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2018. 4

독서/종교 2018. 6. 18. 17:44

 

 

랜선친구들이 뉴스앤조이에서 텀블벅 참여 하시길래 나도 따라가서, 따끈따끈하게 받은 신간.
내용들이 참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좋아서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자고 추천하고 내가 발제하게 되었다.
 여성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교회를 버리지 않는,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까?

  이 고민이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참 정신승리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무신론자들의 수많은 역사적 공격에도 부정되지 않는 기독교의 정통처럼, 크리스천 페미니스트들에게도 단단하고 자랑할만한 계보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 준, 참 감사한 책이다.

  저자 교수님께서 세미나를 하시기에 참석해서 사인도 받아둔 책. 읽는 내내 위안과 격려가, 힘이 되었다.

 


<책 발췌>

 

p.46
우머니스트 선언, 흑인 여성들의 경험은 백인 중산층 엘리트 여성들의 것과 다르며, 특히 흑인 남성은 여성을 지켜주기는커녕 자신들이 받은 억압 경험을 자기의 여자들에게 폭력적으로 발산한 존재였다. 우머니스트들은 말한다. “살아라, 살려라
책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요즘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와 감성을 보면서.. 같은 소수자로서의 동질성을 페미니즘에서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아시안 여성들의 페미니즘은 또 다를 것 같다. 나는 영어를 공부를 하고 나서, 영어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싶다.

p.49
"살아라, 살려라"
자기 하나만 명예 남성처럼 세상에서 공적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우리의 페미니즘과 다르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 적이다. 여성을 노새로 응시하는 강한 가부장제의 폭력 앞에서도 우리는 살아남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를 여왕으로 응시하는 부드러운 가부장제는 아예 경험도 해 본 적이 없다.

상호 동반자 관계야 말로 사랑의 토대페미니즘 운동의 지도자들은 반드시 사랑과 공감을 보여줄 능력이 있어야 하며, 행동으로 그런 사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며, 대화를 성숙하게 끌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대부분이 이성애자인 우리의 현실을 지적하며, 사랑의 감정과 능력을 부정하지 말고 같은 페미니스트들끼리도 연대하자고 촉구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 선포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하나님 나라에는 배제되는 자가 없다. 모두가 형제이고 자매이며 수평적이다. 희생, 나눔 등이 배타적으로 여성에게만 강요될 때 문제인 것 뿐.

p.59
백인 여성들이 남자들의 자리에 올라가는 순간, 페미니스트 운동이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여성으로서 노예로서 이중 억압 속에 살았던 경험을 통해, 나 자신도 중요하지만 더 연약한 생명을 끌어안고 가는 살고, 살리는 페미니즘의 주장. > 그러나
오히려 시스템을 유지하는 역효과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결국 한 패러다임이 페미니즘을 대변할 수 없고, 또한 특정한 패러다임만으로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세상을 한 번에 완전하게 만들 수 없다.
다만 후배들은 선배들이 주장하고 걸어온 길의 장단점을 살피며 미리 점검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위상학적 위치.

p.60~
1960년대 2기, 래디컬 페미니즘의 핵심
<정체성> 과연 여자란 무엇인가, 우리는 여자인가, 우리는 여자여야 하나, 여자라면 어떤 방식으로 여자여야 하나
1. 성차를 제거하자 <성차의 소멸>
Shulamith Firestone, 1969년 발족한 레드 스타킹을 통해 가부장제 해체를 위한 강한 성 혁명 전개. 성의 변증법가부장제 안에서의 성행위, 즉 일부일처 재생산 중심의 성관계를 계속하는 한 여성해방은 어림도 없다. 공동체의 지속을 위한 생산은 인공 생식으로 해결.
2. 성차를 발현하라, 여성성으로 새로운 문명
성차라는 것은 우리의 언어와 사회제도 안에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가부장적 시스템은 남성들이 여성을 왜곡하여 응시한 성차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원래적 성차는 아니다.
여성성은 본질적인 것이다. 본래적 여성성을 우리가 찾아낸다면, 남성 중심 문화의 반생명적 모습을 넘어, 구원적 문명을 이룰 것.
3. 성차란 구성된 것, <젠더 트러블>
Judith Butler 젠더 트러블성차는 사회 문화적 구성물이다. 본질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된다. 결국 남성, 여성의 성차가 반복된 수행성에 불과하다면, 본질주의적 특성을 강조하며 여성성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은 불가능해진다.
본의 아니게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음. “원래란 없다. 구성적이다.
4. 트랜스 페미니즘, 존재의 경계를 허물어 젠더 없는 세상으로
: 마지막 패러다임, ‘존재의 교란자연, 인간, 기계 사이의 경게를 없애버림


