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트라우마 - 2019.7

독서/종교 2019. 6. 26. 14:22

 어떤 마음들은 입 밖으로 표현되었을 때 변질 되어 버린다. 게다가 어떤 감각들은 깔끔하게 인식 되지도, 명확하게 표현할 수도 없는 채로 까끌거리기도 한다. 이름을 찾지 못한 이 감각들은 부유하다 불쑥 튀어나와 주인의 뒷통수를 치기도 한다.

 기존의 세계에 통합 되지 못한 경험, 즉 트라우마로 부터 온 고통은 더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 시간이 변형되어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위협처럼 재현되는 플래시백, 언어로 정립되지 못해 타인에게 이해 받을 수 없는 기억들과 마비/과각성을 경험하는 몸, 이 모든 것은 고통이 개인에게 영향을 미쳐 일어나는 대표적 증상이다.
 정리되지 않는 것들은 나를 참을 수 없게 한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트라우마를 공부한 후로 그 세계는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처럼, '나는 세상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를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깨어지기 쉬운 내면을 보게 되었고, 우리의 발자국으로 지구가 얼마나 상처를 입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내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설명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히 묵상하던 시절, 목사님께 물어보았다. 십자가를 알수록 동반되는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목사님은 십자가에서 멈추지 말고 부활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하셨고, 당시 그 말에 많은 위안을 얻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어떻게 부활까지 나아가는지를 몰라 고통의 문제에 멈춰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오래전 얻지 못했던 다리를 얻게 되었다. 즉, 십자가(성금요일)와 부활 주일 사이에는 성토요일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내려왔고, 그 사랑이 가는 길에는 고통과 승리, 죽음과 삶이 온통 뒤섞여 있다. 성 토요일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중요한 대목이다. 성토요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인식할 수 없는 곳 즉 죽음과 부활사이, 지옥 깊숙한 곳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죽음의 경험, 즉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태풍 이 후의 삶'이 우리에게 남은 것처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 부활 신앙으로 대표되는 '승리주의' 신학이 우리에게 제시했던 고통에 대한 빈약한 대답은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는 커녕 비난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 남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증언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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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우리가 특정한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 때, 그 세계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 트라우마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10년 전에 비해 나는 세상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사람들을 볼 때마다 깨어지기 쉬운 내면을 보게 되었고, 우리의 발자국으로 지구가 얼마나 상처입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사실에 책임을 느낀다. 나는 우리가 설명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믿게 되었다.

 

p.24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제 그만 폭풍을 극복하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물론 폭풍은 지나갔지요. 하지만 '폭풍 이후'는 늘 여기에 있습니다." (..) 리 집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연민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드러내면서, 대중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고 이야기했다. 대중들은 카트리나로 인한 트라우마를 불편해했고,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에게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p.26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진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려는 사람은 삶을 파고드는 죽음에 대한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트라우마의 복잡한 모습들을 모조리 목격하고 증언해야 할 과제를 갖는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나, 트라우마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 모두 복잡한 상황 속에서 힘겹게 치유의 길을 만들어 간다.

 

p.28
이처럼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트라우마를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은 삶과 죽음의 관계 속에서다. 트라우마는 죽음과의 만남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계와 그 속에서의 익숙한 삶의 모습을 산산이 부서뜨린 끔찍한 사건을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에서부터 단절이 발생한다. 한 사건은 모든 것이 철저히 끝장난 것으로 생각되어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려운 일이다. 

 

p.34
트라우마 생존자가 경험하는 삶은 새로운 것도, 더 나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이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한 삶으로 선포되는 한, 트라우마의 고통이 존재하는 현실은 묻혀 버린다. 우리는 이런 방식의 부활 선포가 죽음의 여파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침묵하고 그 경험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p.35
트라우마의 이중구조는 이 책에서 내가 '중간(the middle)이라고 비유하여 부르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드러낸다. 이 중간은 삶도 죽음도 아닌, 생존이라는 당혹스러운 영역에 대해 말한다. 그동안 신학은 죽음과 삶의 사건에 집중한 나머지 이 중간이라는 영역을 다루지 못했다. 중간은 위태로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서 가려지거나 무시되기 쉽다. 시간과 몸과 언어가 중간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에, 중간을 증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p.36
이 책의 역할은 이 중간에 대한 담론을 드러내는 데있다. 이 작업은 고통경험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구원의 성급함에 반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 전통의 중심에 자리한 죽음과 부활이라는 내러티브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이중간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고통을 다른 방식으로 대할 수 밖에 없다. 

 

p.41
트라우마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선함을 굳게 믿는그리스도교의 신앙백이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p.47
복구가 진행 중이지만, 이제 삶은 새로운 삶도 승리한 삶도 아니다. 삶은 오히려 더불확실하고 모호하며 캄캄하다. 이러한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신학적 인식과 표현이필요하다. 나는 아무런 삶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마음속에 삶을 품고나아갔던 사람들의 몸부림을 존경한다. 나는 그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책을 썼다. 

 

p.48
구원을 죽음이나 삶 어느하나와긴밀학하게 연결 시키면, 고통을 미화시키고 찬양하거나혹은 부정하게 될 위험이 있다. 

p.5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주류의 논리를 주장하는한, 신학은 깊은 상처를 덮어버리며 고통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p.53
결국 고통 속에서 과연 하느님이 계신지를 다시 묻기 위해 남아 있는 것에 관한언어는 신학 안에서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트라우마라는 렌즈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고통의한가운데에서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전통적인 질문은 새롭게표현된다. (...) 트라우마의 여파 속에서, 신학적 해석의 틀은 사람들이 겪는 깊은 고통을 거의 설명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그 해석의 틀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p.55
여느 고통 경험과 다르게 트라우마는 우리가 고통에 대응하는 능력과 경험을 자기삶에 통합하는 능력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건의 폭력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특성 때문에, 다양한 트라우마 증상들이 나타나고, 경험을 처리하고 해석하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집요하게 떠오르는 고통스러운 장면들과 트라우마 사건의 기억은 가장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중 하나다.
과거의 파편들이 현재에 다시 흩뿌려진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과거는 거듭 현재를 침범하고, 많은 생존자들의 삶은 다시 트라우마 언저리로 떠밀려 간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 모두는 트라우마와 씨름하면서 자기와의관계 및 타인과의 관계 모두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트라우마 여파 속에서 생존자는자기신체 및 타인의 신체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언어 사용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에도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p.56
트라우마의 핵심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과거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않고 현재를 침범한다. 현재는 과거를 재현할 뿐 아니라, 온전히 알지도 못했고 제대로 이해하짇지도 못했던 것들을 다시 보여주게 된다.

"세월이 약이다!"라는 익숙한 격언이 있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이 격언과 상반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p.63
우리가 고통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사람과 공동체에 끼친 영향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고, 그 고통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을 다르게 정립해야 한다. 

 

p.84
트라우마는 일반적으로 죽음과의 만남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만남은 완전히 통합되거나 파악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만남은 인식할 수 없는 형태로 되살아난난다. 죽음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죽음이 가져온 위기는 죽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힘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에 있다. 되살아나는 죽음 때문에 트라우마 이전과 같은 삶은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삶은 죽음과 계속적으로 맞붙어 싸우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삶은 다른형태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트라우마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간단하게 읽어낼 수 없다. 죽음은 완결되지 않고, 삶 속에 계속된다. 

 

p.87
신학자 발타자르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죽음과 삶 사이에 무엇이 끈질기게 계속되는가?"

 

p.102
트라우마 현장에서 움트는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은 바로 사랑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p.104

이를 통해 트라우마에 대한 통찰들은 또한 예수라는 인물 대신에, 증언이라는 행위에 의해 드러나는 성령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모델들은 예수가 떠나고 난 뒤, 예수의 부재로 인해 형성된 증언의 방식들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하며, 성령이 하는 증언과 성령에 대한 증언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전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증언을 성령의 증언과 연관해 성령론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어떤의미가 있을까? 많은 경우에, 우리가 성서 속에서 보는 증언은 지금 제안된 해석들보다 훨씬 덜 직접적이다. 만약 증언이 말로 전달하기 어렵고, 간접적이며,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지도 확실치 않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교의 증언에 대한 개념이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우리의 관심이 증언의 내용이 아니라 증언하는 행위 자체로 옮겨지고, 목격된것들은 계속해서 생략된다면 어떻게 될까? 트라우마라는 렌즈는 선포되어야 하는 분명한 진실이 아니라, 우리가 담아낼 수 없지만 증언해야만 하는 진실을 주목하게 한다.

