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딸들-2018.02.21

독서/종교 2018. 6. 18. 17:38

 

의외로(?) 소심한 사람이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을 많이 만들고 싶지 않아 한다. 책 읽는 걸 좋아해도, 혼자 읽고 친한 이들과 세부내용을 나누고 얘기하거나 차곡차곡 기록에 남겨놓고 나중에 다시 읽는게 행복하지, 무려 '북클럽' 다닌다고 하면 너무.. 작위적인 것 같다고 느끼던 시기들도 있었다. 책도, 흥미있는 주제들을 바탕으로 함께 읽어내는게 좋지... 그냥 인문학 서적들은 흥미가 없어서.. 뭐 아무튼간에 이런 내가 이번주를 시작으로 두개의 북클럽의 회원이 될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첫번째 독서모임은 1년 훨씬 넘게 해온 과학과 신앙 관련 독서모임인데, 이것도 뇌과학과 신앙에 대한 포럼을 듣고 머리를 딱 얻어맞은 것 같은 통찰을 얻어서, 북클럽에도 참석했다가 모임이 너무 좋아서 바뀐 해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아무래도 나에겐 포럼이 북클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트리거인가보다.(하하)

 몇 주 전에 기독교 신앙과 페미니즘 관련 모임 갔다가 너무 화가 났다. 솔직히 좀 절망스러웠다. 이거 정말 기독교를 떠나야 하는건가. 물론 예수님을 떠나진 않겠지만.. 한국 개신교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 이정도가 한계라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수준의 논의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거라면 과연 내가 여기서 계속 지낼 수 있을지 심각하게 회의가 들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만난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존재에서 아주 짧지만 큰 위안을 얻기도 했었다. 니가 무슨말을 하는지, 나는 알고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너의 존재가 고마운. 그런 강렬한 느낌.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젊은 기독교인 페미니스트들이랑 얘기할 수 있는 장을 찾아볼까 고민이 되었다. 기독인 페미니스트로 치면, 나름 제이디스 모임도 떠오르기는 하지만, 친목도모의 면이 더 강해서.. 나에게는 좀 이 절망감을 함께 토해낼 수 있는 더 빡세고, 무섭고, 센 페미니스트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알고있는 북클럽이 하나 있긴 했는데, 혹시나 싶어서 문의를 해봤더니 1차 회원 모집이 마감됐다고. 그래서 "할 수 없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몰라 될대로 되라지'하고 그냥 넘겼는데, 담당자한테 다시 연락이 왔다. 참여하고 싶으면 참여해도 된다고. 회원을 좀 더 모집하기로 했다고. 그래서 이번주에 방문하려 한다. 설렌다.

 독서모임 책들은, 블로그에 잘 올리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런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책을 끊어 읽기 때문도 큰 것 같고.. 내가 읽고 온전하게 느꼈던 것만 다 적기에는 모임에서 이루어진 논의들이 너무 풍성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논의들을 다 적을 생각을 하면 약간 overwhelming 된다.
그런데 새로 시작하는 모임에서의 책은, 쉽고 짧은 책이라고 한번에 다 읽어 가기로 했다. 표지가 파란색, 보라색 두가지이고... 랜덤으로 배송된다는데,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이라 기쁘다.

아마 모임이 끝나고 나면 또 여러가지 생각들과 감정이 들겠지. 내가 예상하고 설레하는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들일거라고도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좋은 책을 읽으면서, 책 자체에서 느꼈던 감동과 감사를 조금이나마 블로그에 기록해 두고 싶었다. 책을 만나게 해 준 모임에 이미, 미리 감사하다.
 
책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여성혐오주의자, 인 동시에 신앙의 대부들의 발언을 발췌하며 시작한다. 지금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이 우스웠다.

