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무기력이다 - 16.07.28

독서/심리 2018. 6. 18. 16:03

 

박사 선생님의 추천으로, 애정이 많이 있는 내담자와 함께 읽은 책이었습니다. 특별히 대학생 그룹의 경미한 우울증 내담자들과 함께 읽으며 자신과 어떤점이 비슷한지, 다른 부분은 어떤 부분인지 점검하면 좋습니다. 내담자들이 많이 공감해 하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고, 상담에 대한 잘못된 편견을 조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후반부에 나오는 상담치료관련 내용이 와닿지는 않습니다만, 무기력에 대한 깊은 경험담과 따뜻한 격려가 참 좋기도 합니다.


한명의 직장인으로서 문득, 한국 직장인들의 90퍼센트가 책에서 말하는 무기력을 경험하지 않나 싶은 슬픈 생각도 듭니다.

우울증과 무기력은 아주 같은 것으로 치부하기엔 증상도 정도도, 치료 방법도 조금씩 차이가 있기 때문에 본인이 중증 우울이라는 생각이 드시는 분들은 꼭 전문 기관에 내방하셔서 상담과 진료, 약 처방을 받아 보시길 권고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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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

피로사회- 2014.04.04

독서/심리 2018. 6. 18. 15:46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858823

 

 

"활동하는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상담학을 공부하다 보면 종종 정신건강의 이유를 개인의 수준에서 찾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개인의 성격과 환경, 어린 시절, 적응 패턴, 반응 방식..

그러나 어쩌면 개인이 자기 자신에게 미치는 영향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의 책임이 사회에 있는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2014년 한창 상담학을 공부하고 실습하며, 이전에는 흥미가 없던 사회학 분야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아마 이런 부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은 모여서 구조와 사회를 이루고, 그 사회는 다시 개인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겠지요.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일에 대한 의무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본문 발췌>

 

알렝 에렝베르 Alain Ehrenberg는 우울증을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이행기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규정한다. “우울증이라는 병은 권위적 강제와 금지를 통해 인간에게 사회 계급과 서열에 따른 역할을 부여하는 규율적 행위 조종의 모델이 만인에게 자기 주도적으로 될 것, 자기 자신이 될 것을 요구하는 새로운 규범으로 대체되는 순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 우울한 자는 컨디션이 완전히 정상이 아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버리고 만다.” 알랭 에랭베르의 논의가 안고 있는 문제점은 우울증을 단지 자아의 경제라는 관점에서만 관찰하는데 있다. ... 그러나 우울증을 초래하는 요인 가운데는 사회의 원자화와 파편화로 인한 인간적 유대의 결핍도 있다. 우울증의 이러한 측면은 에랭베르의 논의에서 빠져 있다. 그는 성과사회에 내재하는 시스템의 폭력을 간과하고 이러한 폭력이 심리적 경색을 야기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오직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명령이 아니라 성과를 향한 압박이 탈진 우울증을 초래한다. 그렇게 본다면 소진증후군은 탈진한 자아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다 타서 꺼져버린 탈진한 영혼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실제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은 과도한 책임과 주도권이 아니라 후기근대적 노동사회의 새로운 계율이 된 성과주의의 명령이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다.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는 우울한 개인의 한탄은 아무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믿는 사회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다. 우울증 환자는 이러한 내면화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p.30 멀티태스킹이라는 시간 및 주의 관리 기법은 문명의 진보를 의미하지 않는다. 멀티태스킹은 후기근대의 노동 및 정보사회를 사는 인간만이 갖추고 있는 능력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퇴화라고 할 수 있다. 멀티태스킹은 수렵자유구역의 동물들 사이에서도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습성이다. 야생에서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기법이 멀티태스킹인 것이다.

 

철학을 포함한 인류의 문화적 업적은 깊은 사색적 주의에 힘입은 것이다. 문화는 깊이 주의할 수 있는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러한 깊은 주의는 과잉주의에 자리를 내주며 사라져가고 있다. 다양한 과업, 정보 원천과 처리 과정 사이에서 빠르게 초점을 이동하는 것이 이러한 산만한 주의의 특징이다. 그것은 심심한 것에 대해 거의 참을성이 없는 까닭에 창조적 과정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는 저 깊은 심심함도 허용하지 못한다. 발터 벤야민은 깊은 심심함을 경험의 알을 품고 있는 꿈의 새라고 부른 바 있다. 잠이 육체적 이완의 정점이라면 깊은 심심함은 정신적 이완의 정점이다. 단순한 분주함은 어떤 새로운 것도 낳지 못한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재생하고 가속화할 따름이다. 벤야민은 꿈의 새가 깃드는 이완과 시간의 둥지가 현대에 와서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한탄한다.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그런 것을 짜지도, 잣지도않는다. 심심함이란 속에 가장 열정적이고 화려한 안감을 댄 따뜻한 잿빛 수건이다.” 그리고 우리는 꿈꿀 때 이 수건으로 몸을 감싼다.” 우리는 수건 안감의 아라베스크 무늬 속에서 안식한다.” 이완의 소멸과 더불어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이 소실되고 귀 기울여 듣는 자의 공동체도 사라진다. 이 공동체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우리의 활동 공동체이다. “귀 기울여 듣는 재능은 깊은 사색적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능력에 바탕을 둔다. 지나치게 활동적인 자아에게 그런 능력은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 문명은 평온의 결핍으로 인해 새로운 야만 상태로 치닫고 있다. 활동하는 자, 그러니까 부산한 자가 이렇게 높이 평가받는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따라서 관조적인 면을 대대적으로 강화하는 것은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인간 성격 교정 작업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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