 

 

p.108
"그 위험이아주 실제적이기에 우리는, 마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드라마를 보는 관객들철처럼, 그저 장면이 바뀔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p.115
"성토요일, 내 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극심한 피로만 느꼈다. 영혼의 상태." 그녀는 그 고통을 신체적인 고통보다는 심리적인 고통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극도의 고독, 버림받음, 포기가 지옥에존재한다. 그녀의 경험은, 지옥에 존재하지도 않고 그녀가 손에 넣을 수도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지옥의 고통은 그녀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마치 성자가 성부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졌듯이. (...) 지옥은 고통을 떠맡는 곳이 아니라, 버려짐을 견디는 곳이다.

 

p.125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내려왔고, 그 사랑이 가는 길에는 고통과 승리, 죽음과 삶이 온통 뒤섞여 있다. 성 토요일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중요한 대목이다. 성토요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인식할 수 없는 곳 즉 죽음과 부활사이, 지옥 깊숙한 곳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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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책이 읽고 싶어서 집었는데, 하이퍼 리얼리즘 소설이다.

그런데 이 책은 모두가 봐야 한다. 왜냐하면 너무 웃기기 때문에 ㅋ

 

'임신 중단 전면 합법화!'

'내가 바로 생명이다!'

저 여자들이 혹시 말로만 듣던 '메갈'인가?

(...)

그녀였다!

사 년 전에 공항에서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했던 그녀.

내 연애 역사상 최대치의 치명적인 상처와 잊을 수 없는 아픔을 안겨줬던 그녀.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여자. 사실상의 첫사랑.

그녀가 '메갈'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나는 페미니스트 여친의 행보가 너무 당연하고 이해가 됐었는데,
이 책은 한국남성시점으로 쓰여있다. 그래서 페미니즘에 관심없는 여자, 그리고 일반 남성들은 주인공의 시점에 많이 몰입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작가가 의도한 독자들은 페미니스트 여성들이었을테지만.

 

아무튼 간에 참 재미있어서 지인들에게 열심히 홍보하고 있다.

깨알같이 웃기고 구체적이고, 공기와 같은 생활 속 여성혐오가 잘 묘사되어 있다. 

 

posted by sergeant

대화- 2019. 7

독서/종교 2019. 6. 25. 08:42

 

당신의 진리는 안전한가요?

 

어린 시절에는 진리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었던 기억이 난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무언가 힘이 있는 느낌. 삶을 헌신할 분명한 목적이 있는 감각, 그리고 자부심.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내가 익숙한 기독교적 진리라는 것이 폭력을 휘두르는 정당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스칼은 이 현실을 직시하였습니다. 물음을 던질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지만, 자신의 현실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비참한 존재입니다. 

 

진리는 증명되는 게 아니라, 진리임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볼 때 오히려 세상이 정확하고 잘 보이기 때문에 진리인 줄 알게 됩니다.

 

돌아보면, 그 불쾌함 때문에 진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나도 많이 회피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단어가 너무 거창해서, 폭력의 탄알로 사용되는 용례들이 진절머리 나서, 결국 진리라는 것을 깔끔하게 정의해 내기가 어려울 뿐더러 그 결론의 의미가 유용한지 모르겠다는 등의 다양한 이유로.

그러나 책을 읽으며 다시 나에게 질문하고, 직면하는 지난한 시간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걸까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피곤하고 보기 싫은 마음이 크다. 직면이 성격상 가장 큰 장점이라던 나의 베짱은 어딜간건지,, 피할 수 없는 현실의 고통들의 비참함 때문에 싫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만. 

posted by sergeant

책.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

 

기독교인들의 진화에 대한 경기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친해진 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별 생각 없이 "요즘 아이들은 팔다리도 길고, 진짜 잘 진화하네요."라고 말했다가 지인이 화들짝 놀라며 "아 작은 범위 안에서는 그것도 진화라고 볼 수 있겠지."라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딱히 진화에 대해 논쟁하고자 했던 말이 아닌데, 작은 단어 하나하나에서 조차 세계관이 반영되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이 책을 그 지인께 선물한다면, 너무 도전적인걸까? 고민이 된다.

 

p.38
나는 손을 들고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렇다면 공룡 뼈들은 뭐죠?" 지도 선생님과 목사님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눈빛을 교환하셨다. 그러고는 목사님이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씀하셨다. "그 뼈들은 사탄이 묻어 놓은 거란다."

 

p.41
나는 나의 성경이 사실 나의 성경 해석임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잘못된 것은 성경 자체가 아니라, 나의 성경 읽기 방식은 아닐까. 성경을 역사적, 신학적 맥락에서 읽는 법을 배워서 품게 된 질문들이 아니라 진화에 대한 걱정 때문에 갖게 된 질문들이라는 렌즈를 통한 나의 성경 해석법이 문제인 것은 아닐까.

 

 

책은 복음주의 기독 지성들이 어떻게 진화, 즉 과학과 자신의 지성을 통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여정에서 아주 분명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적 성실성.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신앙과 학문을 아주 분리해 버리거나 억지로 봉합하고 싶어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자주 두 부류 모두 같은 의미에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학문이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으로서, 신앙과 자신의 학문에 지적인 성실성을 가지고 임하는 이들을 삶 속에서 자주 만나 볼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25인의 수필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내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p.55
"난 모르겠다." 나는 그 때 느꼈던 안도감을 지금도 기억한다. 몰라도 괜찮은 거였어! 어른이 이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면, 나같은 십대가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나이가 들 수록,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무언가 가르치고 싶은 욕구, 어른으로서 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편견으로 인해 미래 세대의 지적 탐구와 호기심을 비틀고 변형시키지는 않아야지, 라고 다짐하게 된다.

 

p.136
"하나님은 게으름뱅이들 중에서도 지적인 게으름뱅이를 정말 싫어하시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될 요량이라면, 내 경고 한마디만 하겠소. 당신은 당신의 전부-두뇌를 비롯한 모든 것-를 요구하는 여정에 오르는 것이오." 

 

두뇌만, 혹은 신체만 즉 나의 일부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많다. 내 삶을 드린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매일을 붙잡고 씨름할 문제이다.

 

p.139
교수님도 그날 발표가 있어서 일찍 도착하셨던 터라 나의 엉터리 없는 소리의 많은 부분을 들으셨지만, 다행히도 내게 무안을 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나는 그날 내가 진화라는 악에 대항하여 믿음의 승리를 기록했다고 생각했다.

어떤 선생이 될 것인가. 이 또한 앞으로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이겠다.

 

p.242
"이것 말고 교회가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 또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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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

[05/30/2019] 여자는 인질이다

독서/여성주의 2019. 5. 30. 14:52

한국에 와서 가장 즐거운 것 중 하나는, 큰 도서관의 책 들이 모두 다 내 것처럼 느껴진다는 감각이다.
사촌 동생네 대학 도서관도, 서울 공공 도서관도, 심지어는 길거리 교보 문고에서 살 수 있는 책들이 모두 진짜로 내 것처럼 느껴지고 최근에 핫한 책들을 얼른 구매해서 사 볼 수 있다는 기쁨이 참 크다. 언어의 힘이란.

이 책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의 담론을 친절하게 담아낸 책으로 보인다. 최근 활발하게 논의 되는 비혼, 탈혼, 코르셋 등의 한국 래디컬 페미니즘 담론들이 녹아져있다. 1990년대 쓰인 책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 책의 내용 중 '여성들의 역사는 지워져 왔기 때문에, 항상 여성해방 운동가들은 자신이 처음 해방운동을 시작한다는 고립감을 느낄 수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말이 나온다. 우리에게도 계보가, 역사가, 선배와 동지들이 있다는 사실은 나와 일부 동료들이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과 역사의 큰 물줄기에서 최대한 이 계주를 당겨놓자는 마음가짐을 다잡게 만든다.

