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트라우마 - 2019.7

독서/종교 2019. 6. 26. 14:22

 어떤 마음들은 입 밖으로 표현되었을 때 변질 되어 버린다. 게다가 어떤 감각들은 깔끔하게 인식 되지도, 명확하게 표현할 수도 없는 채로 까끌거리기도 한다. 이름을 찾지 못한 이 감각들은 부유하다 불쑥 튀어나와 주인의 뒷통수를 치기도 한다.

 기존의 세계에 통합 되지 못한 경험, 즉 트라우마로 부터 온 고통은 더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 시간이 변형되어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위협처럼 재현되는 플래시백, 언어로 정립되지 못해 타인에게 이해 받을 수 없는 기억들과 마비/과각성을 경험하는 몸, 이 모든 것은 고통이 개인에게 영향을 미쳐 일어나는 대표적 증상이다.
 정리되지 않는 것들은 나를 참을 수 없게 한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트라우마를 공부한 후로 그 세계는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처럼, '나는 세상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를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깨어지기 쉬운 내면을 보게 되었고, 우리의 발자국으로 지구가 얼마나 상처를 입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내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설명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히 묵상하던 시절, 목사님께 물어보았다. 십자가를 알수록 동반되는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목사님은 십자가에서 멈추지 말고 부활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하셨고, 당시 그 말에 많은 위안을 얻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어떻게 부활까지 나아가는지를 몰라 고통의 문제에 멈춰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오래전 얻지 못했던 다리를 얻게 되었다. 즉, 십자가(성금요일)와 부활 주일 사이에는 성토요일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내려왔고, 그 사랑이 가는 길에는 고통과 승리, 죽음과 삶이 온통 뒤섞여 있다. 성 토요일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중요한 대목이다. 성토요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인식할 수 없는 곳 즉 죽음과 부활사이, 지옥 깊숙한 곳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죽음의 경험, 즉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태풍 이 후의 삶'이 우리에게 남은 것처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 부활 신앙으로 대표되는 '승리주의' 신학이 우리에게 제시했던 고통에 대한 빈약한 대답은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는 커녕 비난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 남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증언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

 

p.20

우리가 특정한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 때, 그 세계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 트라우마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10년 전에 비해 나는 세상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사람들을 볼 때마다 깨어지기 쉬운 내면을 보게 되었고, 우리의 발자국으로 지구가 얼마나 상처입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사실에 책임을 느낀다. 나는 우리가 설명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믿게 되었다.

 

p.24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제 그만 폭풍을 극복하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물론 폭풍은 지나갔지요. 하지만 '폭풍 이후'는 늘 여기에 있습니다." (..) 리 집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연민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드러내면서, 대중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고 이야기했다. 대중들은 카트리나로 인한 트라우마를 불편해했고,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에게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p.26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진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려는 사람은 삶을 파고드는 죽음에 대한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트라우마의 복잡한 모습들을 모조리 목격하고 증언해야 할 과제를 갖는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나, 트라우마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 모두 복잡한 상황 속에서 힘겹게 치유의 길을 만들어 간다.

 

p.28
이처럼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트라우마를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은 삶과 죽음의 관계 속에서다. 트라우마는 죽음과의 만남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계와 그 속에서의 익숙한 삶의 모습을 산산이 부서뜨린 끔찍한 사건을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에서부터 단절이 발생한다. 한 사건은 모든 것이 철저히 끝장난 것으로 생각되어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려운 일이다. 

 

p.34
트라우마 생존자가 경험하는 삶은 새로운 것도, 더 나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이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한 삶으로 선포되는 한, 트라우마의 고통이 존재하는 현실은 묻혀 버린다. 우리는 이런 방식의 부활 선포가 죽음의 여파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침묵하고 그 경험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p.35
트라우마의 이중구조는 이 책에서 내가 '중간(the middle)이라고 비유하여 부르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드러낸다. 이 중간은 삶도 죽음도 아닌, 생존이라는 당혹스러운 영역에 대해 말한다. 그동안 신학은 죽음과 삶의 사건에 집중한 나머지 이 중간이라는 영역을 다루지 못했다. 중간은 위태로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서 가려지거나 무시되기 쉽다. 시간과 몸과 언어가 중간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에, 중간을 증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p.36
이 책의 역할은 이 중간에 대한 담론을 드러내는 데있다. 이 작업은 고통경험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구원의 성급함에 반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 전통의 중심에 자리한 죽음과 부활이라는 내러티브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이중간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고통을 다른 방식으로 대할 수 밖에 없다. 

 

p.41
트라우마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선함을 굳게 믿는그리스도교의 신앙백이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p.47
복구가 진행 중이지만, 이제 삶은 새로운 삶도 승리한 삶도 아니다. 삶은 오히려 더불확실하고 모호하며 캄캄하다. 이러한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신학적 인식과 표현이필요하다. 나는 아무런 삶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마음속에 삶을 품고나아갔던 사람들의 몸부림을 존경한다. 나는 그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책을 썼다. 

 

p.48
구원을 죽음이나 삶 어느하나와긴밀학하게 연결 시키면, 고통을 미화시키고 찬양하거나혹은 부정하게 될 위험이 있다. 

p.5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주류의 논리를 주장하는한, 신학은 깊은 상처를 덮어버리며 고통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p.53
결국 고통 속에서 과연 하느님이 계신지를 다시 묻기 위해 남아 있는 것에 관한언어는 신학 안에서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트라우마라는 렌즈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고통의한가운데에서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전통적인 질문은 새롭게표현된다. (...) 트라우마의 여파 속에서, 신학적 해석의 틀은 사람들이 겪는 깊은 고통을 거의 설명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그 해석의 틀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p.55
여느 고통 경험과 다르게 트라우마는 우리가 고통에 대응하는 능력과 경험을 자기삶에 통합하는 능력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건의 폭력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특성 때문에, 다양한 트라우마 증상들이 나타나고, 경험을 처리하고 해석하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집요하게 떠오르는 고통스러운 장면들과 트라우마 사건의 기억은 가장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중 하나다.
과거의 파편들이 현재에 다시 흩뿌려진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과거는 거듭 현재를 침범하고, 많은 생존자들의 삶은 다시 트라우마 언저리로 떠밀려 간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 모두는 트라우마와 씨름하면서 자기와의관계 및 타인과의 관계 모두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트라우마 여파 속에서 생존자는자기신체 및 타인의 신체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언어 사용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에도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p.56
트라우마의 핵심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과거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않고 현재를 침범한다. 현재는 과거를 재현할 뿐 아니라, 온전히 알지도 못했고 제대로 이해하짇지도 못했던 것들을 다시 보여주게 된다.

"세월이 약이다!"라는 익숙한 격언이 있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이 격언과 상반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p.63
우리가 고통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사람과 공동체에 끼친 영향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고, 그 고통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을 다르게 정립해야 한다. 

 

p.84
트라우마는 일반적으로 죽음과의 만남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만남은 완전히 통합되거나 파악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만남은 인식할 수 없는 형태로 되살아난난다. 죽음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죽음이 가져온 위기는 죽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힘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에 있다. 되살아나는 죽음 때문에 트라우마 이전과 같은 삶은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삶은 죽음과 계속적으로 맞붙어 싸우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삶은 다른형태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트라우마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간단하게 읽어낼 수 없다. 죽음은 완결되지 않고, 삶 속에 계속된다. 

 

p.87
신학자 발타자르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죽음과 삶 사이에 무엇이 끈질기게 계속되는가?"

 

p.102
트라우마 현장에서 움트는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은 바로 사랑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p.104

이를 통해 트라우마에 대한 통찰들은 또한 예수라는 인물 대신에, 증언이라는 행위에 의해 드러나는 성령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모델들은 예수가 떠나고 난 뒤, 예수의 부재로 인해 형성된 증언의 방식들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하며, 성령이 하는 증언과 성령에 대한 증언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전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증언을 성령의 증언과 연관해 성령론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어떤의미가 있을까? 많은 경우에, 우리가 성서 속에서 보는 증언은 지금 제안된 해석들보다 훨씬 덜 직접적이다. 만약 증언이 말로 전달하기 어렵고, 간접적이며,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지도 확실치 않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교의 증언에 대한 개념이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우리의 관심이 증언의 내용이 아니라 증언하는 행위 자체로 옮겨지고, 목격된것들은 계속해서 생략된다면 어떻게 될까? 트라우마라는 렌즈는 선포되어야 하는 분명한 진실이 아니라, 우리가 담아낼 수 없지만 증언해야만 하는 진실을 주목하게 한다.