p.78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부자관계의 친밀성, 인격적 관계로 설명한 것은 해방과 자유를 준 것이다. 물론 '어머니'라고 부를 수도 있었겠으나 당시는 강한 가부장제의 한 중간이었기에 '어머니'라는 언어가 하나님의 초월성, 절대 권위, 사랑과 힘을 동시에 가진 어른들의 이미지를 다 담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p.101
질 리포베츠키(Gilles Lipovetsky) 3의 여성 역사적 사회적으로 의미심장한 이 여성상을 우리는 3의 여성이라 부른다. 이는 전통과 가정의 굴레에 갇혀 있었던 굴종의 여성상과 남성과의 무조건적인 대립만을 일삼았던 전투적 여성상을 뛰어넘는 것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자리가 미리 정해져 있지도 않고 사회적 자연적 제약을 받지도 않는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똑같은 운명, 즉 자아를 자유롭게 구성하고 활용할 기회를 갖고 모든 사회적 강령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아를 창조애햐 한다는, 동일한 과제 앞에 서 있다는 것이다.

p.110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이미 지배적인 후기-근대 페미니즘을 바라보며, 저자는 가족 공동체의 중요성을 언급하는데, 여기서 가족은 기독교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생존력을 가질수 없는 사회의 소수자들과 약자들을 어떻게 끌어안고 갈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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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이상적인 여성: 통제 아래 사랑스런 바보 + 신앙적으로 경건한 성녀 + 결혼 제도 안의 창녀
'성녀'들은 성적으로 순수할 뿐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기독교 전통 안에서 가장 숭앙받을 수 있는 존재들. 대표적으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교회의 금욕주의적 신앙 수행의 시스템 안에서 거룩하다고 구별될 수 있는 여성들은 수녀의 형태로 자기들의 여성성을 될 수 있는 대로 '거세'하면서 살아갔다. 이런 범주의 여성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체제에 도전하지 않으니까.
'창녀'의 경우 시스템 안에 있지만, 시스템의 보호는 받지 못하고 있는 존재들. 어떻게 말하면 시스템이 보호하고 있는 성스러운 질서를 위해서 일종의 분출구, 심지어 하수구의 역할을 하는 대상으로 간주. 남성 사제들과 신자들의 신앙이나 도덕성 측면에서는 위험한 존재들인지 몰라도, 가부장 시스템 면에서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다.  성녀와 창녀, 이 둘은 서로를 대면하지는 않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짝이다. 성스럽게 지키고 있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어두운 그림자의 세계. 두 범주에 속한 여성들 모두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기독교 전통의 시스템을 흔들지 않는다.
'바보'야 당연히 시스템을 흔들 능력도, 마음도 없다.
그러나 '마녀'는 다르다.

p.127
(Mary Daly, 1928-2010), ‘교회의 범위와 정의에 따라 기독교 페미니즘의 범위에 포함.
  교회와 제2의 성출간
데일리는 이들(남성중심 체계의 패배자인 남성들)이 비록 희생자이긴 하지만 이들 역시 남녀 구도에서는 여성을 억압하고 경멸하는 자일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밖에서는 '알파 수컷'인 다른 남성들에게 짓눌리다가도 집에 가면 아내와 딸을 억압하는 남자들이 꽤 있잖아요. 흑인 노예들이 백인 주인들에게 채찍 맞고 고통당했지만, 집에 오면 그들은 '가부장'이거든요. 따라서 여자들은 맨 마지막까지 경멸의 대상이고 아예 원천적으로 권력 구조에서 '거세'된 존재들이라는 고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과의 연대를 끊겠다는 선포예요.

