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넘어 아침으로!" 책 표지에 저자교수님께서 사인을 해 주시며 적으신 문구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밤(?)이 있고, 그 밤에서 새벽으로, 결국에는 새벽에서 아침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선하심..? 동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말,,?


창조과학회는 물론, 여성주의 및 동성애 반대, 세습과 성문제로 바람 잘 날 없는 우리 한국 기독교.

동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이 바로 지금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은 6월에 읽었으나 계속 정리하지 못하고 넘어갔는데, 토르3 개봉한 기념으로(??!!) 생각나서 찾아보니, 블로그에 정리가 안 되어 있다는걸 알게됐다ㅋㅋ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토르 영화 좋아해서 배우자와 킬링 타임 용으로 1,2편 가끔 봤었는데.. (어벤져스 및 아이언맨, 캡틴 시리즈 너무 자주 봐서 질렸음.. 나의 대안 토르..) 과도기를 읽던 중에 2편을 다시 봤었다. 그 때 약간 당황스러움을 느꼈는데..(ㅋㅋ)

이 책을 읽고 나서 과학적인 마인드가 나도 모르게 스며들고 장착이 된건지..

음, 아스가디언들이 5천년 밖에 못 산다고? 설정이 너무 후잡하잖아.. 지구 나이가 몇년인데....

음.. 토르가 지금 바이프로스트를 통해서 거의 날라댕기는데.. 저거 너무 진짜 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설정.. 뭐임.. 하 너무 판타지야..

이렇게 비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해서 너무 고통스러웠다..ㅋㅋ


그만큼 쉽고 재밌게, (전문가까지는 못 되더라도) 과학적인 기본 교양을 쌓을 수 있는 너무 좋은 책이다 ㅋㅋㅋ

사진도 많이 들어가있고, 게다가 우주사진 너무 예쁨 ㅋㅋ 표지도 예쁨..


창조과학자들이랑 싸우다 보면 "한낱 미천한 과학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블라블라" 이런 얘기 나오는데

제발 '한낱 미천한 과학'이 만든 인터넷과 스마트폰 좀 갖다버리고 와서 다시 얘기했으면 좋겠다.

무크따 선물로 보낸 오빠 목사님에게 조만간 과도기도 한권 놔드려야 겠다.


한국교회의 지성 회복을 위하여, 새벽을 넘어 아침으로.

 


p.159

 과학의 영역에 관해서 그리스도인이 무신론자와 대화할 때는, 과학은 유신론이나 무신론을 직접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 즉 과학이 중립적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과학을 넘어서는 수많은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에 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들보다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기독교 신앙의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 과학의 영역과 과학 외적인(형이상학의) 영역을 구분하는 일은 비그리스도인들이나 무신론자들, 혹은 불가지론자들과 대화할 때 우리가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고 서로 오해하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 안타까운 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뒷받침하는 지적인 토대를 거의 갖고 있지 않거나 혹은 너무 약한 토대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누가 신을 만들었는가"와 같은 성립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무신론자들과의 대화나 토론에서 밀리고 만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을 명확히 이해하는 일,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명확히 파악하는 일, 그리고 신앙의 지적 토대를 굳건히 다지는 일이다.


p.167

"신학에 대한 이해가 원초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무신론자는 외계인에게 납치당한 적이 없는 미국인만큼이나 드물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이글턴은 오히려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꿰뚫어 보고 있다. 우리나라 상황으로 번역하자면, 목사의 성추행, 대기업으로 전락한 교회, 샤머니즘과 기복 신앙을 파는 타락한 종교문화, 여성에 대한 불평등 등에 관해서는 도킨스나 히친스의 비판에 공감하지만 그러나 사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는 대변한다. 그러면서 예수의 삶은 희생과 섬김의 삶이었고 그의 가르침은 오히려 정의와 사랑을 강조했으며 성경은 자유주의자들의 낭만적인 생각보다 훨씬 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회의를 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는 종교라고 일갈한다.