 

 

p.108
"그 위험이아주 실제적이기에 우리는, 마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드라마를 보는 관객들철처럼, 그저 장면이 바뀔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p.115
"성토요일, 내 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극심한 피로만 느꼈다. 영혼의 상태." 그녀는 그 고통을 신체적인 고통보다는 심리적인 고통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극도의 고독, 버림받음, 포기가 지옥에존재한다. 그녀의 경험은, 지옥에 존재하지도 않고 그녀가 손에 넣을 수도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지옥의 고통은 그녀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마치 성자가 성부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졌듯이. (...) 지옥은 고통을 떠맡는 곳이 아니라, 버려짐을 견디는 곳이다.

 

p.125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내려왔고, 그 사랑이 가는 길에는 고통과 승리, 죽음과 삶이 온통 뒤섞여 있다. 성 토요일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중요한 대목이다. 성토요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인식할 수 없는 곳 즉 죽음과 부활사이, 지옥 깊숙한 곳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posted by sergeant

대화- 2019. 7

독서/종교 2019. 6. 25. 08:42

 

당신의 진리는 안전한가요?

 

어린 시절에는 진리라는 단어를 참 좋아했었던 기억이 난다.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면, 무언가 힘이 있는 느낌. 삶을 헌신할 분명한 목적이 있는 감각, 그리고 자부심.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내가 익숙한 기독교적 진리라는 것이 폭력을 휘두르는 정당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그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파스칼은 이 현실을 직시하였습니다. 물음을 던질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위대한 존재이지만, 자신의 현실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비참한 존재입니다. 

 

진리는 증명되는 게 아니라, 진리임을 받아들이고 세상을 볼 때 오히려 세상이 정확하고 잘 보이기 때문에 진리인 줄 알게 됩니다.

 

돌아보면, 그 불쾌함 때문에 진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나도 많이 회피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단어가 너무 거창해서, 폭력의 탄알로 사용되는 용례들이 진절머리 나서, 결국 진리라는 것을 깔끔하게 정의해 내기가 어려울 뿐더러 그 결론의 의미가 유용한지 모르겠다는 등의 다양한 이유로.

그러나 책을 읽으며 다시 나에게 질문하고, 직면하는 지난한 시간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하는걸까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피곤하고 보기 싫은 마음이 크다. 직면이 성격상 가장 큰 장점이라던 나의 베짱은 어딜간건지,, 피할 수 없는 현실의 고통들의 비참함 때문에 싫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만. 

posted by sergeant

책. 진화는 어떻게 내 생각을 바꾸었나

 

기독교인들의 진화에 대한 경기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최근 미국에서 친해진 지인과 대화를 나누던 중, 별 생각 없이 "요즘 아이들은 팔다리도 길고, 진짜 잘 진화하네요."라고 말했다가 지인이 화들짝 놀라며 "아 작은 범위 안에서는 그것도 진화라고 볼 수 있겠지."라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딱히 진화에 대해 논쟁하고자 했던 말이 아닌데, 작은 단어 하나하나에서 조차 세계관이 반영되어 서로를 알아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다.

 이 책을 그 지인께 선물한다면, 너무 도전적인걸까? 고민이 된다.

 

p.38
나는 손을 들고 아주 간단한 질문을 하나 던졌다. "그렇다면 공룡 뼈들은 뭐죠?" 지도 선생님과 목사님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눈빛을 교환하셨다. 그러고는 목사님이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씀하셨다. "그 뼈들은 사탄이 묻어 놓은 거란다."

 

p.41
나는 나의 성경이 사실 나의 성경 해석임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잘못된 것은 성경 자체가 아니라, 나의 성경 읽기 방식은 아닐까. 성경을 역사적, 신학적 맥락에서 읽는 법을 배워서 품게 된 질문들이 아니라 진화에 대한 걱정 때문에 갖게 된 질문들이라는 렌즈를 통한 나의 성경 해석법이 문제인 것은 아닐까.

 

 

책은 복음주의 기독 지성들이 어떻게 진화, 즉 과학과 자신의 지성을 통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를 담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여정에서 아주 분명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적 성실성.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기독교인으로서 신앙과 학문을 아주 분리해 버리거나 억지로 봉합하고 싶어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많이 보았고, 자주 두 부류 모두 같은 의미에서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학문이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으로서, 신앙과 자신의 학문에 지적인 성실성을 가지고 임하는 이들을 삶 속에서 자주 만나 볼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25인의 수필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내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p.55
"난 모르겠다." 나는 그 때 느꼈던 안도감을 지금도 기억한다. 몰라도 괜찮은 거였어! 어른이 이것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면, 나같은 십대가 지금 당장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었다.

 

나이가 들 수록,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기가 어려워 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무언가 가르치고 싶은 욕구, 어른으로서 답을 제시해야 한다는 편견으로 인해 미래 세대의 지적 탐구와 호기심을 비틀고 변형시키지는 않아야지, 라고 다짐하게 된다.

 

p.136
"하나님은 게으름뱅이들 중에서도 지적인 게으름뱅이를 정말 싫어하시오.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될 요량이라면, 내 경고 한마디만 하겠소. 당신은 당신의 전부-두뇌를 비롯한 모든 것-를 요구하는 여정에 오르는 것이오." 

 

두뇌만, 혹은 신체만 즉 나의 일부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아주 많다. 내 삶을 드린 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매일을 붙잡고 씨름할 문제이다.

 

p.139
교수님도 그날 발표가 있어서 일찍 도착하셨던 터라 나의 엉터리 없는 소리의 많은 부분을 들으셨지만, 다행히도 내게 무안을 주는 일에는 관심이 없으셨다. 나는 그날 내가 진화라는 악에 대항하여 믿음의 승리를 기록했다고 생각했다.

어떤 선생이 될 것인가. 이 또한 앞으로 계속 고민해야 할 부분이겠다.

 

p.242
"이것 말고 교회가 내게 거짓말을 한 것이 또 있나요?"

'독서 >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령과 트라우마 - 2019.7  (0) 2019.06.26
대화- 2019. 7  (0) 2019.06.25
복음의 공공성-2019.03.01  (0) 2019.01.21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2018. 4  (0) 2018.06.18
마음, 뇌, 영혼, 신 - 2018.03.  (0) 2018.06.18
posted by sergeant

복음의 공공성-2019.03.01

독서/종교 2019. 1. 21. 07:03

나봇은 왜 왕의 제안을 하나님이 주신 기회로 생각하지 않았을까? 나봇은 왜 '열심히 하나님에게 순종하고 믿음대로 살았더니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재물을 주시는구나' 생각하며 감사하지 않았을까? 오늘날의 모든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다 그렇게 여긴다. 교회 기도원 인근이 개발되어 엄청난 이익이 생기면 하나님 은혜로 여기고 감사헌금에, 십일조에 난리법석이다. 교인들은 아파트가 재개발되면서 값이 폭등하면 하나님에게 큰 복을 받았다고 교회에 헌금하고 난리다. 하나님이 신실한 종에게 마침내 빛을 비추어주신다고 얼마든지 해석할 수 있그 그렇게 해석해줄 목사들도 가득하다. 그런데 왜 나봇은 이 기회를 거절하고 죽음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맞이한 것일까?


(...)

나봇의 대답을 직역하면, "내 조상의 유업을 당신에게 주는 것을 여호와께서 결단코 내게 대해 허락하지 않으시리라"가 된다. 여기에서도 아합과 나봇의 시각 차이를 엿볼 수 있다. 아합은 나봇의 '포도원'을 요구하면서, 다른 '포도원'을 주든지 그에 상응하는 돈을 주겠다고 하는 데 반해, 나봇은 자신의 포도원을 '포도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에게 포도원이 있는 땅은 '내 조상의 유산'이다. 


(...)

