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두 사람 - 2019.01.30

독서/기타 2019. 1. 31. 06:10



[본문 중]

언니, 제가 좋아하는 농담이 하나 있어요. 전에 어떤 일간신문 만화에서 본건데요. 어떤 남자가 교통방송에서 뉴스를 들어요. 고속도로 어느어느 구간에 역주행을 하는 승용차가 있으니 일대를 운행하는 차량들은 모두 주의하라는 거예요. 그는 문득 그 방면으로 출장을 간 친구가 떠올라서 전화를 걸어요. 

야, 그 부근에 역주행을 하는 미친놈이 하나 있대. 조심해.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한둘이 아니야. 얼른 전화 끊어.

다들 충고들을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 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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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는 E는 호기심이 많고 톡톡 튀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자고 일어나니 E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는데, 
예전부터 내가 얘기하던 미드를 보게되었다고, 골때리게 웃긴다고.

그래서인지 오늘 오후에는 E가 얘기했던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을 읽게 되었다.

나는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데,

아무래도 길을 헤매는 주인공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이 가장 많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더더욱 자기 파괴적인 행동들을 하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소설의 목적이라는 것이, 
삶도 자신도 생각대로 되지 않고, 마음먹은 것처럼 모든걸 해낼 수 없는 
모든 이들과 인생을 위로하고, 
더욱이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 듯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아 
공감과 연민의 확장을 불러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나서는
소설을 읽는 것이 이전보다는 즐거워 졌다.

어쩌면 generosity라는 특성이 부족한 내가
더 많이 접해야 할 장르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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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

복음의 공공성-2019.03.01

독서/종교 2019. 1. 21. 07:03

나봇은 왜 왕의 제안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봇은 왜 '열심히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믿음대로 살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재물을 주시는구나' 생각하며 감사하지 않았을까? 오늘날의 모든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렇게 여긴다. 교회 기도원 인근이 개발되어 엄청난 이익이 생기면 하나님 은혜로 여기고 감사헌금에, 십일조에 난리법석이다. 교인들은 아파트가 재개발되면서 값이 폭등하면 하나님에게 큰 복을 받았다고 교회에 헌금하고 난리다. 하나님이 신실한 종에게 마침내 빛을 비추어주신다고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그 그렇게 해석해줄 목사들도 가득하다. 그런데 왜 나봇은 이 기회를 거절하고 죽음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맞이한 것일까?


(...)

나봇의 대답을 직역하면, "내 조상의 유업을 당신에게 주는 것을 여호와께서 결단코 내게 대해 허락하지 않으시리라"가 된다. 여기에서도 아합과 나봇의 시각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요구하면서, 다른 '포도원'을 주든지 그에 상응하는 돈을 주겠다고 하는 데 반해, 나봇은 자신의 포도원을 '포도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에게 포도원이 있는 땅은 '내 조상의 유산'이다. 


(...)

그에 비해 아합의 요구는 땅을 그저 재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부동산으로 보는 사고를 전제로 한다. 아합은 나봇과 달리 땅을 하나님의 선물이나 은혜로 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땅을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 재화로 보느냐,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약속이 담긴 대상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가 아합과 나봇 사이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봇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지파 중심 농경사회와 와왕정의 도시문화 사이의 갈등을 증거한다.


(...)

여기에서 심각한 점은 이세벨의 이러한 음모가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진위를 밝힐 수 없는 거짓 증언을 바탕탕으로 이 모든 음모를 꾸몄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 모든 상황은 이스라엘의 율법을 따라 지극히 '합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세벨이 토라의 전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토라를 이용한다. 이세벨에게 토라는 따라야 할 규범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는 재료였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본문은 '합법적인 정의' 혹은 '절차적인 정의'라라는 것이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장로와 귀족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을까? 나봇이 무죄라는 것을 깨달았을까? 나봇이 이세벨의 음모에 희생된 것을 눈치챘을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 어리석은 질문이다. 장로와 귀족들은 아마 수십 년을 함께 살아왔을 터이니 나봇의 사람됨을 이미 알았고, 이세벨이 어떤 여자인지도 충분히 알았지만, 이세벨의 음모에 동참하여 무죄한 피를 흘렸다. 자기들과 함께 살던 나봇을 생각하지 않고, 나봇의 억울함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아마도 이세벨이 보냈을 무뢰배들 말만 듣고 나봇을 죽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세우신 명예로운 제도인, 성문에서 장로들이 집행하는 공평한 재판이 나봇 사건에서 완전히 뭉개지고 말았다. 공평과 정의는 절차적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절차적 정의도 지키지 않아 문제이지만, 절차적 정의는 구약의 정의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공평과 정의의 재판을 명령하는 신명기 16장 18절에 이어지는 19절은 '외모'와 '뇌물'을 언급한다. ... 이러한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외모'와 '뇌물'이 부족한 약자들이다(고아, 과부, 객의 송사: 신24:17; 27:19; 욥29:12). 관계 안에서 이루는 정의와 정의 있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공평은 현실에서 가장 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 예민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아를 위해 재판하사 더는 세상이 고아를 억압치 못하게 하신다(시10:18). 그 분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다(시68:5).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신다(시82:3), 그러므로 고아의 억울한 것을 풀어주고 과부를 위해 변호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첩경이다 (사1:17) 


아무도 주의하지 않았을 나봇의 피가 하나님의 앞에 상달되었다. 아무도 나서주지 않은 나봇의 죽음에 하나님의 예언자가 나서주었다. 그래서 예언자는 권력의 적이며(왕상 21:20), 권력과 부귀를 지닌 자들을 언짢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다. 예언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가난한 이들의 삶과 눈물이 있다.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알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 공평과 정의를 외친 예언자의 삶은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엘리야의 고통과 예레미야의 눈물의 깊이를 오늘 우리가 헤아리기 어렵다. 


구약성경은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과 개인의 실존적인 만남만 다룬 책은은 아니다. 구약성경이 그러한 만남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 개인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공동체가 어떻게 해서 하난나님을 예배하며 역사 한가운운데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구약은 개인과 하나님의 만남을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역사 가운데 하나님 백성으로 존재하는 공동체를 다룬 책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하다. 그고 이렇게 다룰 때, 구체적인 역사 현실은 하나님 백성의 존재를 결정하는 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즉 역사와 거의 무관하게 개인의 실존에 집중하는 성경해석은 근본적으로 부당하며 부적절한 해석인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구원을 약속 받았다는 식의 고백은 예언자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신앙이다. 예언자들과 무관하다면 기독교 신앙 전체와도 무관하다. '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사적인 촉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거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추하고 더러운 속마음, 음란하고 거짓말 잘하는 누추한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실존을 드러내어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지도 않는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사회가, 사람들의 관계가 얼마나 끔찍하고 참담한지 드러낸다. 하나님을 향한 극진한 예배와 가난한 이웃을 짓밟는 것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폭로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에게 진실하게 예배드리거나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회개로 보지 않는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 다시 말해 회개다. 


이상의 관찰은 하나님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예언자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명료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개인의 사귐을 더 기깊게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없다. 개인의 죄악상을 직면하고 들여다보며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는 것으로 요약할 수도 없다. 더 은혜롭고 충만한 예배를 함께 회복하는 것이라는 표현도 적절치 않다. 하나님에게 돌이키는 것은 성문에서 회복하는 정의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공적 삶의 현장에서 지켜내는 다. 달리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렇게 공적인 신앙을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한 데서 비롯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앙의 사사화는 부족하거나 미흡한 신앙이 아니라 잘못된 신앙이다. (...) 울러 사적 앙을 넘어서 공적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올바른 행동과 직결됨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을 고발하며 돌이킬 것을 요구한 예언자들의 외침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로 이어진다. 사회 자들을 중심에 둔 사고방식과 실천과 행동이야말로 야훼 신앙의 보본질이며, 공적 신앙의 핵심이다. 

posted by sergeant

아픔이 길이 되려면 - 2018.07.11

독서/심리 2018. 7. 11. 11:14

 

 

질병의 생물학적인 분석을 넘어 사회학적인 책임을 묻겠다는 큰 목적을 가지고 작성된 책이다.

저자 교수님의 땀과 헌신, 진정성이 책의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연구를 한다면 이런 의미있는 연구들을 해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는 것이,

아직은 너무 크고 멀고 험난할 것 같지만. 꿈이라도 크게, 목적은 숭고하게 가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책발췌)

 

p.7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

 

p.14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직장과 학교와 가정에서 맺는 수많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지요. 그 관계들은 종종 인간의 몸에 상처를 남깁니다. 미세먼지가 천식을 유발하고 석면이 폐를 망가뜨리는 것처럼 우리가 관계 속에서 겪은 차별과 같은 사회적 폭력 역시 병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사회역학은 그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병으로 남긴 상처를 해독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미세먼지나 석면 노출을 측정하는 일에 비해, 차별 경험을 측정하는 일은 인간의 사회적 경험을 측정한다는 점에서 더 예민하고 어렵습니다. 사회적 폭력에 노출된 약자들은 자신의 경험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를 가지지 못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말하지 못한 차별 경험, 기억하는 여성의 몸<

한국의 노동자들이 겪는 다양한 차별 경험이 건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를 진행하던 때입니다. Kim S-S, Williams DR. 2012 "Perceived Discrimination and Self-Rated Health in South Korea: A Nationally Representative Survey", PLos ONE 7(1): e30501 데이터를 분석하다가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귀하는 새로운 일자리에 취업할 때 차별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 때문이었습니다. (중략) 그런데 직장인 152명이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이미 취직한 사람들이니까 '구직 과정에서 차별을 경험했는가?'라는 질문에 '예' 아니면 '아니요'라고 답해야 하는데, 무슨 이유로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답한 것일까요?