p.187

과학은 자연을 다룬다. 자연은 사람의 힘이 가해지지 않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으로 설명되는 자연현상이 왠지 신을 배제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중력에 따라 스스로 운행되는 행성의 운동이나 스스로 자기복제를 하는 세포나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종의 분화도 비슷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가 확연하게 보이지 않고 과학으로 검출되지 않더라도 이 모든 자연현상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자 고백이다.

posted by sergeant

창조과학과 세대주의 -2017.09.26

독서/종교 2018. 6. 18. 17:20

 

 

<창조과학과 세대주의>를 읽으며, 예상치 못한 충격들에 마음만 점점 힘들어져 가며 쓰는 글.. 빡침주의

 [전도사들도 안 믿는 창조과학]
사실 창조과학은 내 인생이나 신앙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었다. 그런게 다 뭔 소용이람ㅋ 창조과학 말고도 고민할 문제는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저 문구를 본 이 후 부터는 알 수 없는 불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학을 전공하는 이들이 믿지 않는 내용이, 교회 대중들에게 열광을 받고 있는데.. 도대체 왜 그에 일말의 책임 있는 사람들은 입을 닫고 가만히 있는걸까. "어쩔 수 없다"고 하는걸까. 아니, 오히려 어쩔 수 없다며 침묵하고, 나아가 그를 옹호하는 선택을 하는 걸까. 이게 바로 내 불편함의 시작 포인트였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롬11]
그리고 일년 정도, 가볍게나마 과학과 신학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귀한 기회였다. 우연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니. 어쩌면 내가 강연과 독서모임을 갈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ㅊ신대에 예정되었던 과학과 신학에 대한 강연을, 진화론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강제 취소시키는데 들었던 수많은 노력과 권위주의.. 당시엔 그 무례함과 개념없음을 전해 듣고, 신학교가 제 정신인가.. 싶긴 했다ㅋ 그런데 요즘 예장합동 하는 행태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지금 돌이켜 보면 크게 놀랍진 않다. 
 결국 ㅊ신대생들은 그 명품강의를 듣지 못했는데, 덕분에(?) 신학생이 아닌 나에게 기회가 왔다. 권위주의와 은폐, 무례함과 반지성에 맞서서 꾸준하게 이 분야에 대해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 오신 많은 분들을 비롯하여, 황당한 강의 취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소에서나마 당일에 강연을 해 주셨던 우종학 교수님이 계셨기에 나는 완전히 새로운 강연, 불편함에 대한 답을 접할 수 있었다. 

[신학의 부재인가]
모임을 통해서는 주로, 과학에 대한 내용을 많이 접했지만 사실 내가 생각했을 때 창조과학의 진짜 문제는 "신학의 부재"였다. 그러나 신학생이 아닌 이상..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이에 대한 내 의견을 주변 목사들과 나누면 돌아오는 응답은 "너는 왜 다 아는 내용을 새로운 것처럼 얘기하냐" 혹은 "사람들의 관심사는 너의 관심사와는 좀 다르지"정도가 되겠다. 과연 "다 아는 내용"을 모두가 알고 있을까? 영향이야 조금 있겠지만, 그렇다고 성경을 "관심사"에 따라 가르쳐야 하는건가?

