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뇌, 영혼, 신 - 2018.03.

독서/종교 2018. 6. 18. 17:41

 

 

수 많은 흥미로운 질문들을 품고있는 이 책은, 답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책이라기 보다는 작은 질문들을 이것저것 던져주는 도움서와도 같은 느낌이다. (사실 좀 답답했다는 뜻..ㅋㅋ)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상담사로서, 이런 질문들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책이 있다는 것. 참 충분하고도 좋은 일이다. 독서모임에서 읽었는데, 그래서 정리하는게 더 많이 늦어졌다. 곳곳에 나중에라도 한번 들춰 볼 만한, 생각해 볼 만한 중요한 지점들이 있고. 가이드가 되어 줄 수 있는 주옥같은 구절들도, 그리고 도저히 수긍할 수 없어서 꼭 후에 연구를 다시 해보고 싶은 부분들도 있다.

 


<책발췌>

 

p. 37
 오늘날은 문제가 더 복잡하다. 영어 성경 번역본만 수십 종이 있고, 같은 구절에 대해 각기 다른 단어를 쓰고 있거든.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어. 그렇게만 해도 불필요한 불안과 염려를 많이 덜 수 있을 거다. '마음'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란다. 과거에는 '마음'(mind)과 '영혼'(soul) 두 단어를 서로 바꿔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단어의 깔끔한 의미"를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수 있지. (...) 그러니 '마음'이라는 말이 나올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렴. 대략적인 지침은 될 거야. 첫째, 여기서 '마음'은 인지적 신경과학자들이 쓰는 것처럼 "정신생물학적 통일체의 심리적 측면"을 줄여서 쓴 과학 용어인가? 둘째, (성경의 많은 문맥에서 그렇듯) 하나의 태도 또는 공유된 태도와 신념의 집합(예를 들어, 빌 2:5; 롬 12:2)을 말하는가? 네 질문에 대한 답은 거의 언제나 '아니다'일 거야. 과학과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그 뜻이 같지 않아.
석사를 시작하기 전에, 학부 수업시간에 만난 지도교수님께 수업이 끝나고 질문을 했다. 교수님은 심리학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나는 조금 두렵다고. 교수님이 답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본인은 이 학문을 게임이라고 생각한다고. 그 때는 그 말이 무엇인지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온전한 의미를 잘 모르겠다. 내가 의미를 더하고 더하는, 그런 의미의 답변이신건지, 아니면 정말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하셨던 것인지. 다시 뵙고 기회가 되면, 한번쯤 더 여쭤보고 싶다.

p.46
이런 연구 사례들이 보여 주는 교훈은 과학의 어떤 모델을 은유로 사용할 때 자신의 신학적 신념 내지 과학과 무관한 다른 신념이 과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 말라는 거야. 과학은 본질상 변하는 학문이거든.

p.50
한 가지는 분명해.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방향은 인간이 심리생물학적 통일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거야. 질병이나 사고로 생물학적 측면이 손상되어 이 통일체가 깨질 수도 있고, 심리학적 측면이 생물학적 측면을 수정할 수도 있어.
이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많은 해방감을 느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우리가 배우는 지식과 신앙을 조화롭게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p.52
인지 과정은 뇌에 새겨져 있지만 택시 운전사들의 경우처럼 뇌를 변화시킬 능력도 갖고 있다는 것을 함께 기억해야 해. 이 정도가 오늘날 대체로 합의된 내용이야.

p.70
 유전적 차이가 나타나는 방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환경적 맥락(이 경우에는 유전형을 아우르는 가족의 종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종교가 없는 가정이라는 좀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는 유전적 결함이 쉽게 표출된 반면, 종교적인 가정에서는 달랐지. 동일한 유전적 결함이 있어도 그렇게 쉽게 표출되진 않았어.