(중략) 결과는 성별에 따라 명확하게 나뉘었습니다. 남성 노동자가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답했을 때 그 대답은 '아니요(구직 과정에서 차별받은 적이 없다)'를 뜻했습니다. 하지만 여성 노동자가 같은 답을 했을 때 그것은 '예(구직 과정에서 차별받은 적이 있다)'라는 뜻에 가까웠습니다. 같은 대답이지만 남성과 여성에게 각기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구직 과정에서의 차별만이 아니었습니다. 월급을 받는 과정의 차별 경험을 측정했을 때도 같은 결과가 나왔습니다. 여성의 '해당사항 없음'은 차별을 받았다는 뜻이었고, 남서의 경우에는 그 반대였습니다. 이 결과는 여성 노동자가 구직 과정에서 혹은 일터에서 차별을 경험했다고 말하는 것이 남성에 비해 더 어렵고 예민한 일임을 보여줍니다.

(중략) 남성의 경우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답변한 사람들과 차별받지 않았다고 답변한 사람들의 건강 상태에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성의 경우 달랐습니다.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답한 사람드이 가장 많이 아팠습니다. 심지어 차별을 경험했다고 말한 사람들보다 건강 상태가 더 나빴습니다. 차별을 경험했지만 '해당사항 없음'이라고 답변했던, 자신의 차별 경험을 말하지 못하는 이들이 실제로는 가장 많이 아팠던 것입니다. [논문은 출간되지 않음]

 

 

p.21

차별 경험과 건강에 대해 연구하는 하버드보건대학원의 낸시 크리거 교수는 설문이나 인터뷰를 통해 차별과 같이 예민한 경험을 측정할 때는 차별을 경험하는 것, 그 경험을 차별이라고 인지하는 것, 그 인지한 차별을 보고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Krieger N. 1999. "Embodiying inequality: a review of concepts, measures, and methods for studying health consequences of discrimination". Int J Health Serv. 29(2):295-352. 비슷한 형태의 차별을 경험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것을 차별로 인지하지 못하고, 또 차별을 인지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성르 연구자에게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다양한 인종을 대상으로 진행된 한 실험 연구는 미국사회에서 약자인 흑인, 여성, 아시아인들이 차별을 경험했을 때, 그 경험을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차별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차별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는 것보다 심리적으로 불편함이 덜하기 때문이라고 연구는 설명합니다. Ruggiero KM, Taylor DM. 1997. "Why Minority Group Members Perceive or Do Not Perceive the Discrimination that Contronts Them: The Role of Self-Esteem and Perceived Control".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72(2):373-389.

 

p.174

 트라우마에 대해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은 의학적인 치료방법이 지닌 한계를 지적합니다. 이들은 환자가 겪는 고통의 원인을 생물학적으로 파악할 때, 특히 구조적 폭력에 의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그런 방식으로 분석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부작용을 우려합니다. 약물 치료와 인지 치료로 그 장애를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자들이 경험한 고통을 초래한 폭력적인 사회 조건을 모호하게 만들고", "고통의 유발 경로를 흐릿하게 함으로써, '설명 없는 치료'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는 지적입니다. 김명희, 2015. "고통의 의료화: 세월호 트라우마 담론에 대한 실재론적 검토". 보건과 사회과학 38:225-245.

 트라우마에 대한 많은 연구는 인간의 몸에 상처를 남기는 과정에서 트라우마를 초래한 사건 자체만이 아니라 그 이후에 사건의 의미가 해석되고 재생산되는 사회적 환경이 외상을 구성하는 핵심요소라고 말합니다. 그 고통을 초래한 사회적 원인이 밝혀지지 않고, 자신이 겪는 고통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을 때 트라우마는 더욱 확대 재생산되는 것이지요. 이현정. 2015. "세월호 참사와 사회적 고통: 인류학적 현장ㅈ보고.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 심포지움: 세월호가 묻고, 사회과학이 답하다. 서울대학교 아시아 연구소

 

posted by sergeant

 

 어린 시절부터 운동에 관심이 많아 검도 유단자가 되었고, 바디토크를 많이 하지 않는 환경에서 자랄 수 있던 것이 돌이켜보니 큰 행운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 책. 페미니스트로서 다시 나의 삶에 대해 돌이켜보면, 나를 한사람의 인간으로서 대해주었던,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배려와 사회적 자원들을 다시금 느낀다. 그리고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현재의 문화와 행태들에 책임감을 느낀다.
SNS가 발전하고, 교묘한 여성혐오와 백래시가 밀려오는 이 시대에 반드시 읽고 생각하고 밑줄 그어야 할 책. 최근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이 이끌어낸 '탈코르셋 운동'의 바이블격


- 우리는 많은 여성이 외모 강박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성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아름다움이라고 강요하는 문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들이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표준을 주입했다. 동시에 아름다움에 관해 걱정하는 여성을 속물이라고 비난하고 그녀들의 걱정을 싸잡아 무시하고는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라고 이야기하며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이라고 책망했다. 나는 여성과 아름다움을 향한 메시지 공해를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고자 이 책을 썼다. 오늘날의 여성과 그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름다움의 역할을 정직하고도 도전적으로 평가할 자격이 있다.

- 소녀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가끔 어른들이 흔히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 그리고 그들의 다채로운 대답을 듣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선생님이요. 과학자요. 우주 비행사요. 수의사요. 화가요. 대통령이요. 그러나 소녀들이 어떤 삶을 꿈꾸든 저 너머에는 정말 되고 싶은 두 가지가 있다. 바로 날씬해지는 것과 예뻐지는 것이다.

- 외모 강박은 여성이 거울에 비친 모습에 너무 ㅁ낳은 정서적 에너지를 쏟을 때 생긴다. 거울 속의 모습은 인생의 다른 측면을 바라볼 때보다 그녀를 더 힘들게 한다. 외모 강박은 놀라우리만큼 이른 나이에 시작된다. 소녀는 다른 사람의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기본적인 법칙이라고 배운다. 외모 강박이라고 하면 젊은 여성을 떠올리지만 사실 모든 연령의 여성이 외모 강박을 갖고 있다. 단순히 나이를 먹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굳은 의지와 인내를 가져야 떨쳐낼 수 있는 것이다.

- 여성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와는 상관없이 여성의 외모에만 초점을 맞추는 문화가 외모 강박을 키운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이미지, 자신이나 다른 여성을 묘사하는 언어를 통해 강화된다. 또한 여성에게 외모로 모욕을 주는 사람들이 외모 강박을 부추긴다. 물론 능력이 아닌 외모로만 칭찬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외모 강박은 공식적인 병이 아니다. 엑스레이를 찍어도, 피검사를 해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여러 질병과 마찬가지로 파괴적인 증상을 보인다. 급증하는 섭식 장애와 성형수술 등 명백한 증상이 있다. 그리고 조금 미묘한 증상도 있다. 예를 들어 SNS에 올릴 완벽한 셀카를 만드는 데 들이는 시간과 에너지 같은 것이다.

- 오늘날 젊은 여성은 당혹스러운 모순과 마주한다. 그녀들은 바비 인형이 되길 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비 인형처럼 보여야 한다고 느낀다. 수많은 여성이 미디어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에 분노하지만 바로 그 미디어를 게걸스레 소비한다.

- 코미디언 존 스튜어트가 "케이틀린, 당신이 남자였을 때 우린 당신의 스포츠맨 정신에 관해 이야기했죠. 그러나 이제 당신은 여자예요. 즉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건 당신의 얼굴밖에 없다는 거죠." 라고 이야기 했듯이 말이다.

- 오랫동안 심리학은 여남 간의 차이를 오해하고 과장해왔다. 나는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라는 유감스러운 은유를 선호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여남 간의 차이가 실제보다 더 크고 더 심각하게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모 강박의 문제에서 여남 간의 차이는 실질적이고 크다. 그리고 그 격차는 세계 각국의 문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 신체 경험에 대한 여남 차이는 단순한 만족이나 불만족 이상으로 확장된다. 영국 서식스대학교의 연구자들은 영국 여성과 남성 수십 명을 인터뷰한 결과 여성이 자신의 몸을 좀 더 파편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따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성은 자신의 각 신체 부위를 실망의 연속이라 표현했고 '나쁘지 않은 부위'는 아주 드물었다. 배는 너무 출렁거리고 허벅지는 지나치게 굵으며 피부는 얼룩덜룩하고 머릿결은 푸석거린다. 각 신체 부위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언제든 따로따로 분리할 수 있다.
 반면 남성은 자신의 몸에 대해 좀 더 전체론적인 접근법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아마도 남성은 신체적 능력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생각한다는 점이다.