p.154
Elizabeth S. Fiorenza: 성경을 역사적 모형으로 보자고 제안
성경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재구성과 재생산도 가능해 진다.
Carter Heyward: 조직신학자 사랑한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우리가 느끼는 존재의 흐름

p.183
내가 믿는 바 오늘날 사랑에 대한 교리는 주로 남성의 경험에 기초하여 형성되었고, 따라서 남성의 기준점에서 인간의 상황을 바라본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교리는 여성의 상황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제공하지 않는다. 여성의 죄는 의존, 자기 정체성의 결여, 자기를 버릴 정도로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여성의 미덕은 자율성과 자기실현이다. Valerie Saiving Goldstein 1921-1992

p.198
예수의 적극적 사랑의 행위가 상호적인 힘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통주의 기독론적 해석은 예수의 생애와 사역의 전적인 의미가 골고다, 즉 십자가를 향하는 고난에서 발견되어진다고 말한다. 마치 그가 단번에 모두를 위한 신적 인간의 드라마의 결단을 완전케 하기 위해 결말 그 자체인 고통을 추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이런 식의 견해가 예수의 사역의 도덕적 급진성(moral radicality)을 빼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수는 희생을 향한 그의 욕망에 철저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상호적인 힘에 철저했다.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 그의 희생은 도덕적 미덕의 실천으로 추상화될 수 없다. 그의 죽음은 그의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 연대성과 상호 호혜를 표현하는 사랑의 급진적 행위를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그가 지불한 대가였다.
Beverly Harrison, "The power of Anger in the work of Love" in Carol S, Robb, ed. Making the Connection: Essays in Feminist Social Ethics.

p.266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들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에서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나 혜 석!!!!!!!!!!!!!

posted by sergeant

하나님의 딸들-2018.02.21

독서/종교 2018. 6. 18. 17:38

 

의외로(?) 소심한 사람이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을 많이 만들고 싶지 않아 한다. 책 읽는 걸 좋아해도, 혼자 읽고 친한 이들과 세부내용을 나누고 얘기하거나 차곡차곡 기록에 남겨놓고 나중에 다시 읽는게 행복하지, 무려 '북클럽' 다닌다고 하면 너무.. 작위적인 것 같다고 느끼던 시기들도 있었다. 책도, 흥미있는 주제들을 바탕으로 함께 읽어내는게 좋지... 그냥 인문학 서적들은 흥미가 없어서.. 뭐 아무튼간에 이런 내가 이번주를 시작으로 두개의 북클럽의 회원이 될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첫번째 독서모임은 1년 훨씬 넘게 해온 과학과 신앙 관련 독서모임인데, 이것도 뇌과학과 신앙에 대한 포럼을 듣고 머리를 딱 얻어맞은 것 같은 통찰을 얻어서, 북클럽에도 참석했다가 모임이 너무 좋아서 바뀐 해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아무래도 나에겐 포럼이 북클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트리거인가보다.(하하)

 몇 주 전에 기독교 신앙과 페미니즘 관련 모임 갔다가 너무 화가 났다. 솔직히 좀 절망스러웠다. 이거 정말 기독교를 떠나야 하는건가. 물론 예수님을 떠나진 않겠지만.. 한국 개신교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 이정도가 한계라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수준의 논의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거라면 과연 내가 여기서 계속 지낼 수 있을지 심각하게 회의가 들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만난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존재에서 아주 짧지만 큰 위안을 얻기도 했었다. 니가 무슨말을 하는지, 나는 알고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너의 존재가 고마운. 그런 강렬한 느낌.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젊은 기독교인 페미니스트들이랑 얘기할 수 있는 장을 찾아볼까 고민이 되었다. 기독인 페미니스트로 치면, 나름 제이디스 모임도 떠오르기는 하지만, 친목도모의 면이 더 강해서.. 나에게는 좀 이 절망감을 함께 토해낼 수 있는 더 빡세고, 무섭고, 센 페미니스트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알고있는 북클럽이 하나 있긴 했는데, 혹시나 싶어서 문의를 해봤더니 1차 회원 모집이 마감됐다고. 그래서 "할 수 없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몰라 될대로 되라지'하고 그냥 넘겼는데, 담당자한테 다시 연락이 왔다. 참여하고 싶으면 참여해도 된다고. 회원을 좀 더 모집하기로 했다고. 그래서 이번주에 방문하려 한다. 설렌다.

