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뇌, 영혼, 신 - 2018.03.

독서/종교 2018. 6. 18. 17:41

 

 

수 많은 흥미로운 질문들을 품고있는 이 책은, 답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책이라기 보다는 작은 질문들을 이것저것 던져주는 도움서와도 같은 느낌이다. (사실 좀 답답했다는 뜻..ㅋㅋ)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상담사로서, 이런 질문들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책이 있다는 것. 참 충분하고도 좋은 일이다. 독서모임에서 읽었는데, 그래서 정리하는게 더 많이 늦어졌다. 곳곳에 나중에라도 한번 들춰 볼 만한, 생각해 볼 만한 중요한 지점들이 있고. 가이드가 되어 줄 수 있는 주옥같은 구절들도, 그리고 도저히 수긍할 수 없어서 꼭 후에 연구를 다시 해보고 싶은 부분들도 있다.

 


<책발췌>

 

p. 37
 오늘날은 문제가 더 복잡하다. 영어 성경 번역본만 수십 종이 있고, 같은 구절에 대해 각기 다른 단어를 쓰고 있거든.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만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를 주의 깊게 살필 필요가 있어. 그렇게만 해도 불필요한 불안과 염려를 많이 덜 수 있을 거다. '마음'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란다. 과거에는 '마음'(mind)과 '영혼'(soul) 두 단어를 서로 바꿔 쓸 수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단어의 깔끔한 의미"를 유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 수 있지. (...) 그러니 '마음'이라는 말이 나올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렴. 대략적인 지침은 될 거야. 첫째, 여기서 '마음'은 인지적 신경과학자들이 쓰는 것처럼 "정신생물학적 통일체의 심리적 측면"을 줄여서 쓴 과학 용어인가? 둘째, (성경의 많은 문맥에서 그렇듯) 하나의 태도 또는 공유된 태도와 신념의 집합(예를 들어, 빌 2:5; 롬 12:2)을 말하는가? 네 질문에 대한 답은 거의 언제나 '아니다'일 거야. 과학과 성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그 뜻이 같지 않아.
석사를 시작하기 전에, 학부 수업시간에 만난 지도교수님께 수업이 끝나고 질문을 했다. 교수님은 심리학과 기독교 신앙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나는 조금 두렵다고. 교수님이 답해주시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본인은 이 학문을 게임이라고 생각한다고. 그 때는 그 말이 무엇인지 다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도 온전한 의미를 잘 모르겠다. 내가 의미를 더하고 더하는, 그런 의미의 답변이신건지, 아니면 정말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하셨던 것인지. 다시 뵙고 기회가 되면, 한번쯤 더 여쭤보고 싶다.

p.46
이런 연구 사례들이 보여 주는 교훈은 과학의 어떤 모델을 은유로 사용할 때 자신의 신학적 신념 내지 과학과 무관한 다른 신념이 과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 말라는 거야. 과학은 본질상 변하는 학문이거든.

p.50
한 가지는 분명해. 모든 증거가 가리키는 방향은 인간이 심리생물학적 통일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는 거야. 질병이나 사고로 생물학적 측면이 손상되어 이 통일체가 깨질 수도 있고, 심리학적 측면이 생물학적 측면을 수정할 수도 있어.
이 사실을 깨닫게 되고 많은 해방감을 느꼈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우리가 배우는 지식과 신앙을 조화롭게 만들 수 있다면 좋겠다.

p.52
인지 과정은 뇌에 새겨져 있지만 택시 운전사들의 경우처럼 뇌를 변화시킬 능력도 갖고 있다는 것을 함께 기억해야 해. 이 정도가 오늘날 대체로 합의된 내용이야.

p.70
 유전적 차이가 나타나는 방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환경적 맥락(이 경우에는 유전형을 아우르는 가족의 종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야. 종교가 없는 가정이라는 좀 더 자유로운 환경에서는 유전적 결함이 쉽게 표출된 반면, 종교적인 가정에서는 달랐지. 동일한 유전적 결함이 있어도 그렇게 쉽게 표출되진 않았어.

