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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에 해당되는 글 7건
- 2018.06.18 마음, 뇌, 영혼, 신 - 2018.03.
- 2018.06.18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16.07.01
- 2018.06.18 심리치료에서 정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 대학원 스페셜 2
- 2018.06.18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남자- 2017.05.18
- 2018.06.18 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 2016. 12.13
- 2018.06.18 위험한 심리학 - 16.09.22
- 2018.06.18 파리의 심리학 카페 - 16.08.25
글
수 많은 흥미로운 질문들을 품고있는 이 책은, 답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책이라기 보다는 작은 질문들을 이것저것 던져주는 도움서와도 같은 느낌이다. (사실 좀 답답했다는 뜻..ㅋㅋ)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상담사로서, 이런 질문들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책이 있다는 것. 참 충분하고도 좋은 일이다. 독서모임에서 읽었는데, 그래서 정리하는게 더 많이 늦어졌다. 곳곳에 나중에라도 한번 들춰 볼 만한, 생각해 볼 만한 중요한 지점들이 있고. 가이드가 되어 줄 수 있는 주옥같은 구절들도, 그리고 도저히 수긍할 수 없어서 꼭 후에 연구를 다시 해보고 싶은 부분들도 있다.
<책발췌>
p. 37
오늘날은 문제가 더 복잡하다. 영어 성경 번역본만 수십 종이 있고, 같은 구절에 대해 각기 다른 단어를 쓰고 있거든.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어. 그렇게만 해도 불필요한 불안과 염려를 많이 덜 수 있을 거다. '마음'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란다. 과거에는 '마음'(mind)과 '영혼'(soul) 두 단어를 서로 바꿔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단어의 깔끔한 의미"를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수 있지. (...) 그러니 '마음'이라는 말이 나올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렴. 대략적인 지침은 될 거야. 첫째, 여기서 '마음'은 인지적 신경과학자들이 쓰는 것처럼 "정신생물학적 통일체의 심리적 측면"을 줄여서 쓴 과학 용어인가? 둘째, (성경의 많은 문맥에서 그렇듯) 하나의 태도 또는 공유된 태도와 신념의 집합(예를 들어, 빌 2:5; 롬 12:2)을 말하는가? 네 질문에 대한 답은 거의 언제나 '아니다'일 거야. 과학과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그 뜻이 같지 않아.
석사를 시작하기 전에, 학부 수업시간에 만난 지도교수님께 수업이 끝나고 질문을 했다. 교수님은 심리학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나는 조금 두렵다고. 교수님이 답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본인은 이 학문을 게임이라고 생각한다고. 그 때는 그 말이 무엇인지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온전한 의미를 잘 모르겠다. 내가 의미를 더하고 더하는, 그런 의미의 답변이신건지, 아니면 정말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하셨던 것인지. 다시 뵙고 기회가 되면, 한번쯤 더 여쭤보고 싶다.
p.46
이런 연구 사례들이 보여 주는 교훈은 과학의 어떤 모델을 은유로 사용할 때 자신의 신학적 신념 내지 과학과 무관한 다른 신념이 과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 말라는 거야. 과학은 본질상 변하는 학문이거든.
p.50
한 가지는 분명해.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방향은 인간이 심리생물학적 통일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거야. 질병이나 사고로 생물학적 측면이 손상되어 이 통일체가 깨질 수도 있고, 심리학적 측면이 생물학적 측면을 수정할 수도 있어.
이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많은 해방감을 느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우리가 배우는 지식과 신앙을 조화롭게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p.52
인지 과정은 뇌에 새겨져 있지만 택시 운전사들의 경우처럼 뇌를 변화시킬 능력도 갖고 있다는 것을 함께 기억해야 해. 이 정도가 오늘날 대체로 합의된 내용이야.
p.70
유전적 차이가 나타나는 방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환경적 맥락(이 경우에는 유전형을 아우르는 가족의 종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종교가 없는 가정이라는 좀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는 유전적 결함이 쉽게 표출된 반면, 종교적인 가정에서는 달랐지. 동일한 유전적 결함이 있어도 그렇게 쉽게 표출되진 않았어.