- 언어에서조차 남성의 몸은 능동적이지만 여성의 몸은 수동적이다. 남성의 '아름다움'을 칭하는 잘생긴handsome이란 단어에는 '잘하는'handy 상태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설명하듯 잘생긴이란 단어의 본래 의미는 적절한, 잘하는, 영리한 이다. 반면에 아름다운이란 단어의 정의는 감각을 즐겁게 해준다거나 장식용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 분명 남성도 외모에 압력을 받고 있지만 이들은 외모보다 역량이 더 널리 인정받는 세계에서 살고 있다. 그래서 남성은 특정 영역에서 성공하면 외모의 압박에서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여성에게는 그런 안전한 피난처가 없다. 한 여성이 얼마나 일을 잘하느냐와는 상관없이, 그녀의 외모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똑같은 일을 하는 남성보다 여성에게 외모적으로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은 대중 앞에 안경을 쓰고 화장을 거의 하지 않은 채 나타났다는 이유로 뉴스 미디어 전반에서 비난받았다. 힐러리 클린턴의 머리가 흐트러졌다는 사실은 전국적인 이야깃거리가 됐다.

- "네 젊음이나 미모를 너무 자랑하지 마라. 그건 네가 노력해서 얻은 게 아니고 아무리 노력해도 간직할 수 없는거란다." (중략) 무엇보다도 아름다움이 주는 권력은 불안정한 토대에 서 있다. 이 권력은 다른 사람들이 인지해주어야만 존재할 수 있다. 이를 좌지우지하는 누군가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오로지 당신만의 권력도 아니다. 심지어 놀라울 정도로 엄격한 소멸 기한이 주어진 권력이다. 젊은과 아름다움의 상관관계는 거의 불변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 오늘날 젊은 여성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란다. 대학을 졸업한 여성의 수가 남성의 수를 추월한 지 30년이 넘었다. 이제 젊은 여성은 학교와 직장에서 당당하게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예뻐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고 있다. 그 중 대다수는 자신의 외모가 지속적으로 시험에 들고 있다고 느끼면서 불안해하거나 우울해 한다.

-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인 미를 조장하는 '미디어'를 비난하기는 쉽다. 그러나 해결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 대상화는 당신이 생각과 느낌, 목표와 욕망을 지닌 진짜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대신, 당신은 그저 몸 또는 신체 부위의 총합으로 취급받는다. 심하게는 당신의 몸은 그저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무언가로 취급받는다. 누군가 당신을 사물로 취급하는 경우 또는 당신이 외모로 누군가를 즐겁게 해줄 때만 쓸모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경우 당신은 주체성을 잃는다. 주체성을 당신의 내면적 현실이라 생각해 보자. 자의식이라 생각해 보자. 그것이 지금 위기에 처한 것이다.

- 스물 두 살의 에린은 길거리 성희롱을 끝내기 위해 급진적인 방법을 택했다. 에린은 스스로 운명을 책임진다는 느낌을 되찾기 위해 과감한 방식이 필요했다고 한다. 그 방법은 머리를 모두 밀어버리는 것이었다. 완전한 민머리였다. 그리고 잔혹했던 어린 시절처럼 매일 큰 사이즈의 티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또한 모든 화장품을 버리면서 일종의 의식을 행했다. 나는 이 부분에 매혹됐다.
(중략)
그렇게 에린은 민머리와 민낯이 됐다. 그리고 그녀는 한동안 거울을 멀리 했다. 이런 선택은 에린의 인생을 기대하지 못한 방식으로 바꿔놓았다. 길거리 성희롱 횟수가 확연히 줄어든 것이다. 남성들은 더 이상 그녀를 성적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 에린에게 민머리는 의도적이고도 강력한 도발이 됐다.

- 남성이 듣기 싫은 여성의 말을 말로 받아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외모에 대한 비난으로 받아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여성을 인간이 아닌 대상으로 보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논리적 결과물이다.

-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정말 스스로 떠올린 것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외모 강박적인 문화가 아니었으면 결코 생기지 ㅇ낳았을 생각인데 말이다.

- 시간이 갈수록 다른 사람이 언제 어디서든 외모를 평가하고 있다는 인식을 내면화한다. 결국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당신은 자신의 외모에 가장 밀접한 관찰자가 되고 가장 끈질긴 감시자가 된다. 이런 이유에서 자기 대상화는 신체 감시 또는 신체 모니터링이라 불리기도 한다.

- 이제 다른 종류의 질문을 던져보자. 내가 올바른 결정을 내렸나? 오늘은 무엇을 배우게 될까? 내 기분이 어떻지? 지금 나에게 뭐가 필요하지? 내 주변 사람들에게는 뭐가 피요할까?

- 내가 스물 네 살의 대학원생 강사였던 시절 첫 교수 평가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 중에는 "교수님, 파란 스커트를 자주 입으세요. 예뻐 보여요."라는 코멘트가 있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따. 교수 평가는 익명으로 이뤄졌지만, 누가 썼는지 알아내기 위해 출석부를 계속 훑어보았다. 내가 어떻게 하면 수업을 잘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동안 내 다리만 생각했던 학생은 누구였을까? 심지어 그 수업은 '젠더 심리학'이었다. 그 수업이 끝날 때까지 그 학생은 여전히 그런 식의 코멘트가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내가 뭔가 잘못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중략) 마치 이런 말처럼 들렸다. "저는 당신을 교수로서는 전혀 존경하지 않아요. 당신 수업에 대해선 한마디도 언급하고 싶지 않을 정도예요. 그냥 저는 당신의 옷이랑 몸매에 대해서나 이야기할래요."

- 우리는 자신이 멀티테스킹의 강자이길 바라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우리의 관심이 외모로 움직이게 되면 다른 무언가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줄어든다.
 내가 무언가에 가장 넋을 놓고 헌신하고 있을 때, 지인은 당시 내가 하고 다니던 거지꼴을 보고 '목을 조르고 싶었다'고 말하던 그 때에 배우자를 만났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내게 참 의미 있는 일이다.

- 우리가 자신을 모니터링하고 있다면, 그 대상이 외모가 아닌 생각이나 기분, 욕망과 목표였으면 좋겠다. 여성의 외모보다 여성의 일에 초점을 맞추는 세상에서는 다양한 패션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 시간과 돈은 문제가 된다. 시간과 돈은 권력의 필수적인 원천이며 자유의 원천이기도 하다.

- 나는 기존의 '해야 할 일' 목록에 그 어떤 것도 추가하고 싶지 않았다. 여러 방식으로 내 외모를 감시하고 있는 또 다른 나를 부추기고 싶지 않았다.

- 여성의 외모에 대해 느끼는 압박을 고려하면 엄청난 돈이 여성의 지갑에서 흘러나와 미용 산업 분야로 향하는 것이 놀라울 일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여성은 미용 제품의 85퍼센트를 소비한다.

- 기업은 매출을 올리기 위해 외모 강박을 부추긴다. 그들은 우리가 계속 외모에 만족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익을 얻는다. 또한 자신들의 제품이 이상적인 미에 가까워지도록 도와준다는 믿음을 줘야 매출이 오른다.

- 좋은 남성과의 결혼이 인생에서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느껴질 때, 그리고 미모가 남성을 만날 수 있는 기준일 때, 아름다움에 쏟는 돈은 당연한 투자로 여겨진다.
 제이미는 한국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지갑으로 취급하고 남자가 여자를 장식품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가끔 여남 간의 갈등이 발생한다고 했다. 즉 많은 여성이 자신의 아름다움으로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마찬가지로 많은 남성이 마음대로 여성의 아름다움을 평가하고 이야기 할 자격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 우리는 많은 비용을 외모에 투자하는 남성을 우습게 생각한다. 왜일까? 그 비용이 여성들에게는 평범한 수준인데 말이다.

- 다양성의 부재는 그녀의 내부 지각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문제의 초점은 그녀가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미디어를 통해 소비하는 여성이 거의 모두 백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런 미디어 이미지로 자신을 비춰볼 수가 없었다.

- 이런 유형의 미디어를 더 많이 소비할수록 미디어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미를 내면화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런 아름다움의 표준을 흡수하는 것은 좌절감을 안길 뿐 아니라 섭식 장애로 발전할 수 있다.

- 인간의 이미지를 거꾸로 놓으면 구분이 어려워진다. 이를 역전 효과라고 부른다. 반면 집과 같은 사물의 이미지는 거꾸로 놓여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학술지 <심리 과학>은 여성과 남성의 성적인 사진을 실험 참여자들에게 보여줬다. 사진 속 인물은 모두 속옷이나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실험 참여자들은 거꾸로 된 남성의 이미지는 구분하는데 어려워하며 역전 효과를 증명했다. 그러나 여성의 성적인 이미지의 경우 역전 효과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성의 이미지는 거꾸로 있든 똑바로 있든 쉽게 구분됐다. 성애화된 여성은 사물의 이미지와 동일한 방식으로 처리화 되고 있는 것이다.

- 미디어상의 여성 이미지는 절대 홀로 제시되지 않으며 풍족한 삶과 연결되는 라이프스타일이나 제품과 짝을 이룬다.

- 외모 강박적인 문화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여성이 항상 자신이 어떻게 보일지를 세세하게 의식하게 하는 것이다.