p.73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떤 선택을 내릴 때 경험이 더 큰 기능을 담당하게 되고, 그 선택들은 어느 정도는 우리 안에 유전적인 영향을 받아서 구축된 성향, 능력, 관심사를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요약된 결과를 보면 종교성이 특징적인 패턴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종교적 태도, 행동, 신념 등에 관해 내리는 선택은 개인의 성향 및 능력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유전적인 영향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p.98
 제임스 바(James Barr)는 지금까지 제시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다섯 가지 해석을 유용하게 정리해 놓았어.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가진 불멸의 영혼을 말한다. 둘째,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이성적 추론을 말한다(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주장했고 루터와 많은 종교개혁가들이 받아들인 입장). 셋째, 두 발로 걷기 같은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말한다. 넷째, 바가 '기능성'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인간의 소명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감당하도록 부름받은 일'이지. 다섯째는 하나님 및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부분을 강조한 사람이 칼 바르트야.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를 맺을 능력 뿐 아니라 관계 자체지.

p.106
여러 성실한 성경학자들의 도움으로 이해하게 된 것들을 자신만만하게 여기면서 우리가 신앙의 선조들보다 앞서 있다고 오만해지기는 너무나 쉽지. 지난 일을 돌아보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보니 자칫하면 신앙의 선조들을 혹독하고 부당하게 비판하게 되겠구나. 그분들은 어떤 성경 말씀들에 대해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확신했고 거기엔 나름의 합당한 이유들이 있었지. 현대 과학 이전의 시대였기 때문에 일부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종종 있었고 말이다.
지난 며칠간 사실 너무 힘들었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너무 많은 논쟁을 했다. 그리고 논쟁의 한 쪽, 내가 많이 지지했던 분들이 결과적으로는 나에 대해서 한계가 있다고, 내가 속해있는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쪽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끊임없이 새겨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루어 온 성과들까지도 철저하게 도마 위에 올랐다. 정말 철저하게 다 까발려진 기분이다. 아무래도 이 문제, 정말 핵심적이고 중요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내 문제가 되니까 바로 보기가 힘들구나.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아서 노력했는데. 그나마 빨리 생각을 돌이킬 수 있었던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혹독한 비판들 가운데서, 이런 생각들도 조금은 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쨋거나 유리한 입장에 있구나. 그리고 비판적인 내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비판과 포용, 두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한계를 인식하는 것과 함께 적정하게 가지고 나가고 싶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이 쌓아놓은 탑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 긴 계주에서. 중간 지점에 있는 사람으로서. 더 많이 달려가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이미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한계가 있더라도.

p.126
다른 연구들에 따르면,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묘사하는 환상은 각 사람이 속한 문화에 따라 내용이 다르단다. (...) 뇌의 특정 부위가 작용한 결과 박생하는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은 우리가 속한 전통, 우리가 이미 받아들인 신념에 많이 의존한다는 거야.

p.131
중요한 것은 역사가 진행되면서 같은 본문을 가지고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이지.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야. 종교개혁 시대에는 이런 식의 해석의 변화로 엄청난 결과가 따라왔지.

p.137
탁월한 수학자이자 사상가이며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블레즈 파스칼은 1659년에 이렇게 썼어. "사람에게 그의 위대함을 보여주지 않은 채 짐승을 많이 닮았다는 점만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위험하다. 그의 저속함을 드러내지 않고 그의 위대함만 또렷이 보게 하는 것도 위험하다. 위대함과 저속함을 둘다 모르는 상태로 사람을 내버려 두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진화 심리학은 그런 무지를 줄이는 데 분명히 도움을 줄 수 있어.
종종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 빠진다. 중립은 얼마나 어려운것인지. 내가 과연 중립을 원하기는 하는건지.

p.167
'로이드 모건의 준칙'
"심리학적 척도에서 낮은 수준의 심적 능력의 산물로 설명이 가능한 행동을 더 높은 수준의 심적 능력의 산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가끔은 환원주의에 합당한 자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거지.
수많은 논쟁들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도 들었다 ㅋ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참 상대방을 입체적으로 보는구나. 사실 나도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뭔가 더 있겠지, 그래도 이유가 있겠지. 이런 관점들이 물론 상담을 할 때는 도움이 되지만... 일상 생활에서 많은 경우에 인간은 납작하다. 그 사실을 자꾸 잊으려고 해서 계속해서 반추한다. 너무 과잉이해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인지적 자원을 그렇게 쓰지 말아요. 모르겠다,  마음이 아프다.