p.73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떤 선택을 내릴 때 경험이 더 큰 기능을 담당하게 되고, 그 선택들은 어느 정도는 우리 안에 유전적인 영향을 받아서 구축된 성향, 능력, 관심사를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요약된 결과를 보면 종교성이 특징적인 패턴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종교적 태도, 행동, 신념 등에 관해 내리는 선택은 개인의 성향 및 능력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유전적인 영향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p.98
제임스 바(James Barr)는 지금까지 제시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다섯 가지 해석을 유용하게 정리해 놓았어.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가진 불멸의 영혼을 말한다. 둘째,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이성적 추론을 말한다(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주장했고 루터와 많은 종교개혁가들이 받아들인 입장). 셋째, 두 발로 걷기 같은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말한다. 넷째, 바가 '기능성'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인간의 소명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감당하도록 부름받은 일'이지. 다섯째는 하나님 및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부분을 강조한 사람이 칼 바르트야.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를 맺을 능력 뿐 아니라 관계 자체지.
p.106
여러 성실한 성경학자들의 도움으로 이해하게 된 것들을 자신만만하게 여기면서 우리가 신앙의 선조들보다 앞서 있다고 오만해지기는 너무나 쉽지. 지난 일을 돌아보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보니 자칫하면 신앙의 선조들을 혹독하고 부당하게 비판하게 되겠구나. 그분들은 어떤 성경 말씀들에 대해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확신했고 거기엔 나름의 합당한 이유들이 있었지. 현대 과학 이전의 시대였기 때문에 일부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종종 있었고 말이다.
지난 며칠간 사실 너무 힘들었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너무 많은 논쟁을 했다. 그리고 논쟁의 한 쪽, 내가 많이 지지했던 분들이 결과적으로는 나에 대해서 한계가 있다고, 내가 속해있는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쪽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끊임없이 새겨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루어 온 성과들까지도 철저하게 도마 위에 올랐다. 정말 철저하게 다 까발려진 기분이다. 아무래도 이 문제, 정말 핵심적이고 중요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내 문제가 되니까 바로 보기가 힘들구나.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아서 노력했는데. 그나마 빨리 생각을 돌이킬 수 있었던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혹독한 비판들 가운데서, 이런 생각들도 조금은 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쨋거나 유리한 입장에 있구나. 그리고 비판적인 내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비판과 포용, 두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한계를 인식하는 것과 함께 적정하게 가지고 나가고 싶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이 쌓아놓은 탑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 긴 계주에서. 중간 지점에 있는 사람으로서. 더 많이 달려가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이미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한계가 있더라도.
p.126
다른 연구들에 따르면,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묘사하는 환상은 각 사람이 속한 문화에 따라 내용이 다르단다. (...) 뇌의 특정 부위가 작용한 결과 박생하는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은 우리가 속한 전통, 우리가 이미 받아들인 신념에 많이 의존한다는 거야.
p.131
중요한 것은 역사가 진행되면서 같은 본문을 가지고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이지.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야. 종교개혁 시대에는 이런 식의 해석의 변화로 엄청난 결과가 따라왔지.
p.137
탁월한 수학자이자 사상가이며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블레즈 파스칼은 1659년에 이렇게 썼어. "사람에게 그의 위대함을 보여주지 않은 채 짐승을 많이 닮았다는 점만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위험하다. 그의 저속함을 드러내지 않고 그의 위대함만 또렷이 보게 하는 것도 위험하다. 위대함과 저속함을 둘다 모르는 상태로 사람을 내버려 두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진화 심리학은 그런 무지를 줄이는 데 분명히 도움을 줄 수 있어.
종종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 빠진다. 중립은 얼마나 어려운것인지. 내가 과연 중립을 원하기는 하는건지.
p.167
'로이드 모건의 준칙'
"심리학적 척도에서 낮은 수준의 심적 능력의 산물로 설명이 가능한 행동을 더 높은 수준의 심적 능력의 산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가끔은 환원주의에 합당한 자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거지.
수많은 논쟁들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도 들었다 ㅋ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참 상대방을 입체적으로 보는구나. 사실 나도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뭔가 더 있겠지, 그래도 이유가 있겠지. 이런 관점들이 물론 상담을 할 때는 도움이 되지만... 일상 생활에서 많은 경우에 인간은 납작하다. 그 사실을 자꾸 잊으려고 해서 계속해서 반추한다. 너무 과잉이해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인지적 자원을 그렇게 쓰지 말아요. 모르겠다, 마음이 아프다.
p.168
이타주의와 상호 협력이 비인간 영장류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이타적 행동 범위에서 인간과 다른 영장류가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될 것은 없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비인간 영장류의 이타주의는 혈연과 호혜적 상대에게 강하게 쏠려 있다는 것이지. 그들의 이타주의가 낯선 대상을 향해 표현되는 경우는 없어. 이 대목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최우선적인 의무가 떠오르는구나. 차이점은 또 있어. 인간과 달리, 비인간 영장류는 가용 자원을 자기들만 유리하도록 불공평하게 분배하는 데 어떤 거부감도 없단다. 다시 말해, 이기심을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아.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돼.