- 54 또 다른 관점은 페미니스트적 태도를 지닌 여성이 미디어상의 이상화된 아름다운 여성에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페미니스트로 분류되는 여성은 미디어의 여성상에 대해 비판적인 관점을 가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페미니즘이 외모 강박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줄 것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연구 결과는 좀 더 복잡했다. 수십 개의 관련 연구를 분석한 케니언대학 연구팀은 페미니즘이 미디어가 조정하는 이상적인 미를 내면화하는 경향을 감소시킨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는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페미니즘이 여성이 자신의 몸을 실질적으로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는지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Murnen SK, Smolak L. Are feminist women protected from body image problems? A meta-analytic review of relevant research. Sex Roles. 2009; 60(3-4): 186-197

- 시선과 칭찬은 여성을 자기 대상화의 덫에 빠뜨렸을 뿐만 아니라 모순적이게도 스스로 덜 매력적이라 느끼게 했던 것이다.

- 말에는 무게와 의미가 있다. 때로 말은 우리의 상상보다 더 큰 힘을 가졌다. 당신의 말을 통해 여성을 대상이 아닌, 세계를 바꿀 준비가 되어 있는, 능력 있는 인간으로 보는 문화의 흐름을 만들자.

- 만약 모든 사람이 아름답다면 그 누구도 아름답지 않은 것이 된다. 나는 아름다운 영혼이나 인격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 시선이 닿는 모든 곳에서 내면의 아름다움을 본다. 그러나 신체적 아름다움에는 동일한 규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 네 몸을 사랑해! 하지만 너무 사랑해선 안 돼. 자신감을 가져! 하지만 겸손해야 해. 마음 속으로 편안함을 느껴!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그걸 드러내서는 안 돼. 우리는 신체 자신감을 설파하면서도 자신의 외모를 좋아하는 여성을 거만하고 심지어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취급하는 문화 속에서 살고 있다.

- 겉모습보다 기능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사실

-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보이는 지의 관점에서만 생각할 뿐, 어떻게 기능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을 장식적이고 수동적인 대상으로 생각할수록 기능에 대한 주관적인 감각은 떨어진다. 몸매에 너무 관심을 쏟다 보니 에너지나 스태미나와 같은 것에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못하게 된다. '육체적 자원'으로서 자신의 몸을 존중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 긍정적인 신체 이미지는 다양한 태도와 행동으로 표현된다. 우선 긍정적인 신체 이미지를 지닌 여성은 자신의 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집중한다. 에이미처럼 기능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들은 신체가 성취하는 모든 과업을 인식하고 이를 감사히 받아들인다. 결론적으로, 이 여성들은 몸을 지속적인 다이어트와 극단적인 운동, 또는 잔인한 말로 굴복시킬 대상이 아닌 잘 돌봐야 할 것으로 바라본다.

- 열심히 노력하는 것, 집중하는 것, 배려하는 것, 창조적인 것, 너그러운 것, 그녀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쏟았는지 알고 있다고 말하자.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다고 말하자. 그녀가 당신에게 어떤 영감을 주는지 설명하다.

- 우리가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느낄수록, '아름다움'을 연기해야 하는 일이 적어질 것이다. 그리고 연기를 그만둬야 비로소 정신적 자원을 다른 과업에 자유로이 쓸 수 있다.

- 당신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를 결정하라.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한정된 시간과 돈을 어떻게 쓰겠는가? 당신의 감정적 에너지를 어디에 투자하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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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집 - 2018.02.21

독서/기타 2018. 6. 18. 18:37

 

카카오톡의 행보는 매번 놀랍고,
지인으로부터 이런 선물은 또 처음이다.
굳이 또 시집을..ㅋ 감사합니다.. 향초도 있다ㅋㅋ 천천히 아껴가며 읽어야겠다.

 

 

 

 

치과 병원 오는길에 데려왔는데, 병원 냄새와 환자들과 더불어 괜히 그 처연함이 생각난다.

 

 

 

 

동주는 그 사촌 몽규에 비해 실천적이지 않고, 시로만 마음을 토로하며 부끄러워 하는 사람일 것 같은 편견이 있지만..

사실 부끄러움이란 행동하는 사람들의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부끄러움도 염치도, 빈익빈 부익부.

 

 

posted by sergeant

 

UCF 인터뷰를 끝내고 잠이 오지 않아서, 다음 인터뷰 준비하기 전 짧은 시간에 그 동안 미처 못 끝냈던 책들을 서재로 가져왔다.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 지원을 위한 안내서는, 책이라기 보다는 작은 소책자이다.
사단법인 한국 여성의 전화에서 기획하여 부설 연구소인 울림에서 제작했다. 제작과 동시에 이벤트를 해서, 선착순으로 지원하면 택배로 보내주시기에 잽싸게 신청했다.
pdf가 무료로 배포 된 줄 알았는데, 3,000원이라는 가격이 있나보다. 핵 이득!

성폭행 피해자 상담을 하면서 좀 더 내가 지식을 많이 알고 도와줄 수 있으면 좋을텐데, 라는 아쉬움이 들었던 적이 있다. 해바라기 센터와 같은 전문 센터로 곧장 연결하고 할 수 있는 심리적 지원을 한다는 측면에서 할 일을 다 했었지만, 배경지식을 알고 있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의 큰 차이를 항상 느낀다. 잘 공부해서 나도 필요한 사람들과 지식을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다.

다음은 책자에 대한 안내이다.

<성폭력 가해자들은 피해자가 자신에 대한 고소를 취하하도록 협박하거나 더 이상의 문제제기를 하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수단으로 무고, 명예훼손 등의 각종 역고소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최근 일어난 유명연예인이나 직장내 성폭력 무고 고소들 역시 ‘성폭력 사실이 없었다’는 입증 없이 이루어졌습니다. 마치 피해자를 의심하기만 하면 무고가 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성폭력에 대한 통념은 ‘꽃뱀’ 의심으로, 그리고 너무 쉽게 역고소로 이어지곤 합니다. #무혐의는무고가아니다
이 안내서는 실제 성폭력 역고소 피해자들의 인터뷰와 판례들을 바탕으로 성폭력 가해자들이 ‘일단 하고 보는’ 역고소의 과정과 이를 어떻게 분별 있게 감지해야 하는지, 어떠한 역고소에 휘말리더라도 스스로가 당당한 피해자임을 잊지 말고 힘을 내자고 말하기 위해 쓰여졌습니다.>

 


 

.6
성폭력 가해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피해자 동의 없이 섹스했나요?'
-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질문하면 어떨까요?
'당신은 강간을 했습니까?'
-아니오.

위 글은 2017년 10월 31일 뉴욕타임즈 에디션 1면에 실린 "강간을 저지른 남성에 대한 면밀한 검토"를 번역한 글로, 2017년 11월 13일 직썰, "성폭력 가해자들은 자신이 '나쁜 사람인지 모른다"에 실린 기사의 일부입니다.

p.12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 낮은 신고율
성폭력에 대한 역고소가 왜 논란이 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 성폭력 범죄의 특수성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낮은 신고율입니다. 여성가족부의 '2016년 성폭력 실태조사'에 따르면 성폭력 신고율은 2.2%에 불과합니다. 어떤 범죄의 신고율이 낮은 이유 중 하나는 범죄피해 사안이 경미하여 굳이 신고하지 않고도 피해회복에 문제가 없는 경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하지만 성폭력은 중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신고율이 낮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짐작하다시피 성폭력의 신고율이 낮은 것은 범죄가 경미하거나 사건이 사소해서가 아니라 범죄 증명의 어려움, 가해자 처벌의 불확실성, 가해자와 친족 등 친밀한 관계, 이례적인 피해자 비난, 보복의 두려움, 수사기관의 비협조 등이 예견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성에게만 정조의 의무를 부과하고 비난해 온 가부장적 남성중심의 영향으로 피해 여성 및 그 가족 등이 성폭력을 범죄피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감추고 은폐해야 할 부끄러운 일로 여기는 인식도 신고를 망설이게 합니다.

p.13
가해자에 대한 온정주의
성폭력은 다른 범죄와 달리 피해자에 대한 비난이 과하다는 범죄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가해자를 동정하고 감싸는 온정주의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도적으로도 이를 뒷받침하여, 2013년 6월 19일 성폭력 범죄에 대한 친고죄가 폐지되기 이전에는 피해자의 고소취소가 있으면 가해자를 처벌하지 못하는 일도 가능했었지요.

p.16
성폭력의 무고를 보도하는 언론의 편파적 보도기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무혐의 용어의 사용에 관한 것입니다. 피의자가 된 피해자에 대한 검찰의 무혐의 판결을 강조하면서 마치 무혐의가 무죄인 양 대중들이 오독하게 하는 것이죠.

p.19
꽃뱀 낙인
한국사회는 성폭력 피해 호소를 소위 "꽃뱀"에 의한 허위신고, 그리고 '불쌍하고 억울한 남성'에 관련된 사건으로 보려는 경향이 매우 강합니다.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사건의 면모를 알아보려하기보다 '꽃뱀'사건으로 미리 단정해버리는 태도는 주로 피해자가 되는 여성에 대한 신뢰가 낮은 사회, 즉 여성의 말을 잘 믿지 않고, 신뢰할만한 사람으로 보지 않는 사회적 배경과 관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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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2017.12.03

독서/여성주의 2018. 6. 18. 18:32

 

2017년의 마지막달을 7년만의 감기몸살로 정신없이 시작하게 될 줄이야. 사람이 참 한치 앞을 못 내다본다. 어쨋거나 강제로 질병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올-스탑 한 채로 며칠을 집에서 누워지냄.
강철 체력이라 웬만해서는 아프지 않는데.. 너무 힘들었다. 오죽하면 밥을 잘 못먹고(!!) 좋아하는 지인이 상수동에 전시보고 같이 밥먹자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류의 데이트 코스) 연락 주셨는데도 거절했다.
밥도 거의 못먹고 옥수수스프나 포카리스웨트, 보리차 끓여마시다가 좀 상태 괜찮다 싶을땐 집 앞 본죽에서 사 온 새우죽 한 번 먹고.

