82년생 김지영 - 2019. 11. 05

독서/여성주의 2019. 11. 6. 12:16

개인적으로 육아와 출산에 대한 여성주의 담론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페미니스트로서 시급한 문제는 동일임금/동일노동이나 성폭력 근절과도 같은 것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비 선호가 육아와 출산에 대한 담론을 의미 없게 생각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다못해 비출산/비혼 결심을 하려면 결혼, 육아, 출산이 어떤건지 알고 결심해야 할 것 아닌가.


아무튼간에 개인적인 선호 때문에,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작품을 딱히 읽어야 겠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매력적인 작품이 아니고, 희미한(힘 없는) 주인공들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고.
그러나 조남주 작가의 문체가 평이하고 읽기 쉽다는 점은 다른 작품을 통해 접한 터였다.
굳이 작품에 대한 사전 정보를 떠올려 보자면,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주변 지인들의 반응이 둘로 나뉘는 것이 흥미롭기는 했었다.
어떤 여성들은 김지영이 운이 좋은 삶을 살았다고 하고, 어떤 여성들은 그 불행이 너무 안 됐다고..
그 간극 차의 흥미로움.

 

그런데 얼마전 이런 말을 들었다.
"82년생 김지영이 이 정도의 파급력을 가질 만한 작품은 아니지."
한국 남성이 한 말이 아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는 여성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이 계기를 통해 다시금,
내가 사는 이 세상에서 여성의 업적이 얼마나 평가 절하 되는지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직접 읽고 생각해 보고 싶다고 느끼게 되었다.

 

소설의 영화화로 인해 다시금 핫해진 작품.
이 책을 읽었다는 인증만으로도 메갈 낙인이 찍혀 논란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

그러나 이 소설은, 엄청난 통찰력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주인공의 희미함과 개성없음, 보편적이고 매력없는 그 특성 때문에
너무나도 평범하고 평이하기 때문에 
그 익숙함이 가지는 어마어마한 울림과 파급력 때문에 오히려 문제적이 되어버리는 소설이다.
이 글의 장르를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이 글이 소설인가? 사실 르포르타주에 가깝지 않나?
주변에 김지영이라는 사람을 찾으면,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문체는 드라이하다.
읽기 전 내가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신파 소설이라고 생각해서 였기 때문이다.
소설을 둘러싼 너무나도 많고 과장된 남성들의 반응 때문에,
질척이는 신파 소설일 거라 예상했다.
아니다. 조곤조곤 현실의 통계자료들을 인용한다.
이 부분이 그분들의 마음을 심히 불편하게 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보기 전에 소설을 읽어야 한다는 듀나님의 조언 때문에도 읽고 봐야겠다고 생각하긴 했었다.
말 그대로 적확한 조언이었다.
왜냐하면, 소설 속의 김지영은 살아 움직이는 한명의 캐릭터가 아니다.
얼굴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기에 누구나 김지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보편성은 실제 통계자료를 통해 뒷받침 된다.

영화에 나타난 정유미라는 배우가 그려낸 김지영을 보기 전에,
얼굴 없는 김지영을 만나고 싶었다.


이 작품은 사회학을 전공했다는 작가가 그려 낼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상담을 전공하고 나서, 사회학을 전공했어야 하나 가끔 돌이켜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한 개인의 특별함과 스토리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닌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는, 그에 종속될 수 밖에 없는 보통의 인간을 참 잘 그려냈다.

음악과 미술을 전공하는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며,
과연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누구에 의해 정해질 수 있는지를 계속 도전했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대중이라는 말은 가끔 멸칭으로 쓰이고, 가끔은 모든 것이 된다는 점이다.
이는 소설에서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소설은 독자를 염두에 두고 적는 글이기 때문에.

그렇기에 나는 이 소설의 평이함,
즉 대중에게 가지는 이 잔잔한 호소력,이 이 소설의 가치를 훼손하는 이유로 쓰여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변화에 대한 희망을 주지도 않고,
결국 '다음 직원은 미혼으로 뽑겠다'로 끝내버리는 고구마 백개 먹은 소설이라 볼 수도 있겠지만,
그저 과평가된 작품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 끝마저 메타적으로 이 소설을 읽고 다시금 여성혐오 사회에 갇혀버리는 독자들에 대한 풍자를 잘 그려내 준다.

 

시간이 지나고, 교육자로서 정체성을 더욱 가지게 되면서,
내 서비스를 받을 학생을 생각하는 점이 더욱 더 중요하게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보았을 때, 이만큼 훌륭한 페미니즘 소설,
즉 대중에게 울림을 줄 수 있는 여성주의적 작품,을 다시 가질 수 있을지.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게 된다.

 

페미니즘 소설이 별건가?
싸우고 때려부수는 여주인공이 나와 모두를 계도해야 하는 것만이 페미니즘은 아니다.
여성의 삶에 대한 르포식 보고.
그남들이 발작하는 이유를 더욱 깨달았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햇볕의 힘이 더욱 강력하듯이,
현실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아무것도 바꾸겠다고 소리치지 않아도
위험하고 불순한 급진여성주의자가 되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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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