앞에 있던 얘기랑 너무 반대되는 말 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는 것. 역시 기독교는 나를 갈아 넣어야 해. (농담입니다 농담)
p.172
"돕는 행동의 성별 차이에 대한 메타 분석적 검토 결과,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많이 돕고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도움을 많이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진짜 말도 안 됨 ㅋㅋㅋㅋㅋㅋㅋ
Lindon Eaves, "Genetic and Social Influences on Religion and Values", in from Cells to Souls-and Beyond, ed. Malcolm Jeeves(Grand Rapids: Eerdmans, 2004):102-122.
도움을 주고 받는 것과 도움의 중요성, 그리고 성격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또 다른 연구진은 전 세계 여섯 국가에서 자료를 모았어. 그 연구의 한가지 결론은 이거야. "성별은 이타주의를 측정하는 한 가지 척도가 되는데, 거의 모든 부분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더 이타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좀 어이없다 ㅋ 저 연구 좀 살펴봐야겠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자신이 많이 돕는다"고 얘기하거나,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거나, "기회"가 더 많았던게 아니라? 심리학은 너무 남성중심적인 학문이다. 한계를 느낀다.
p.177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당장 별다른 이들이 생기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드러낸다는 데 주목한 거지. 다른 영장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클라우스는 이렇게 말해. "원칙적으로, 인간이 내는 소리를 다 낼 법한 침팬지가 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는 그 방향으로 진화의 압력이 없었기 때문이고, 침팬지가 할 말이 없는 이유는 얘기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출처: 개인이메일..당황....
이것도 너무 재밌어서 연구 reference 찾아보려고 했는데 개인 메일이었다...당황.......ㅋㅋㅋ 그래도 흥미로운 얘기다. 나같은 말많은 사람은 더 공감가는 얘기랄까.
p.238
정직한 질문은 더 깊은 믿음으로 가는 성경적인 길이야. (...) 어린 시절 나는 교만한 사람만이 감히 주님께 질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때로는 질문을 하는 것이 겸손한 일임을 배웠다. 질문 안에는 내게 답이 없고 하나님께 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질문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정직하게 질문하고 싶다. 그런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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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년 반동안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던 기독교인 학생 하나가 '미움 받을 용기'를 읽고 재밌었다며 심리학 관련된 책을 추천해 달라길래 몇권과 함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추천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의 경우에는 대학원 들어가기 전에 읽었던 오래된 책이고, 당시에 나는 이 책 덕분에(?) '말씀의 검으로, 잘못된 심리학 지식들에 정면승부 할' 훌륭한 "학자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웠었다. 지금도 궁극적인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 책에는 당시처럼 적극적으로 동의하기에는 어려운 전제들이 꽤나 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내가 종종 상담을 통해 만나게 되는 '신실한 기독교인 내담자'들에게서 느끼는 불편감과 매우 비슷하다.
보통 심리학은 인간의 '선함'과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옹호한다고 한다.(이건 긍정심리학 등 몇에 국한된 부분이지만 그냥 편하게, 직관적으로 그렇다고 치자) 반면에 기독교의 인간관은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이다.