p.168
이타주의와 상호 협력이 비인간 영장류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이타적 행동 범위에서 인간과 다른 영장류가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될 것은 없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비인간 영장류의 이타주의는 혈연과 호혜적 상대에게 강하게 쏠려 있다는 것이지. 그들의 이타주의가 낯선 대상을 향해 표현되는 경우는 없어. 이 대목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최우선적인 의무가 떠오르는구나. 차이점은 또 있어. 인간과 달리, 비인간 영장류는 가용 자원을 자기들만 유리하도록 불공평하게 분배하는 데 어떤 거부감도 없단다. 다시 말해, 이기심을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아.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돼.
앞에 있던 얘기랑 너무 반대되는 말 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는 것. 역시 기독교는 나를 갈아 넣어야 해. (농담입니다 농담)

p.172
"돕는 행동의 성별 차이에 대한 메타 분석적 검토 결과,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많이 돕고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도움을 많이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진짜 말도 안 됨 ㅋㅋㅋㅋㅋㅋㅋ
Lindon Eaves, "Genetic and Social Influences on Religion and Values", in from Cells to Souls-and Beyond, ed. Malcolm Jeeves(Grand Rapids: Eerdmans, 2004):102-122.
도움을 주고 받는 것과 도움의 중요성, 그리고 성격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또 다른 연구진은 전 세계 여섯 국가에서 자료를 모았어. 그 연구의 한가지 결론은 이거야. "성별은 이타주의를 측정하는 한 가지 척도가 되는데, 거의 모든 부분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더 이타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좀 어이없다 ㅋ 저 연구 좀 살펴봐야겠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자신이 많이 돕는다"고 얘기하거나,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거나, "기회"가 더 많았던게 아니라? 심리학은 너무 남성중심적인 학문이다. 한계를 느낀다.

p.177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당장 별다른 이들이 생기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드러낸다는 데 주목한 거지. 다른 영장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클라우스는 이렇게 말해. "원칙적으로, 인간이 내는 소리를 다 낼 법한 침팬지가 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는 그 방향으로 진화의 압력이 없었기 때문이고, 침팬지가 할 말이 없는 이유는 얘기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출처: 개인이메일..당황....
이것도 너무 재밌어서 연구 reference 찾아보려고 했는데 개인 메일이었다...당황.......ㅋㅋㅋ 그래도 흥미로운 얘기다. 나같은 말많은 사람은 더 공감가는 얘기랄까.

p.238
정직한 질문은 더 깊은 믿음으로 가는 성경적인 길이야.  (...) 어린 시절 나는 교만한 사람만이 감히 주님께 질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때로는 질문을 하는 것이 겸손한 일임을 배웠다. 질문 안에는 내게 답이 없고 하나님께 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질문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정직하게 질문하고 싶다. 그런 사람이고 싶다.

 

'독서 >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의 공공성-2019.03.01  (0) 2019.01.21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2018. 4  (0) 2018.06.18
하나님의 딸들-2018.02.21  (0) 2018.06.18
여성 리더십 논쟁 - 2018.01.22  (0) 2018.06.18
지렁이의 기도- 2017.11.02  (0) 2018.06.18
posted by sergeant

지렁이의 기도- 2017.11.02

독서/종교 2018. 6. 18. 17:27

 

'지렁이의 기도'는 추천사들부터 아주 화려하다. 추천사만으로도 약간 '간증' 분위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들 한보따리. 주옥같은 통찰들.
저자 목사님은 성령의 은사(ex.방언)이 아니더라도 지성과 학문을 위해 봉사 할 수단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 부분에서는 동의가 많이 되면서도 뒤 이어 나오는 신령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여전히 '참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제'하며 바른 앎과 지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에 국한되지 않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비록 한국교회가 반지성주의로 몸살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성과 이성, 합리적인 것으로만 가두어 두기에 우리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시다.

책은 나의 완악하고, 두려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태도들을 회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나님은 크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지인들에게도 자세하게 꼭꼭 씹어서 추천하고 싶다.