그러는 와중에 부담없이 다시 읽게 된 '이갈리아의 딸들'
이 책은 아마 내가 초등학생 때 읽었던 책인 것 같은데, "페호"라는 남자 성기를 받치는 속옷의 개념이 너무 충격적이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브레지어 착용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페호에 관한 글을 보고나서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당시 어린 나에겐 생각의 전환을 하게 만든 엄청난 작품이었던 것 같다.

 1990년대는 페미니즘의 부흥이 한차례 일어났던 시기였지만, 다시금 잠잠해졌고 이제 또 다시 페미니즘에 관련된 서적이나 논쟁들이 많이 이루어 지고 있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2010년대 후반 지금 '메갈'이라고 불려지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낙인찍기 시도와 밀접하게 관련있는 메갈리아 사이트의 이름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책이다.

메갈리아 사이트의 주된 운동 방법은 '미러링'이었는데, 혐오 행동이나 사상등을 똑같이 반영해서 비추어주는 전략을 말한다.
한국 남성들에게 미러링은 너무 어려운 전략이었다는 정희진님의 말처럼, 미러링은 쉽지 않은 전략이다. 잘 고안되지 않은 미러링은 여러 어려움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면, 잘 고안된 미러링이 얼마나 크고 강한 파급력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갈리아는 여성상위사회이다. 단어 하나하나부터 모두가 여성중심으로 다시 재편되어 있는 사회.

어린 시절 충격을 뒤로 하고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 다시 읽어도 전혀 유치하거나 이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재밌게 읽게 되었다.
몸이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면서도 책을 읽으며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다시금, 마음을 꾹꾹 다질 수 있었다.

전화영어를 시작하며 레벨테스트를 하는데, 인터뷰어가 "80년대 생이라는건 어떤의미야?"라고 하길래.. 나도 모르게 너무 훅 들어버린 생각이.. 어릴때부터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고 배워왔지만 사회에 나왔을때 전혀 그렇지 않다는걸 깨닫는 세대라고 대답하며 페미니즘 얘기까지 같이 나왔었는데 ㅎㅎㅎ

이 책을 처음 접하던 십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책이 비슷한 울림을 준다는 것이... 아직 한국 사회가 발전하지 못했다거나 혹은 퇴보하였음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성인이 되었고. 연대할 수 있는 많은 단체들과 도구들이 있다는, 그리고 진심을 나누고 공감하며 같이 전시도 보고 책도 읽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sergeant

괜찮지 않습니다- 2017.10.04

독서/여성주의 2018. 6. 18. 18:30

 

며칠 전, 책을 들자마자 근 2년간 발생했던 수많은 여성혐오 범죄들에 대한 목록을 차근차근 나열하고 자세하게 기술해 둔 초반부에 질색하며 화를 내고 있는 나를 보더니 배우자가 "지금쯤이면 우리가 그런 사건들 모아둔 책 읽을 시기는 지나지 않았냐."고 말했다. 그래, 따지고보면 이렇게 황당하고 빡치는 사건들을 보고 화를 낼 시기는 지난건지도 모르겠다. 이미 익숙해지고 무뎌질 것이었다면 담담해지고도 남았을 시간들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앞으로 몇십년이 지나더라도 전혀 담담하거나 화를 덜 내고나 무뎌지거나 익숙하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친 사회현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는 한.
 사실 나 또한 책 제목을 보고 방심했었다. 괜찮지 않다고? 그래, 당연히 괜찮지 않지. 그러면서 책을 들고 괜찮게 읽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아니. 전혀 괜찮지 않다. 매일매일 갱신되는 사건들, 범죄들. 10년 전에 비해 훨씬 후퇴한 여성인권. 엉망인 교실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이 사회. 
 언제쯤이면 이런 사건들을 나열하고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몇 권의 책이 나오거란 생각을 안 할 수 있을까. 삼개월만 지나도, 이 책에 적힌 최근 사건들이 업데이트 되지않고 올해의 대표적인 여성혐오 범죄들로 소개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절망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괜찮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어서. 그리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연대가 있어서. 나는 괜찮아질 수 있다. 지금은 괜찮지 않지만, 좀 더 괜찮아 질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특히 기자분이시기 때문에, 방송과 관련된 여성혐오쪽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셨다. 다양한 사건과 범죄들은 접했었지만 방송 깊숙히 스며들어있는 여성혐오들에 대해 정리하고 인식하기에 매우 좋은 책이었다. 어린 사촌동생이나 친구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페미니즘 입문서로.


 

"괜찮다는 종종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저 난감한 상황을 넘기기 위한 말일 때가 많았다. 원치 않는 호의 앞에서, 무심과 무례 앞에서, 불편과 번거로움 앞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괜찮아요" 대답하곤 했다.
 사람들이 정말 괜찮은 일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내 뒤의 또 다른 여성이 그 괜찮지 않은 말과 행동을 견뎌야 했던 것은 아닐까. 마음이 무거워진다.
여학생, 여직원, 엄마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폭력과 조롱과 비하이 대해 그걸 웃으며 소비하는 대중문화에 대해,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한국 남자들의 세상에 대해 이제 분명히 말하겠다. "괜찮지 않습니다."

p.18
10대 남성들의 성욕이 대해서는 온 사회가 "참느라 힘들지? 자식들, 힘내라!" 며 좋은 티슈라도 챙겨주려는 분위기라면, 10대 여성의 성욕은 어떤가.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기 보다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P.34
가정, 학교, 직장, 사회는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고, 자신을 갈아 넣어 이 모든 것을 완수하는 '알파걸'과 '수퍼우먼'에게만 박수를 보냈다.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도전할 기회를 주고 있으니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 여자는 당연히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낳아야 하고, 상냥한 아내이면서 좋은 엄마이자 알뜰한 주부, 시어른에 대한 도리를 아는 며느리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P.69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소설 "체체파리의 비법"은 이렇게 말한다.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충분히 많은 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생활 방식이라고 부른다."

P.136
체중 관리부터 표정, 몸짓, 발언, 행동, 심지어 범죄 경력까지, 왜 우리는 이토록 남자에게 관대하고 여자애게 엄격한가. 여자 연예인이 무례한 일을 겪었을 때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조롱하고 비난하면서, 남자 연예인의 무례한 언행은 왜 그렇게 조용히 빠르게 잊어주는가.

posted by sergeant

 

정확히 한달 전, 방한 기념회 때 참석해서 사인 받아온 책을 아끼고 아끼고 아껴서 읽다가

어제 시험 끝나고 후루룩 마저 읽은 후 포스팅:) 리베카 솔닛의 글은 분명하고 예리하며 통찰력으로 가득 넘친다.


그녀를 알게 해준 책 '맨스플레인'은 차근차근 다 정리하지 못했었지만

초두효과와 더불어.. 훨씬 더 강력하게 내게 영향을 주었었고,

그 때문에 투고할 논문에도 한 줄을 할애해서 적었었다.


앞으로도 여러가지 할 일들 많을테고, 그 과정에서 이 책 또한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

본격적으로 인용해 정리해 둘까 싶다.

 



p.18

어떤 엄마들은 내게 말하기를, 자신은 그저 아이가 있다는 것 때문에 무시당해도 싼 아둔한 인간 취급을 당한다고 한다. (...) 많은 엄마들은 설령 일에서 성공하더라도 그렇다면 틀림없이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했을 거라는 말을 듣는다. 여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정답은 없다. 우리가 습득해야 할 기술은 오히려 어떻게 그 질문을 거부할 것인가인지도 모른다.

p.19

내 인생의 목표 중 하나는 진실로 랍비처럼 문답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 닫힌 질문에 열린 질문으로 답할 줄 아는 것,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깍 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p.25

사람들은 아이 없는 사람에게 그 동기를 캐묻고 그가 부모 역할에 수반되는 희생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거꾸로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 밖의 세상에 베풀 사랑이 그만큼 적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

 >>많은 남성들이 우호적이든, 그렇지 않든간에 나의 딩크족 선언을 들으면 마치 '뭘 모르는 인간'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에 신물이 난다. 특히 방금 말한 그런 이들은 모두가 나보다 결혼을 1년 이상 늦게한 자들이라는 것도 우스운 포인트이다. 어쨋거나 그들이 나에게 들이대는 아이를 가지기로 결심한 '귀한 논리와 포부'를 들어보면 딱히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재깍 지적들이 가능한 포인트들이 많다. ex1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최상의 경험인 부모가 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애는 무슨 죄..?? 나의 경험을 위해서 아이를 낳겠다는 건가.. ex2 "와이프가 아이를 낳아줬으니 어쩌면 내가 양육의 반은 부담해 줄 의향도 있어." 아니지. 와이프는 낳는 걸로 그가 할 책임을 다 했으니 니가 100% 양육을 책임지는건 어떨까..? 어쩌면 그들이 나에 대해 반발감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인지도 모르겠다.. 본래 맞는말만 하는 사람들은 미움을 산다.