그에 비해 아합의 요구는 땅을 그저 재산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부동산으로 보는 사고를 전제로 한다. 아합은 나봇과 달리 땅을 하나님의 선물이나 은혜로 보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땅을 화폐가치로 환산할 수 있는 재화로 보느냐, 하나님과 맺은 언약과 약속이 담긴 대상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가 아합과 나봇 사이에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나봇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지파 중심 농경사회와 와왕정의 도시문화 사이의 갈등을 증거한다.


(...)

여기에서 심각한 점은 이세벨의 이러한 음모가 절차상으로는 문제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진위를 밝힐 수 없는 거짓 증언을 바탕탕으로 이 모든 음모를 꾸몄다는 것만 제외하면, 이 모든 상황은 이스라엘의 율법을 따라 지극히 '합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세벨이 토라의 전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토라를 이용한다. 이세벨에게 토라는 따라야 할 규범이 아니라 통제할 수 있는 재료였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본문은 '합법적인 정의' 혹은 '절차적인 정의'라라는 것이 얼마나 무기력할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

장로와 귀족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을까? 나봇이 무죄라는 것을 깨달았을까? 나봇이 이세벨의 음모에 희생된 것을 눈치챘을까? 그러나 이것은 사실 어리석은 질문이다. 장로와 귀족들은 아마 수십 년을 함께 살아왔을 터이니 나봇의 사람됨을 이미 알았고, 이세벨이 어떤 여자인지도 충분히 알았지만, 이세벨의 음모에 동참하여 무죄한 피를 흘렸다. 자기들과 함께 살던 나봇을 생각하지 않고, 나봇의 억울함에 귀 기울이지 않고, 아마도 이세벨이 보냈을 무뢰배들 말만 듣고 나봇을 죽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세우신 명예로운 제도인, 성문에서 장로들이 집행하는 공평한 재판이 나봇 사건에서 완전히 뭉개지고 말았다. 공평과 정의는 절차적 정의와는 거리가 멀다. 절차적 정의도 지키지 않아 문제이지만, 절차적 정의는 구약의 정의와 거리가 멀다. 그래서 공평과 정의의 재판을 명령하는 신명기 16장 18절에 이어지는 19절은 '외모'와 '뇌물'을 언급한다. ... 이러한 사태의 가장 큰 피해자는 '외모'와 '뇌물'이 부족한 약자들이다(고아, 과부, 객의 송사: 신24:17; 27:19; 욥29:12). 관계 안에서 이루는 정의와 정의 있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공평은 현실에서 가장 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 예민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아를 위해 재판하사 더는 세상이 고아를 억압치 못하게 하신다(시10:18). 그 분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다(시68:5). 가난한 자와 고아를 위하여 판단하며 빈궁한 자에게 공의를 베푸신다(시82:3), 그러므로 고아의 억울한 것을 풀어주고 과부를 위해 변호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나아가는 첩경이다 (사1:17) 


아무도 주의하지 않았을 나봇의 피가 하나님의 앞에 상달되었다. 아무도 나서주지 않은 나봇의 죽음에 하나님의 예언자가 나서주었다. 그래서 예언자는 권력의 적이며(왕상 21:20), 권력과 부귀를 지닌 자들을 언짢게 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존재다. 예언자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가난한 이들의 삶과 눈물이 있다.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알고 그들의 이웃이 되어 공평과 정의를 외친 예언자의 삶은 외롭고 고통스러웠다. 엘리야의 고통과 예레미야의 눈물의 깊이를 오늘 우리가 헤아리기 어렵다. 


구약성경은 시공을 초월한 하나님과 개인의 실존적인 만남만 다룬 책은은 아니다. 구약성경이 그러한 만남도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 개인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공동체가 어떻게 해서 하난나님을 예배하며 역사 한가운운데 존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구약은 개인과 하나님의 만남을 다룬 책이라기보다는, 역사 가운데 하나님 백성으로 존재하는 공동체를 다룬 책이라고 하는 편이 훨씬 더 정확하다. 그고 이렇게 다룰 때, 구체적인 역사 현실은 하나님 백성의 존재를 결정하는 데 본질적인 중요성을 지닌다. 즉 역사와 거의 무관하게 개인의 실존에 집중하는 성경해석은 근본적으로 부당하며 부적절한 해석인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나라가 어떻게 되든지, 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구원을 약속 받았다는 식의 고백은 예언자들과는 전혀 관계없는 신앙이다. 예언자들과 무관하다면 기독교 신앙 전체와도 무관하다. '사적 신앙'은 근본적으로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사적인 촉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거민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추하고 더러운 속마음, 음란하고 거짓말 잘하는 누추한 마음을 들여다보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실존을 드러내어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지도 않는다. 이사야는 예루살렘 사회가, 사람들의 관계가 얼마나 끔찍하고 참담한지 드러낸다. 하나님을 향한 극진한 예배와 가난한 이웃을 짓밟는 것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폭로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에게 진실하게 예배드리거나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을 회개로 보지 않는다. 정의를 추구하는 것이 곧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 다시 말해 회개다. 


이상의 관찰은 하나님에게 돌아간다는 것이 예언자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명료하게 보여준다.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개인의 사귐을 더 기깊게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없다. 개인의 죄악상을 직면하고 들여다보며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이 서는 것으로 요약할 수도 없다. 더 은혜롭고 충만한 예배를 함께 회복하는 것이라는 표현도 적절치 않다. 하나님에게 돌이키는 것은 성문에서 회복하는 정의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공적 삶의 현장에서 지켜내는 다. 달리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렇게 공적인 신앙을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한 데서 비롯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신앙의 사사화는 부족하거나 미흡한 신앙이 아니라 잘못된 신앙이다. (...) 울러 사적 앙을 넘어서 공적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올바른 행동과 직결됨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을 고발하며 돌이킬 것을 요구한 예언자들의 외침은 고아와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에 대한 긍휼로 이어진다. 사회 자들을 중심에 둔 사고방식과 실천과 행동이야말로 야훼 신앙의 보본질이며, 공적 신앙의 핵심이다. 

posted by sergeant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2018. 4

독서/종교 2018. 6. 18. 17:44

 

 

랜선친구들이 뉴스앤조이에서 텀블벅 참여 하시길래 나도 따라가서, 따끈따끈하게 받은 신간.
내용들이 참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좋아서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자고 추천하고 내가 발제하게 되었다.
 여성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교회를 버리지 않는,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까?

  이 고민이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참 정신승리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무신론자들의 수많은 역사적 공격에도 부정되지 않는 기독교의 정통처럼, 크리스천 페미니스트들에게도 단단하고 자랑할만한 계보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 준, 참 감사한 책이다.

  저자 교수님께서 세미나를 하시기에 참석해서 사인도 받아둔 책. 읽는 내내 위안과 격려가, 힘이 되었다.

 


<책 발췌>

 

p.46
우머니스트 선언, 흑인 여성들의 경험은 백인 중산층 엘리트 여성들의 것과 다르며, 특히 흑인 남성은 여성을 지켜주기는커녕 자신들이 받은 억압 경험을 자기의 여자들에게 폭력적으로 발산한 존재였다. 우머니스트들은 말한다. “살아라, 살려라
책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요즘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와 감성을 보면서.. 같은 소수자로서의 동질성을 페미니즘에서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아시안 여성들의 페미니즘은 또 다를 것 같다. 나는 영어를 공부를 하고 나서, 영어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싶다.

p.49
"살아라, 살려라"
자기 하나만 명예 남성처럼 세상에서 공적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우리의 페미니즘과 다르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 적이다. 여성을 노새로 응시하는 강한 가부장제의 폭력 앞에서도 우리는 살아남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를 여왕으로 응시하는 부드러운 가부장제는 아예 경험도 해 본 적이 없다.