[창조과학의 신학적 둥지]
결국 나는 오늘, "창조과학과 세대주의"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부제가 "창조과학의 신학적 둥지"이다.  책은 고대로부터 19세기까지의 젊은 지구론을 다루며, 현대 세대주의 종말론까지도 다룬다. 세대주의?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 했다. 그렇지만 그를 이해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6000년에서 일만년을 주장한다는 창조과학의 젊은 지구론의 뿌리는 세대주의인데, 첫째 장부터 보면 이건 거의 신천지급 아닌가 싶을정도로.. 당황스럽다.
 젊은 지구론의 뿌리가 단순히 "문자적으로, 천지창조에서 그리스도 탄생까지 성경에 나온 연수를 계산해 보았더니 6000년쯤 되니, 지구의 역사도 그럴 것이다."라는 나이브한 관점을 넘어서서, 여섯개의 시대를 나누고 한 시대 당 천년, 즉 6000년 이후에 7000년대에는 주님께서 쉬셨듯이 우리도 안식, 즉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가적 뉘앙스.. 이것을 "무지함" 또는 "천진함"으로만 보아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뿌리를 가진 흐름을 목회자들이 모른다고..? 그래, 공부 싫어하면 모를수도 있지...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결국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창조과학이 말이 안 된다는걸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입 다물고 있는" 목회전공 및 신학 전공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누지 않을 수 없다. 몰라서 안가르친건가, 알고도 안가르치는건가? 어느쪽인가? 물론 어느쪽이든 비난을 피해갈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목회 전공인들이 이러한 내용을 몰랐다는 것은 좀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소명 받았다며.. 성경 좀 잘 공부해서 제대로 전해줘야 할 것 아닌가..
 그들의 직무유기 덕분에 나는 전공책을 한권 더 읽거나, 성경을 한 구절 더 묵상할 시간에 창조과학을, 세대주의를 공부하고 있다. 그렇다. 사실 예전에도 나는 항상 그 점이 불만이었다. 교회에서는 왜 자꾸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려고 하는가? 내가 내 삶에서 열심히 그 자리를 지키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리더의 자리에서 왜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도록 팔로워들을 촉진시켜야 하는 것인가. 왜 지금 평신도는 말씀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목회를 흉내내야 하고, 목회자들은 제대로 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말씀을 전해주지 않는 건가...?
 아무튼간에 그들의 직무유기 덕분에 오늘의 긴 밤에도 나는 "한낮의 우울"을 다시 펼치기 보다는 "창조과학과 세대주의"책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한다. 어쩌면 나 또한 내 내담자를 대하기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 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나는 비난의 화살을 그들에게 돌린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자기 필요대로 해석하는 사람들. 창조과학을 신봉하고, 교인들을 몰지성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고 천박한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목자랍시고, 자신에게 '님'자를 꼬박꼬박 붙이기를 무언으로 강요하며 나에게 봉사를 요구하는 이들. 필요할 때는 하나님을 운운하다가, 결정적일때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이들. 당신들의 무지와 게으름 덕분에 내가 들여야 하는 수고에 애도를 표한다. 

그러나 어쩌겠나.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신앙에 자기만 책임 질 수 있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목회자나 존경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혐오하고, 강한 힘과 결탁하는 당신들에게 나는 오늘도 화가난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현장에서 그에 맞서고 싶다. 무지하고 게으르고 싶은 나의 욕망에 나도 반기를 들고자 한다. 그러니 제발 목회자들도 좀 그래주기를 바란다. 

이 글에 "좋은 목사님도 있어."라는 반발심 들어도 나를 가르치려 들지는 말길. 나도 진심으로 존경하는 목사님/훌륭한 선교사님들이 주변에 계시니까. 그러나 그 비율은 현저하게 낮은 것이 사실이니까.

 

 