------------------------------본문 중

p.28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수천 년의 시간 동안 남자들이 조직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여자들을 때리고 강간하고 살해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자들 대다수가 왜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가 하는 언뜻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남자들의 폭력과 이성애는 서로의 존재를 상호 보완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들의 폭력으로부터 한 순간도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여자들은 자신의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 남자 계급의 시각에 동화되고 자신을 보호해 줄 남자를 찾아 그에게 의지하고자 하게 된다. 여자에게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신사적인 남자라 할지라도, 그는 분명 다른 남자가 여자에게 행하는 성폭력으로부터 이득을 본다. 여자들이 남자의 보호를 받기 위해 '자발적으로' 종속적인 이성애 관계 안으로 들어가 남자에게 감정적, 성적, 가사적 무보수 노동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한편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폭력을 저지르고 한편에서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면, 가부장제는 기름칠 잘 한 기계처럼 남자 계급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게 되어 있다. 여자 계급이 피억압 계급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지 않고 지배 계급의 시각에 동화되게 되므로 집단적 저항의 가능성이 매우 효과적으로 차단되는 셈이다.
가부장제는 여자들이 자신이 피지배 계급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도록, 이것을 깨닫더라도 집단적인 저항을 하지 못하도록 사회제도와 문화를 구성해 왔다. 19세기에 여자들의 집단적인 저항이 시작되기 전에는 여자들이 공적 영역에서 활동할 수 있는 기회를 아예 차단하여 아버지나 남편이 지배하는 가정을 벗어날 수 ㅇ벗도록 하였고, 여자들의 목숨을 건 투쟁으로 인해 여자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 및 사회에 진출하고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하자 사적인 영역에서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종속적인 수행을 하도록 하기 위한 프로파간다 공격이 더욱 거세졌다. 여자들이 남자 계급의 시각에 따라 자신의 몸을 통제하고 꾸며서 섹시해 보여야 한다는 사회적 강요가 강화된 것이다. 

p. 36
이제 여정을 떠날 시간이다. 여정의 목적지부터 설명하겠다. 우리는 현재 시점에서 여자 전반의 심리를 이해하려면 남자가 여자에게 가하는 폭력과 그 폭력의 효과를 논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남자의 폭력은 여자의 마음속에 상존하는 공포를 심는다. 이 공포는 공기처럼 존재하기에 좀처럼 인식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어떤' 여자라도 '어떤' 남자든지 자신을 강간할 수 있다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뭘 잘못해서 '어떤' 남자든지 남자를 화나게 할까 봐 무서워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우리는 여자 전반의 현재 심리는 감금 상황의 심리라고, 즉 여자는 남자가 여여자에게 가하는 폭력으로 인해 공포 상황에 처해있다고 주장하려 한다. (실제로 여자가 처한 상황은 노예처럼 예속된 상황이기도 하다.) 우리는 또 안전하고 자유로운 상황에서 여자의 심리가 어떠할지 인류는 아는 바가 없다고도 본다. 우리는 감금 상황- 또는 예속 상황-인 여자의 심리는 유전적, 생물학적인 의미로 전혀 '자연'스럽거나 고유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이는 감금된 야생동물의 심리를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교육을 받고, 남학생들보다 -그것이 운동이든, 수학이든, 리더십이든간에- 여학생이 더 뛰어난 퍼포먼스를 낼 수 있었던 청소년기, 적어도 대학시절까지를 생각해 보았을 때 여성이 한번도 남성과 동등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는 역사에 대한 환기는 너무나도 새롭다. 나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시민이라고 배우고, 믿고, 생각하고 길러졌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눈 뜨게 된 것은 내게 아주 큰 자산이다.

p.37
 우리는 역설적이지만 여자가 남자에게 느끼는 유대감은 물론 여자의 여성성과 이성애도 남자가 여자에게 가하는 폭력에 대한 반응이라고 주장한다. 인질범이 원하는 바를 얻으려면 적어도 인질 몇 명은 죽거나 다치게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남자도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즉 여자의 성적, 감정적, 가정적, 생식적 서비스를 계속 누리기 위해 여자에게 공포를 심는다. 인질이 인질범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인질범을 살살 달래려고 노력하듯, 여자도 남자를 분 좋게 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이 노력에서 여자의 여성성이 생겨난다. 여성성은 지배 계급, 즉 남자가 기분 좋아하는 행동 조합을 말한다. 여자는 여성성을 통해 자신은 종속적 위치를 받아들인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따라서 여성적인 행동은 생존 전략이다. 
 인질범과 유대감을 형성하는 인질처럼 여자는 살아남기 위해서 남자에게 유대감을 느낀다. 여자가 남자와 연결되려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도, 여자의 남자 사랑도 전부 생존 때문이다. 우리는 남자가 다시는- 여자의 기억 속에서조차- 여자를 공포로 밀어 넣지 않는 날이 오기 전까지는, 여자의 남자 사랑과 이성애가 스톡홀름 증후군적 생존 법칙에 불과한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자의 현재 심리를 이런 식으로 설명하는 이론을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Societal Stockholm Syndrome 이론이라 부르려 한다.
 이 이론을 읽는 것만으로도 감정적으로 힘겨울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론은 서로 분리된 듯 보이는 여러 현상 간의 관계를 폭로함으로써 세상을 더 잘 이해하는 틀이 된다.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 이론은 왜 평등권 수정안 운동에 반대하는 여자가 그렇게 많은지, 왜 여자 대부분이 여자의 시각을 옹호하고 여자의 권리를 확대하려는 이론인 페미니즘을 거부하는지, 타인과 연결되고자 하는 욕구는 다른 여자들에게서 충족하는게 더 쉬운데도 여자는 왜 남자와 연결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는지, 왜 많은 여자가 '사랑 중독'에 걸리는지, 남자가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왜 여자는 남자를 사랑하는지 같이 우리가 궁금해했던 문제를 설명해 준다.

p.41
지배나 복종이 아닌 상호성에 기반을 둔 관계만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그런 세상을 상상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인질이나 노예에게 상상은 전복적이고 혁명적인 행위다.

p.54 - 스톡홀름 증후군 
이 후 인터뷰에서 비르기타(인질)은 '올손(인질범)은 내게 경찰이 가기만 하면 다 괜찮아질 거라고 했어요. 저는 당시 올손에 동의했어요. 제가 아이들을 볼 수 없게 막고 있는 건 경찰이라고 생각했죠'라고 설명했다.

p.73
경찰서 인질극의 '비서'사례에서 보듯 인지 왜곡은 스톡홀름 증후군을 떠받치는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바데르스는 인지 왜곡이 흔들리고 깨지자 유대감도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를 볼 때 특정 사건을 이용하면 인질이 인질범에게 갖는 긍정적 유대감을 파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사건이 적절한지, 그 이유는 엇인지에 관해서는 추가적인 관찰과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p.82
소스키스와 옥버그의 책은 스톡홀름 증후군이 인질이 구속되고 무력한 상태에서만 발현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여기서 착안해 인질의 무의식이 스톡홀름 증후군을을 발달시키는 데에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목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 희망의 원천이 인질범이기 때문에 인질은 인질범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p.93
주관적 생존 위협
사람들은 대부분 신체적 폭력을 정신적 폭력보다 더 심각한 범죄라고 생각하지만, 파트너 구타에 시달린리는 여성 피해자나 전쟁 포로를 다룬 연구를 보면 실제 신체 폭력보다 폭력을 가하겠다는 협박이 심리적으로 더 큰 가해다. 많은 피피해자가 불구로 만들거나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처럼 감정적인 학대에 노출되었을 때 신체적 생존이 위협당한다고 느낀다. 이런 이유로 정신적 폭력은 신체적 폭력만큼이나, 혹은 신체적 폭력보다도 더 스톡홀름 증후군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을 수 있다. 논리적으로도 이해가 간다.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인간은 방문을 두드리고, 전화를 걸고, 집 앞 도로에 나타나고, 모퉁이에서 불쑥 고갤개를 내밀기도 하할 것이다. 실제로 총에 맞기 전까지 모든 순간이 공포로 가득 찬 셈이다. 반면 일단 총에 맞고 나면 언제 어떻게 총알이 발사되었는지, 내가 얼마나 다쳤는지, 총상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알게 되었기에 긴장을 풀 수 있다. 

p.95
주관적 친절
생존에 위협을 받는 사람이 받아들이는 친절은 생존에 위협을 받지 않는 사람과는 다르다. 예를 들어 신변이 안전한 상황에서는 무심코 지나칠 사소한 친절도 신변이 위협받거나 심신이 약해졌을 때는 크게 느껴진다. 앤절라 브라운의 책에 따르면 파트너의 구타에 시달리는 여자 중에서 파트너가 폭력을 중지하는 것을 친절하다고 받아들이는 경욷우도 있었다. 

p.99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은 피해자는 보살핌과 보호가 필요하며, 피해자가 립된 이상 보살핌과 보호를 줄 수 있는 사람은 가해자뿐이다. 피해자에게는 보살핌을 받으려는 갈망과 생존하려는 의지가 있고, 또 계속되는 공포에서 달리 탈출할 방법이 없어 보이기에, 결국 피해자는 적극적으로 가해자에게서 친절과 공감, 애정 표현을 구하게 된다.

p.100
피해자는 무의식적으로 가해자처럼 세상을 보려고 노력한다. 가해자의 시각을 가져야만 어떻게 가해자를 만족시키고 가해자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가지게 할 수 있을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p.103
인질극이 끝나고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도 피해자가 갛가해자에게 의리를 지키는 건 가해자가 자신을 '잡으러' 다시 돌아올 것이고, 이번에는 가해자가 자신을 가만 놔두지 않을 거라고(살려주지 않을 거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p.106
인지 왜곡 대부분은 피해자의 공포를 줄이는 효과가 있다. 인지 왜곡을 유지하려면 상당한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므로, 공포를 낮추기 위해 여러 인지 왜곡을 동원하는 상황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이는 공포 감소가 피해자의 생존에 중요할 뿐 아니라 학대가 벌어지는 순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도 중요하다는 뜻이다. 공포를 줄이는 기능이 없는 인지 왜곡도 생존 전략인 것은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해자의 사랑을 쟁취행해야 한다는는 인질의 믿음은 실제로 생존에 도움을 준다. 