상호 동반자 관계야 말로 사랑의 토대페미니즘 운동의 지도자들은 반드시 사랑과 공감을 보여줄 능력이 있어야 하며, 행동으로 그런 사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며, 대화를 성숙하게 끌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대부분이 이성애자인 우리의 현실을 지적하며, 사랑의 감정과 능력을 부정하지 말고 같은 페미니스트들끼리도 연대하자고 촉구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 선포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하나님 나라에는 배제되는 자가 없다. 모두가 형제이고 자매이며 수평적이다. 희생, 나눔 등이 배타적으로 여성에게만 강요될 때 문제인 것 뿐.

p.59
백인 여성들이 남자들의 자리에 올라가는 순간, 페미니스트 운동이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여성으로서 노예로서 이중 억압 속에 살았던 경험을 통해, 나 자신도 중요하지만 더 연약한 생명을 끌어안고 가는 살고, 살리는 페미니즘의 주장. > 그러나
오히려 시스템을 유지하는 역효과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결국 한 패러다임이 페미니즘을 대변할 수 없고, 또한 특정한 패러다임만으로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세상을 한 번에 완전하게 만들 수 없다.
다만 후배들은 선배들이 주장하고 걸어온 길의 장단점을 살피며 미리 점검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위상학적 위치.

p.60~
1960년대 2기, 래디컬 페미니즘의 핵심
<정체성> 과연 여자란 무엇인가, 우리는 여자인가, 우리는 여자여야 하나, 여자라면 어떤 방식으로 여자여야 하나
1. 성차를 제거하자 <성차의 소멸>
Shulamith Firestone, 1969년 발족한 레드 스타킹을 통해 가부장제 해체를 위한 강한 성 혁명 전개. 성의 변증법가부장제 안에서의 성행위, 즉 일부일처 재생산 중심의 성관계를 계속하는 한 여성해방은 어림도 없다. 공동체의 지속을 위한 생산은 인공 생식으로 해결.
2. 성차를 발현하라, 여성성으로 새로운 문명
성차라는 것은 우리의 언어와 사회제도 안에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가부장적 시스템은 남성들이 여성을 왜곡하여 응시한 성차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원래적 성차는 아니다.
여성성은 본질적인 것이다. 본래적 여성성을 우리가 찾아낸다면, 남성 중심 문화의 반생명적 모습을 넘어, 구원적 문명을 이룰 것.
3. 성차란 구성된 것, <젠더 트러블>
Judith Butler 젠더 트러블성차는 사회 문화적 구성물이다. 본질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된다. 결국 남성, 여성의 성차가 반복된 수행성에 불과하다면, 본질주의적 특성을 강조하며 여성성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은 불가능해진다.
본의 아니게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음. “원래란 없다. 구성적이다.
4. 트랜스 페미니즘, 존재의 경계를 허물어 젠더 없는 세상으로
: 마지막 패러다임, ‘존재의 교란자연, 인간, 기계 사이의 경게를 없애버림


p.78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부자관계의 친밀성, 인격적 관계로 설명한 것은 해방과 자유를 준 것이다. 물론 '어머니'라고 부를 수도 있었겠으나 당시는 강한 가부장제의 한 중간이었기에 '어머니'라는 언어가 하나님의 초월성, 절대 권위, 사랑과 힘을 동시에 가진 어른들의 이미지를 다 담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p.101
질 리포베츠키(Gilles Lipovetsky) 3의 여성 역사적 사회적으로 의미심장한 이 여성상을 우리는 3의 여성이라 부른다. 이는 전통과 가정의 굴레에 갇혀 있었던 굴종의 여성상과 남성과의 무조건적인 대립만을 일삼았던 전투적 여성상을 뛰어넘는 것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자리가 미리 정해져 있지도 않고 사회적 자연적 제약을 받지도 않는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똑같은 운명, 즉 자아를 자유롭게 구성하고 활용할 기회를 갖고 모든 사회적 강령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아를 창조애햐 한다는, 동일한 과제 앞에 서 있다는 것이다.

p.110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이미 지배적인 후기-근대 페미니즘을 바라보며, 저자는 가족 공동체의 중요성을 언급하는데, 여기서 가족은 기독교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생존력을 가질수 없는 사회의 소수자들과 약자들을 어떻게 끌어안고 갈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p.113
-
개신교의 이상적인 여성: 통제 아래 사랑스런 바보 + 신앙적으로 경건한 성녀 + 결혼 제도 안의 창녀
'성녀'들은 성적으로 순수할 뿐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기독교 전통 안에서 가장 숭앙받을 수 있는 존재들. 대표적으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교회의 금욕주의적 신앙 수행의 시스템 안에서 거룩하다고 구별될 수 있는 여성들은 수녀의 형태로 자기들의 여성성을 될 수 있는 대로 '거세'하면서 살아갔다. 이런 범주의 여성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체제에 도전하지 않으니까.
'창녀'의 경우 시스템 안에 있지만, 시스템의 보호는 받지 못하고 있는 존재들. 어떻게 말하면 시스템이 보호하고 있는 성스러운 질서를 위해서 일종의 분출구, 심지어 하수구의 역할을 하는 대상으로 간주. 남성 사제들과 신자들의 신앙이나 도덕성 측면에서는 위험한 존재들인지 몰라도, 가부장 시스템 면에서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다.  성녀와 창녀, 이 둘은 서로를 대면하지는 않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짝이다. 성스럽게 지키고 있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어두운 그림자의 세계. 두 범주에 속한 여성들 모두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기독교 전통의 시스템을 흔들지 않는다.
'바보'야 당연히 시스템을 흔들 능력도, 마음도 없다.
그러나 '마녀'는 다르다.

p.127
(Mary Daly, 1928-2010), ‘교회의 범위와 정의에 따라 기독교 페미니즘의 범위에 포함.
  교회와 제2의 성출간
데일리는 이들(남성중심 체계의 패배자인 남성들)이 비록 희생자이긴 하지만 이들 역시 남녀 구도에서는 여성을 억압하고 경멸하는 자일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밖에서는 '알파 수컷'인 다른 남성들에게 짓눌리다가도 집에 가면 아내와 딸을 억압하는 남자들이 꽤 있잖아요. 흑인 노예들이 백인 주인들에게 채찍 맞고 고통당했지만, 집에 오면 그들은 '가부장'이거든요. 따라서 여자들은 맨 마지막까지 경멸의 대상이고 아예 원천적으로 권력 구조에서 '거세'된 존재들이라는 고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과의 연대를 끊겠다는 선포예요.

p.154
Elizabeth S. Fiorenza: 성경을 역사적 모형으로 보자고 제안
성경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재구성과 재생산도 가능해 진다.
Carter Heyward: 조직신학자 사랑한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우리가 느끼는 존재의 흐름

p.183
내가 믿는 바 오늘날 사랑에 대한 교리는 주로 남성의 경험에 기초하여 형성되었고, 따라서 남성의 기준점에서 인간의 상황을 바라본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교리는 여성의 상황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제공하지 않는다. 여성의 죄는 의존, 자기 정체성의 결여, 자기를 버릴 정도로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여성의 미덕은 자율성과 자기실현이다. Valerie Saiving Goldstein 1921-1992

p.198
예수의 적극적 사랑의 행위가 상호적인 힘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통주의 기독론적 해석은 예수의 생애와 사역의 전적인 의미가 골고다, 즉 십자가를 향하는 고난에서 발견되어진다고 말한다. 마치 그가 단번에 모두를 위한 신적 인간의 드라마의 결단을 완전케 하기 위해 결말 그 자체인 고통을 추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이런 식의 견해가 예수의 사역의 도덕적 급진성(moral radicality)을 빼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수는 희생을 향한 그의 욕망에 철저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상호적인 힘에 철저했다.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 그의 희생은 도덕적 미덕의 실천으로 추상화될 수 없다. 그의 죽음은 그의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 연대성과 상호 호혜를 표현하는 사랑의 급진적 행위를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그가 지불한 대가였다.
Beverly Harrison, "The power of Anger in the work of Love" in Carol S, Robb, ed. Making the Connection: Essays in Feminist Social Ethics.

p.266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들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에서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나 혜 석!!!!!!!!!!!!!

posted by sergeant

마음, 뇌, 영혼, 신 - 2018.03.

독서/종교 2018. 6. 18. 17:41

 

 

수 많은 흥미로운 질문들을 품고있는 이 책은, 답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책이라기 보다는 작은 질문들을 이것저것 던져주는 도움서와도 같은 느낌이다. (사실 좀 답답했다는 뜻..ㅋㅋ)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상담사로서, 이런 질문들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책이 있다는 것. 참 충분하고도 좋은 일이다. 독서모임에서 읽었는데, 그래서 정리하는게 더 많이 늦어졌다. 곳곳에 나중에라도 한번 들춰 볼 만한, 생각해 볼 만한 중요한 지점들이 있고. 가이드가 되어 줄 수 있는 주옥같은 구절들도, 그리고 도저히 수긍할 수 없어서 꼭 후에 연구를 다시 해보고 싶은 부분들도 있다.