어린시절부터 엄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일 수록, 인간관에 있어서 중요한 명제는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문장일 것이다. 이건 믿음과 구원의 여정에 있어 첫 걸음마와도 같다. 그런데 이 명제에서 좀 더 나아가면, 사람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감정들이 '죄악시'되면서, 부정 해야할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특히 욕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모습의 경우 더 억압해야 할 것처럼 보여진다. 이 시점부터, 순종적이고 믿음이 좋다고 여겨지는 학생들은 내적 어려움이 심화된다. 그래서 가면을 쓰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기독교적 가치관들에 대해 반발을 하게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95% 둘 중 하나다. 왜냐? 부정적인 감정이나 모습은 억눌러서 없앨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전자, 즉 가면을 쓰게되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반발 하는 후자는 내적으로는 꽤나 힘이라도 있는 친구들이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싫어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연약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느껴진다. 모두에게 그렇다. 그런면에서, 오히려 비기독교인들은 '연약함은 숨기는게 자연스럽다'를 비교적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유리한 지점에 있다. 반면 기독교인들은 연약함을 숨기고 싶어하는 욕구 조차도 공격을 받는 불리한 지점에 있다. 그러나 안전함이 뒷받침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자살행위와도 같다. 역설적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연약함을 드러냈을 때 그것이 더 강력한 파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개의 힘이 나는 이 부분에서 맞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나를 죽이는 것. 내가 무익함을 타인에게 알리는 것. 철저한 복종과 완전한 죽음. 이건 구원과도 연관이 되겠다.
그런데 많은 교회공동체에서는 (가장 기본 요건인 안전한 환경을 조성해 주지 못한 채로) 연약함을 드러내라고 얘기하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연약함 때문에 "거봐~) 너는 죄인"이라고 얘기한다. 어쩌면 연약함과 그로 인한 회개의 관점을 가진 공동체는 차라리 건강한 것일수도 있다. 아예 '장로님 딸이 왜저래' '목사님 아들인데 왜 저래'가 오히려 더 흔한 반응이다. 그런데 나는...그 연약함 자체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 약함, 혹은 악함은 현상 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부분이다. 이걸 문장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이자 진행형이다.
다른 측면에서, 사실 나는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이 교육이나 외부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뜻밖의 회심>에서 로자리아 버터필드의 말에 더 공감이 된다. "그 때까지 내가 들어봤던 간증들은 모두 에고와 자만이 가득한 것들이었다. 그리스도를 선택한 내가 정말 장하지 않나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내 결정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저는 내 삶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단했어요. 아직 길을 발견하지 못한 저 이방인들 보다 얼마나 훌륭한지 모르겠어요. (중략) 나는 그리스도를 택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실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응답을 해야 한다. 응답을 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이야기의 전부이다."
만약에 나 자신의 죄인됨을 교육이나 일방적인 선생님의 요구에 의해서 인정하게 할 수 없다면, 어린 아이들을 위한 근본적인 기독교 교육은 조금 다른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도 또한 마찬가지다. "당신은 죄인입니다"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이 과연 옳은 접근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그걸 가르치는 본인 자신도 이미 죄인이잖아... 차라리 저는 죄인입니다,가 나을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물론 나는..현재로선 이상적인 교육이나 접근 대안을 제시할 수가 없다ㅋ 그래서 참 어렵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알게되는 하나님은 그리 단편적인 분은 아니시다. 어떤 사안에 대한 태도를 정하고 싶어서 아주 오래전부터 씨름했던 문제들도 있다. 그런데 주님은.. (별로 안 단호해도 될것 같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하시면서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참 지난하게도 단정 하지 않으신다. 답답하다. 그렇지만.. 그래서. 날마다 더 새롭고, 참 감사하고, 이해할 수 없고 응답이 없으셔서 좀 짜증날 때가 많고. 그래도 여전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선하신 주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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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학원 시절 읽었던 책 중에 몇권을 정리해 둔 파일들을 발견했다.
읽었던 모든 책들을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의미 있는 책 몇 권을 정리해 둔 것이라 현재 블로그에도 옮겨 둔다.