이후 참고할 법한 책의 발췌 내용들
p.202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라는 용어는 침례교도 커티스 리 로스가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집지 '워치맨 이그재미너'의 1920년 7월자 사설에서 그가 "대근본교리들에 여전히 매달리며 근본교리들을 위해 대 혈투를 벌일 뜻이 있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드이라 부를 것을 제안"하면서 유행했다. 근본주의자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복음주의자들인 셈이다.
1920년대에 자유주의와의 투쟁에서 패하면서 1930년대에 근본주의는 분리주의적 성향이 농후해졌다. 데이비드 비일의 근본주의의 역사는 근본주의자가 서술하는 근본주의의 역사서다. 그는 근본주의의 역사에 관해서 1930년 전을 비순응주의적 근본주의, 이후를 분리주의적 근본주의로 나누고 있다. 이 책에서 "전투적," "분리적"이라는 형용사는 근본주의를 묘사하는 미사여구이다. 이 책의 영문제목처럼 "순결함을 추구함에 있어서" "분리와 전투"는 마땅히 치러야 할 댓가이다. 근본주의자가 전투적이지 못한 복음주의를 형용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는 "포용적"이라는 것이다. 이 포용적 복음주의자들은 "순결함을 추구함에 있어서" 전투적이지 못하고 분리적이지 못한 타협주의자들인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의 전투성은 반계몽적, 반지성적, 반문화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근본주의라는 단어는 문화적 고정관념으로서 변질되어 버렸다. 세계저인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에서 근본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사고방식의 8가지 경향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
1. 학문과 과학에 대한 전체적 의심
2. 기계적 성경 영감설 혹은 '구술 영감설'
3. 킹제임스역(에 대한 미신적인 경외심)
4. 모든 성경말씀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
5. 분리주의적인 교회론
6. 문화적인 폐쇄성
7. 복음에 함축된 사회적인 의미들을 거부
8. 전천년설 종말론 주장
이처럼 근본주의는 패키지화된 신앙태도이다.
posted by sergeant

아론의 송아지- 2017.03.10

독서/종교 2018. 6. 18. 17:18

 

친절하고 쉽게 읽히면서도 속 시원하고 내용이 풍부한 글을 쓰는 능력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걸까?

아론의 송아지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책은 하나님을 우리의 입맛대로 맞추고 가두려 하고 나아가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그 하나님'을 숭배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창조과학, 특히 젊은 지구론에 대한 비판이다.

  실제로 내가 창조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건 '전도사들도 안 믿는 창조과학' 이라는 묘한 구문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수식어들에 대한 궁금증을 말끔하게 해소시켜 준다. 아... 이래서 전도사들도 안 믿는 구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 과학, 그리고 과학의 눈으로 바라본 신앙 이라는 두가지 챕터로 나누어 져있는 이 책을 통해

신앙과 과학을 이상하게 뒤섞거나 반대로 완전히 단절시켜 버리는 몰지성적인 논리를 반성하고

 세계관과 학문의 바른 층위에 따른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나아가 이 논의들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삶의 태도도 정립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참 의미있었다.

 


<책발췌>

 

p.15

우매함은 선의 적으로서 사악함보다 훨씬 위험하다. 우리는 악에 맞서 항거할 수도 있고, 악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힘으로 저지할 수도 있다. 악은 자멸의 싹을 지니고 있다. 최소한 사람 속에 불쾌감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매함에는 백약이 무효다. 우매함에는 저항도 힘도 소용이 없고, 기본 지식도 쓸모가 없다. 우매한 자는 제 선입견에 어긋나는 사실들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p.88

기독교 종말론에서 "때"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내세의 일만 가치가 있는 것이고 현세의 삶과 역사는 하찮은 것이라는 이원론에 빠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현재 이 땅에서의 삶은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이비 여성 예언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가족을 팽개치고 해외로 도피 행각을 벌였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소명을 얼마나 무가치하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한 가정의 어머니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어린 자식을 버리고 해외로 도피해버리는 것, 또는 한 가정의 아버지가 종말의 파국을 피하겠다고 가족을 등지고 나홀로 해외로 도피해버리는 것,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양식과 감정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종말 신앙은 결코 인간의 지성과 양식을 저버린 몰역사적인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이다.