 


<책발췌>

 

p. 37
 오늘날은 문제가 더 복잡하다. 영어 성경 번역본만 수십 종이 있고, 같은 구절에 대해 각기 다른 단어를 쓰고 있거든.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어. 그렇게만 해도 불필요한 불안과 염려를 많이 덜 수 있을 거다. '마음'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란다. 과거에는 '마음'(mind)과 '영혼'(soul) 두 단어를 서로 바꿔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단어의 깔끔한 의미"를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수 있지. (...) 그러니 '마음'이라는 말이 나올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렴. 대략적인 지침은 될 거야. 첫째, 여기서 '마음'은 인지적 신경과학자들이 쓰는 것처럼 "정신생물학적 통일체의 심리적 측면"을 줄여서 쓴 과학 용어인가? 둘째, (성경의 많은 문맥에서 그렇듯) 하나의 태도 또는 공유된 태도와 신념의 집합(예를 들어, 빌 2:5; 롬 12:2)을 말하는가? 네 질문에 대한 답은 거의 언제나 '아니다'일 거야. 과학과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그 뜻이 같지 않아.
석사를 시작하기 전에, 학부 수업시간에 만난 지도교수님께 수업이 끝나고 질문을 했다. 교수님은 심리학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나는 조금 두렵다고. 교수님이 답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본인은 이 학문을 게임이라고 생각한다고. 그 때는 그 말이 무엇인지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온전한 의미를 잘 모르겠다. 내가 의미를 더하고 더하는, 그런 의미의 답변이신건지, 아니면 정말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하셨던 것인지. 다시 뵙고 기회가 되면, 한번쯤 더 여쭤보고 싶다.

p.46
이런 연구 사례들이 보여 주는 교훈은 과학의 어떤 모델을 은유로 사용할 때 자신의 신학적 신념 내지 과학과 무관한 다른 신념이 과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 말라는 거야. 과학은 본질상 변하는 학문이거든.

p.50
한 가지는 분명해.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방향은 인간이 심리생물학적 통일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거야. 질병이나 사고로 생물학적 측면이 손상되어 이 통일체가 깨질 수도 있고, 심리학적 측면이 생물학적 측면을 수정할 수도 있어.
이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많은 해방감을 느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우리가 배우는 지식과 신앙을 조화롭게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p.52
인지 과정은 뇌에 새겨져 있지만 택시 운전사들의 경우처럼 뇌를 변화시킬 능력도 갖고 있다는 것을 함께 기억해야 해. 이 정도가 오늘날 대체로 합의된 내용이야.

p.70
 유전적 차이가 나타나는 방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환경적 맥락(이 경우에는 유전형을 아우르는 가족의 종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종교가 없는 가정이라는 좀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는 유전적 결함이 쉽게 표출된 반면, 종교적인 가정에서는 달랐지. 동일한 유전적 결함이 있어도 그렇게 쉽게 표출되진 않았어.

p.73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떤 선택을 내릴 때 경험이 더 큰 기능을 담당하게 되고, 그 선택들은 어느 정도는 우리 안에 유전적인 영향을 받아서 구축된 성향, 능력, 관심사를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요약된 결과를 보면 종교성이 특징적인 패턴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종교적 태도, 행동, 신념 등에 관해 내리는 선택은 개인의 성향 및 능력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유전적인 영향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p.98
 제임스 바(James Barr)는 지금까지 제시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다섯 가지 해석을 유용하게 정리해 놓았어.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가진 불멸의 영혼을 말한다. 둘째,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이성적 추론을 말한다(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주장했고 루터와 많은 종교개혁가들이 받아들인 입장). 셋째, 두 발로 걷기 같은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말한다. 넷째, 바가 '기능성'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인간의 소명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감당하도록 부름받은 일'이지. 다섯째는 하나님 및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부분을 강조한 사람이 칼 바르트야.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를 맺을 능력 뿐 아니라 관계 자체지.

p.106
여러 성실한 성경학자들의 도움으로 이해하게 된 것들을 자신만만하게 여기면서 우리가 신앙의 선조들보다 앞서 있다고 오만해지기는 너무나 쉽지. 지난 일을 돌아보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보니 자칫하면 신앙의 선조들을 혹독하고 부당하게 비판하게 되겠구나. 그분들은 어떤 성경 말씀들에 대해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확신했고 거기엔 나름의 합당한 이유들이 있었지. 현대 과학 이전의 시대였기 때문에 일부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종종 있었고 말이다.
지난 며칠간 사실 너무 힘들었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너무 많은 논쟁을 했다. 그리고 논쟁의 한 쪽, 내가 많이 지지했던 분들이 결과적으로는 나에 대해서 한계가 있다고, 내가 속해있는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쪽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끊임없이 새겨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루어 온 성과들까지도 철저하게 도마 위에 올랐다. 정말 철저하게 다 까발려진 기분이다. 아무래도 이 문제, 정말 핵심적이고 중요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내 문제가 되니까 바로 보기가 힘들구나.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아서 노력했는데. 그나마 빨리 생각을 돌이킬 수 있었던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혹독한 비판들 가운데서, 이런 생각들도 조금은 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쨋거나 유리한 입장에 있구나. 그리고 비판적인 내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비판과 포용, 두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한계를 인식하는 것과 함께 적정하게 가지고 나가고 싶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이 쌓아놓은 탑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 긴 계주에서. 중간 지점에 있는 사람으로서. 더 많이 달려가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이미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한계가 있더라도.

p.126
다른 연구들에 따르면,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묘사하는 환상은 각 사람이 속한 문화에 따라 내용이 다르단다. (...) 뇌의 특정 부위가 작용한 결과 박생하는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은 우리가 속한 전통, 우리가 이미 받아들인 신념에 많이 의존한다는 거야.

p.131
중요한 것은 역사가 진행되면서 같은 본문을 가지고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이지.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야. 종교개혁 시대에는 이런 식의 해석의 변화로 엄청난 결과가 따라왔지.

p.137
탁월한 수학자이자 사상가이며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블레즈 파스칼은 1659년에 이렇게 썼어. "사람에게 그의 위대함을 보여주지 않은 채 짐승을 많이 닮았다는 점만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위험하다. 그의 저속함을 드러내지 않고 그의 위대함만 또렷이 보게 하는 것도 위험하다. 위대함과 저속함을 둘다 모르는 상태로 사람을 내버려 두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진화 심리학은 그런 무지를 줄이는 데 분명히 도움을 줄 수 있어.
종종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 빠진다. 중립은 얼마나 어려운것인지. 내가 과연 중립을 원하기는 하는건지.

p.167
'로이드 모건의 준칙'
"심리학적 척도에서 낮은 수준의 심적 능력의 산물로 설명이 가능한 행동을 더 높은 수준의 심적 능력의 산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가끔은 환원주의에 합당한 자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거지.
수많은 논쟁들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도 들었다 ㅋ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참 상대방을 입체적으로 보는구나. 사실 나도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뭔가 더 있겠지, 그래도 이유가 있겠지. 이런 관점들이 물론 상담을 할 때는 도움이 되지만... 일상 생활에서 많은 경우에 인간은 납작하다. 그 사실을 자꾸 잊으려고 해서 계속해서 반추한다. 너무 과잉이해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인지적 자원을 그렇게 쓰지 말아요. 모르겠다,  마음이 아프다.