p.73
"나이가 들어갈수록 어떤 선택을 내릴 때 경험이 더 큰 기능을 담당하게 되고, 그 선택들은 어느 정도는 우리 안에 유전적인 영향을 받아서 구축된 성향, 능력, 관심사를 반영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요약된 결과를 보면 종교성이 특징적인 패턴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종교적 태도, 행동, 신념 등에 관해 내리는 선택은 개인의 성향 및 능력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유전적인 영향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p.98
 제임스 바(James Barr)는 지금까지 제시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다섯 가지 해석을 유용하게 정리해 놓았어. 첫째,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가진 불멸의 영혼을 말한다. 둘째,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이성적 추론을 말한다(아우구스티누스와 아퀴나스가 주장했고 루터와 많은 종교개혁가들이 받아들인 입장). 셋째, 두 발로 걷기 같은 인간의 신체적 특징을 말한다. 넷째, 바가 '기능성'이라 이름 붙인 것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인간의 소명을 말한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현재 모습이 아니라 '감당하도록 부름받은 일'이지. 다섯째는 하나님 및 피조물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이 부분을 강조한 사람이 칼 바르트야. 그에게 하나님의 형상은 관계를 맺을 능력 뿐 아니라 관계 자체지.

p.106
여러 성실한 성경학자들의 도움으로 이해하게 된 것들을 자신만만하게 여기면서 우리가 신앙의 선조들보다 앞서 있다고 오만해지기는 너무나 쉽지. 지난 일을 돌아보는 유리한 입장에 있다보니 자칫하면 신앙의 선조들을 혹독하고 부당하게 비판하게 되겠구나. 그분들은 어떤 성경 말씀들에 대해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확신했고 거기엔 나름의 합당한 이유들이 있었지. 현대 과학 이전의 시대였기 때문에 일부 본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종종 있었고 말이다.
지난 며칠간 사실 너무 힘들었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너무 많은 논쟁을 했다. 그리고 논쟁의 한 쪽, 내가 많이 지지했던 분들이 결과적으로는 나에 대해서 한계가 있다고, 내가 속해있는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다른 쪽이라고 얘기하는 것을 끊임없이 새겨야 했다. 그러는 와중에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이루어 온 성과들까지도 철저하게 도마 위에 올랐다. 정말 철저하게 다 까발려진 기분이다. 아무래도 이 문제, 정말 핵심적이고 중요했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내 문제가 되니까 바로 보기가 힘들구나. 그런 사람이고 싶지 않아서 노력했는데. 그나마 빨리 생각을 돌이킬 수 있었던게 다행이다 싶기도 하다.
 혹독한 비판들 가운데서, 이런 생각들도 조금은 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쨋거나 유리한 입장에 있구나. 그리고 비판적인 내 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비판과 포용, 두가지 모두가 필요하다. 한계를 인식하는 것과 함께 적정하게 가지고 나가고 싶다. 앞서 지나간 사람들이 쌓아놓은 탑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이 긴 계주에서. 중간 지점에 있는 사람으로서. 더 많이 달려가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이미 가지고 있는 필연적인 한계가 있더라도.

p.126
다른 연구들에 따르면, 임사체험을 한 사람들이 묘사하는 환상은 각 사람이 속한 문화에 따라 내용이 다르단다. (...) 뇌의 특정 부위가 작용한 결과 박생하는 경험을 해석하는 방식은 우리가 속한 전통, 우리가 이미 받아들인 신념에 많이 의존한다는 거야.

p.131
중요한 것은 역사가 진행되면서 같은 본문을 가지고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는 점이지. 새로울 것이 없는 사실이야. 종교개혁 시대에는 이런 식의 해석의 변화로 엄청난 결과가 따라왔지.

p.137
탁월한 수학자이자 사상가이며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블레즈 파스칼은 1659년에 이렇게 썼어. "사람에게 그의 위대함을 보여주지 않은 채 짐승을 많이 닮았다는 점만 분명히 보여 주는 것은 위험하다. 그의 저속함을 드러내지 않고 그의 위대함만 또렷이 보게 하는 것도 위험하다. 위대함과 저속함을 둘다 모르는 상태로 사람을 내버려 두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진화 심리학은 그런 무지를 줄이는 데 분명히 도움을 줄 수 있어.
종종 우리는 이러한 유혹에 빠진다. 중립은 얼마나 어려운것인지. 내가 과연 중립을 원하기는 하는건지.