p.94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의외로 이원론적 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원론이란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선한 일이고, 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활동은 생존을 위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선하지도 의미가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이것은 교회를 빛의 영역으로, 세상을 어둠의 영역으로 극단적으로 나눠 접근하는 태도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는 물론 타락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실체가 동등하게 다투고 있는 혈투의 장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우주 전체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이미 가지고 있는 화가와 진지의 절반을 적에게 내어주고 전쟁을 시작하는 거소가 같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면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필요한 동시에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해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오늘날 과학은 인류의 삶에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실체다. 과학 기술의 진보는 경제적으로 막강한 재화를 창출할 수 있고, 이런 경제적 힘은 당연히 정치, 사회, 문화 등 우리를 에워싼 삶의 모든 분야에 강력한 입김을 미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는 것, 그리고 그 과학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 더 나아가 자연 과학적 인과 관계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혜안을 갖추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sergeant

 

 

한창 심취해 있는 독서모임과, 새롭게 발족된 '과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단체를 통해 다양한 책들을 접하고 있다.

근 1년간, 기독교 상담에 대한 고민에 실질적인 행동들로 답하고 한발짝씩 나아가면서, 신학과 성경의 바른 해석에 대하여 제대로 된 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의외의 장소에서 추천받은 여러 책들을 통해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서 감사했다. 비록 내가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아니지만, 바른 성경의 이해와 바른 세상에 대한 이해는 바른 제자의 길을 안내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사회과학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문제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고군분투하지 않는 우리의 게으름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교회에서 과학을 접하는 것은, 아무래도 창조과학이 먼저가 아닐까 싶다.

어릴 때부터 받아왔던 기독교 교육들은 문자주의적인 성경 해석을 자연스럽게 요구한다.

그리고 창조과학은 문자주의적 해석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기독교=문자주의적 성경해석=창조과학 인 것인가??

창조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것일까??

위와같은 고민들을 가지고 무신론 기자에 감정이입을 하며 과학과 성경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입문자에게 적합한 책.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해결되지 않았던 의문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시는 한 교수님의 발언이 참 따뜻한 이유는

저자이신 교수님이 가지고 계신 사명감과 한국교회 다음세대를 향한 사랑으로 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을 해 보았다.

 

책과 별개로,

처음에는 참석한 포럼에서 교수님께서 '과신대'라고 자꾸 하시길래, 과기대를 헷갈리시는건가 싶었는데(ㅎㅎ) 사명감을 갖고 만드신 단체 이름이었다. 그리고 '무크따'도 책 이름...ㅋㅋㅋ 나도 모르게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묻다'에서 강조하시려고 다를 쎄게 발음하시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책을 보고 '따지다'여서 놀랐음...하하하


읽기 쉽고, 재밌다.

 


 

p.40

세계관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주를 보는 하나의 틀이다. 세계관은 우주의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믿음으로 구성되는데, 가령 '신은 존재하는가', '우주는 창조되었는가'와 같은 기본적인 전제들을 포함한다. 대표적인 세계관으로는 유신론과 무신론을 꼽을 수 있다. 반면 과학 이론은 어떤 현상을 자연과학의 방법을 이용하여 이해하는 방식이며 과학 이론은 세계관적 논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 이론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세계관 각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더 읽을 거리

- 신국원, '니고데모의 안경' <-이거 예전에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야 할듯...

-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

- 로널드 넘버스,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 프랜시스 콜린스 '신의 언어'


p.92

보통 누군가 의도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우연이라고 하지. 그러니까 우연히 발생한 사건은 누군가 계획(혹은 설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진화가 우연이라고 할 때, 진화는 신의 설계일 수 없다는 뜻이 되네.