p.109
정리해보자면 자기 탓하기라는 인지 왜곡은 인질이 거의 아무런 통제력이 없는 상황에서 통제력을 느끼려고 노력할 때 발생한다. 나는 피해자가 실제로 통제력이 없으면 없을수록, 통제력 없음의 결과가 참혹하면 참혹할수록(즉 폭력이 심각하면 심각할수록) 피해자가 자기 탓을 할 가능성이 커진다고 주장하고 싶다. 자기 탓하기는 피해자가 피해자라는 기분을 느끼지 않게 해주는 아주 유용한 인지 왜곡이다. (...) 트라우마 반응으로서 자기 탓하기에 관해 더 알아보고 싶다면 재노프-불먼의 연구, D.T. 밀러와 포터의 연구, 손턴 등의 연구, 워트먼의 연구를 참고하길 바란다. (Janoff-Bulman 1979, D.T. Miller and Porter 1983, Thornton et al, 1988, Wortman 1976).

p.114
사람들은 그저 운이 나빠 피해자가 된 사람들을 보며 뭔가 잘못을 해서 저렇게 됐다며 사고를 피해자 탓으로 돌리거나, 보인과 피해자가 어떻게 다른지 강조하면서 피해자와 거리를 두려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피해자를 탓하는 경향을 방어적 귀인이라고도 한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편향적으로 타인의 행동에서 원인을 찾는다는 말이다. 연구에 따르면 사람들이 방어적 귀인을 더 많이 하게 되는 조건이 있었다. 피햊해자가 (혹은 타인이) 겪어 내야 하는 결과가 참혹할수록, 피해자가 사회적으로 존경할 만한 위치에 있을수록(파렴치하고 기만적인 사람이 아니라 성공적이며 이기적인 사람으로 여겨질수록), 그리고 피해자를 지켜보는 사람이 자신이 잠재적 피해자이며 피해자와 비슷하다고 느낄수록 사람들은 피해자 탓에 몰두한다. 

p.118
피해자에게 친절을 보이는 특정 인물이 가해자와 유사하면 유사할수록, 피해자는 그 인물이 가해자인 것처럼 (그래서 학대를 멈춰줄 수도 있을 것처럼) 반응하며 유대감을 느낄 것이고 유대감도 더 강할 가능성이 크다. 그레이엄의 이론과 자극 일반화 법칙에 따르면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피해자를 폭력으로 위협했던 가해자와 유사하면 유사할수록, 그 개인이나 집단의 친절한 행위가 트라우마를 겪는 피해자에게서 스톡홀름 증후군 일반화를 끌어내게 된다.
(...) 남자가 여자의 목숨을 위협하고, (성별 외에는 모든 측면에서 유사한) 여자와 남자가 즉시, 동시에 친절을 보였다면 피해자는 친절을 보인 여자보다는 친절을 보인 남자에게 더 강한 유대감을 느낄 것이다. 친절을 보인 남자가 (남성) 가해자와 (성별 관점에서) 신체적으로 더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 예시는 피해자가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 성별을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는다고 가정하고 있으며, 친절을 보인 남자와 여자가 다른 측면에서는 가해자와 유사성을 띠는 정도가 비슷하다고 가정한다.)

p.129
스톡홀름 증후군 일반화를 겪는 사람의 생존 전략은 정신 의학계에서 경계선 성격 특성(BPC)으로 일컫는 것과 유사하다. 이는 건강하지 못한 개인 간 관계에 놓인 피해자가 생존하기 위해 보이는 반응을 병리화해 버리는 정신 의학계의 경향을 보여준다.

p.133
우리가 더는 숨지 않고, 우리를 마비시키는 방어 태세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여자가 겪는 성폭력 및 억압의 본모습과 똑바로 마주해야 한다. 이를 이해해야만, 직면해야만 우리가 이 억압에서 벗어날 길을 그릴 수 있다.

p.135
스톡홀름 증후군의 4대 선행 조건 중 3개 (생존 위협, 탈출 불가능성, 친절)는 피해자를 둘러싼 객관적 조건이 아니라 피해자의 주관적인 인식이 결정한다. 피해자가 객관적 조건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영향을 받지도 않을 것이며 사고와 행동도 변하지 않을 테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가 자기 생존을 위협한다고 인식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기는 쉽지 않다. 스톡홀름 증후군을 보이는 피해자들은 본인이 처한 상황의 위험성과 본인의 학대 사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눈에는 학대로만 비치는 사건을 털언어놓으면서도 말이다.

p.136 특정 문화권의 여자가 남자와의 관계에서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을 겪을 가능성을 평가하는 기준

p.141
아빠가 엄마를 구타하는 광경을 보는 아이가 신체적 위협을 느끼듯이, 남자가 가하는 폭력을 보는 여자 또한 신체적인 위협을 느낀다. 사람들은 타인끼리 주고받는 폭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신체적 폭력을 두려하게 며, 이는 감정적 폭력에 해당한다. 남성 폭력에 대한 우리(여자)의 두려움은 충분히 근거가 있다. 유대인부터 흑인 노예까지, 위에서 언급한 살해당한 집단의 절반가량은 여자였지만 그들을 죽인 건 거의 남자였다. (...) 블라인더는 배우자 살인을 다룬 책에서 "미국에서 살해 현장이 될 가능성이 가장 큰 곳은 고속도로, 그 다음이 침실"이라고까지 말한다(p.144).

p.149
강간범 절대 다수는 남자이며, 대부분의 강간 피해자는 여자다. 러셀의 1984년 저서에는 무작위적으로 선정된 930명의 18세 이상 여성성을 대상으로 한 강간 경험 빈도 조사가 실려있다. 이에 따르면 표본 집단에 속한 여성 중 44%는 강간 혹은 강간 미수 피해 경험이 있었다. (이 중 8%만 경찰에 신고했다고 답했다.) 강간 경험이 있는 여자 중 50%는 강간 경험이 1회 이상이었다. 

p.151
허먼과 허시먼의 연구 결과 친족 성폭력에 종지부를 찍는 건 아버지가 아니라 딸이었다. 주로 딸이 도망치거나, 일찍 결혼하거나, 어린 나이에 임신하면서 성폭력이 끝났다. 그러나 한번 친족 성폭력이 벌어진 이상 피해자는 다시는 피해가 발생하지 않더라도 언제든 똑같은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공포를 안고 살아가며, 학대에서 안전하다는 기분을 결코 느끼지 못한다.

p.152
모든 아동은 생존을 위해 모부에게 완전히 기댈 수 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모부의 인질이라고 볼 수 있다. 모부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을 때, 모부가 실제 신체적 폭력을 쓰거나 폭력을 쓰겠다고 위협할 때 아동은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직접적 친족 성폭력이 벌어지는 가정의 약 50%에서는 아버지가 신체적 폭력도 쓴다. 따라서 아동은 사실상 아버지의 직접적인 성적 학대에 순순히 응할 수 밖에 없다. 

p.154
성추행은 여자와의 교류, 소통을 성애화해 우리가 아무리 날고 기어봐도 남자의 성적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대상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기능이 있다. 

p.160
많은, 어쩌면 대다수의 여자가 경험하는 빈곤 및 노숙의 위협은 그 자체로 폭력이며, 여자들은 실제 빈곤의 나락 속에 살면서 폭력에 노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보다도 덜 알려진 폭력이 바로 고용 차별로 인한 폭력이다. 여자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얻지 못한 여자는 심리적으로 어떤 타격을 입는가? 비슷한 스펙을 갖고 비슷한 성과를 내도 남자보다 받는 돈이 적을 때는 어떠한가? 남자의 소득 없이는 본인도 아이도 제대로 된 생활이 불가할 때는? 사회가 본인보다 남자를 귀하게 여기고 높이 평가한다는 것을 일상적으로 상기해야 할 때는? 이런 구조적이고 만연한 차별 역시 여자에게 가해지는 폭력임이 분명하다. 