 나는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인 우위를 통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쨋거나 아이를 가지게 되면 아무리 이타적이었던 사람도, 자기 자신 혼자서는 이타적일 수 있지만 자신의 아이에게 만큼은 최선의 것을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될 터이다.  그리고 오히려 아이에게 이타적이라고 강요를 하는 것 자체도 모순적이고 아동학대적이다. 내가 들었던 최고의 아이를 가지겠다는 결심의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데, 아이와 함께 이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정도였다. 그 밖에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이 논리적으로 뛰어나다고 포장하며 아이를 낳으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대더라도, 차라리 피임 실패였다는 대부분의 이유와 거의 수준이 비슷하다고 느껴졌을 뿐이라고 말하면, 너무 과한걸까..


p.36

지난 세기 동안 인간이 스트레스와 위험에 대처하는 반응은 "맞서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2000년 UCLA의 심리학자들은 그런 연구가 대체로 수컷 쥐와 인간 남성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심리학자들은 그래서 여성을 연구했고, 자주 채택되는 세번째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그것은 여럿이 한데 뭉쳐서 연대와 지지와 조언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3년에 석사과정에 입학했던 나는 여전히 fight or flight를 정설로 배우고 있었다는게 함정.


p.44

피해자를 믿는다는 건 곧 세상의 바탕에 깔린 가정들을 의심한다는 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편안함이 지켜져야 할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 편안함이 남들의 고통과 침묵 위에 세워졌을 때 조차, 아니 그럴 때일수록 더욱 더.

p.46

여성이라는 범주는 길고 너른 대로이다. 계급, 인종, 가난과 부 등 다른 많은 길들이 이 길과 교차한다. 이 대로를 걷는다는 것은 그 다른 길들과 만난다는 뜻이다.

p.52

가부장제가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첫번째 폭력 행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다. 그 대신 가부장제는 모든 남자에게 정신적 자기절단을 행할 것을, 자신의 감정적 부분을 도려낼 것을 요구한다. 만일 자신을 감정적으로 불구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남자가 있다면, 가부장제의 다른 남자들이 그의 자존감을 공격하는 힘의 의식을 틀림없이 거행해 준다. <Bell Hooks>

​(...)

남성성이란 거대한 포기다. 분홍색을 포기하는 건 사소한 일이지만, 성공적으로 남성화한 남자아이들과 남자들은 일상에서 감정, 표현력, 감수성, 그 밖의 온갖 가능성을 포기한다.

p.55

여성혐오와 동성애 혐오는 둘 다 가부장제가 아닌 것에 대한 혐오다.

p.57

감정이 죽여야만 하는 것이라면, 살해의 표적은 여성이 되기 쉽다. 상대적으로 덜 점잖은 남자들은 나약함을 적극적으로 사냥한다. 남자가 된다는 것이 나약함에 대한 혐오를 익히는 것이라면, 자기 내면의 나약함은 물론이고 자신을 대신해서 그 나약함을 품어주는 젠더의 나약함까지 ㅎ며오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자애 같다거나 계집애 같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남자아이나 성인 남자에게 모욕으로 쓰였고, 게이 같다거나 호모 같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ㅏ신이 지배하고 삽입하는게 아닌 방식으로, 오히려 삽입을 당하고 동등해지고 개방된 방식으로 성애화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개방성을 강함이 아니라 약함으로 보는 시각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남성 호모포비아에 대해 생각을 할 때면, 연구결과에 기반한 추론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삽입공포, 강간공포가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자주했었다. 혐오란 본래 두려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근데 솔닛 언니가 이렇게 얘기해주니 또 괜히 반갑고 그렇더라.


p.59

만일 당신이 협동하고 타협하고 존중하고 유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당신과 동등한 존재이자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존재로 여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당신은 사랑하는 일에 자격이 부족하다.

p.64

성폭행이 범죄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강간) 영상은 법 체계에서 유통될 때는 일탈적 범죄의 증거이지만, 범죄자의 동료 집단에서 유통 될 때는 범죄자가 남성성의 규범에 순응한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p.68

Dacid Morris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공개한 인상적인 책  '불길의 시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잠식하는 트라우마의 힘은 이야기를 파괴하는 능력에 일부 담겨있다. 글이든 말이든, 이야기는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엄청난 치유력을 발휘한다. 정상적이고 비트라우마적인 기억은 늘 현재진행형으로 씌어지는 자아의 이야기에 쉽게 포함되고 통합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기억은 길들여진 동물과 같아, 자아가 거뜬히 통제하고 다룰 수 있다. 대조적으로 트라우마적 기억은 들개처럼 멀찍이 떨어진 채, 자아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모리스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강간이 트라우마의 가장 흔하고 심각한 형태인데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연구는 대부분 전쟁 트라우마와 퇴역 군인을 대상으로 수행된다. PTSD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남자들을 연구해서 얻은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고통을 겪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한 침묵도 존재하고, 그 침묵이 여성을 더욱 침묵시킨다는 것이다. 침묵은 침묵 위에 건설되고, 침묵의 도시는 이야기들과 전쟁을 벌인다.


p.82

우리가 공손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종종 자신보다 남들의 안락함을 더 중시하는 태도다. 어떤 상황에서도 남들의 안락함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p.84

개인과 사회는 입을 열어 증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권력과 권력자에게 이바지 한다.

입을 열기를 거부하는 증인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권리, 주체성, 온전한 신체, 인생을 잃는 데 동의하는 셈이다. 침묵은 폭력을 보호한다. 온 사회가 침묵할 수도 있다. (..) 범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위험하거나 불법일 수도 있다. 작가 오르한 파묵은 교과서와 공식 기록에 뻔히 나와 있는 내용이었음에도 범죄에 대해 말했다는 이유로 "터키의 국가성을 모욕했다"며 고발되었고, 해외로 피신해야 했다.


p.91

 여성을 공적이고 전문적인 삶으로부터 밀어내는 방법은 셀 수없이 많다. (...) 우쭐댄다는 표현이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쓰이는 것처럼, 날카롭다거나 나댄다는 표현은 대체로 여자들에게 쓰인다. 정치하는 여자는 너무 여성스러워서도 안 되고 너무 남자 같아서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여성성은 지도력과 연관되는 속성이 아니고 남성성은 여자가 누릴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는 여자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차지하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잘못된 것이 되기 싫다면 불가능한 것이 되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여성이 된다는 것은 늘 잘못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결론밖에 못 내리겠다. 최소한 가부장제하에서는 그렇다.


p.113

침묵과 수치심은 전염된다. 그러나 용기와 발언도 전염된다.


p.125

세계보건기구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전세계 여성 살인 피해자의 38퍼센트가 친밀한 파트너에게 살해된다.

p.130

여성에 대한 폭력을 논하는 공공의 대화가 변하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갑자기, 그런 폭력이 얼마나 흔하고 어떤 변명들이 거기에 뒤따르는지를 말함으로써 폭력을 해결하는 일보다 자기자신을 변명하는 일에 더 골몰하는 남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억울해하는 남자들이 반복해서 읊는 표현인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진 않아"가 - 예를 들어 모든 "남자가 다 강간범은 아니야"처럼 쓰인다- 여자들은 다 겪는다로- 예를 들어 "여자들은 다 어떤 식으로든 강간에 대처해야 해"처럼 쓰인다- 변형되었다.

 많은 남자들은 이때-소셜미디어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여자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서 여자들이 오래 견뎌온 현실을 일생 처음 깨달았다.

p.139

수치심은 성폭행 피해를 당한 여자들을- 또는 남자들을- 침묵시키는 중대한 요소다. 수치심은 사람을 침묵시키고, 고립시키고, 범죄가 지속되게끔 만든다. 언론은 전통적으로 강간 피해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피해자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이 전통은 피해자가 당한 일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암시하고 피해자를 사람들 눈에 안 보이게, 고립되게, 침묵하게 만드는 부수 효과가 있다.

p.161

요컨대, 강간 신고로는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기 어렵다. 그리고 강간 고발의 약 2퍼센트가 무고이겠지만, 전체 고발의 2퍼센ㄴ트가 좀 넘는 비율만이 유죄로 결론난다.( 3퍼센트까지 높게 잡는 계산도 있다.) 달리 말해, 세상에는 처벌받지 않은 강간범이 끔찍하게 ㅁ낳이 돌아다닌다. 그리고 대부분의 강간범은 고발이나 고소를 당했을 때 자신이 강간을 저질렀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세상에는 강간범인 동시에 거짓말쟁이인 사람들이 잔뜩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에 넘치는 거짓말은 어쩌면 강간당하지 않은 여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라 강간을 저지른 남자들의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얼마전 '꽃뱀'에 관련한 얘기가 나오는 프로에다가, 댓글 다는 남성들을 본 적이 있다. 주변 지인이 꽃뱀 때문에 누명을 쓰고 자살했으니 꽃뱀이 매우 흔하고, 많고, (어쩌면 성폭행 가해자 보다도) 나쁘다는 논지의 이야기였다. 실화인지 주작인지 그따위 것은 잘 모르겠고, 어쨋거나 하나 분명한 것은.. 그 댓글을 쓰고 있는 인간의 지인들은 운이 좋다는 생각 뿐이었다. 큰 수고 들이지 않고 투명한 한국남자 한명을 걸러낼 수 있을테니까.