 

 

 

 

 

 

 

 

 

 

 

 

 

 

 

 

 

 

 

 

 

 

 

 

 

 

 

 

 

 

 

 

 

 

 

 

 

 

 

 

 

 

 

 

 

 

 

 

 

 

 

 

 

 

 

 

p.46 (문제의 발단은 철학자들)
 서구 정신의 아버지라 할 만한 아테네의 세 남성은 놀라울 정도로 여성을 비하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아테네는 여성의 이름을 딴 도시다.


p.72 (암흑기의 암흑)
 토마스 아퀴나스(주후 1224/24?-1274년). 그는 수도사였으며 가톨릭교회의 일등 신학자이기도 했다. 수도사들은 여성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결국엔 여성이 남성을 정욕에 휩싸이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우습다. 남성들에게 여성은, 유혹하는 동일한 주체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와 닿았다. 정욕을 휩싸이게 만드는, 악한 악마적 존재일 뿐. 똑같이 죄를 지을 수 있고 정결함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지지 않는 시각. 결국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음란함을 마음껏 투사해 온 '연약한 사람'인 남성 수도사들. 반대로 노예보다 낮은 지위의.. 인간이기 보다는 대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마녀로 몰려 교수형 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여성은 자신을 돌볼 정도의 지혜도 없기 때문에 누군가를 가르치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는 여성의 지위가 노예보다 더 낮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훌륭한 신학자이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여성혐오주의자였다. 마치 아무리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시대의 영웅들도 성매수남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의 충격과 거의 비슷했다. 여성에게 구원자는 없다.

이런 여러가지 오래된 여성혐오의 역사를 읽다가 3부에 와서 마주친, 혁명가 예수의 존재는 내 마음을 울렸다.

p.97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이것을 기억하라. 비참하게 얼룩진 인생을 살았던 이 여성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물이며 이 물이 그 여성 안에서 솟아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돌로 지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때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다른 길로 여행을 하도록 하셨다.

 

책의 5부부터는 현대 교회들이 여성의 안수를 거부하고, 리더십에 제한을 두기위해 사용하는 고린도전서의 말씀들과 디모데서의 말씀들을 그 맥락에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잘 파헤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성실하게 한다.
예컨대, 고린도전서 11장 10절에 관한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p.158 (요약)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6-12절이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인이 주장하는 것이 따로 있고, 동양인이 주장하는 것이 따로 있다. 유대인의 시각은 6-9절까지 나오고 있다. (...) 이 뒤에 이어지는 10절로 인해 위의 표현이 바울이 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보다는 바울이 유대적 견해를 한 번 더 인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해 보인다. (...) 11절에서 우리는 위대한 "그러나"를 만난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11-12절)

책은 계속해서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했던 여성혐오자 히에로니무스의 전형적인 수법, 잘못된 오용과 단어 끼워넣기를 비판하며 성경의 내용을 다시 잘 살펴보기를 촉구한다. 게다가 "바울은 아내들에게 단 세 구절을 썼으나 남편들에게는 아홉 구절"의 권고를 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항상 간과하는 이야기들이다.

책에서 여성들만의 모임을 시작하라는 적용점을 제시하는 것도 매우 좋았다. 그런 점에서 모임이 훨씬 더 기대되었다. 또한, 나는 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이 '세속 페미니스트'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측면에서 많은 의문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책에서 제시된다는 느낌도 받았다. 비기독교인들은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주류가 많은 반면,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둘 간의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는 시각. 비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확실히 정립해보지 못했지만, 그와 별개로 기독교적 관점을 잘 드러내주는 흥미로운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도로시 세이어즈의 글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계획들도, 만날 사람들도. 설렘 반 두려움 반 여러가지 양가감정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항상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p.233
 가장 처음 말구유 옆에 있었고, 가장 마지막까지 십자가 앞에 남아 있었던 것이 여성들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들은 예수님 같은 남성을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결코 그런 남성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지자이며 선생인 그 분은 여성에게 절대로 잔소리하지 않았고 입에 발린 찬사도, 감언이설로 속이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선심 쓰는 체하지도 않았다. 결코 여성에게 어리석은 농담도 하지 않았고, 여성들에게 "여자들이란, 아이고 맙소사!"라고 하거나 "저런 형편없는 것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분은 화를 내지 않고 꾸짖었고, 생색내지 않고 칭찬했으며, 여성의 질문과 논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여성만의 특별 구역을 만들지도 않았고, 여성에게 여자답게 굴라고 하지도 않았으며, 여성성에 대해 조롱한 적도 없다. 여성을 무시하거나 어줍잖게 남성의 위신을 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분은 여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었고 언제나 따뜻하게 대하셨다. 복음서 어디에서도 여성의 사악함을 거론하는 행동이나 설교나 비유를 찾아볼 수 없으며,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서도 여성의 '우스꽝스러운 본성을 암시라도 하고 있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바로 이 분이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시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