p.165
아무리 일부 여자들이 "전 남자한테 위협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 폭력도 한번도 경험한 적 없어요."라고 주장한들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앤드리아 드워킨도 인터뷰에서 명쾌하게 지적한다. "이 나라 미국에서 여자아이 3명 중 1명이 18살이 되기 전 친족 성폭력을 겪지만, 당신은 아니었겠죠. 3분에 한번 꼴로 강간이 발생하지만, 당신은 겪지 않았겠죠. 18초에 한 번 꼴로 여자가 구타당하지만, 당신은 그런 적이 없겠죠." 이 세상이 여아와 여자를 공포에 떨게 하고, 우리의 신체적 심리적 생존을 위협한다는 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어야 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일상적으로 폭력을 가하지만, 본인이 그런 폭력을 겪어야 한다고 하면 공포에 질리는 듯 보인다. 빌 클린턴 대통령이 군내 동성애자 차별을 없애기 위한 노력을 폈을 때 언론인인 앨렌 굿맨에게 쏟아진 독자 편지가 이를 잘 보여준다. 굿맨이 받은 편지 중 약 90%가 남자가 보낸 편지였다. 남자들의 편지에서는 앞으로는 남자 동성애자와 샤워를 같이 하고 생활관에서 함께 잠을 자야한다는 사실에 대한 공포가 묻어났다. (몰랐을 뿐이지 동성애자 군인은 항상 함께였는데도 말이다.) 남자들은 다른 남자에게 자기가 여자를 보는 눈으로 보이는 걸 참을 수 없어 하는게 분명했다. 

p.167
강간, 구타, 친족 성폭력의 마수를 피간 여자는 존재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덜 노골적인 형태의 폭력 때문에 반복적으로 심리적 타격을 입은 적이 없는 여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형태의 폭력이 사소하다고 한다면 우리가 숨 쉬는 공기도 사소하고, 우리가 먹는 음식도 사소할 따름이다. 여자에게 매일 이렇게 '사소한' 방식으로 독약을 챙겨 먹인다면, 우리는 심리적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심리 체계 전반에 손상을 입지 않을 수 없다. 
(...) 남성 폭력과 너무도 오래 함께하다 보니 이제는 그 존재를 볼 수 없게 된 여자들도 있다. 우리는 남성 폭력이 없는 삶을, 안전한 세상에서의 삶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p.173
우리는 타인에게 자주, 여러 방식으로 우리의 성별을 드러낼 것을 강요받는다. 여남 상호작용이 서로의 성별을 중심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한가지 예로 우리는 남자와 분되는 옷을 입어 여남의 성적 차이를 강조해야 한다. 영어의 경우 사람의 성별을 모호하게 둘 수 없게 한다. 동물까지도 성별을 알아야만 자연스럽게 칭할 수 있다. 타인을 만나면 제일 먼저 알려주는 우리 이름에섣서도 성별이 드러난다.  이에 더해 우리의 접촉에는 사회적 규범이 강력하게 작용해서, 본인이나 타인을 탈 성애화 하려고 하는 사람은 비웃음을 사거나 누군각가가 바로 잡아주려고 하거나 무리에서 밀려날 가능성이 크다. 사람들이 아이의 성별을 모를 때 아이와 접촉하는 걸 불편해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p.176
강간범의 1%만이 체포되며, 체포된 강간범의 1%만이 유죄 판결을 받는다. (Russell 1984)

p.180
우리의 역사는 남성형이다. 여자의 삶은 공식적 기록에서 지워지거나, 남자의 시각에서 재편집되었다. 이 문에 남성 지배와 맞서 싸우는 여자들은 매 세대 본인이 첫번째 세대라고 믿게 된다. 사회에서 여자에게 '어울리는' 역할이 있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신이 뭔가 잘못된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만약 여자의 저항이 인류 역사에 걸쳐 계속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의 노력이 여성 투쟁의 발판이 될 것을 깨닫게 된다면 여자들이 얼마나 강한 목적의식과 뿌듯함, 자부심, 방향성을 품게 될지 상상해 보라.

p.181
(전장에서 이어서) 여자는 남편, 아버지,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챙겨줘야 한다는 압박을 받으며 딸이 아닌 아들, 손녀가 아닌 손자를 원하고 아들과 손자를 더 잘 돌봐줘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다.
 이런 의무감 때문에 여는 평생에 걸쳐 남자로 둘러싸여 살아가게 된다. 여자가 본인을 돌보려고 노력력하면 이기적이라고 여겨지거나, 남편 호혹은 남자 친인척을 배신하는 일로 비친다. 남자는 이런 의무감이 없다. 자신을 돌보는 남자는 이기적이라는 얘기를 듣는 대신 자기 앞가림을 할 줄 아는 사람, 그런 대우를 받아 마땅한 사사람, '1등 신랑감'이라는 말을 듣는다.
 여자는 작고 마른 사람이 매력적이라고 정의된다. 즉 신체적으로 나약한 사람이 매력적으로 여겨진다. 옷차림도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 옷차림(하이힐 착용 등)을 할 때 더 매력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사회적 분위는 여자보다는 남자가 스포츠 등을 통해 몸을 강인하게 하할 것을 장려한다. 이런 분위기는 다양한 수단을 통해 강화된다. 남자 스포츠는 투자와 지원금을 훨씬 많이 받으며, 대중의 관심 속에 치러진다. (...) 남자가 근육을 단련할 때와 여자가 근육을 단련할 때도 반응이 서로 다르다. 남자는 여자에 비해 근육을 발달시켜야 한다는 동기 부여가 훨씬 크다. 

p.188
성역할이 반전된 문장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남자를 둘러싸고 분주히 움직이며 온갖 일을 대신 해주는 여자와 예의를 지키려고 그 자리에 그저 서 있는 남자가 떠오른다. 예의 바른 여자의 행동을 남자가 하는 광경을 그려보면, 예의 바른 여자에게 적용되는 사회적 규범은 주로 남자의 행동을 기다리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여자는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사회적 규범은 잘 눈에 띄지 않는 또 다른 규범과 연관되어 있다. 바로 여자는 남자의 감정을 살펴야 한다는 규범이다. 반면 예의 바른 남자의 행동을 여자가 하는 광경을 그려보면, 사회가 남자에게 예의라는 이름으로 활동성을 부추기고 있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남자에게는 여자와의 모든 상호작용을 '리드'하는 역할이 맡겨진다. (...) 사회적 규범상 여자는 남들에게 예의 바르다고 비치기 위해 수동적으로 될 수 밖에 없다면, 이런 규범이 여자의 심리적 건강에 어떤 해악을 끼칠지 고찰할 필요가 있다. 행동력과 예의가 서로 상충하는 이상 여자에겐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실질적인 선택권도 없고, 심리적으로 건강한 선택도 불가능하다.

p.197
성관계는 상급자와 하급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명령을 내리는 사람과 복종하는 사람, 정복자와 피정복민이 맺는 관계와 일맥상통한다고 여겨졌다. 이는 성행위에서 본질적이고 영예롭고 누가 봐도 정당성을 갖춘 역할이 하나뿐이었다는 뜻이 된다. 바로 주도하는 자, 지배하는 자, 삽입하는 자, 본인의 우월성을 내세우는 자만이 성행위의 승자였다.

p.198
남자들이 함께 모여 여자를 어떻떻게 '따먹고' '박아볼까' 이야기를 하고 '진도'를 운운할 때, 이들은 성관계는 여자랑 하긴 해도 남자끼리의 감정적 유대감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남성 동지들에게 "나랑 자는 여자보다 너희들이 더 중요해"라고 전하는 것이다. (이게 많은 남자가 어떤 여자랑 성관계를 갖는지에는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또한한 여기에는 여자와의 성관계는 착취가 목적이라는 메시지도 담겨있다.

p.201
노예소유 가 친절을 베풀면 수하의 노예들은 노예제의 멍에가 견딜만하겠지만, 노예 제도의 극악무도함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또한 친절과 사랑을 베푸는 남자는 언제나 태도가 돌변해 친절과 사랑을 끊을 수 있다. 따라서 친절과 사랑이 언제든 끊길 수 있다는 위협이 여자를 통제하는 도구로 작용해, 여자가 계속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하게 하고 남자의 친절함이 중단되지 않도록 노력하게 만든다. 남자가 여자에게 보일 수 있는 진정한 친절이 있다면 그건 남성 지배에 맞서는 우리의 투쟁에 참여하고 지지를 보내는 것뿐이다.