<책발췌>
p.22_정동, 정서 및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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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affect)’, ‘정서(emotion)’ 및 ‘기분(feeling)'의 개념에 대한 학문적 역사를 살펴보면 명확하게 구분된 정의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Hillman, 1960; Jaspers, 1963; James, 1890, 1950; Freud, 1915, 1963). 이자드(Izard, 1979)는 정서를 정동적 과정과 지적 과정의 조합으로 본 반면, 기분은 의미와 근거에 의해 강렬해지고 풍부해지며 회고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정서적 상태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런 명료한 학문적 구분이 있지만 여기서는 정동, 정서 및 기분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는 것이 유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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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 정동을 자극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생리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진화과정을 통해 적응적인 행동 반응 체계로 발전해 온 자동적이고 생리적이며 동기적이고 신경학적인 과정들이 포함된다. 정동에는 반영적 평가가 포함되지 않는다. 정동은 단지 일어날 뿐이다. 반면, 정서와 기분은 이런 무의식적인 정동과정이 의식화된 산물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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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 기분에는 정동에 대한 생리적 감각을 자각하는 것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몸이 어질어질한’ 것이나 ‘긴장되는 느낌’같이 몸이 느끼는 경험들이 포함된다. 이보다 더 복잡한 몸에서 느껴지는 느낌에는 우리가 복합적인 기분 혹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들, 즉 어떤 일이 올바르게 되지 않았거나 배려 받지 못했을 때 느끼는 모욕감이나 ‘가라앉는’ 느낌처럼 의미가 느껴지는 감정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런 기분 상태는 정동을 자기 자신과 연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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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 : 의식적으로 경험된 인간의 정서는 기분 상태 및 행위 경향성이 이를 이를 촉발한 상황 및 자기와 결합될 때 생겨나는 경험이다. 따라서 정서는 여러 가지 수준이 처리과정이 통합된 것이다(Greenberg & Safran, 1987). 여기에는 각기 고유한 행위 경향성이나 얼굴 표정을 수반하는 두려움, 분노, 슬픔과 같이 구체적인 정서 경험도 있으며 보다 복잡한 이야기나 각본을 수반하는 질투나 자부심 같은 복합적인 정서도 있다. 정서는 경험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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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와 이성의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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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의 치료적 효과를 다룬 과거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전통적으로 정서의 비합리성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 책 전반에 걸쳐 우리는 정서의 조직화(organizing) 역할을 강조하고, 정서가 결정과정이나 문제해결 능력을 어떻게 인도하고 강화하는지를 일관성 있게 보여 주고자 한다. 정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려 준다. 정서는 인식해야 할 목표를 설정해 주며,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인지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바로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치료 장면에서 정서를 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 중요성과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기 위해 정서를 이성과 어떻게 통합할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정서는 여러 가지 수준의 정보처리를 통합하는 복합적인 구성과정에서 생겨난다(Barnard & Teasdale, 1991; Greenberg et al., 1993; Greenberg & Pascual-Leone, 1995; Teasdale & Barnard, 1993; Watson & Greenberg, 1995). 우리 내부에서는 정동적, 인지적, 동기적 그리고 감각운동적인 정보들이 항상 복합적으로 통합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경험과 행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다. 이런 정보처리 과정들이 통합되어 최종적인 기분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암묵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떠올라 자각되고 종합될 때만이 정서와 이성의 온전한 통합이 가능하다. 신체가 느끼는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를 자각하여 상징화할 때 비로소 정서가 의식 속에 출현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적으로 상징화된 요소(material)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올바른 결정을 하도록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의식은 인간의 경험을 통제하는 위계의 정점에 반드시 있는 것도 아니며 외로운 단독자도 아니다. 그보다는 정서 도식, 즉 경험을 처리하는 암묵적인 정서적, 동기적, 인지적 수준이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정서 도식은 의식적인 이성이나 자동화된 행동보다 높은, 가장 높은 수준의 처리과정을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들이 바로 의식적 사고와 행위를 인도하며, 우리가 결정하고 선택하는데 중요한 복합적이고 정서적인 감각(대개 신체가 느끼는 감각)을 제공하는 것이다. ...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정서적, 동기적, 인지적 과정이다(Greenberg et al.,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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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책의 제목이 처음에는 비유적이라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코타르증후군이라는 (이전까지 듣도보도 못한) 특이한 병에 대한 묘사였다. 그리고 그 코타르 증후군을 시작으로 저자는 철학이 묻고, 뇌과학이 답하는 '자아에 대한 성찰 여행'을 시작한다.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기본적인 명제는 처음 심리학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굉장히 불편하고 소화해내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지금 그 명제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사실이다.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오랜시간을 걸쳐 진화해 왔다.'라는 명제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그런생각을 해 본다.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런 명제들을 좀 더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까? .... 어떻긴 뭘 어때. 지금보다 빨라 봤자 1~2년 정도 일찍, 편한 마음을 가지고 현재 수준만큼의 심리학을 이해할 수 있었겠지. 이렇게 혼자 답하고 있다ㅋㅋㅋ작년 말에는 이 괴리가 한창 극심해 져서, 이관직 교수님께 용감하게 질문도 드렸다. 심리학을 기본으로 공부를 계속 하다보니, 성경에 입각한 인간관을 가지지못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스럽다고. 교회에 소속된 상담사이지만 보수기독교단에서 대동단결하여 반대하는 여러 입장들에 대해 분개하는 것이 일반 학문에 너무 심취해서 인지 고민스럽다고. 답변은 기억안나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ㅋㅋㅋㅋㅋㅋ그리고 생각 외로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교회의 규범주의적인 문화 및 정죄함에 대해 비판을 함께 해 주셔서 더 편해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갈림길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과연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배움을 더할 수록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고, 나약한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뒤집었을 때 오히려 더 인간의 위대한 발전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게 해 준다. 인류애가 많지는 않으나, 공부할 수록 더 애정을 키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서서.