p.168
이타주의와 상호 협력이 비인간 영장류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이타적 행동 범위에서 인간과 다른 영장류가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될 것은 없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비인간 영장류의 이타주의는 혈연과 호혜적 상대에게 강하게 쏠려 있다는 것이지. 그들의 이타주의가 낯선 대상을 향해 표현되는 경우는 없어. 이 대목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최우선적인 의무가 떠오르는구나. 차이점은 또 있어. 인간과 달리, 비인간 영장류는 가용 자원을 자기들만 유리하도록 불공평하게 분배하는 데 어떤 거부감도 없단다. 다시 말해, 이기심을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아.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돼.
앞에 있던 얘기랑 너무 반대되는 말 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는 것. 역시 기독교는 나를 갈아 넣어야 해. (농담입니다 농담)

p.172
"돕는 행동의 성별 차이에 대한 메타 분석적 검토 결과,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많이 돕고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도움을 많이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진짜 말도 안 됨 ㅋㅋㅋㅋㅋㅋㅋ
Lindon Eaves, "Genetic and Social Influences on Religion and Values", in from Cells to Souls-and Beyond, ed. Malcolm Jeeves(Grand Rapids: Eerdmans, 2004):102-122.
도움을 주고 받는 것과 도움의 중요성, 그리고 성격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또 다른 연구진은 전 세계 여섯 국가에서 자료를 모았어. 그 연구의 한가지 결론은 이거야. "성별은 이타주의를 측정하는 한 가지 척도가 되는데, 거의 모든 부분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더 이타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좀 어이없다 ㅋ 저 연구 좀 살펴봐야겠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자신이 많이 돕는다"고 얘기하거나,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거나, "기회"가 더 많았던게 아니라? 심리학은 너무 남성중심적인 학문이다. 한계를 느낀다.

p.177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당장 별다른 이들이 생기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드러낸다는 데 주목한 거지. 다른 영장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클라우스는 이렇게 말해. "원칙적으로, 인간이 내는 소리를 다 낼 법한 침팬지가 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는 그 방향으로 진화의 압력이 없었기 때문이고, 침팬지가 할 말이 없는 이유는 얘기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출처: 개인이메일..당황....
이것도 너무 재밌어서 연구 reference 찾아보려고 했는데 개인 메일이었다...당황.......ㅋㅋㅋ 그래도 흥미로운 얘기다. 나같은 말많은 사람은 더 공감가는 얘기랄까.

p.238
정직한 질문은 더 깊은 믿음으로 가는 성경적인 길이야.  (...) 어린 시절 나는 교만한 사람만이 감히 주님께 질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때로는 질문을 하는 것이 겸손한 일임을 배웠다. 질문 안에는 내게 답이 없고 하나님께 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질문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정직하게 질문하고 싶다. 그런 사람이고 싶다.

 

'독서 > 종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의 공공성-2019.03.01  (0) 2019.01.21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2018. 4  (0) 2018.06.18
하나님의 딸들-2018.02.21  (0) 2018.06.18
여성 리더십 논쟁 - 2018.01.22  (0) 2018.06.18
지렁이의 기도- 2017.11.02  (0) 2018.06.18
posted by sergeant

하나님의 딸들-2018.02.21

독서/종교 2018. 6. 18. 17:38

 

의외로(?) 소심한 사람이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을 많이 만들고 싶지 않아 한다. 책 읽는 걸 좋아해도, 혼자 읽고 친한 이들과 세부내용을 나누고 얘기하거나 차곡차곡 기록에 남겨놓고 나중에 다시 읽는게 행복하지, 무려 '북클럽' 다닌다고 하면 너무.. 작위적인 것 같다고 느끼던 시기들도 있었다. 책도, 흥미있는 주제들을 바탕으로 함께 읽어내는게 좋지... 그냥 인문학 서적들은 흥미가 없어서.. 뭐 아무튼간에 이런 내가 이번주를 시작으로 두개의 북클럽의 회원이 될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첫번째 독서모임은 1년 훨씬 넘게 해온 과학과 신앙 관련 독서모임인데, 이것도 뇌과학과 신앙에 대한 포럼을 듣고 머리를 딱 얻어맞은 것 같은 통찰을 얻어서, 북클럽에도 참석했다가 모임이 너무 좋아서 바뀐 해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아무래도 나에겐 포럼이 북클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트리거인가보다.(하하)

 몇 주 전에 기독교 신앙과 페미니즘 관련 모임 갔다가 너무 화가 났다. 솔직히 좀 절망스러웠다. 이거 정말 기독교를 떠나야 하는건가. 물론 예수님을 떠나진 않겠지만.. 한국 개신교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 이정도가 한계라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수준의 논의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거라면 과연 내가 여기서 계속 지낼 수 있을지 심각하게 회의가 들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만난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존재에서 아주 짧지만 큰 위안을 얻기도 했었다. 니가 무슨말을 하는지, 나는 알고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너의 존재가 고마운. 그런 강렬한 느낌.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젊은 기독교인 페미니스트들이랑 얘기할 수 있는 장을 찾아볼까 고민이 되었다. 기독인 페미니스트로 치면, 나름 제이디스 모임도 떠오르기는 하지만, 친목도모의 면이 더 강해서.. 나에게는 좀 이 절망감을 함께 토해낼 수 있는 더 빡세고, 무섭고, 센 페미니스트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알고있는 북클럽이 하나 있긴 했는데, 혹시나 싶어서 문의를 해봤더니 1차 회원 모집이 마감됐다고. 그래서 "할 수 없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몰라 될대로 되라지'하고 그냥 넘겼는데, 담당자한테 다시 연락이 왔다. 참여하고 싶으면 참여해도 된다고. 회원을 좀 더 모집하기로 했다고. 그래서 이번주에 방문하려 한다. 설렌다.

 독서모임 책들은, 블로그에 잘 올리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런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책을 끊어 읽기 때문도 큰 것 같고.. 내가 읽고 온전하게 느꼈던 것만 다 적기에는 모임에서 이루어진 논의들이 너무 풍성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논의들을 다 적을 생각을 하면 약간 overwhelming 된다.
그런데 새로 시작하는 모임에서의 책은, 쉽고 짧은 책이라고 한번에 다 읽어 가기로 했다. 표지가 파란색, 보라색 두가지이고... 랜덤으로 배송된다는데,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이라 기쁘다.

아마 모임이 끝나고 나면 또 여러가지 생각들과 감정이 들겠지. 내가 예상하고 설레하는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들일거라고도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좋은 책을 읽으면서, 책 자체에서 느꼈던 감동과 감사를 조금이나마 블로그에 기록해 두고 싶었다. 책을 만나게 해 준 모임에 이미, 미리 감사하다.
 
책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여성혐오주의자, 인 동시에 신앙의 대부들의 발언을 발췌하며 시작한다. 지금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이 우스웠다.

 

 

 

 

 

 

 

 

 

 

 

 

 

 

 

 

 

 

 

 

 

 

 

 

 

 

 

 

 

 

 

 

 

 

 

 

 

 

 

 

 

 

 

 

 

 

 

 

 

 

 

 

 

 

 

 

p.46 (문제의 발단은 철학자들)
 서구 정신의 아버지라 할 만한 아테네의 세 남성은 놀라울 정도로 여성을 비하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아테네는 여성의 이름을 딴 도시다.


p.72 (암흑기의 암흑)
 토마스 아퀴나스(주후 1224/24?-1274년). 그는 수도사였으며 가톨릭교회의 일등 신학자이기도 했다. 수도사들은 여성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결국엔 여성이 남성을 정욕에 휩싸이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우습다. 남성들에게 여성은, 유혹하는 동일한 주체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와 닿았다. 정욕을 휩싸이게 만드는, 악한 악마적 존재일 뿐. 똑같이 죄를 지을 수 있고 정결함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지지 않는 시각. 결국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음란함을 마음껏 투사해 온 '연약한 사람'인 남성 수도사들. 반대로 노예보다 낮은 지위의.. 인간이기 보다는 대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마녀로 몰려 교수형 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여성은 자신을 돌볼 정도의 지혜도 없기 때문에 누군가를 가르치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는 여성의 지위가 노예보다 더 낮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훌륭한 신학자이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여성혐오주의자였다. 마치 아무리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시대의 영웅들도 성매수남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의 충격과 거의 비슷했다. 여성에게 구원자는 없다.

이런 여러가지 오래된 여성혐오의 역사를 읽다가 3부에 와서 마주친, 혁명가 예수의 존재는 내 마음을 울렸다.

p.97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이것을 기억하라. 비참하게 얼룩진 인생을 살았던 이 여성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물이며 이 물이 그 여성 안에서 솟아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돌로 지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때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다른 길로 여행을 하도록 하셨다.