우리  사회는 모든 남자가 이번 꼭지에서 다룰 '친절'을 베베풀 것을 강권한다. 물론 모든 여자에게 베풀라는 말은 아니며, 가부장적 체제에서 친절을 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에게만 해당한다. 그러나 그런 사실만으로도 이런 친절을 종합적으로 뜯어볼 필요가 있다. 가부장제 문화를 특징짓는 요소가 여자에게 가해지는 남성 폭력인데, 같은 문화가 남자가 여자에게 친절을 베풀도록 강요한다. 그 속셈을 짚어내야 한다. 여자에게  그런 친절이 필요하게끔 만든 사회적 환경과 가부장제 내에서 그런 친절이 갖는 기능을 살펴보면, 남자 집단이 여자에게 보이게 되어 있는 친절이 가부장제를 강화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p.203
어떤 여자가 남자- 그리고 아이-의 생각과 의견, 태도와 감정, 욕구에만 노출되어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여자의 생각과 의견, 태도와 감정, 욕구에 전혀 접촉할 수 없다면, 이 여자는 이념적으로 고립된 상태라 할 수 있다. 여자가 남성적 시각이 아닌 여자의 시각을 옹호하는 타인에게 접근할 수 없을 때 이념적 고립이 발생한한다. 여자가 모이더라도 남자가 한 명 이상 끼어 있으면 여자는 이념적으로 고립될 가능성이 크다. 여자 대부분이 남자의 눈치를를 보고 신경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자는 혼성 집단을 이끄는 역할을 맡을 때가 많으며,해당 집단의 여성 일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다.

p.207
여남을 일대일로 짝짓는 문화는 여자끼리 남자의 관심을 두고 경쟁하게 만들어 여자들이 힘을 합치기 어렵게 한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인식이 생기기 때문이다. 남자는 사회적 권력에 직접 접근할 수 있으므로, 남자 편에 서려는 여자의 노력은 여자가 서로와 맺는 가장 친밀하고 성애적인 관계까지 영향을미친다. 

p.219
그러나 맥캔, 색하임, 에이브러햄슨의 논문이 지적하듯, "최근 들어 트라우마적 사건 중 일부는 인간의 일상적인 경험 내에 있다는 인식이 늘고 있다." 이 논문은 PTSD 증상을 다섯 가지로 나눠 나열한다. 먼저 감정적 증상에는 두려움, 불안, 우울증, 낮은 자존감, 분노(피해자가 분노 표출시 보복이 있을 수 있다고 두려워하면 나타나지 않을 수 있음), 죄책감, ㅜ치심이 있다. ...

p.222
심리 치료사인 캐럴린 코워치에 따르면 남편이 크로스 드레서나 트랜스섹슈얼인 여자들이 와서 남편은 겁이 없어서 밤에 여자 옷을 입고 나갈 때도 전혀 조심하지 않는다고 호소할 때가 많다고 한다. 즉 남자는 남자로 자라왔기 때문에 여자로 사는 삶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모른다. 그래서 이들은 여자처럼 차려입더라도 겁을 내지도 않고, 밤에 혼자 길거리를 걷지 않는 것처럼 조심스러운 행동을 하지도 않는 것이다.

p.226
성별 차이가 두드러지지 않은 질환은 '조증 삽화'와 '인지 장애'였다. 남자가 주로 겪는 질환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이기적으로 본인만 챙기고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거나 (반사회적 인격 장애), 계속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고 본인의 행동을 책임지지 않고자 하는 (알코올 및 약물의 남용/의존) 사람이 그려진다. 남자에게 특화된 질환은 피지배 집단보다는 지배 집단의 특징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 여자가 주로 겪는 질환의 이미지를 떠올려봄보면 우울하고 공포에 질려있지만 공포의 근원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광장 공포증, 단순 공포증, 공황 장애), 본인에게조차 불행한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거나(신체화 장애), 항상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강박 장애) 사람이 그려진다. 여자에게 특화된 질환은 이렇게 피지배층의 특징을 담고 있다.

p.229
거식증 환자는 (문화적 기준상) "완벽하게" 보이려는 욕망과 관련된 인지 왜곡도 겪었다. 여자가 남자보다 거식증과 식욕 부진을 더 많이 겪는다는는 건 여자가 실제로 자기 몸에 양가감정을 느끼고, 몸을 돌보는데 어려움을 겪고, 몸에 대한한 통제권을 상실한 것처럼 느끼는 경향이 남자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p.242
이성애적 사랑은 강압적인 환경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여자에게 퇴행적인 성격을 지닌다. 여자는 동등한 관계에서 남자를 사랑할 자유가 없기에 아동이 모부와 관계를 맺듯 남성 파트너와 관계를 맺는다. 그러니 사회가 여자를 애 취급하는 것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여자가 남성 파트너와 맺는 관계는 '모부화'된 아동이 모부와 맺는관계와 유사 할 때도 있다. 모부화된 아동이란 가정 내에서 모부의 역할까지 맡는 '애어른'을 말한다. 여남 관계에서 여자는 모부의 역할을 맡지만 실제 통제권은 남자가 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단행동으로 어질 수 없다면 단기적으로는 이성애적 사랑이 다른 어떤 대안보다 여자에게 안전한 생존 전략일 수 있다. 여기서 집단 행동이란 (최근 페미니즘 운동을 해온 것처럼) 여자들이함께 성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는 것을 말한다.

p.247
여자들은 본인과 친밀한 사이인 남자의 위험성을 부정하는 경향이 있다. 가장 여자에게 신체적 폭력을 가할 가능성이 큰 집단인데도 말이다. 실제로 여자들은 남성 파트너를 '사랑이 넘치는' 사람, '자상한' 사람으로 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낯선 남자에게, 우리가 느끼는 분노는 우리 자신, 다른 여자, 어린아이처럼 안전한 과녁에 전치하는 경향이 있다.

p.257
여자가 보복을 당할까 두려워 남자에 대한 공격성을 억제한다면, 여자의 분노는 어디로 향하게 될까? 혹실드에 따르면 여자는 분노 반응으로 울거나 마음의 상처를 받는 것을 꼽았다. 이는 남자가 분노로 인해 흔히 표출하는 공격성과는 분명 거리가 있다. 여자는 화가 났을 때 타인을 다치게 하기 보다는 본인을 다치게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p.264
우리는 남자의 마음을 사기 위해 성격을 바꿀 뿐 아니라 우리의 신체도 바꾼다. 여자가 그나마 인지하고 있는 것도 격적 변화보다는 신체적 변화일 것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신체를 얻기 위해 얼마나 수많은 노력을 하는지 한번 떠올려보라. 우리는 식이를 조절하고, 운동하며, 변비약을 먹어 장을 비운다. 피부를 보기 좋게 태우기 위해 일광욕을 하거나 태닝 부스에 눕고, (항상 성적 흥분 상탱태인 것처럼 보이도록) 화장을 하고, 눈썹을 뽑으며, 머리에 헤어롤을 만 채 잠자리에 든다. 코 수술을 받고, 가슴 확대 기구를 쓰고, 가슴 축소/확대 수술을 받고 흉터 치료 연고를 바르고, 지방 흡입과 주름 제거 수술, 위 절제 수술, 허벅지, 엉덩이 셀룰라이트 제거 수술을 받는다. (참담해서 다 못 씀)... 남자가 위의 행위를를 하는 여자에게 끌리는 이유는, 남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 위해 우리 몸을 바꾸는 것도 불사하겠다는 여자의 의지를 전달하기 때문이 아닐까? 남자는 여자가 스스로 자기 몸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메시지에 끌리는 것은 아닐까? 앞에서 지적했듯, 남성 지배가 성립되고 유지되는 건 남근이 여근보다 우월하고, 여자의 몸은 '거세'되어 열등하다는 시각을 남자가 여자에게 심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미용 행위와 이 사실을 엮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남자에게 매력적인 여자가 되기 위해 신체 변형까지 감수하는 현상은 네 가지 사실을 반영한다. (1) 여자는 남자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위해 노력을 기울인다. (2) 여자는 남자들과의 연결고리를 갖기 해 노력을 기울인다. (3) 여자는 남자들의 애정과 승인이 꼭 필요하다고 느낀다. (4) 여자는 '있는 그대로'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않은 채로는) 남자들의 애정과 승인을 받을수  없다고 느낀다.
 여자에게 생존 욕구가 가장 기본이 되는 욕구임을 고려할 때, 남자를 만족시킨다는 목표와 관련 없는 다른 모든 욕구는 뒷순위로 밀리게 된다. 뒷순위의 욕구가 남자를 만족시키는 능력을 줄이기라도 한다면 여자는 그 욕구를 부정해버린다.

p.274
이 논문에 따르면 "여자는 현재 체중에서 4.5kg을 빼야 본인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몸무게라고 응답했지만, 남자는 1.4kg을 빼면 이상적인 몸무게라고 답했다." 이런 결과는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 이론에도 부합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큰 몸집이 권력과 결부되기 때문에, 지배 집단은 몸집이 커 보이기를 원한다. 피지배 집단은 지배 집단을 위협하지 않고, 배 집단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최대한 몸집이 작아 보이기를 원한다. 지배 집단에게 매력적으로 비쳐야 그들과 유대감을 형성할 가능성이 커진다.

p.276
여자는 우리와 비슷한 수준으로 성공한 남자보다 우리 자신을 낮게 평가한다. 우리의 성공을 실력이 아닌 운 때문으로 돌리는 경향도 남자보다 강하다. 남자는 좀만 하면 성공하겠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미치도록 노력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공해야만'한다고 느끼는 경향은 남자보다도 강하다. 게다가 남자와 비슷한 성과를 거둬도 우리는 우리의 성과를 더 낮게 평가한다.