<책 발췌> p.71 이 검사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질병실인증이 단순히 기억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아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잼버니는 나에게 말했다. "그것은 아주 선별적인 무능입니다. 타인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은데 자기 자신에 관한 정보만 업데이트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p.76 로빈 모리스는 런던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알츠하이머 환자들에게 일어나는 두 가지 큰 변화에 관해 설명했다. 하나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 자기 자신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지 못해 그들의 서사적 자아를 업데이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아를 지지하는 역할을 맡은 뇌 구조가 아마도 알츠하이머병의 공격을 받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는 자신의 이야기 중 가장 회복력이 좋은 부분으로 물러난다. 이러한 회복력에 관한 생각들은 후기 청소년기나 초기 성인기에 형성된다. ... 사실 건강한 사람들도 삶의 사건들을 회상하라고 하면 십대 이전이나 삼십대 이후의 것들보다는 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더 많이 기억한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회고절정reminiscence bump'이라고 부른다. p.78 여기서 우리는 '회고절정'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후기 청년기와 초기 성인기에 내가 누구인지에 관한 자아믿음과 자아개념을 형성하는 결정적 시기가 있습니다." 로빈 모리스는 나에게 말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서사적 자아의 핵심을 형성한다. p.109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주의사항이 바로 이것이다. 신경과학계는 특히 질병을 연구하면서 뇌와 정신의 관계를 일방통행으로 보는 신경생물학적 환원주의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뇌가 정신활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fMRI나 PET 스캔은 대개 어떤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특정 뇌 영역의 움직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건강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보여준다. 하지만 명백히 신경 손상을 입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스캔은 뇌 활동과 그 사람의 문제에 대한 상관관계만 보여줄 뿐이다. p.153 블레이크모어와 프리스, 그리고 동료들은 더 나아가 환청과 조종 망상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왼손을 만지든 실험자가 만지든 별다른 차이 없이 똑같이 강렬하고 간지러우며 즐거운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스스로 간지럼을 태울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기발생적 행위와 자신의 행동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p.164 랠프 호프먼도 조현병에 관해 비슷한 얘기를 한다. (호프먼을 포함한) 과학자들은 많은 조현병 환자의 뇌에서 신경 시스템의 오작동이나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변화들을 관찰해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들은 조현병의 원인일까, 아니면 조현병 발병 이전에 이미 '직장이나 학교 등 사회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관계에서 극심한 철회를 여러 번 겪으면서' 생긴 결과로 보아야 할까? 호프먼은 말한다. "어떤 사람이 후기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를 거치면서 정상적인 상호작용에서 여러번 물러난다고 해봅시다. 그것이 몇 년간 계속된다면, 인지 풍부화와 과제 참여가 일어나지 않는 두뇌 시스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나는 이런 관계 철회가 계속 되다 보면 결국 '신경퇴행성 과정'에 이르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p.182 다마지오의 체계에 완전히 동의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신경과학계는 자아가 생기는 데에서 몸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인다. 몸의 역할은 정서와 감정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다마지오의 관점에서자아는 상부뇌간, 섬엽피질, 그리고 체성감각피질에 나타나는 몸 상태인 원초적 감정으로 시작되어 더 복합적인 정서와 감정들을 형성해 간다. p.309 고요한 확실성, 고조된 각성, 그리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느낌들이 또한 신비주의적 경험들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묘한일이다. 피카르의 환자들은 자신의 발작에 확실하게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내 환자들 중 일부는 신을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인데도 그러한 발작을 경험하고부터 신앙과 믿음을 갖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거기엔 뭔가 영적 요소가 있으니까요. 신비주의적 경험을 한 사람들은 어쩌면 과거에 황홀경 발작을 실제로 겪었는지도 몰라요." 이것은 그런 경험들에 대한 흥미로운 역설이다. 자신과 주위 환경에 대해 자아인식이 높은 사람이 동시에 자신과 세계의 경계가 녹아버리는 것처럼 느끼면서, 모든 것이 하나가 된 일체감을 갖는다는 것이다. p.324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논쟁에서 신경과학자들과 철학자들(과거와 현재의 사람들 모두)이 하나로 수렴된다는 느낌은 피할 수 없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너무 잘게 구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 크게 불일치하는 경우는 매우 적다. 