 

책의 5부부터는 현대 교회들이 여성의 안수를 거부하고, 리더십에 제한을 두기위해 사용하는 고린도전서의 말씀들과 디모데서의 말씀들을 그 맥락에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잘 파헤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성실하게 한다.
예컨대, 고린도전서 11장 10절에 관한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p.158 (요약)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6-12절이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인이 주장하는 것이 따로 있고, 동양인이 주장하는 것이 따로 있다. 유대인의 시각은 6-9절까지 나오고 있다. (...) 이 뒤에 이어지는 10절로 인해 위의 표현이 바울이 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보다는 바울이 유대적 견해를 한 번 더 인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해 보인다. (...) 11절에서 우리는 위대한 "그러나"를 만난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11-12절)

책은 계속해서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했던 여성혐오자 히에로니무스의 전형적인 수법, 잘못된 오용과 단어 끼워넣기를 비판하며 성경의 내용을 다시 잘 살펴보기를 촉구한다. 게다가 "바울은 아내들에게 단 세 구절을 썼으나 남편들에게는 아홉 구절"의 권고를 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항상 간과하는 이야기들이다.

책에서 여성들만의 모임을 시작하라는 적용점을 제시하는 것도 매우 좋았다. 그런 점에서 모임이 훨씬 더 기대되었다. 또한, 나는 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이 '세속 페미니스트'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측면에서 많은 의문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책에서 제시된다는 느낌도 받았다. 비기독교인들은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주류가 많은 반면,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둘 간의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는 시각. 비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확실히 정립해보지 못했지만, 그와 별개로 기독교적 관점을 잘 드러내주는 흥미로운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도로시 세이어즈의 글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계획들도, 만날 사람들도. 설렘 반 두려움 반 여러가지 양가감정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항상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p.233
 가장 처음 말구유 옆에 있었고, 가장 마지막까지 십자가 앞에 남아 있었던 것이 여성들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들은 예수님 같은 남성을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결코 그런 남성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지자이며 선생인 그 분은 여성에게 절대로 잔소리하지 않았고 입에 발린 찬사도, 감언이설로 속이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선심 쓰는 체하지도 않았다. 결코 여성에게 어리석은 농담도 하지 않았고, 여성들에게 "여자들이란, 아이고 맙소사!"라고 하거나 "저런 형편없는 것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분은 화를 내지 않고 꾸짖었고, 생색내지 않고 칭찬했으며, 여성의 질문과 논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여성만의 특별 구역을 만들지도 않았고, 여성에게 여자답게 굴라고 하지도 않았으며, 여성성에 대해 조롱한 적도 없다. 여성을 무시하거나 어줍잖게 남성의 위신을 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분은 여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었고 언제나 따뜻하게 대하셨다. 복음서 어디에서도 여성의 사악함을 거론하는 행동이나 설교나 비유를 찾아볼 수 없으며,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서도 여성의 '우스꽝스러운 본성을 암시라도 하고 있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바로 이 분이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시다.

 
posted by sergeant

여성 리더십 논쟁 - 2018.01.22

독서/종교 2018. 6. 18. 17:30

 

이 책은 여성리더십에 대한 평등주의적 관점과 상보주의적 관점으로 나뉜 두 토론에 대한 책이다. 상보주의적 관점이란 전통주의적 관점으로서 여성 리더십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책 이름을 접했을 때, 나는 내게 꼭 필요한 책이 드디어 새물결 플러스에서 발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상보적 관점’을 소개한 책의 내용 일부를 먼저 접하고 약간 화가 났다.  평소 새물결 플러스의 책은 믿고 구매하는 편이지만, 과연 전통주의적 관점을 평등주의적 관점과 나란히 놓은 책이 내게, 그리고 이 책을 읽을 여성들에게 가치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전통주의 관점들은 이미 모두가 다 잘 알고 익숙해져 있기에 지면을 할애하지 않아도 무리가 없지만, 평등주의적 관점들은 가뭄에 콩은커녕 존재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기 때문이다. 책 제목이 아무래도 논쟁이니까, 필수불가결 하다는 것쯤은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불쾌했다.


  이러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출판사 이벤트에 응모했는데, 내게 책이 배달되었다. 나는 이벤트에 응모할 당시 페미니스트인 몇 지인들에게 내 글을 공공연하게 공유했다. ‘이렇게 응모했는데도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주시면, 제가 책임지고 리뷰 하겠습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나의 지인들은 배달 된 책에 관심을 표했다. 그리고 나는 책을 통해 평등주의적 관점들로부터 얻은 귀한, 양질의 자료들을 그분들과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 중 일부는 책이름을 확인하여 구매하기도 했다.) 마치 저자들이 논쟁을 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따뜻한 인사를 잊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그런 인사를 차용한다고 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게도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현했으나, 귀한 책을 보내주신 새물결 플러스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평등주의적 관점을 읽으며, 나는 린다와 크레이그의 세련된 유머와, 핵심을 찌르는 주장에 감명 받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사도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인 유니아에 대한 발견이다. 그리고 194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번역본들은 그녀를 시종일관 남성으로 옮겼다는 사실까지도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녀가 성별이 바뀐 이유는 “사도”란 용어가 여성에게 사용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정 때문이다. 네 학자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여성’이었던 유니아의 발견은 그러한 만연한 삭제들에서도 살아남은 기록일 수 있겠다. 이 시점에서 나는 유니아가 마치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유관순열사처럼 느껴졌다. 지우고 지워냈지만 결국 하나만 남겨져 있는 유명한 여성운동가처럼. 그마저 없어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걸까, 그런 존재. 그리고 더 다행히도 린다와 크레이그는 유니아 외에도 다양한 여성 리더십의 대표들을 제시해 낸다. 미리암, 드보라, 훌다, 브리스길라... 특히 마리아에 대한 크레이그의 <마리아는 제자의 자세를 취했다> 해석은 만약 현대에 예수님이 활동하셨다면 그의 가장 수제자가 마리아가 아니었겠냐는 동료들의 의견을 다시금 곱씹게 해준다.
  지워지는 여성에 대한 문제는 비단 성경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여성의 역사는 지워진다. 세탁기를 발명한 이는 여성이었으나(마가렛 플렁켓 콜빈) 얼마전 나는 유투브 Prager University에서 발간한 feminism 동영상에서 “세탁기를 발명한 것은 남자였다”고 말하며 현대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하는 여성인 교수를 보고 경악했다.(4분11초_https://www.youtube.com/watch?v=ZR9FHKKbMZo) 그 뿐일까,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지워졌다는 수많은 여성운동가들의 존재는? 이러한 예는 굳이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겠다. 얼마 전 영화<1987>만 해도, 고문가해자 미화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여성의 존재를 축소하고 왜곡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시들은 끝도 없으니 이 정도에서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아주 오래된 역사이다. 나는 책에서 자신들을 상보주의자라 부르는 전통주의자들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시각에서는 아주 관대해 봤자, 여성을 여전히 도움을 주어야 할 시혜적인 대상으로 보는 태도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굳이 지적하고 싶지 않다.

  평등주의 관점을 통해 많은 쾌감을 얻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도 있었다. 두 평등주의자들은 여성의 안수권과 리더십에 대한 내용은 적절하게 옹호하면서도 ‘세속 페미니스트’와 ‘동성애’를 자신들과 구분하는 의견을 공공연하게 표현한다. 실상은 세속 페미니스트들의 투쟁 덕분에 1918년에는 영국에서, 1920년에는 미국에서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또한, 그들이 강하게 반대하는 동성애자들의 경우에는 일부의 목사님들께서 이미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한 해석을 곁들여 동성애를 죄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 반대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다만 나는, 평등주의자들이 배제하는 동성애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수용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에 강하게 동의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들이 오랜 시간 후에 모두 교회에서 환대받게 되었을 때에조차 여전히 교회의 허드렛일과 식당일과 온갖 잡무들을 다 맡아 하면서도 최종 리더십 자리에는 절대 오를 수 없다는 소릴 듣고 있을 것 같은 자매들을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많은 이들에게 추천할 것이다. 지워진 역사에 대한 발굴과, 맥락과 역사를 통해 성경을 읽어내는 통찰을 함께 하고 싶으니까. 각종 혐오의 선봉에 서 있는 기독교를 정화하고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할 건전한 논쟁의 내용들이 이 책에 담겨 있으니까.