 독서모임 책들은, 블로그에 잘 올리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런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책을 끊어 읽기 때문도 큰 것 같고.. 내가 읽고 온전하게 느꼈던 것만 다 적기에는 모임에서 이루어진 논의들이 너무 풍성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논의들을 다 적을 생각을 하면 약간 overwhelming 된다.
그런데 새로 시작하는 모임에서의 책은, 쉽고 짧은 책이라고 한번에 다 읽어 가기로 했다. 표지가 파란색, 보라색 두가지이고... 랜덤으로 배송된다는데,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이라 기쁘다.

아마 모임이 끝나고 나면 또 여러가지 생각들과 감정이 들겠지. 내가 예상하고 설레하는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들일거라고도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좋은 책을 읽으면서, 책 자체에서 느꼈던 감동과 감사를 조금이나마 블로그에 기록해 두고 싶었다. 책을 만나게 해 준 모임에 이미, 미리 감사하다.
 
책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여성혐오주의자, 인 동시에 신앙의 대부들의 발언을 발췌하며 시작한다. 지금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이 우스웠다.

 

 

 

 

 

 

 

 

 

 

 

 

 

 

 

 

 

 

 

 

 

 

 

 

 

 

 

 

 

 

 

 

 

 

 

 

 

 

 

 

 

 

 

 

 

 

 

 

 

 

 

 

 

 

 

 

p.46 (문제의 발단은 철학자들)
 서구 정신의 아버지라 할 만한 아테네의 세 남성은 놀라울 정도로 여성을 비하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아테네는 여성의 이름을 딴 도시다.


p.72 (암흑기의 암흑)
 토마스 아퀴나스(주후 1224/24?-1274년). 그는 수도사였으며 가톨릭교회의 일등 신학자이기도 했다. 수도사들은 여성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결국엔 여성이 남성을 정욕에 휩싸이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우습다. 남성들에게 여성은, 유혹하는 동일한 주체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와 닿았다. 정욕을 휩싸이게 만드는, 악한 악마적 존재일 뿐. 똑같이 죄를 지을 수 있고 정결함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지지 않는 시각. 결국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음란함을 마음껏 투사해 온 '연약한 사람'인 남성 수도사들. 반대로 노예보다 낮은 지위의.. 인간이기 보다는 대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마녀로 몰려 교수형 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여성은 자신을 돌볼 정도의 지혜도 없기 때문에 누군가를 가르치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는 여성의 지위가 노예보다 더 낮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훌륭한 신학자이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여성혐오주의자였다. 마치 아무리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시대의 영웅들도 성매수남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의 충격과 거의 비슷했다. 여성에게 구원자는 없다.

이런 여러가지 오래된 여성혐오의 역사를 읽다가 3부에 와서 마주친, 혁명가 예수의 존재는 내 마음을 울렸다.

p.97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이것을 기억하라. 비참하게 얼룩진 인생을 살았던 이 여성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물이며 이 물이 그 여성 안에서 솟아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돌로 지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때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다른 길로 여행을 하도록 하셨다.

 

책의 5부부터는 현대 교회들이 여성의 안수를 거부하고, 리더십에 제한을 두기위해 사용하는 고린도전서의 말씀들과 디모데서의 말씀들을 그 맥락에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잘 파헤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성실하게 한다.
예컨대, 고린도전서 11장 10절에 관한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p.158 (요약)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6-12절이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인이 주장하는 것이 따로 있고, 동양인이 주장하는 것이 따로 있다. 유대인의 시각은 6-9절까지 나오고 있다. (...) 이 뒤에 이어지는 10절로 인해 위의 표현이 바울이 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보다는 바울이 유대적 견해를 한 번 더 인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해 보인다. (...) 11절에서 우리는 위대한 "그러나"를 만난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11-12절)

책은 계속해서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했던 여성혐오자 히에로니무스의 전형적인 수법, 잘못된 오용과 단어 끼워넣기를 비판하며 성경의 내용을 다시 잘 살펴보기를 촉구한다. 게다가 "바울은 아내들에게 단 세 구절을 썼으나 남편들에게는 아홉 구절"의 권고를 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항상 간과하는 이야기들이다.