p.277
여러 연구자가 이미 피지배 집단이 지배 집단의 시각을 받아들이는 경향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런 현상 전반을 일컫는 말이 바로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이다. 여자가 남자에 의해 억압당하는 맥락에서는 이를 '남성 동일시male-identification'라고 부른다. '목소리 상실not having a voice'이라는 용어도 쓰인다.

p.278
피지배 집단의 일원이 본인의 시각을 갖기 시작하는 과정을 '의식 고양raised consciousness'이라고들 한다. 그중에서도 자가 본인의 시각을 갖게 되는것이 '여성 동일시woman-identified'이다. 남자는는 여자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에, 남자의 시각을 받아들인 여자는 대부분 본인을 자와 동일시하지 않는다. (...) 여자가 본인의 시각을 찾고, 다른 여자가 본인의 시각을 찾도록 돕는 과정에서, 여자가 남성 시각을 체화하는 것을 허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참작할 만한 생존 략이라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p.279
 페미니즘은 여자의 권리를 찾고 여자를 해방하기 위해 여자가 주도하는, 여자에 관한 이론이자 운동이다. 여자가 페미니즘을 거부한다는 건 본인의 권리를 거부하는 것이다. 영원히 노예로 살고 싶어하는 노예와 다를 바가 없다. 

p.280
코르만의 논문에 따르면 미국 남동부의 한 대형 대학교의 결혼하지 않은 여자 학부생 중 1/3 전통적 가치관을, 1/3은 페미니즘즘적 가치관을, 1/3은 중도적 가치관을 가졌다. 그러나 페미니즘적 가치관을 가진 여자 학부생 중 35%만이 본인을 '페미니스트'라고 간주했다. 코르만은 여자가 "개인 간 관계, 특히 여남 관계에서 껄끄러워질까봐" "페미니즘 운동을 대놓고 옹호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다고 석했다. 

p.296
여자가 여성적 수단을 이용할 때는 그 어떤 공격성으로도 얻을 수 없는 충성심을 끌어낼 수 있다. 여자는 경험상 남자가 종종 휘두르는 폭력이 무섭고 고압적이긴 해도 자연이 주신 여성적 수단을 활용하면 가장 막강한 남자와도 동등한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 본인이 겪는 굴욕을 영광스러운 정체성으로 삼기로는 여성성만 한 게 없다.

 

p.298
인지왜곡은 스톡홀름 증후군과 상관성을 지닐 뿐 아니라 스톡홀름 증후군을 낳거나 스톡홀름 증후군이 생길 수 있는 판을 깔아준다고까지 할 수 있다.

p.305
9개 연구 중 78%에서 여자가 사회적 바람직성을 걱정하는 정도는 남자보다 높게 나타났다. 역시 남자가 사회적 바람직성성을 훨씬 많이 걱정한다고 나타난 연구는 단 하나도 없었다.

p.306
사람들이 이타성과 자기희생의 중요성을 논할 때는 근본적으로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음을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다...이해관계 충돌을 해결하기 위해 제도적 권력력을 적게 쥔 쪽에게 이타성을 발휘하라는 압박을 가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면에서 이타성과 자기희생은 '여성적 덕목'으로 겨진다. '여성성'은 남성 지배 아래 여자가 복종하는 모습을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광경으로 만드는 개념이다.

p.309
여성성이 피지배 집단으로서 갖는 심리이며 사회적 스톡홀름 증후군의 징후인 이상, ㅘ연 자가 '여성적 자질'을 떠받드는 문화에동조해야만 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런 짓을하는지 알면서도 생존하기 위해 ㅇ여성적으로 행동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여성성을 여자됨의 증거로 예찬하는 건 다른 층위의 문제다.

p.310

여자는 대부분 본인이 생물학적으로 여성성을 타고 났다고생 각하거나 ("여자애가 게 뭐니"라고 타이르던 엄마 말은 억의 저편으로 라진 상태다), 본인은 남자들이 매력적이라고 느끼든 말든 화장을 하고 고데기로 머리를 고 하이힐을 신기로 선택할거라고믿기도 한다. ...

P.314
 "여자라는 계급의 가장 뼈 아픈 특징은 본인의 비참한 처지를 알면서도 난 그래도 우리 가해자를 '사랑'한다고 고집하는 것이다."

P.322
끌림을 좌우하는 건불평등이다.. 불평등이 무너지면 궁합과 끌림도 같이 너진다. 여자가 남자와 결합할할 수 있는 건 자가 여자일 때만이다. 즉 피지배 계급으로서 존재할 때만이다.

 

 

 

 

 

 

 

 

posted by sergeant

[03/20/2019] Feminist Therapy

독서/여성주의 2019. 3. 21. 09:11

A therapist who has always lived in financially comfortable circumstance gives a book on self-care to her working-class client, who has always lived in financially precarious circumstances. The therapist suggests that she try some of the strategies in the book for homework. The therapist, who has read the book, thinks that the examples of self-care, such as getting oneself a massage, going out for a nice dinner, or taking a weekend retreat to a lovely setting, all seem like wonderful ideas, and she has been pushing her client to engage in more self-care. Her client returns the book the following week, never commenting on the fact that each of these suggestions are financially beyond her means, something the therapist has never taken into account because of a failure to explore her social class privilege. She tells her therapist that the book was “interesting.” Soon thereafter, the client leaves therapy by simply not showing up again and not responding to communications from the therapist. Several years later, when she is again struggling, she seeks out therapy and carefully searches for someone who grew up poor. “That other therapist had no idea of the value of a dollar,” she tells her subsequent therapist. Privilege unexamined can lead to failures of empathy and loss of relationship


From [ Feminist Therapy, Brown 2018 ]


주옥같은 구절이 너무 많아서, 책이 온통 형광줄이 그어져있다.

사실 위에 본문은 feminist therapy 자체와 관련이 있다기 보다는, 내가 한창 관심있는 다른 큰 주제인 privilege study가 feminist therapy에 이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책에 소개된다는 사실이 신기해서...ㅎㅎㅎ 역시 파다보면 관심사는 한곳으로 모이는건가 싶기도 하고... 즐거운 시간들이다.



posted by sergeant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 beyond the curve, 2018>

흥미로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속담을 조언으로 여러번 들었다. 그 속담은 완전히 틀린거라고 대답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한심스럽게 느껴 질 때 쯤, 조금은 위안이 되는 메시지들.
안아키. 일베. 타진요. 그리고 창조과학.. 자정작용을 잃은 채 고립된 단체들이 괴물로 돌아와 일으켰던, 그리고 현재도 진행 중인 한국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을 생각나게 한다.

I saw an interesting documentary on Netflix, which is about flat earthers. Many friends of mind advised me that I should leave my religion if I am suffering too much there. I responded that it is not my option, but I know I am exhausted. In those fluctuations of the mind, this documentary gives me some consolation.

------아래: 일부내용 the part of contents is below

평면 지구인들이 해를 끼치는 건 아니잖아요?
시간을 많이 쏟아 생각해야하지 않는다면, 좀 웃기기도 해요. 그런데 문제는 이 현상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는거죠.
So flat earthers, pretty innocuous, right?
It's a little bit funny if you do not spend too much time thinking about it.
But the problem is that this is not a phenomenon restricted to flat earthers.

점점 많은 수의 사람들이 비평적 사고를 할 줄 모르고 전문 지식을 평가할 줄 모르면 선동하기도 쉬워지죠.
If you have a growing section of the population that does not know how to think critically and does not know how to evaluate expert resources, they are gonna be easy to manipulate.

백신 접종 거부자부터 시작해서 예를 들면 진화론도 거부하죠. 성경과 안 맞기 때문이에요. 이런 일이 계속되면 언젠가 공무원 중에도 날씨 전문가 의견 중 97퍼센트를 안 믿는,사람도 생기겠죠.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게 될 거예요. 그건 모두에게 영향을 주죠.
It runs the gamut from people that are anti-vaxxers. Denial of evolution because it conflicts with the bible, for example. Then all of a sudden you get people that may work in our government that does not believe what 97 percent of all climate experts say. And so they are making uninformed or poorly informed decisions, and that affects all of us.

그들과 대면하지 않으면 변화를 기대해서도 안 되죠.
If you are not willing to engage with them, you can't expect them to change.