p.163

무고한 사람이 유죄를 선고받는 것은 이렇듯 사법 체계의 부패와 직권 남용의 결과인 편이지, 한 사람의 고발자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예외는 있다. 나는 그런 예외는 드물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p.165

우리가 강관문화라는 용어로 표현하려는 뜻이 무엇인지 따져보자. 그것은 혐오다. 스포츠 팀이나 남학생 사교 모임이 저지르는 강간은 타인의 권리, 존엄, 육체를 침해하는 것이 멋진 일이라는 생각에 입각한다. 그런 집단 행동은 남성성을 포악한 포식자다운 것으로 보는 생각을 깔고 있다. 그런 생각에 찬동하지 않는 남자도 많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p.167

열두살에서 서른살 사이에 나는 날 괴롭히는 남자들로부터 그저 살아남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낯모르는 사람이나 가볍게 아는 사람이 내 젠더 때문에 내게 모욕과 피해를 가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런 불운을 피하려면 내가 한시도 빠짐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것. 정말이지, 그건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 이유 중 하나였다.


p.178

모든 폭력에는 권리의식 혹은 권위주의가 있다. 우리는 살인자가 타인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말한다. 앗는다는 건 가로챈다는 뜻이다. 훔치는 것, 자신이 소유자인 양 특권을 행세하는 것, 타인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자기 것이라서 그래도 된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의 것이 아니다.


p.188

"사람들이 여자들 말을 왜 그렇게 못 믿는지 모르겠어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남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려면 여자가 두명은 있어야 한다죠. 그런데 여기서는 스물다섯명이나 필요하잖아요." <-인기 코미디언의 강간사실을 밝히기 위해 25명의 여자가 증언을 했어야 했던 것을 비꼬면서 한 말


p.206

가부장제는- 남성이 지배하는 구조와 부계에 집착하는 사회를 둘 다 뜻하는데, 이런 체제는 여성의 성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가능하다- 많은 시대와 장소에서 의존적이고 비생산적인 여성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냈다.


p.211

차별Discrimination이라는 단어에는 서로 모순된 두가지 뜻이 있다. 인식을 말할 때는 이 단어가 무언가를 똑똑히 구별하는 것, 세부를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 사회정치적 맥락에서는 무언가를 똑똑히 구별하기를 거부하는 것, 범주를 넘어 특수와 개체를 보는 데 실패하는 것을 뜻한다. (...)

집단이란 물 샐 틈 없는 범주이므로 그 속의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사고방식, 신념, 나아가 책임을 공유한다는 생각은 차별의 핵심적 요인이다. 이런 생각은 집단 처벌로 이어진다. 이 여자가 나를 배신했으면 저 여자를 비난해도 된다는 생각, 집 없는 사람들 중 일부가 범죄를 저질렀으면 모든 집 없는 사람을 처벌하거나 쫓아내도 되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요즘 그 생각은 어린아이, 장애인, 노약자들을 향해 급속도로 퍼져있으며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마치 그러한 생각이 합리적이고 경제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결과물인 양 포장된다.


p.215

 여자는 누구든 걸어다니는 여성 대표처럼 취급되기 쉬운데 비해- 우리 여자들은 정말로 모두 감정적이고, 앙큼하고, 수학을 싫어하나?- 남자들은 비교적 그런 판단에서 자유롭다. 백인을 일반화하는 말은 많이 들리지 않고, 루프나 찰스 맨슨은 제 인종이나 젠더의 수치로 여겨지지 않는다.

(...)

차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개인의 장점으로만 평가받는 개인이 되도록 허락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종의 자유 때문에 중요한 데이터가 틈새로 빠져 누락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요즘의 총기 난사 사건들에 대해서 불과 최근까지만 해도 거의 이야기되지 않았던 한 사실은 그런 사건을 거의 전부 남자가 저지른다는 것, 그런 남자들 중 대부분은 백인이라는 것이다. 대신 그런 사건들은 불가사의하고 끔찍하게 놀라운 사건으로, 혹은 정신질환이나 그밖에 각각의 사건을 눈송이처럼 저마다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다른 구체성들로 설명된다.

예외는 있다. 이슬람 국가 출신의 사람이 저질렀을 때다. 그 때는 사람들이 총격을 테러로 부르고, 정치적 움직임과 겨랕ㄱ한 정치적 발언으로 간주한다.

p.219

이것은 피부색이 우리의 지위, 경험, 기회, 경찰의 총에 맞을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서 우리가 색맹인 척 하고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우리는 범주를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기술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p.222

남자들 중 그 일부 부분집합은 심지어 #notallmen(모든 남자가 그렇진 않다)이라는 해시태그도 만들었다. 마치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이 땅에 창궐한 재앙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그들의 안락과 평판이어야 한다는 것처럼.

p.234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내 독서 금지 영역에 포함된다. 모름지기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라면 동성애혐오자, 반유대주의자, 여성혐오자가 되어선 안 되고, 총으로 큰 동물을 죽이는 짓을 ㄴ마성성의 동의어로 여겨서도 안 되는 법이다. 총-남성 성기-죽음 어쩌고저쩌고 하는 짓은 꼴사나울뿐더러 서글프다. 게다가 간결하고 억제된 스타일의 문체는 헤밍웨이의 손에서는 딱딱하고 가식적이고 감상적인 문체가 된다. 남성적 감상주의는 최악의 감상주의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면에서 자신에 대한 망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솔하게 감정적이었던 찰스 디킨스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헤밍웨이가 F.스콧 피츠제럴드의 성기 크기에 대해서 했던 쓰레기 같은 소리는 딱할 뿐 아니라 그의 내면을 너무 투명하게 보여준다. 피츠제럴드가 헤밍웨이보다 훨씬 성공한 작가였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지금도 피츠제럴드가 헤밍웨이보다 훨씬 낫다. 레고 블럭 같은 헤밍웨이의 문장에 비해 피츠제럴드의 문장은 실크처럼 나긋하며, 피츠제럴드는 남성 인물 뿐 아니라 데이지 뷰캐넌이나 니콜 드라이버 같은 여성 인물에게도 자유자재로 감정이입할 줄 안다(밤은 부드러워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근친상간과 아동학대가 미치는 장기적 영향을 탐구한 작품으로도 읽을 수 있다).

>>얼마 전, 영페미님과의 대화에서 "헤밍웨이"를 좋아하신다기에 무슨 헤밍웨이냐고 그렇게 말려도 씨알도 안먹혔으나 오늘 비로소 신뢰로운 레퍼런스를 찾았다. 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이 마초남이 감히 내가 좋아하는 피츠제럴드까지 건드렸었다니.. 감히 내 위대한 개츠비를. 우리 데이지 뷰캐넌을 창조해 낸 작가를.. 너는 영영 빠이다... 노인과 바다는 잘 읽었었고 너의 자화상 사진은 멋있지만, 너는 진짜 이제 안녕이다!!

p.241

이 문제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 유달리 많이 겪는데, 왜냐하면 서구 사회가 오랫동안 거울을 들어 그들을 비춰주었고, 버지니아 울프가 지적했던 것처럼 고분고분한 여자들로 하여금 그런 남자를 실물의 두배 크기로 비추는 거울이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 역시..........백인헤테로남성.........

 

​p.249

스스로는 예술에 대한 변호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예술에 대한 공격에 해당하는 흔한 주장이 하나 있다. 예술이 삶에 충격을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예술은 위험하지 않고, 따라서 예술은 질책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예술에 대해서든 반대할 근거가 없고, 따라서 모든 반대는 검열이라는 것이다. (....)

사진, 에세이, 소설, 그밖의 것들은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다. 그것들은 위험하다. 예술은 세상을 만든다. ​

>>나는 이 대목에서 "좆같은 걸 만들 수 있는 표현의 자유는 있지만, 그 만들어진게 좆같다고 표현할 수 없는 한국의 좆같은 표현의 자유"를 깊이 묵상하였다.

 

​p.252

어떤 또다른 선한 진보 남성이 나타나서 말했다. "당신은 예술의 기본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남자들을 마구 거세하고 다니는 소설이 있더라도 개의치 않을 겁니다. 그 작품이 훌륭하기만 하다면 읽고 싶을 겁니다. 그것도 한 번 이상." 세상에는 당연히 그런 문학작품은 없다. 그리고 만약 저 말을 했던 선한 진보 남성이 거세 장면이 잔뜩 나오는 책, 심지어 거세를 찬양하는 책을 또 읽고 또 읽었다면, 그 경험은 틀림없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매혹당한 사람들이 급 보고싶어 졌다. 물론 콜린 파렐은 거세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아가씨의 하정우처럼 "자지는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아직 보지 않았으므로 확인할 길이 없네.


p.263

여자는 자기 자궁 속 태아보다 가치가 없다. 그 태아들의 절반쯤은 여자일 테고, 그 여자들은 자라서 다시 그 다음 세대의 잠재적 태아들에 비해 가치 없는 존재로 평가될 텐데도. 여자들은 가치 잇는 것을 담은 용기를 담은 용기를 담은 용기를 담은... 무가치한 용기인 모양이다. 이때 가치있는 것이란 물론 남자다. 남자 태아다. 어쩌면 태아도 성별이 여자로 확인되기 전까지만 가치 있는지도 모른다. 아, 모르겠다. 나는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전혀 이해가 안 된다.