p.167
'로이드 모건의 준칙'
"심리학적 척도에서 낮은 수준의 심적 능력의 산물로 설명이 가능한 행동을 더 높은 수준의 심적 능력의 산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사실상 가끔은 환원주의에 합당한 자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거지.
수많은 논쟁들을 보면서, 비슷한 생각도 들었다 ㅋ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참 상대방을 입체적으로 보는구나. 사실 나도 항상 그랬던 것 같다. 뭔가 더 있겠지, 그래도 이유가 있겠지. 이런 관점들이 물론 상담을 할 때는 도움이 되지만... 일상 생활에서 많은 경우에 인간은 납작하다. 그 사실을 자꾸 잊으려고 해서 계속해서 반추한다. 너무 과잉이해 해주려고 하지 말아요. 인지적 자원을 그렇게 쓰지 말아요. 모르겠다,  마음이 아프다.

p.168
이타주의와 상호 협력이 비인간 영장류의 삶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해도, 이타적 행동 범위에서 인간과 다른 영장류가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문제될 것은 없어.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비인간 영장류의 이타주의는 혈연과 호혜적 상대에게 강하게 쏠려 있다는 것이지. 그들의 이타주의가 낯선 대상을 향해 표현되는 경우는 없어. 이 대목에서 낯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그리스도인들의 최우선적인 의무가 떠오르는구나. 차이점은 또 있어. 인간과 달리, 비인간 영장류는 가용 자원을 자기들만 유리하도록 불공평하게 분배하는 데 어떤 거부감도 없단다. 다시 말해, 이기심을 별 무리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아. 이것은 기독교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돼.
앞에 있던 얘기랑 너무 반대되는 말 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는 것. 역시 기독교는 나를 갈아 넣어야 해. (농담입니다 농담)

p.172
"돕는 행동의 성별 차이에 대한 메타 분석적 검토 결과,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많이 돕고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도움을 많이 받는 것으로 드러났다." <-진짜 말도 안 됨 ㅋㅋㅋㅋㅋㅋㅋ
Lindon Eaves, "Genetic and Social Influences on Religion and Values", in from Cells to Souls-and Beyond, ed. Malcolm Jeeves(Grand Rapids: Eerdmans, 2004):102-122.
도움을 주고 받는 것과 도움의 중요성, 그리고 성격 사이에 어떤 연관 관계가 있는지 포괄적으로 연구하는 또 다른 연구진은 전 세계 여섯 국가에서 자료를 모았어. 그 연구의 한가지 결론은 이거야. "성별은 이타주의를 측정하는 한 가지 척도가 되는데, 거의 모든 부분에서 남자가 여자보다 더 이타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거 좀 어이없다 ㅋ 저 연구 좀 살펴봐야겠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이 "자신이 많이 돕는다"고 얘기하거나,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거나, "기회"가 더 많았던게 아니라? 심리학은 너무 남성중심적인 학문이다. 한계를 느낀다.

p.177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당장 별다른 이들이 생기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드러낸다는 데 주목한 거지. 다른 영장류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 클라우스는 이렇게 말해. "원칙적으로, 인간이 내는 소리를 다 낼 법한 침팬지가 소리를 내지 않는 이유는 그 방향으로 진화의 압력이 없었기 때문이고, 침팬지가 할 말이 없는 이유는 얘기하는 데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출처: 개인이메일..당황....
이것도 너무 재밌어서 연구 reference 찾아보려고 했는데 개인 메일이었다...당황.......ㅋㅋㅋ 그래도 흥미로운 얘기다. 나같은 말많은 사람은 더 공감가는 얘기랄까.

p.238
정직한 질문은 더 깊은 믿음으로 가는 성경적인 길이야.  (...) 어린 시절 나는 교만한 사람만이 감히 주님께 질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때로는 질문을 하는 것이 겸손한 일임을 배웠다. 질문 안에는 내게 답이 없고 하나님께 답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진실한 질문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을 드러내고, 그분의 능력을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다.
정직하게 질문하고 싶다. 그런 사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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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

하나님의 딸들-2018.02.21

독서/종교 2018. 6. 18. 17:38

 

의외로(?) 소심한 사람이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모임을 많이 만들고 싶지 않아 한다. 책 읽는 걸 좋아해도, 혼자 읽고 친한 이들과 세부내용을 나누고 얘기하거나 차곡차곡 기록에 남겨놓고 나중에 다시 읽는게 행복하지, 무려 '북클럽' 다닌다고 하면 너무.. 작위적인 것 같다고 느끼던 시기들도 있었다. 책도, 흥미있는 주제들을 바탕으로 함께 읽어내는게 좋지... 그냥 인문학 서적들은 흥미가 없어서.. 뭐 아무튼간에 이런 내가 이번주를 시작으로 두개의 북클럽의 회원이 될 것 같다.