어떨 땐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면 창피를 주는 수 밖에 없다고 한 친구가 그러더군요. 전 창피 주는게 해결책이 될 순 없다고 봐요. 그건 수업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으면 선생님이 아니라 아이 잘못이라는 건데 전 동의 안합니다.
My friend said, "Sometimes the way to change somebody's mind is to shame them." And I say. I don't think that it is the last resort, ever. This is the same as saying that if a kid doesn't get a particular subject, it is not your fault as their teacher, it is their fault. I cannot believe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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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

The Displaced - 2019. 3. 6

독서/기타 2019. 3. 7. 11:39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금주는 이번 학기의 peak week였는데, 2nd 통계시험과 발표 두개가 끝났다. 이제 2시간짜리 발표하나와 페이퍼들만 완료하면 된다. 마음이 가볍다. 여름에 데이터 모을 연구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The Displaced, 부제 Refugee writers on refugee lives. 
난민의 삶을 풀어낸 글들의 모음이다. 퓰리쳐 상을 받은 책이라고.

독서모임 가입했더니 무료로 나눠주셨다 :) 역시 풍요로운 나라, 그 중에서도 부유한 곳 대학... 
금주에는 시험시간이랑 겹쳐서 못 갔지만, 다음주부터 참여할건데 꽤 기대가 된다.
읽으며 주옥같은 구절들이 있어 남기고 싶다. (추후 계속 업데이트 예정)




첫구절부터 강렬했다.

I was once a refugee, although no one would mistake me for being a refugee now. Because of this, I insist on being called a refugee, since the temptation to pretend that I am not a refugee is strong. It would be so much easier to call myself an immigrant, to pass myself off as belonging to a category of migratory humanity that is less controversial, less demanding, and less threatening than the refugee. 

I remember all these things because if I did not remember them and write them down then perhaps they would all disappear ...

The other exists in contradiction, or perhaps in paradox, being either invisible or hypervisible, but rarely just visible.

Invisible and hypervisible, refugees are ignored and forgotten by those who are not refugees until they turn into a menace.

A writer is supposed to go where it hurts, and because a writer needs to know what it feels like to be an other. A writer's work is impossible if he or she cannot conjure up the lives of others, and only through such acts of memory, imagination, and empathy can we grow our capacity to feel for others.

We need stories to give voice to a writer's vision, but also, possibly, to speak for the voiceless.

Readers and writers should not deceive themselves that literature changes the world. Literature changes the world of readers and writers, but literature does not change the world until people get out of their chairs, go out in the world, and do something to transform the conditions of which the literature speaks.

윗부분은 좀 반박하고 싶긴함.


The problem here is that the people we call voiceless often times are not actually voiceless. Many of the voiceless are actually talking all the time. They are loud, if you get close enough to hear them, if you are capable of listening, if you are aware of what you cannot hear. The problem is that much of the world does not want to hear the voiceless or cannot hear them.

난민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도, 그 지독한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성들을 생각하게 된다. 난민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엮어 이 책을 만든 저자는 피난길을 시작할 때 가족의 '재산을 지키도록' 남기고 왔다는 누이에 대해 짧게 언급 했다.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 말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 말해도 신뢰를 얻지 못했던 이들. 그렇게 꾸준하고 철저하게 지워져나간 존재들.
이 세상의 가장 마지막 식민지, 여성.

posted by sergeant

희랍어 시간 - 2019.01.31

독서/기타 2019. 2. 1. 06:42



흉터 많은 꽃잎들을 사방에 떨구기 시작한 자목련이 가로등 불빛에 빛난다. 가지들이 휘도록 흐드러진 꽃들의 육감, 으깨면 단 냄새가 날 것 같은 봄밤의 공기를 가로질러 그녀는 걷는다. 자신의 뺨에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이따금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문장에 흐드러지게 담겨있는 봄의 밤. 작가의 글이란 이런거구나.

침묵 속에서 어어, 우우, 하는 분절되지 않은 음성으로만 소통하던 인간이 처음 몇 개의 단어들을 만들어낸 뒤, 언어는 서서히 체계를 갖추어나갑니다. 체계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언어는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들을 갖습니다. 고어를 배우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요. ... 정점에 이른 언어는 바로 그 순간부터, 더디고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좀 더 사용하기 편한 형태로 변화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쇠퇴이고 타락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진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겁니다. ... 말하자면, 플라톤이 구사한 희랍어는 마치 막 떨어지려 하는 단단한 열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대 이후 고대 희랍어는 급격하게 저물어갑니다. 언어와 함께 희랍 국가들 역시 쇠망을 맞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언어 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 싼 모든 것의 석양 앞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언어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의미의 전달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이전에는 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다채롭고 풍성하며 의미있는 나의 세계들을 언어로 완전하게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리 소질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글을 쓰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노력 중이었다. 책을 읽으며 표현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한번쯤은 다시 묻게 된다. 이 마음을 모든 삶을 걸고 꼭 전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꼭 완벽하게 표현해야만 하는 걸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목표인 것을.

무심히 강가를 산책하는 당신을 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나는 라일락 냄새를 갑자기 들이마신 것처럼 멍해지곤 했습니다.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담다면, 어느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나는 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한다는 중간태의 희랍어 문장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게서 영향을 받아 변화할까요.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진실을 파괴할 때, 어리석음에도 균열이 생겨 함께 부섲서질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했을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마말하겠습니까. 목소리. 당신의 목소리. 지난 이십년 가까이 잊은 적 없는 목소리. 내가 아직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다시 내 얼굴에 그 단단한 주먹을 날리겠습니까.


자라면서 그녀는 이 일화를 반복해 들었다. 하마터면 넌 못 태어날 뻔했지. 주문처럼 그 문장이 반복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는 그 문장이 품고 있는 섬뜩한 차가움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녀는 태어나지 못할 뻔 했다. 세계는 그녀에게 당연스럽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실, 건강이 걱정스러운 사람은 오히려 너야.

너는 불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지 않니. 무엇에든 몰두하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서, 결국엔 병을 얻고 마는 사람이지 않니. 계집애 같은 오빠와 사내애 같은 여동생. 친척들은 늘 우릴 그렇게 비교했지. 넌 그런 말을 죽기보다 싫어했지. 나처럼 서랍을 정리하라는 말. 나처럼 책가방을 미리 챙겨두라는 말. 나처럼 글씨를 반듯하게 쓰라는 말. 나처럼 공손하게 어른의 얼굴을 올려다보라는 말.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로 너는 엄마에게 소리지르곤 했지. 그만 좀 해요. 열이 나서  살겠어. 냉장고에라두 뛰어들고 싶을 지경이라구.


이곳의 여름밤을 기억하니.

한낮의 무더위를 보상하는 듯 서늘하게 젖은 공기.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 할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이야 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아무래도 넌 문학을 하는게 좋겠어.' 그렇게 넌 까다로운 친구, 지지독히 까다로운 동갑내기 스승이었지.
그 스승이 나에게 충고했던 것이 아마도 옳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 문학 텍스트를를 읽는 시간이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린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 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간절한, 숨길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sergeant

살인자의 기억법 - 2019.01.30

독서/기타 2019. 1. 31. 11:38



본문

몽테뉴의 수상록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버린다.


카그라스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뇌의 친밀감을 관장하는 부위에 이상이 생길 때 발생하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가까운 사람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더이상 친밀감을 느낄수가 없게 된다.

니체의 차라우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쓰인 모든 글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타인의 피를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책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증오한다.

김경주의 비정성시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내가 살았던 시간은 아무도 맛본 적 없는 밀주였다. 나는 그 시간의 이름으로 쉽게 취했다.

나는 그 뒤로 시인으로 불렸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옶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 그놈들이 다 밤잠을 설치고 있을까? 아닐거다.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포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는 잠이 안 온다. 죄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웃는다. 인생도 모르는 작자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

내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친구여, 차라우스트라가 대답했다. 당신이 말한 것 따위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마도 없고 지옥도 없다.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육신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다. 그러니 더이상 두려워하지 마라.

꽃을 오래 보고 있으면 무서웠다. 사나운 개는 작대기로 쫓지만 꽃은 그럴 수가 없다. 꽃은 맹렬하고 적아라하다. 그 벚꽃길, 자꾸 생각난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그저 꽃인 것을.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세이렌과 칼립소가 원했던 것은 오디세우스가 미래를 잊고 현재에 못박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끝까지 망각과 싸우며 귀환을 도모했다. 왜냐하면 현재에만 머무른다는 것은 짐승의 삶으로 추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에 별들이 찬란하다. 다음 생에는 천문학자나 등대지기로 태어나고 싶다. 돌이켜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상대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너는 너 자신이 “빈말을 일삼는 놈들이 싫어” 하고 그래서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너는 마지막 희생자, 은희 엄마의 소원에 따라 그녀의 딸을 살려줬고 입양했으며 지금은 새로운 연쇄살인범 박주태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 그러나 네가 생각하는, 약속을 지키는 너는 없다.

없고, 없고, 없으니 그것은 평온이며 무아의 경지인가?

이것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공포의 기록이다.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악마적 연쇄살인범조차도 감당할 수 없었던 공포. 우리 가운데 누구도 이겨낼 수 없는, 인생이 던진 악마적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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