책에서 여성들만의 모임을 시작하라는 적용점을 제시하는 것도 매우 좋았다. 그런 점에서 모임이 훨씬 더 기대되었다. 또한, 나는 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이 '세속 페미니스트'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측면에서 많은 의문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책에서 제시된다는 느낌도 받았다. 비기독교인들은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주류가 많은 반면,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둘 간의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는 시각. 비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확실히 정립해보지 못했지만, 그와 별개로 기독교적 관점을 잘 드러내주는 흥미로운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도로시 세이어즈의 글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계획들도, 만날 사람들도. 설렘 반 두려움 반 여러가지 양가감정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항상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p.233
 가장 처음 말구유 옆에 있었고, 가장 마지막까지 십자가 앞에 남아 있었던 것이 여성들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들은 예수님 같은 남성을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결코 그런 남성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지자이며 선생인 그 분은 여성에게 절대로 잔소리하지 않았고 입에 발린 찬사도, 감언이설로 속이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선심 쓰는 체하지도 않았다. 결코 여성에게 어리석은 농담도 하지 않았고, 여성들에게 "여자들이란, 아이고 맙소사!"라고 하거나 "저런 형편없는 것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분은 화를 내지 않고 꾸짖었고, 생색내지 않고 칭찬했으며, 여성의 질문과 논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여성만의 특별 구역을 만들지도 않았고, 여성에게 여자답게 굴라고 하지도 않았으며, 여성성에 대해 조롱한 적도 없다. 여성을 무시하거나 어줍잖게 남성의 위신을 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분은 여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었고 언제나 따뜻하게 대하셨다. 복음서 어디에서도 여성의 사악함을 거론하는 행동이나 설교나 비유를 찾아볼 수 없으며,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서도 여성의 '우스꽝스러운 본성을 암시라도 하고 있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바로 이 분이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시다.

 
posted by sergeant

여성 리더십 논쟁 - 2018.01.22

독서/종교 2018. 6. 18. 17:30

 

이 책은 여성리더십에 대한 평등주의적 관점과 상보주의적 관점으로 나뉜 두 토론에 대한 책이다. 상보주의적 관점이란 전통주의적 관점으로서 여성 리더십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책 이름을 접했을 때, 나는 내게 꼭 필요한 책이 드디어 새물결 플러스에서 발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상보적 관점’을 소개한 책의 내용 일부를 먼저 접하고 약간 화가 났다.  평소 새물결 플러스의 책은 믿고 구매하는 편이지만, 과연 전통주의적 관점을 평등주의적 관점과 나란히 놓은 책이 내게, 그리고 이 책을 읽을 여성들에게 가치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전통주의 관점들은 이미 모두가 다 잘 알고 익숙해져 있기에 지면을 할애하지 않아도 무리가 없지만, 평등주의적 관점들은 가뭄에 콩은커녕 존재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기 때문이다. 책 제목이 아무래도 논쟁이니까, 필수불가결 하다는 것쯤은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불쾌했다.