 하지만 과학에서 사용하는 우연이라는 개념은 그런 개념이 아니지. 과학에서는 가능한 여러 가지 일 중에 하나가 발생하는 것을 우연이라고 표현하네. 꼭 그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 하나가 실현되는 것이지. 주사위를 던지면 1에서 6까지의 숫자 중에 어떤 숫자도 나올 수 있네. 만일 주사위를 던졌는데 5가 나왔다면 이런 경우를 우연이라고 표현하네.


p.106

휴 로스(Hugh Ros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학이 신학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자연의 사실과 성경 말씀 중 어느 하나도 거부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자연의 사실과 성경 말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점검해 봐야 한다. 그 이유는 건전한 과학과 건전한 성경 해석은 항상 조화롭기 때문이다."

posted by sergeant

최초의 7일 - 2016. 11. 29

독서/종교 2018. 6. 18. 17:14

 

처음으로 방문할 과신대 서울 남부지구 독서모임을 위해 읽게 된 책. 중간중간에 꽤나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고 생각의 틀을 깨어 주기에는 더 없이 좋은 책이 아니었나 싶었다.
 
독서모임 토론을 통해 인상 깊었던 내용은, imago dei 즉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아마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하신, 그 말씀의 권위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애초에 천지 창조에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것이 말씀이고, 아무래도 동물과 비교했을 때.. 초보적인 수준에서 동물도 언어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는 것에 고차원적 수준의 문자 사용이 기여를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 자체를 극도로 신봉하게 된 계기에는 아무래도 학부를 언어관련 학과로 전공했기 때문도 있을거라고 솔직하게 덧붙여둔다. 그런 의미에서 학부 동안 바벨탑 사건이 갖는 의미와 나의 진로에 대해 한동안 고민하기도 했었다. (돌이켜 보면 참 진정성 있기도 하면서 자신이 귀엽기도 하다.) 어쨋거나 혼자서 생각했을 때 나의 답은, 입술과 말에 있는 권세가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닮은 특징이 아닐까 싶었고, 그래서 말 조심 해야한다는 부분이 더 와닿았었다.
 
그런데 논의에서 나온 내용은 꽤나 흥미로웠고 정답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처음에는 한 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물리적인 속성'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어떤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컨대 선하심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사실 물리적인 속성이 아니라고 말을 하면, 바로 꼬리를 무는 의문은 그렇다면 역집합 말고, 바로 그 정집합이 뭐냐는 의문이었는데,
이 의문을 미처 제기하기도 전에 다른 분이 속성론은 현재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속성론 자체가 앞서 말한 '선하심'이라는 부분에서 하나님을 선이라는 속성에 가두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요즘 합쳐지고 있는 의견은, 아무래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땅을 통치하도록, 섭정하도록 그 권한을 위임하셨다는 부분에서 그 위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란다. 다스리고 통치하는 권한은 아무래도 창조주인 하나님만 가지셨던 부분인데, 그걸 인간에게 위임하셨다니. 꽤나 그럴듯 한 부분이다. 다스려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려야 할 의무와 책임까지도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게 되면,
 
현 시국이나 주위의 삶에 대해서.. '잘 다스려져야 하는 것들'에 전반적으로..너무 방관자적인 태도로 임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반성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는 '공짜가 없다'는 것. 뭐든 정성이 들어가기 마련이니까. 다시금 노력과 정성의 중요함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posted by sergeant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16.07.01

독서/종교 2018. 6. 18. 17:04

 

 

1년 반동안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던 기독교인 학생 하나가 '미움 받을 용기'를 읽고 재밌었다며 심리학 관련된 책을 추천해 달라길래 몇권과 함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추천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의 경우에는 대학원 들어가기 전에 읽었던 오래된 책이고, 당시에 나는 이 책 덕분에(?) '말씀의 검으로, 잘못된 심리학 지식들에 정면승부 할' 훌륭한 "학자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웠었다. 지금도 궁극적인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 책에는 당시처럼 적극적으로 동의하기에는 어려운 전제들이 꽤나 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내가 종종 상담을 통해 만나게 되는 '신실한 기독교인 내담자'들에게서 느끼는 불편감과 매우 비슷하다.


 보통 심리학은 인간의 '선함'과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옹호한다고 한다.(이건 긍정심리학 등 몇에 국한된 부분이지만 그냥 편하게, 직관적으로 그렇다고 치자) 반면에 기독교의 인간관은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이다.