>>너무 맞는말 대잔치 나와서 빵 터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p.269

CDC의 가이드라인을 보면, 지나친 알코올 섭취에게는 "지나친 알코올 소비Excessiv eAlcohol Consumption"라는 형제가 있고 그 역시 골칫덩어리이다. (...) 이 이야기에서는 EAC씨가 명백히 단독으로 범행을 저지른다.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누구의 공격성인가? 누가 공격한단 말인가? CDC는 어서 추적에 나서서 남자들에 대한 경보를 발령해야 할지도 모른다. 누가 뭐래도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제일 많이 일으키는 건 남자들이니까(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남성에 대한 폭력을 제일 많이 일으키는 것도 남자들이다). 이런 언어를 상상해보자. "남자를 사용하면 임신이나 부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남자 사용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위험이 없는지 모든 남자를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술 마신 남자 사용을 조심하십시오." 남자들에게 경고 딱지라도 붙여야 할까? 그러나 그 또한 남자들에게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면해주는 일일 테고, 나는 그런 면책을 그토록 자주 해주지 않는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일 거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sergeant

국가란 무엇인가 - 2017. 05. 29

독서/기타 2018. 6. 18. 18:24

 

오래전부터 붙들고 있었지만 차마 마지막 장 덮기가 아쉬웠던 책. 적시성이 있던 시기가 지나고 5월 장미가 아름답다.

최고의 행정수반 자리에 올라도, 결국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에 너는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에 따라 은퇴를 선언하고 작가생활을 하는 유시민의 삶은, 마음은, 생각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인 이유도 어쩌면, 그가 선택한 지식인으로서의 길에 대한 나의 찬사일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본래 진흙탕이고 전쟁이다. 그러나 예전과 다르게 그 문장이 읽혀지는 이유는, 그 속에서도 어떤 이는 진주를 찾아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그리고 또... 보잘것 없어보이나 고귀한 자신만의 진주를 가지고 묵묵히 불이익을 감수했던 많은 선배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두려움이 용기로, 좌절감이 자신감으로 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p.95

기나긴 자본주의 발전과 사회적 분화를 거치면서 상비군과 관료제가 발전하고 국가제도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길게는 8년, 짧게는 3년에 불과했던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만들어졌다. 우리의 국가는 시민사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p.115

밀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어떤 경우에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기본권으로 내세웠다.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줄이면 국가는 선을 행하려 하기보다 악을 저지르지 않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론의 핵심이다.


p.157

그는 네 가지로 그 이유를 정리했다. 첫째,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본적으로 틀린 전제가 없는 한 침묵을 강요당하는 어떤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검증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근거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하나의 편견으로 간직하게 된다. 넷째, 소수 의견에 침묵을 강요하면 다수 의견 또는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강력하고 진심 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


p.225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어떻게 정치제도를 조직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정치철학이 다루어야 할 올바른 질문이다. - 카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p.254

이론적으로도 그러려니와 세계 각국의 경험을 보아도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을 맡긴 예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히틀러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히틀러는 독일 국민이 보통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한 권력자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악하거나 무능한 또는 둘 다인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한 사례는 숱하게 많다.


p.260

훌륭하고 지혜로운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없다면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은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대가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부작용이다. 이러한 강정ㅁ과 약점을 시민들이 제대로 보지 못하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인물을 지도자로 뽑아 최대의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경우, 선거는 '다시 실망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비극적 이벤트'로 전락할지 모른다. 뽑아놓은 지도자가 알고 보니 최선의 인물이 아니었다거나, 선하기는 하지만 능력과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실망하게 되고, 그래서 대중이 선거 자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잃게 되면 민주주의는 그여말로 교묘한 위선으로 잘 무장한 최악의 인물이 달콤하지만 실현할 수 없는 약속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는 중우정치로 타락할 수 있다


p.280

국가주의를 신봉하는 지식인들중에는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혐오를 부추기는 이가 많다. 그들은 똑똑한 시민이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시민들이 정치에서 멀어지기를 바란다. 진보를 표방하는 지식인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정말로 이 문제에 관심이 적은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일부러 무관심을 가장하기도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된들 어차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p.290

애국심은 특별한 면이 있다. 국가는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물리적 폭력을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행사한다. 다른 어떤 사랑의 대상도 국가와 같지 않다. 그래서 애국심도 다른 사랑의 감정과는 다르다. 폭력조직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폭력에는 정당성과 합법성이 없다. 국가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다. ... 오로지 국가만이 국민에 대해서, 다른 국가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을 행사한다. 고귀한 사랑의 감정일 수 잇는 애국심 뒤에는 결코 사랑하기 어려운 야수가 숨어 있는 것이다.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에 대한 증오심 또는 혐오감이 그것이다. 애국심은 내가 속한 국가를 사랑하는 감정인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를 배척하는 감정이다. 국가는 때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쟁과 학살이라는 끔찍한 참화속으로 몰아간다. 다른 어떤 사랑의 감정도 이런 엄청난 악을 저지르도록 사람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p.344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고 소통한다. 합리적이든 아니든, 민중이 고귀하다고 여기는 어떤 말을 남이 독점하도록 허용하면 권력을 그들에게 넘겨줄 위험이 뒤따라온다. 물론 톨스토이처럼 지식인이 자기의 철학적 소신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은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당과 정치인이 그렇게 하는 것은 혀명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아니다.


p.349

사회를 계획하고자 하는 가장 열광적인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계획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계획을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된다. 성자와 같은 이편단심의 이상주의자와 미치광이 광신자의 거리는 단지 한 발짝에 불과할 때가 많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노예의 길'


p.401

유토피아적 공학(혁명의 길)을 버리고 점진적 공학(개량의 길)을 선택하자는 포퍼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세상 그 누가 폭력혁명을 좋아하겠는가? 만약 점진적 공학의 길이 넓게 열려 있다면 유토피아적 공학을 선택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논리에는 큰 허점이 있다.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량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았다는 점이다.


p.424

우리가 흔히 내세우는 공공의 이익이란 것도 허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수많은 개인의, 때로는 공존하고 때로는 대립하는 이익일 뿐이다. 국익 또는 사회 일반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을 합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에게 귀속될 수 없는 공공의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하이에크에게 자유는 더 높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유는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정치적 이상이다. 훌륭한 행정을 위해 자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민 사회와 개인의 삶에서 각자 최고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대상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p.490

 진보의 범위를 넓게 설정하면서도 그 목표와 방법을 한결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는 '진보를 연찬하다'에서 이남곡 선생이 제시한 견해를 들 수 있다. 이남곡에 따르면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을 지향하는 게 진보주의다.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는 것은 세 가지다. 불합리한 제도, 물질의 결핍, 낡은 생각이다. 진보는 첫째,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예제도, 신분제도, 계급제도, 독재, 자의적인 국가폭력 ㅡㅇ 불합리한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했다.

 실현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국가가 이런 일을 하는데 반대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국가를 만들어 국가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종국적으로 시민 각자가 훌륭해지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훌륭한 국가는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지혜와 윤리적 결단의 산물이다. 국가가 훌륭해지려면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훌륭해야 한다.


p.536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그러나 사회는 여러 면에서 어쩔 수 없이, 도더성이 높은 사람들이 결코 도덕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종국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이 두 도덕적 입장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양자 사이의 모순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조화되는 것도 아니다. -라인홀트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p.598

니버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적 선으로 상정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태도에 대해 조심스럽지만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절대주의는 종교적 정치적 이상을 추구하는 영웅적 행위를 촉진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상황에서는 위험천만한 안내자가 된다. 개인은 절대적인 것을 추구해도 정당하며 위험이 적다. 일이 잘못되어도 그 자신이 손해를 볼 뿐이다. 고귀한 비극이라는 감상이 좌절을 보상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사회가 절대적인 것을 얻고자 달려들면 수백만 명의 생명과 재산이 하루아침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절대주의는 정책의 수단인 국가의 강재력을 잔혹한 독재로 바꾸어 버린다. 개인에게 광신주의는 해롭지 않은 열정적 기행이지만, 이것이 국가의 정책으로 나타나면 인류에 대한 자비심을 파괴한다.


p.622

사회 전체에서 진보는 일반적으로 소수파이다. 그러나 그 이념을 인생의 신념으로 채택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르다. 그곳에서는 그 이념만이 공인받은 지배적 사유습성이 된다. 이것을 바꾸는 것은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드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진보주의자들도 그들 사이에서 공인된 지배적 사유습성을 바꾸려는 시도를 불온하게 본다. 베블런의 말대로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진보진영 안에서도 "혁신은 나쁜 것"이다. 모든 곳에서, 언제나, 인간은 보수적이다.


p.636

그래서 베버는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이러한 윤리적 역설을 인식해야 하며, 그 중압에 눌려서 변지뢴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정치는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인 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범우주적 인간 사라오가 자비를 역설한 위대한 대가들은 폭력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가지고 일한 적이 업삳. 정치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영혼과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정치의 과업은 전혀 다르며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순수한 신념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모든 정치적 행위에 개입되어 있는 악마적인 힘을 의식하지 못한다.


p.661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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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