  이러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출판사 이벤트에 응모했는데, 내게 책이 배달되었다. 나는 이벤트에 응모할 당시 페미니스트인 몇 지인들에게 내 글을 공공연하게 공유했다. ‘이렇게 응모했는데도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주시면, 제가 책임지고 리뷰 하겠습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나의 지인들은 배달 된 책에 관심을 표했다. 그리고 나는 책을 통해 평등주의적 관점들로부터 얻은 귀한, 양질의 자료들을 그분들과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 중 일부는 책이름을 확인하여 구매하기도 했다.) 마치 저자들이 논쟁을 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따뜻한 인사를 잊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그런 인사를 차용한다고 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게도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현했으나, 귀한 책을 보내주신 새물결 플러스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평등주의적 관점을 읽으며, 나는 린다와 크레이그의 세련된 유머와, 핵심을 찌르는 주장에 감명 받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사도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인 유니아에 대한 발견이다. 그리고 194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번역본들은 그녀를 시종일관 남성으로 옮겼다는 사실까지도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녀가 성별이 바뀐 이유는 “사도”란 용어가 여성에게 사용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정 때문이다. 네 학자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여성’이었던 유니아의 발견은 그러한 만연한 삭제들에서도 살아남은 기록일 수 있겠다. 이 시점에서 나는 유니아가 마치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유관순열사처럼 느껴졌다. 지우고 지워냈지만 결국 하나만 남겨져 있는 유명한 여성운동가처럼. 그마저 없어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걸까, 그런 존재. 그리고 더 다행히도 린다와 크레이그는 유니아 외에도 다양한 여성 리더십의 대표들을 제시해 낸다. 미리암, 드보라, 훌다, 브리스길라... 특히 마리아에 대한 크레이그의 <마리아는 제자의 자세를 취했다> 해석은 만약 현대에 예수님이 활동하셨다면 그의 가장 수제자가 마리아가 아니었겠냐는 동료들의 의견을 다시금 곱씹게 해준다.
  지워지는 여성에 대한 문제는 비단 성경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여성의 역사는 지워진다. 세탁기를 발명한 이는 여성이었으나(마가렛 플렁켓 콜빈) 얼마전 나는 유투브 Prager University에서 발간한 feminism 동영상에서 “세탁기를 발명한 것은 남자였다”고 말하며 현대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하는 여성인 교수를 보고 경악했다.(4분11초_https://www.youtube.com/watch?v=ZR9FHKKbMZo) 그 뿐일까,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지워졌다는 수많은 여성운동가들의 존재는? 이러한 예는 굳이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겠다. 얼마 전 영화<1987>만 해도, 고문가해자 미화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여성의 존재를 축소하고 왜곡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시들은 끝도 없으니 이 정도에서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아주 오래된 역사이다. 나는 책에서 자신들을 상보주의자라 부르는 전통주의자들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시각에서는 아주 관대해 봤자, 여성을 여전히 도움을 주어야 할 시혜적인 대상으로 보는 태도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굳이 지적하고 싶지 않다.

  평등주의 관점을 통해 많은 쾌감을 얻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도 있었다. 두 평등주의자들은 여성의 안수권과 리더십에 대한 내용은 적절하게 옹호하면서도 ‘세속 페미니스트’와 ‘동성애’를 자신들과 구분하는 의견을 공공연하게 표현한다. 실상은 세속 페미니스트들의 투쟁 덕분에 1918년에는 영국에서, 1920년에는 미국에서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또한, 그들이 강하게 반대하는 동성애자들의 경우에는 일부의 목사님들께서 이미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한 해석을 곁들여 동성애를 죄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 반대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다만 나는, 평등주의자들이 배제하는 동성애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수용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에 강하게 동의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들이 오랜 시간 후에 모두 교회에서 환대받게 되었을 때에조차 여전히 교회의 허드렛일과 식당일과 온갖 잡무들을 다 맡아 하면서도 최종 리더십 자리에는 절대 오를 수 없다는 소릴 듣고 있을 것 같은 자매들을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많은 이들에게 추천할 것이다. 지워진 역사에 대한 발굴과, 맥락과 역사를 통해 성경을 읽어내는 통찰을 함께 하고 싶으니까. 각종 혐오의 선봉에 서 있는 기독교를 정화하고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할 건전한 논쟁의 내용들이 이 책에 담겨 있으니까.

   다시 한번 좋은 자료들을 책으로 였어 주신 새물결 플러스에 감사를 드린다.

posted by sergeant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16.07.01

독서/종교 2018. 6. 18. 17:04

 

 

1년 반동안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던 기독교인 학생 하나가 '미움 받을 용기'를 읽고 재밌었다며 심리학 관련된 책을 추천해 달라길래 몇권과 함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추천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의 경우에는 대학원 들어가기 전에 읽었던 오래된 책이고, 당시에 나는 이 책 덕분에(?) '말씀의 검으로, 잘못된 심리학 지식들에 정면승부 할' 훌륭한 "학자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웠었다. 지금도 궁극적인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 책에는 당시처럼 적극적으로 동의하기에는 어려운 전제들이 꽤나 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내가 종종 상담을 통해 만나게 되는 '신실한 기독교인 내담자'들에게서 느끼는 불편감과 매우 비슷하다.