 어린시절부터 엄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일 수록, 인간관에 있어서 중요한 명제는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문장일 것이다. 이건 믿음과 구원의 여정에 있어 첫 걸음마와도 같다. 그런데 이 명제에서 좀 더 나아가면, 사람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감정들이 '죄악시'되면서, 부정 해야할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특히 욕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모습의 경우 더 억압해야 할 것처럼 보여진다. 이 시점부터, 순종적이고 믿음이 좋다고 여겨지는 학생들은 내적 어려움이 심화된다. 그래서 가면을 쓰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기독교적 가치관들에 대해 반발을 하게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95% 둘 중 하나다. 왜냐? 부정적인 감정이나 모습은 억눌러서 없앨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전자, 즉 가면을 쓰게되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반발 하는 후자는 내적으로는 꽤나 힘이라도 있는 친구들이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싫어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연약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느껴진다. 모두에게 그렇다. 그런면에서, 오히려 비기독교인들은 '연약함은 숨기는게 자연스럽다'를 비교적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유리한 지점에 있다. 반면 기독교인들은 연약함을 숨기고 싶어하는 욕구 조차도 공격을 받는 불리한 지점에 있다. 그러나 안전함이 뒷받침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자살행위와도 같다. 역설적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연약함을 드러냈을 때 그것이 더 강력한 파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개의 힘이 나는 이 부분에서 맞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나를 죽이는 것. 내가 무익함을 타인에게 알리는 것. 철저한 복종과 완전한 죽음. 이건 구원과도 연관이 되겠다. 


 그런데 많은 교회공동체에서는 (가장 기본 요건인 안전한 환경을 조성해 주지 못한 채로) 연약함을 드러내라고 얘기하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연약함 때문에 "거봐~) 너는 죄인"이라고 얘기한다. 어쩌면 연약함과 그로 인한 회개의 관점을 가진 공동체는 차라리 건강한 것일수도 있다. 아예 '장로님 딸이 왜저래' '목사님 아들인데 왜 저래'가 오히려 더 흔한 반응이다. 그런데 나는...그 연약함 자체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 약함, 혹은 악함은 현상 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부분이다. 이걸 문장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이자 진행형이다.  


 다른 측면에서, 사실 나는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이 교육이나 외부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뜻밖의 회심>에서 로자리아 버터필드의 말에 더 공감이 된다. "그 때까지 내가 들어봤던 간증들은 모두 에고와 자만이 가득한 것들이었다. 그리스도를 선택한 내가 정말 장하지 않나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내 결정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저는 내 삶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단했어요. 아직 길을 발견하지 못한 저 이방인들 보다 얼마나 훌륭한지 모르겠어요. (중략) 나는 그리스도를 택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실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응답을 해야 한다. 응답을 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이야기의 전부이다."

 

 만약에 나 자신의 죄인됨을 교육이나 일방적인 선생님의 요구에 의해서 인정하게 할 수 없다면, 어린 아이들을 위한 근본적인 기독교 교육은 조금 다른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도 또한 마찬가지다. "당신은 죄인입니다"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이 과연 옳은 접근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그걸 가르치는 본인 자신도 이미 죄인이잖아... 차라리 저는 죄인입니다,가 나을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물론 나는..현재로선 이상적인 교육이나 접근 대안을 제시할 수가 없다ㅋ 그래서 참 어렵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알게되는 하나님은 그리 단편적인 분은 아니시다. 어떤 사안에 대한 태도를 정하고 싶어서 아주 오래전부터 씨름했던 문제들도 있다. 그런데 주님은.. (별로 안 단호해도 될것 같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하시면서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참 지난하게도 단정 하지 않으신다. 답답하다. 그렇지만.. 그래서. 날마다 더 새롭고, 참 감사하고, 이해할 수 없고 응답이 없으셔서 좀 짜증날 때가 많고. 그래도 여전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선하신 주님이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