   다시 한번 좋은 자료들을 책으로 였어 주신 새물결 플러스에 감사를 드린다.

posted by sergeant

지렁이의 기도- 2017.11.02

독서/종교 2018. 6. 18. 17:27

 

'지렁이의 기도'는 추천사들부터 아주 화려하다. 추천사만으로도 약간 '간증' 분위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들 한보따리. 주옥같은 통찰들.
저자 목사님은 성령의 은사(ex.방언)이 아니더라도 지성과 학문을 위해 봉사 할 수단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 부분에서는 동의가 많이 되면서도 뒤 이어 나오는 신령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여전히 '참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제'하며 바른 앎과 지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에 국한되지 않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비록 한국교회가 반지성주의로 몸살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성과 이성, 합리적인 것으로만 가두어 두기에 우리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시다.

책은 나의 완악하고, 두려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태도들을 회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나님은 크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지인들에게도 자세하게 꼭꼭 씹어서 추천하고 싶다.

 


 

추천사 중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소원으로 삼아 드리는 간청이요 하나님 통치의 확장을 위해 드리는 몸의 봉헌이다. (김회권)
지렁이는 하나님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기댈 데 없는 존재를 상징한다(시22:6, 시41:14) 기도는 지렁이 같은 존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아뢰는 말이다. (김근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의 은혜를 구한다고 생각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걔는 포유류라도 되지..나는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ㅋㅋ.

p.30
"하나님 왜 이러세요? 됐다니까요, 저는 (그딴 거)필요 없다니까요." .. 내게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잇는 다른 수단이 있다고 나름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도가 아닌, 지성과 학문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컸다.

p.32
"아들이다, 됐냐?! 뭐, 그런 것 갖고 하루종일 화를 내고 그러느냐?"
> That's my man, 우리 주님ㅋㅋ 이분이 바로 내가 아는 나의 주님이시다.

p.73
우리는 기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유비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과의 사랑의 환대와 친교를 맛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신적 비밀을 배울 수 있다.

p.78
그렇지만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을 아빠라는 호칭으로 부르셨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존경심과 함께 두 분 사이에 존재하는 기고 친밀한 관계성이 여과없이 잘 드러난다.

p.93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서 응답받으리라고 확신할 수 잇는 이유는, 그 기도를 드리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즉 기도응답의 비결은 우리의 열심, 노력, 끈질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한 성품에 기초한다.

p.96
기도할 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열심이나 태도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바른 지식을 갖고 있으며, 그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얼마나 신실하게 신뢰하고 있느냐다.

p.124
하지만 방언은사의 진가를 알려면 방언통변을 받아봐야 한다. 방언통변을 받아보면, 방언은사가 얼마나 깊고 오묘한 그리고 유창하고 수려한 기도인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두려워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실 그분은 진정한 자유를 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신데도, 우리는 그 분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었을 때도 그와 같았을까. 처음 방언 통변을 받을 때 내 마음은 그런 마음의 연장이었다. 내가 당시에 고민하고 있던 문제들과 은밀한 죄악들, 교만과 부끄러운 수치들이 방언 통변을 받으면 모두 드러나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방언 통변을 받으며 내가 그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동시에 내 안의 성령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드리는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자유한다. 오묘하고 깊은 기도를 하시며 우리를 항상 중보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음은 정말 귀한 경험이었다.

p.150
 믿음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값싼, 감정적인 긍정이나 승인이 아니다. 기분이 달콤해지면 덩달아 믿음도 생기고, 기분이 우울해지면 믿음도 바닥을 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제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확히 그리고 자세히 알수록 우리의 믿음도 함께 커진다. 또한 참된 믿음은 우리의 의지와 정서를 삼위 일체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온전히 일치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 깊고 친밀한 연합을 경험할 수록 그에 비례하여 우리의 믿음 역시 더욱 깊어진다.

p.153
 성경은 두려움이 가장 큰 죄라고 가르친다.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계명은 "두려워하지 말라"다.

p.167
내가 믿기로는 지성과 영성은 하나이며, 성경도 분명히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p.172
분명한 것은 잘못된 지식이나 편견, 비뚤어진 이념이나 불건전한 가치관을 갖고 있으면 기도가 타락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건전한 지성의 개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p.296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처음 방문하고서 받은 느낌은 한결같이 "한국인들이 더럽고 게으르고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한국인들이 너무 사랑스럽다"고 고백했습니다.
>읽다가 빵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posted by sergeant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2017.11.02

독서/종교 2018. 6. 18. 17:25

 

 

신앙 서적을 좋아하지 않았던 오래 전 시기도 있다. 성경의 가르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려 깊고 풍부한 내용으로 작성된 신앙 서적은, 성경 만큼이나 특별한 은혜를 제공한다. 그래서 나는 성경은 일반식, 신앙 서적은 특식 혹은 별식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어느정도는 지금도 유효한 생각이다. 집에서 해 먹는 밥보다 남이 해주는 '맛있는' 밥을 항상 먹고 싶어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 바르고 좋은 신앙서적을 한 두권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과거 간사 시절, 신학과 성경 지식에 대한 부재 때문에 리더들을 양육하는 것에 나름대로의 부담을 느꼈다. 무식이 용감하다고, 사실 부담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 때 생각에는 '주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이끌어 주시겠지!'라는 자신감이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나를 긍휼히 여기셨던 주님은, 때에 맞는 은혜를 우리 팀에 부어주셨는데 내 머리나 생각으로 해 낼 수 없었던, 말씀에 대한 통찰들은 물론, 다양하고 좋은 신앙 서적들을 내게로 이끌어 주셨다. 우리는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고 나누었었다. 이 책 또한 그러한 책의 목록들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봐도 놀라운 것은, 특히 '빛과 어둠이 영적 전쟁' 같은 종류의 책은 나 스스로는 절대 읽어 보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책이라는 점이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나와 비슷할 것 같은데, 일단 이 책은 표지부터 제목까지 너무.. 너무나도 이단스러운 스멜을 풍긴다 (ㅋㅋ) 나는 '안전함'이 중요한 사람이라, 환상과 예언 등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거부감에 더해 나는 '지성제일주의' 또한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시며 합리적이시고 상식적이신 분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방언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그 조차도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고, 불과 같은 성령 체험 등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히 큰 편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 책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쨋거나 이 책을 처음 읽으며 많이 놀라웠던다. 책은 릭 조이너 목사가 어떻게 환상과 예언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예언적 체험이라는 것은 많고 다양하지만, 주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방법 또한 지성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은 합리적으로 아주 그럴듯 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위대한 선구자들의 이야기들은 어느정도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데, 당시 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깊은 은혜의 체험까지 들어가기를 꺼려한다는 '후안 까를로스' 목사님의 말에 큰 공감을 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깊은 은혜의 바다에서 우리를 부르시지만, 우리는 해안가에서 찰랑찰랑이는 파도에 발목을 담그고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지성과 합리의 영역으로 끌어 내렸지만, 주님은 결단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따라서 이러한 지지적인 말씀들에 힘입어 책을 더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었고 '예언과 꿈, 계시'에 대한 저자의 인정할 수 있을 법한 설명으로의 차분한 시작, 그리고 그 계시의 사용이 어떻게 이루어 져야 하는지에 대한 제언들까지 굉장히 분명하고 훌륭했다.

본문으로 들어가며, 나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책이 끝머리 쯤에는 "여기 있는 사람, 심지어 왕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까지도 만일 그들이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모두 자신의 삶을 달리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p.180) 라는 말이 나온다. 이 책을 읽은 나의 마음 또한 정확히 그것과 같았다. 릭 조이너 목사가 보았던 환상과 계시들은 성경내용의 전체를 아우르고 있으며 지혜와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현재에서 지금 이루어 지고 있는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들에 대한 엄청난 통찰을 준다. 더불어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분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그 분의 위엄은 어떠하신지를 아주 희미하게 엿볼 수 있다.

나는 책을 복사해서 붙여놓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책의 모든 부분들이 주옥같고 중요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발췌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소중한 이들에게 이 책을 몇 권 씩이나 선물했고, 또 다시 책을 사곤 했다. 그리고 어제 다시금 이 책을 읽으며, 기도 해야 겠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책을 읽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망각하고 희미해져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이 떨어지게 되는 것 같다. 사람은 얼마나 약하고 악한 동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복해서 나를 일깨우시고 기억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싶다. 더불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보혈, 그리고 성령님의 따뜻하심을 경험하기를 바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에서 더 많은 이들이 함께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