 보통 심리학은 인간의 '선함'과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옹호한다고 한다.(이건 긍정심리학 등 몇에 국한된 부분이지만 그냥 편하게, 직관적으로 그렇다고 치자) 반면에 기독교의 인간관은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이다.

 어린시절부터 엄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일 수록, 인간관에 있어서 중요한 명제는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문장일 것이다. 이건 믿음과 구원의 여정에 있어 첫 걸음마와도 같다. 그런데 이 명제에서 좀 더 나아가면, 사람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감정들이 '죄악시'되면서, 부정 해야할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특히 욕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모습의 경우 더 억압해야 할 것처럼 보여진다. 이 시점부터, 순종적이고 믿음이 좋다고 여겨지는 학생들은 내적 어려움이 심화된다. 그래서 가면을 쓰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기독교적 가치관들에 대해 반발을 하게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95% 둘 중 하나다. 왜냐? 부정적인 감정이나 모습은 억눌러서 없앨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전자, 즉 가면을 쓰게되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반발 하는 후자는 내적으로는 꽤나 힘이라도 있는 친구들이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싫어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연약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느껴진다. 모두에게 그렇다. 그런면에서, 오히려 비기독교인들은 '연약함은 숨기는게 자연스럽다'를 비교적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유리한 지점에 있다. 반면 기독교인들은 연약함을 숨기고 싶어하는 욕구 조차도 공격을 받는 불리한 지점에 있다. 그러나 안전함이 뒷받침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자살행위와도 같다. 역설적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연약함을 드러냈을 때 그것이 더 강력한 파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개의 힘이 나는 이 부분에서 맞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나를 죽이는 것. 내가 무익함을 타인에게 알리는 것. 철저한 복종과 완전한 죽음. 이건 구원과도 연관이 되겠다. 


 그런데 많은 교회공동체에서는 (가장 기본 요건인 안전한 환경을 조성해 주지 못한 채로) 연약함을 드러내라고 얘기하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연약함 때문에 "거봐~) 너는 죄인"이라고 얘기한다. 어쩌면 연약함과 그로 인한 회개의 관점을 가진 공동체는 차라리 건강한 것일수도 있다. 아예 '장로님 딸이 왜저래' '목사님 아들인데 왜 저래'가 오히려 더 흔한 반응이다. 그런데 나는...그 연약함 자체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 약함, 혹은 악함은 현상 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부분이다. 이걸 문장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이자 진행형이다.  


 다른 측면에서, 사실 나는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이 교육이나 외부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뜻밖의 회심>에서 로자리아 버터필드의 말에 더 공감이 된다. "그 때까지 내가 들어봤던 간증들은 모두 에고와 자만이 가득한 것들이었다. 그리스도를 선택한 내가 정말 장하지 않나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내 결정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저는 내 삶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단했어요. 아직 길을 발견하지 못한 저 이방인들 보다 얼마나 훌륭한지 모르겠어요. (중략) 나는 그리스도를 택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실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응답을 해야 한다. 응답을 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이야기의 전부이다."

 

 만약에 나 자신의 죄인됨을 교육이나 일방적인 선생님의 요구에 의해서 인정하게 할 수 없다면, 어린 아이들을 위한 근본적인 기독교 교육은 조금 다른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도 또한 마찬가지다. "당신은 죄인입니다"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이 과연 옳은 접근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그걸 가르치는 본인 자신도 이미 죄인이잖아... 차라리 저는 죄인입니다,가 나을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물론 나는..현재로선 이상적인 교육이나 접근 대안을 제시할 수가 없다ㅋ 그래서 참 어렵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알게되는 하나님은 그리 단편적인 분은 아니시다. 어떤 사안에 대한 태도를 정하고 싶어서 아주 오래전부터 씨름했던 문제들도 있다. 그런데 주님은.. (별로 안 단호해도 될것 같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하시면서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참 지난하게도 단정 하지 않으신다. 답답하다. 그렇지만.. 그래서. 날마다 더 새롭고, 참 감사하고, 이해할 수 없고 응답이 없으셔서 좀 짜증날 때가 많고. 그래도 여전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선하신 주님이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