 지금 하고 있는 첫번째 독서모임은 1년 훨씬 넘게 해온 과학과 신앙 관련 독서모임인데, 이것도 뇌과학과 신앙에 대한 포럼을 듣고 머리를 딱 얻어맞은 것 같은 통찰을 얻어서, 북클럽에도 참석했다가 모임이 너무 좋아서 바뀐 해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아무래도 나에겐 포럼이 북클럽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트리거인가보다.(하하)

 몇 주 전에 기독교 신앙과 페미니즘 관련 모임 갔다가 너무 화가 났다. 솔직히 좀 절망스러웠다. 이거 정말 기독교를 떠나야 하는건가. 물론 예수님을 떠나진 않겠지만.. 한국 개신교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 이정도가 한계라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런 수준의 논의밖에 이루어질 수 없는거라면 과연 내가 여기서 계속 지낼 수 있을지 심각하게 회의가 들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만난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존재에서 아주 짧지만 큰 위안을 얻기도 했었다. 니가 무슨말을 하는지, 나는 알고 나와 같은 감정을 느끼는 너의 존재가 고마운. 그런 강렬한 느낌.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젊은 기독교인 페미니스트들이랑 얘기할 수 있는 장을 찾아볼까 고민이 되었다. 기독인 페미니스트로 치면, 나름 제이디스 모임도 떠오르기는 하지만, 친목도모의 면이 더 강해서.. 나에게는 좀 이 절망감을 함께 토해낼 수 있는 더 빡세고, 무섭고, 센 페미니스트들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알고있는 북클럽이 하나 있긴 했는데, 혹시나 싶어서 문의를 해봤더니 1차 회원 모집이 마감됐다고. 그래서 "할 수 없지 뭐.." 그렇게 생각하고 '몰라 될대로 되라지'하고 그냥 넘겼는데, 담당자한테 다시 연락이 왔다. 참여하고 싶으면 참여해도 된다고. 회원을 좀 더 모집하기로 했다고. 그래서 이번주에 방문하려 한다. 설렌다.

 독서모임 책들은, 블로그에 잘 올리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다. 왜 그런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책을 끊어 읽기 때문도 큰 것 같고.. 내가 읽고 온전하게 느꼈던 것만 다 적기에는 모임에서 이루어진 논의들이 너무 풍성하고, 그렇다고 해서 그 논의들을 다 적을 생각을 하면 약간 overwhelming 된다.
그런데 새로 시작하는 모임에서의 책은, 쉽고 짧은 책이라고 한번에 다 읽어 가기로 했다. 표지가 파란색, 보라색 두가지이고... 랜덤으로 배송된다는데, 내가 좋아하는 파란색이라 기쁘다.

아마 모임이 끝나고 나면 또 여러가지 생각들과 감정이 들겠지. 내가 예상하고 설레하는 모습과는 조금 다른 모습들일거라고도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좋은 책을 읽으면서, 책 자체에서 느꼈던 감동과 감사를 조금이나마 블로그에 기록해 두고 싶었다. 책을 만나게 해 준 모임에 이미, 미리 감사하다.
 
책은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여성혐오주의자, 인 동시에 신앙의 대부들의 발언을 발췌하며 시작한다. 지금도 그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 현실이 우스웠다.

 

 

 

 

 

 

 

 

 

 

 

 

 

 

 

 

 

 

 

 

 

 

 

 

 

 

 

 

 

 

 

 

 

 

 

 

 

 

 

 

 

 

 

 

 

 

 

 

 

 

 

 

 

 

 

 

p.46 (문제의 발단은 철학자들)
 서구 정신의 아버지라 할 만한 아테네의 세 남성은 놀라울 정도로 여성을 비하하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아테네는 여성의 이름을 딴 도시다.