 


 

추천사 중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소원으로 삼아 드리는 간청이요 하나님 통치의 확장을 위해 드리는 몸의 봉헌이다. (김회권)
지렁이는 하나님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기댈 데 없는 존재를 상징한다(시22:6, 시41:14) 기도는 지렁이 같은 존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아뢰는 말이다. (김근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의 은혜를 구한다고 생각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걔는 포유류라도 되지..나는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ㅋㅋ.

p.30
"하나님 왜 이러세요? 됐다니까요, 저는 (그딴 거)필요 없다니까요." .. 내게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잇는 다른 수단이 있다고 나름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도가 아닌, 지성과 학문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컸다.

p.32
"아들이다, 됐냐?! 뭐, 그런 것 갖고 하루종일 화를 내고 그러느냐?"
> That's my man, 우리 주님ㅋㅋ 이분이 바로 내가 아는 나의 주님이시다.

p.73
우리는 기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유비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과의 사랑의 환대와 친교를 맛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신적 비밀을 배울 수 있다.

p.78
그렇지만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을 아빠라는 호칭으로 부르셨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존경심과 함께 두 분 사이에 존재하는 기고 친밀한 관계성이 여과없이 잘 드러난다.

p.93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서 응답받으리라고 확신할 수 잇는 이유는, 그 기도를 드리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즉 기도응답의 비결은 우리의 열심, 노력, 끈질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한 성품에 기초한다.

p.96
기도할 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열심이나 태도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바른 지식을 갖고 있으며, 그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얼마나 신실하게 신뢰하고 있느냐다.

p.124
하지만 방언은사의 진가를 알려면 방언통변을 받아봐야 한다. 방언통변을 받아보면, 방언은사가 얼마나 깊고 오묘한 그리고 유창하고 수려한 기도인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두려워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실 그분은 진정한 자유를 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신데도, 우리는 그 분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었을 때도 그와 같았을까. 처음 방언 통변을 받을 때 내 마음은 그런 마음의 연장이었다. 내가 당시에 고민하고 있던 문제들과 은밀한 죄악들, 교만과 부끄러운 수치들이 방언 통변을 받으면 모두 드러나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방언 통변을 받으며 내가 그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동시에 내 안의 성령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드리는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자유한다. 오묘하고 깊은 기도를 하시며 우리를 항상 중보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음은 정말 귀한 경험이었다.

p.150
 믿음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값싼, 감정적인 긍정이나 승인이 아니다. 기분이 달콤해지면 덩달아 믿음도 생기고, 기분이 우울해지면 믿음도 바닥을 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제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확히 그리고 자세히 알수록 우리의 믿음도 함께 커진다. 또한 참된 믿음은 우리의 의지와 정서를 삼위 일체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온전히 일치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 깊고 친밀한 연합을 경험할 수록 그에 비례하여 우리의 믿음 역시 더욱 깊어진다.

p.153
 성경은 두려움이 가장 큰 죄라고 가르친다.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계명은 "두려워하지 말라"다.

p.167
내가 믿기로는 지성과 영성은 하나이며, 성경도 분명히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p.172
분명한 것은 잘못된 지식이나 편견, 비뚤어진 이념이나 불건전한 가치관을 갖고 있으면 기도가 타락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건전한 지성의 개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p.296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처음 방문하고서 받은 느낌은 한결같이 "한국인들이 더럽고 게으르고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한국인들이 너무 사랑스럽다"고 고백했습니다.
>읽다가 빵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posted by sergeant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2017.11.02

독서/종교 2018. 6. 18. 17:25

 

 

