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공공성-2019.03.01

독서/종교 2019. 1. 21. 07:03

나봇은 왜 왕의 제안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봇은 왜 '열심히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믿음대로 살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재물을 주시는구나' 생각하며 감사하지 않았을까? 오늘날의 모든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렇게 여긴다. 교회 기도원 인근이 개발되어 엄청난 이익이 생기면 하나님 은혜로 여기고 감사헌금에, 십일조에 난리법석이다. 교인들은 아파트가 재개발되면서 값이 폭등하면 하나님에게 큰 복을 받았다고 교회에 헌금하고 난리다. 하나님이 신실한 종에게 마침내 빛을 비추어주신다고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그 그렇게 해석해줄 목사들도 가득하다. 그런데 왜 나봇은 이 기회를 거절하고 죽음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맞이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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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봇의 대답을 직역하면, "내 조상의 유업을 당신에게 주는 것을 여호와께서 결단코 내게 대해 허락하지 않으시리라"가 된다. 여기에서도 아합과 나봇의 시각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요구하면서, 다른 '포도원'을 주든지 그에 상응하는 돈을 주겠다고 하는 데 반해, 나봇은 자신의 포도원을 '포도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에게 포도원이 있는 땅은 '내 조상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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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해 아합의 요구는 땅을 그저 재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부동산으로 보는 사고를 전제로 한다. 아합은 나봇과 달리 땅을 하나님의 선물이나 은혜로 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땅을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 재화로 보느냐,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약속이 담긴 대상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가 아합과 나봇 사이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봇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지파 중심 농경사회와 와왕정의 도시문화 사이의 갈등을 증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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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심각한 점은 이세벨의 이러한 음모가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진위를 밝힐 수 없는 거짓 증언을 바탕탕으로 이 모든 음모를 꾸몄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 모든 상황은 이스라엘의 율법을 따라 지극히 '합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세벨이 토라의 전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토라를 이용한다. 이세벨에게 토라는 따라야 할 규범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는 재료였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본문은 '합법적인 정의' 혹은 '절차적인 정의'라라는 것이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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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와 귀족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을까? 나봇이 무죄라는 것을 깨달았을까? 나봇이 이세벨의 음모에 희생된 것을 눈치챘을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 어리석은 질문이다. 장로와 귀족들은 아마 수십 년을 함께 살아왔을 터이니 나봇의 사람됨을 이미 알았고, 이세벨이 어떤 여자인지도 충분히 알았지만, 이세벨의 음모에 동참하여 무죄한 피를 흘렸다. 자기들과 함께 살던 나봇을 생각하지 않고, 나봇의 억울함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아마도 이세벨이 보냈을 무뢰배들 말만 듣고 나봇을 죽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세우신 명예로운 제도인, 성문에서 장로들이 집행하는 공평한 재판이 나봇 사건에서 완전히 뭉개지고 말았다. 공평과 정의는 절차적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절차적 정의도 지키지 않아 문제이지만, 절차적 정의는 구약의 정의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공평과 정의의 재판을 명령하는 신명기 16장 18절에 이어지는 19절은 '외모'와 '뇌물'을 언급한다. ... 이러한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외모'와 '뇌물'이 부족한 약자들이다(고아, 과부, 객의 송사: 신24:17; 27:19; 욥29:12). 관계 안에서 이루는 정의와 정의 있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공평은 현실에서 가장 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 예민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아를 위해 재판하사 더는 세상이 고아를 억압치 못하게 하신다(시10:18). 그 분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다(시68:5).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신다(시82:3), 그러므로 고아의 억울한 것을 풀어주고 과부를 위해 변호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첩경이다 (사1:17) 


아무도 주의하지 않았을 나봇의 피가 하나님의 앞에 상달되었다. 아무도 나서주지 않은 나봇의 죽음에 하나님의 예언자가 나서주었다. 그래서 예언자는 권력의 적이며(왕상 21:20), 권력과 부귀를 지닌 자들을 언짢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다. 예언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가난한 이들의 삶과 눈물이 있다.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알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 공평과 정의를 외친 예언자의 삶은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엘리야의 고통과 예레미야의 눈물의 깊이를 오늘 우리가 헤아리기 어렵다. 


구약성경은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과 개인의 실존적인 만남만 다룬 책은은 아니다. 구약성경이 그러한 만남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 개인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공동체가 어떻게 해서 하난나님을 예배하며 역사 한가운운데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구약은 개인과 하나님의 만남을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역사 가운데 하나님 백성으로 존재하는 공동체를 다룬 책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하다. 그고 이렇게 다룰 때, 구체적인 역사 현실은 하나님 백성의 존재를 결정하는 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즉 역사와 거의 무관하게 개인의 실존에 집중하는 성경해석은 근본적으로 부당하며 부적절한 해석인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구원을 약속 받았다는 식의 고백은 예언자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신앙이다. 예언자들과 무관하다면 기독교 신앙 전체와도 무관하다. '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사적인 촉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거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추하고 더러운 속마음, 음란하고 거짓말 잘하는 누추한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실존을 드러내어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지도 않는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사회가, 사람들의 관계가 얼마나 끔찍하고 참담한지 드러낸다. 하나님을 향한 극진한 예배와 가난한 이웃을 짓밟는 것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폭로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에게 진실하게 예배드리거나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회개로 보지 않는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 다시 말해 회개다. 


이상의 관찰은 하나님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예언자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명료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개인의 사귐을 더 기깊게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없다. 개인의 죄악상을 직면하고 들여다보며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는 것으로 요약할 수도 없다. 더 은혜롭고 충만한 예배를 함께 회복하는 것이라는 표현도 적절치 않다. 하나님에게 돌이키는 것은 성문에서 회복하는 정의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공적 삶의 현장에서 지켜내는 다. 달리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렇게 공적인 신앙을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한 데서 비롯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앙의 사사화는 부족하거나 미흡한 신앙이 아니라 잘못된 신앙이다. (...) 울러 사적 앙을 넘어서 공적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올바른 행동과 직결됨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을 고발하며 돌이킬 것을 요구한 예언자들의 외침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로 이어진다. 사회 자들을 중심에 둔 사고방식과 실천과 행동이야말로 야훼 신앙의 보본질이며, 공적 신앙의 핵심이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