데카르트의 이원론도 이제는 유행이 지났다. 어느 누구도 자아가 뇌와 몸이 없어진 이후에도 존재하는 독립된 존재론적 현실을 갖는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어느 누구도 자아에 대한 유일한 관리인으로서 하나의 특권을 가진 곳이 뇌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물론 자기감에 다른 영역보다 좀 더 중요하게 영향을 끼치는 뇌 영역들은 있다. 섬엽피질이나 측두정엽, 내측 전전두엽피질 등이다. 하지만 이 중 어느 영역도 단독으로 자아를 맡는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이야기하는 사람 없이도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서사적 자아가 허구라는 주장도 일부 있다. 사실상 신체에 대한 소유감을 포함해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구성자 없이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몸을 단순히 정신을 담는 그릇의 신분으로 격하시켰던 데카르트적 이원론 대신, 우리는 이제 자기감을 몸에 단단히 통합된 신경 프로세스의 결과물로 보게 되었다. 신경은 현재의 우리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와 몸, 마음과 문화까지 한데 결합시킨다. ... 지적이고 철학적인 논쟁과 별개로, 인간에게는 고통이 있다. 이 책에서 만난 사람들이 경험한 관점에서 보면, 자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불교도들이 주장하듯, 겉으로 견고해 보이는 자아에 대한 망상성 집착이 고통을 일으킨다. 그리고 참된 본성을 깨닫는 것이 고통을 완화시켜줄 수 있다(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구성하는 다양한 자아의 특성들은 실제로 우리가 스스로 분리해낼 수 없는 두뇌의 역할 때문에 일어난다). ... 우리는 자아에 일어난 혼란을 무언가 결소뇐 것으로 생각한다. 대응기제나 병원에서의 치료들, 그리고 심리치료들은 그렇게 이해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혼란들을 자아의 결손에서 비롯된 결과물이 아니라 자아라는 관념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 그럴 경우에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 p.327 우리의 진화적 과거에, 최초로 '아는 자로서의 자아'의 표시가 나타났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중대한 생물학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생존을 유리하게 해주었다. 자신의 몸을 자각하기 위해 진화적 조력을 받아 자신의 주의를 그리로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자아과정, 다시 말해 다양한 뇌영역 활동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여전히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더 진화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장기기억과 서사적 자아를 발전시켰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에서 배울 수 있고, 미래를 구상하고 계획할 수 있다. 여기에 과거의 우리 자신과 미래의 자신에 대한 생각들이 보태지면 대상으로서의 자아가 된다. 문명이 있기 전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았던 동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심리적 시간에 거주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추상적인 생각을 하든, 그러한 생각들이 자신에게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피드백은 여전히 몸에 의해 중재된다. 그것은 큰 기쁨일 수도 있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일 수도 있다. 아니면 황홀감과 우울감 사이에 있는 온갖 다양한 느낌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감정과 정서들은 우리를 행위로 이끈다. 한때 우리가 이런 감정들을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또는 맹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느꼈다면, 이제는 우리의 생각 때문에 느낀다. 생존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이러한 감정은 인간이라는 종에게 사회와 문화, 예술과 기술 등 인간이 된다는 것과 관련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인간을 끊임없이 원하는 종으로 만들어놓기도 했다. ... 장가 대체로 허구적이라는 본성(주관성이라는 쟁점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자신을 조절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단순한 지적 이해도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무아가 매우 중요한 사상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하지만 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주로 명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경험을 포착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을 줄이고 자신을 타인에게 좀 더 개방하게 한다는 점에서 심오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경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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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함께 연구해 보고 싶은 내용이 가득합니다. 후에 참고하고 싶어 발췌를 많이 해 두었습니다. 혹여나 문제가 생길시에 글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도덕과 정의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일까 자괴감이 들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정의는 그렇게 딱딱한 틀 안에 들어가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차츰 들게 되었구요.