신앙 서적을 좋아하지 않았던 오래 전 시기도 있다. 성경의 가르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려 깊고 풍부한 내용으로 작성된 신앙 서적은, 성경 만큼이나 특별한 은혜를 제공한다. 그래서 나는 성경은 일반식, 신앙 서적은 특식 혹은 별식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어느정도는 지금도 유효한 생각이다. 집에서 해 먹는 밥보다 남이 해주는 '맛있는' 밥을 항상 먹고 싶어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 바르고 좋은 신앙서적을 한 두권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과거 간사 시절, 신학과 성경 지식에 대한 부재 때문에 리더들을 양육하는 것에 나름대로의 부담을 느꼈다. 무식이 용감하다고, 사실 부담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 때 생각에는 '주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이끌어 주시겠지!'라는 자신감이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나를 긍휼히 여기셨던 주님은, 때에 맞는 은혜를 우리 팀에 부어주셨는데 내 머리나 생각으로 해 낼 수 없었던, 말씀에 대한 통찰들은 물론, 다양하고 좋은 신앙 서적들을 내게로 이끌어 주셨다. 우리는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고 나누었었다. 이 책 또한 그러한 책의 목록들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봐도 놀라운 것은, 특히 '빛과 어둠이 영적 전쟁' 같은 종류의 책은 나 스스로는 절대 읽어 보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책이라는 점이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나와 비슷할 것 같은데, 일단 이 책은 표지부터 제목까지 너무.. 너무나도 이단스러운 스멜을 풍긴다 (ㅋㅋ) 나는 '안전함'이 중요한 사람이라, 환상과 예언 등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거부감에 더해 나는 '지성제일주의' 또한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시며 합리적이시고 상식적이신 분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방언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그 조차도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고, 불과 같은 성령 체험 등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히 큰 편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 책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쨋거나 이 책을 처음 읽으며 많이 놀라웠던다. 책은 릭 조이너 목사가 어떻게 환상과 예언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예언적 체험이라는 것은 많고 다양하지만, 주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방법 또한 지성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은 합리적으로 아주 그럴듯 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위대한 선구자들의 이야기들은 어느정도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데, 당시 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깊은 은혜의 체험까지 들어가기를 꺼려한다는 '후안 까를로스' 목사님의 말에 큰 공감을 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깊은 은혜의 바다에서 우리를 부르시지만, 우리는 해안가에서 찰랑찰랑이는 파도에 발목을 담그고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지성과 합리의 영역으로 끌어 내렸지만, 주님은 결단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따라서 이러한 지지적인 말씀들에 힘입어 책을 더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었고 '예언과 꿈, 계시'에 대한 저자의 인정할 수 있을 법한 설명으로의 차분한 시작, 그리고 그 계시의 사용이 어떻게 이루어 져야 하는지에 대한 제언들까지 굉장히 분명하고 훌륭했다.

본문으로 들어가며, 나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책이 끝머리 쯤에는 "여기 있는 사람, 심지어 왕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까지도 만일 그들이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모두 자신의 삶을 달리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p.180) 라는 말이 나온다. 이 책을 읽은 나의 마음 또한 정확히 그것과 같았다. 릭 조이너 목사가 보았던 환상과 계시들은 성경내용의 전체를 아우르고 있으며 지혜와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현재에서 지금 이루어 지고 있는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들에 대한 엄청난 통찰을 준다. 더불어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분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그 분의 위엄은 어떠하신지를 아주 희미하게 엿볼 수 있다.

나는 책을 복사해서 붙여놓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책의 모든 부분들이 주옥같고 중요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발췌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소중한 이들에게 이 책을 몇 권 씩이나 선물했고, 또 다시 책을 사곤 했다. 그리고 어제 다시금 이 책을 읽으며, 기도 해야 겠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책을 읽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망각하고 희미해져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이 떨어지게 되는 것 같다. 사람은 얼마나 약하고 악한 동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복해서 나를 일깨우시고 기억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싶다. 더불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보혈, 그리고 성령님의 따뜻하심을 경험하기를 바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에서 더 많은 이들이 함께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posted by sergeant

창조과학과 세대주의 -2017.09.26

독서/종교 2018. 6. 18. 17:20

 

 

<창조과학과 세대주의>를 읽으며, 예상치 못한 충격들에 마음만 점점 힘들어져 가며 쓰는 글.. 빡침주의

 [전도사들도 안 믿는 창조과학]
사실 창조과학은 내 인생이나 신앙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었다. 그런게 다 뭔 소용이람ㅋ 창조과학 말고도 고민할 문제는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저 문구를 본 이 후 부터는 알 수 없는 불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학을 전공하는 이들이 믿지 않는 내용이, 교회 대중들에게 열광을 받고 있는데.. 도대체 왜 그에 일말의 책임 있는 사람들은 입을 닫고 가만히 있는걸까. "어쩔 수 없다"고 하는걸까. 아니, 오히려 어쩔 수 없다며 침묵하고, 나아가 그를 옹호하는 선택을 하는 걸까. 이게 바로 내 불편함의 시작 포인트였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롬11]
그리고 일년 정도, 가볍게나마 과학과 신학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귀한 기회였다. 우연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니. 어쩌면 내가 강연과 독서모임을 갈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ㅊ신대에 예정되었던 과학과 신학에 대한 강연을, 진화론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강제 취소시키는데 들었던 수많은 노력과 권위주의.. 당시엔 그 무례함과 개념없음을 전해 듣고, 신학교가 제 정신인가.. 싶긴 했다ㅋ 그런데 요즘 예장합동 하는 행태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지금 돌이켜 보면 크게 놀랍진 않다. 
 결국 ㅊ신대생들은 그 명품강의를 듣지 못했는데, 덕분에(?) 신학생이 아닌 나에게 기회가 왔다. 권위주의와 은폐, 무례함과 반지성에 맞서서 꾸준하게 이 분야에 대해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 오신 많은 분들을 비롯하여, 황당한 강의 취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소에서나마 당일에 강연을 해 주셨던 우종학 교수님이 계셨기에 나는 완전히 새로운 강연, 불편함에 대한 답을 접할 수 있었다. 

[신학의 부재인가]
모임을 통해서는 주로, 과학에 대한 내용을 많이 접했지만 사실 내가 생각했을 때 창조과학의 진짜 문제는 "신학의 부재"였다. 그러나 신학생이 아닌 이상..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이에 대한 내 의견을 주변 목사들과 나누면 돌아오는 응답은 "너는 왜 다 아는 내용을 새로운 것처럼 얘기하냐" 혹은 "사람들의 관심사는 너의 관심사와는 좀 다르지"정도가 되겠다. 과연 "다 아는 내용"을 모두가 알고 있을까? 영향이야 조금 있겠지만, 그렇다고 성경을 "관심사"에 따라 가르쳐야 하는건가?

[창조과학의 신학적 둥지]
결국 나는 오늘, "창조과학과 세대주의"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부제가 "창조과학의 신학적 둥지"이다.  책은 고대로부터 19세기까지의 젊은 지구론을 다루며, 현대 세대주의 종말론까지도 다룬다. 세대주의?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 했다. 그렇지만 그를 이해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6000년에서 일만년을 주장한다는 창조과학의 젊은 지구론의 뿌리는 세대주의인데, 첫째 장부터 보면 이건 거의 신천지급 아닌가 싶을정도로.. 당황스럽다.
 젊은 지구론의 뿌리가 단순히 "문자적으로, 천지창조에서 그리스도 탄생까지 성경에 나온 연수를 계산해 보았더니 6000년쯤 되니, 지구의 역사도 그럴 것이다."라는 나이브한 관점을 넘어서서, 여섯개의 시대를 나누고 한 시대 당 천년, 즉 6000년 이후에 7000년대에는 주님께서 쉬셨듯이 우리도 안식, 즉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가적 뉘앙스.. 이것을 "무지함" 또는 "천진함"으로만 보아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뿌리를 가진 흐름을 목회자들이 모른다고..? 그래, 공부 싫어하면 모를수도 있지...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결국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창조과학이 말이 안 된다는걸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입 다물고 있는" 목회전공 및 신학 전공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누지 않을 수 없다. 몰라서 안가르친건가, 알고도 안가르치는건가? 어느쪽인가? 물론 어느쪽이든 비난을 피해갈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목회 전공인들이 이러한 내용을 몰랐다는 것은 좀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소명 받았다며.. 성경 좀 잘 공부해서 제대로 전해줘야 할 것 아닌가..
 그들의 직무유기 덕분에 나는 전공책을 한권 더 읽거나, 성경을 한 구절 더 묵상할 시간에 창조과학을, 세대주의를 공부하고 있다. 그렇다. 사실 예전에도 나는 항상 그 점이 불만이었다. 교회에서는 왜 자꾸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려고 하는가? 내가 내 삶에서 열심히 그 자리를 지키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리더의 자리에서 왜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도록 팔로워들을 촉진시켜야 하는 것인가. 왜 지금 평신도는 말씀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목회를 흉내내야 하고, 목회자들은 제대로 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말씀을 전해주지 않는 건가...?
 아무튼간에 그들의 직무유기 덕분에 오늘의 긴 밤에도 나는 "한낮의 우울"을 다시 펼치기 보다는 "창조과학과 세대주의"책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한다. 어쩌면 나 또한 내 내담자를 대하기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 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나는 비난의 화살을 그들에게 돌린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자기 필요대로 해석하는 사람들. 창조과학을 신봉하고, 교인들을 몰지성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고 천박한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목자랍시고, 자신에게 '님'자를 꼬박꼬박 붙이기를 무언으로 강요하며 나에게 봉사를 요구하는 이들. 필요할 때는 하나님을 운운하다가, 결정적일때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이들. 당신들의 무지와 게으름 덕분에 내가 들여야 하는 수고에 애도를 표한다. 