저의 경직된 생각을 조금 더 부드럽게, 그리고 철학과 심리학을 통해 명쾌하게 만들어 준 계기가 되었던 책입니다.
<책발췌>- 긴글 주의
의심의 대가들은 도덕을 끊임없이 탈신화화했고, 그 후로 선과 악은 뜨뜻미지근한 불가지론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악 관념을 별로 믿지 않는데도 허구한날 타인들이 아떤 존재인가, 타인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가를 판단하는데 골몰한다. 또 우리의 행동, 의견, 심지어 겉모습까지 매 순간 다른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는다. ...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과 악이 마치 산소와 수소처럼 결합해 이루는 좋은 생각의 바다와 같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그 바다에 잠겨든다.
P.12
사실 사회적 저항과 도덕적 봉기는 그렇게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권위를 아무리 존중하다 해도, 심지어 유해한 권위의 파괴적인 명령을 따르면서도 우리는 사회적 저항과 분노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활발한 소수집단만의 운동일지라도 그 운동에 당위와 일관성이 있다면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도 있다.
P.27
자의식은 타인의 심리와 정서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초석이다. ... 다트머스 대학 인지신경과학 교수인 마이클 가자니가와 토드 해더튼은 최소한의 자아는 곤충류, 조류, 어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객관화된 자아'는 이보다 좀 더 발전된 의식 수준에서 나타나며, 이는 곧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경우에는 자아가 개체의 관심 대상이 되기 쉽다.
...
자아의 최종 단계는 상징적 자아(혹은 서사적 자아)다. 이 단계에서는 언어를 통하여 시간 속에서의 나 자신을 표상할 수 있다.
P.30
나치 전범들에 대한 이야기와 확증편향
P.37
처음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이 도덕과 어떻게 관련된다는 것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의 시각과 정서를 고려하는 것이 우리가 본능적으로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위치와 무관할 수 있을까? 더 깊게 들어가자면, 우리는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기 시각 자체가 문제시되면 부정적으로 반응하기 쉽다. 그래서 자기만족과 이미지 관리는 폭력의 보편적 요인이 된다.
P.40
자신을 과대평다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부류는 확실히 남들과 차별될까? 그렇다. 하지만 나쁜 방향으로 차별화된다. 한 연구에서 실험참가자들의 논리적 추론능력을 검사했다. 그 결과 성적이 가장 나쁜 부류와 자신의 추론능력을 가장 과대평가하는 부류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P.43
자의식을 느끼면 행동과 신념의 일관성에 대한 욕구가 증가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 그렇다면 위반 행동도 자의식 증대에 영향을 받을까? 이를 입증한 연구들이 있다. 필기시험에서 응시자들의 자의식을 자극하면 부정행위릉 저지를 확률이 낮아진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자의식을 일깨워주면 사소한 물건을 슬쩍하는 행위가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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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홍보를 상당히 상업적으로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는 당신의 속마음을 알고 있다라니..^^; 심리학 공부하는 사람들에 대한 전형적인 편견이 들어간 홍보내용..!!
대중적인 심리학 책들에 흥미를 못느끼지만, 그래도 어떤 내용들이 있나 궁금해서 심심풀이로 집었습니다. 게다가 자격증 시험기간 피크라 시험범위 외의 내용은 뭐라도 읽고싶어서 몸이 근지근질했거든요.
예상치 못하게 나름 자격증 시험에 도움이 되었던게, DSM-5의 성격장애 내용들을 나름 재미있게 풀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성격장애들 공부하면서 저의 심리학 공부에 도움을 주었던 2인의 성격장애인에게 다시금 고맙다는 생각이 들기도..했구요..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분명해서, 너무 이해가 잘 돼..
역시 공부는 뭐니뭐니해도 사람공부가 제일 재밌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 행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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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수퍼비전이나 심리교육을 가도, 본인이 배웠던 마음의 원리와 전혀 다른 식의 조언들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ex. 화를 좀 잘 참아야죠.)
그러나 파리의 심리학 카페에서는 마음의 매커니즘을 정확히 이해하고 얻어진 깊은 통찰을 재밌게 잘 전달할 수 있는 따뜻한 작가를 만날 수 있습니다. 내담자들과 좀 더 심리교육을 꼭꼭 다지고 싶을 때, 주로 추천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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