그러나 어쩌겠나.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신앙에 자기만 책임 질 수 있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목회자나 존경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혐오하고, 강한 힘과 결탁하는 당신들에게 나는 오늘도 화가난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현장에서 그에 맞서고 싶다. 무지하고 게으르고 싶은 나의 욕망에 나도 반기를 들고자 한다. 그러니 제발 목회자들도 좀 그래주기를 바란다. 

이 글에 "좋은 목사님도 있어."라는 반발심 들어도 나를 가르치려 들지는 말길. 나도 진심으로 존경하는 목사님/훌륭한 선교사님들이 주변에 계시니까. 그러나 그 비율은 현저하게 낮은 것이 사실이니까.

 

 

이후 참고할 법한 책의 발췌 내용들
p.202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라는 용어는 침례교도 커티스 리 로스가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집지 '워치맨 이그재미너'의 1920년 7월자 사설에서 그가 "대근본교리들에 여전히 매달리며 근본교리들을 위해 대 혈투를 벌일 뜻이 있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드이라 부를 것을 제안"하면서 유행했다. 근본주의자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복음주의자들인 셈이다.
1920년대에 자유주의와의 투쟁에서 패하면서 1930년대에 근본주의는 분리주의적 성향이 농후해졌다. 데이비드 비일의 근본주의의 역사는 근본주의자가 서술하는 근본주의의 역사서다. 그는 근본주의의 역사에 관해서 1930년 전을 비순응주의적 근본주의, 이후를 분리주의적 근본주의로 나누고 있다. 이 책에서 "전투적," "분리적"이라는 형용사는 근본주의를 묘사하는 미사여구이다. 이 책의 영문제목처럼 "순결함을 추구함에 있어서" "분리와 전투"는 마땅히 치러야 할 댓가이다. 근본주의자가 전투적이지 못한 복음주의를 형용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는 "포용적"이라는 것이다. 이 포용적 복음주의자들은 "순결함을 추구함에 있어서" 전투적이지 못하고 분리적이지 못한 타협주의자들인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의 전투성은 반계몽적, 반지성적, 반문화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근본주의라는 단어는 문화적 고정관념으로서 변질되어 버렸다. 세계저인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에서 근본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사고방식의 8가지 경향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
1. 학문과 과학에 대한 전체적 의심
2. 기계적 성경 영감설 혹은 '구술 영감설'
3. 킹제임스역(에 대한 미신적인 경외심)
4. 모든 성경말씀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
5. 분리주의적인 교회론
6. 문화적인 폐쇄성
7. 복음에 함축된 사회적인 의미들을 거부
8. 전천년설 종말론 주장
이처럼 근본주의는 패키지화된 신앙태도이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