p.72 (암흑기의 암흑)
 토마스 아퀴나스(주후 1224/24?-1274년). 그는 수도사였으며 가톨릭교회의 일등 신학자이기도 했다. 수도사들은 여성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결국엔 여성이 남성을 정욕에 휩싸이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우습다. 남성들에게 여성은, 유혹하는 동일한 주체도 되지 못한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와 닿았다. 정욕을 휩싸이게 만드는, 악한 악마적 존재일 뿐. 똑같이 죄를 지을 수 있고 정결함을 위해 노력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지지 않는 시각. 결국 자신의 마음에 있는 음란함을 마음껏 투사해 온 '연약한 사람'인 남성 수도사들. 반대로 노예보다 낮은 지위의.. 인간이기 보다는 대상으로밖에 존재할 수 없었던 여성들은 마녀로 몰려 교수형 당하고 화형에 처해졌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여성은 자신을 돌볼 정도의 지혜도 없기 때문에 누군가를 가르치게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는 여성의 지위가 노예보다 더 낮다고 생각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훌륭한 신학자이다. 그러나 그는 극단적인 여성혐오주의자였다. 마치 아무리 진보적이고 애국적인 시대의 영웅들도 성매수남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의 충격과 거의 비슷했다. 여성에게 구원자는 없다.

이런 여러가지 오래된 여성혐오의 역사를 읽다가 3부에 와서 마주친, 혁명가 예수의 존재는 내 마음을 울렸다.

p.97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

 

이것을 기억하라. 비참하게 얼룩진 인생을 살았던 이 여성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생명의 물이며 이 물이 그 여성 안에서 솟아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돌로 지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것이 아니라, 주님께 속한 사람들은 자기 내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때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기 아들이 다른 길로 여행을 하도록 하셨다.

 

책의 5부부터는 현대 교회들이 여성의 안수를 거부하고, 리더십에 제한을 두기위해 사용하는 고린도전서의 말씀들과 디모데서의 말씀들을 그 맥락에서 하나하나 차근차근 잘 파헤치고, 그에 대한 설명을 성실하게 한다.
예컨대, 고린도전서 11장 10절에 관한 내용을 잠시 살펴보면

p.158 (요약)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6-12절이 다시 번역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스인이 주장하는 것이 따로 있고, 동양인이 주장하는 것이 따로 있다. 유대인의 시각은 6-9절까지 나오고 있다. (...) 이 뒤에 이어지는 10절로 인해 위의 표현이 바울이 한 말처럼 들리지만, 그보다는 바울이 유대적 견해를 한 번 더 인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 훨씬 타당해 보인다. (...) 11절에서 우리는 위대한 "그러나"를 만난다.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11-12절)

책은 계속해서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했던 여성혐오자 히에로니무스의 전형적인 수법, 잘못된 오용과 단어 끼워넣기를 비판하며 성경의 내용을 다시 잘 살펴보기를 촉구한다. 게다가 "바울은 아내들에게 단 세 구절을 썼으나 남편들에게는 아홉 구절"의 권고를 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항상 간과하는 이야기들이다.

책에서 여성들만의 모임을 시작하라는 적용점을 제시하는 것도 매우 좋았다. 그런 점에서 모임이 훨씬 더 기대되었다. 또한, 나는 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이 '세속 페미니스트'들과 자신을 구분하는 측면에서 많은 의문점이 있었는데, 그 중 하나의 답이 될 수 있는 부분이 책에서 제시된다는 느낌도 받았다. 비기독교인들은 여성과 남성이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는 주류가 많은 반면,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고. 둘 간의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는 시각. 비기독교 페미니스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확실히 정립해보지 못했지만, 그와 별개로 기독교적 관점을 잘 드러내주는 흥미로운 시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도로시 세이어즈의 글을 인용하며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계획들도, 만날 사람들도. 설렘 반 두려움 반 여러가지 양가감정이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항상 감사할 수 있을 것 같다.

p.233
 가장 처음 말구유 옆에 있었고, 가장 마지막까지 십자가 앞에 남아 있었던 것이 여성들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들은 예수님 같은 남성을 한 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결코 그런 남성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지자이며 선생인 그 분은 여성에게 절대로 잔소리하지 않았고 입에 발린 찬사도, 감언이설로 속이려고도 하지 않았으며 선심 쓰는 체하지도 않았다. 결코 여성에게 어리석은 농담도 하지 않았고, 여성들에게 "여자들이란, 아이고 맙소사!"라고 하거나 "저런 형편없는 것들"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분은 화를 내지 않고 꾸짖었고, 생색내지 않고 칭찬했으며, 여성의 질문과 논쟁을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여성만의 특별 구역을 만들지도 않았고, 여성에게 여자답게 굴라고 하지도 않았으며, 여성성에 대해 조롱한 적도 없다. 여성을 무시하거나 어줍잖게 남성의 위신을 세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분은 여성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었고 언제나 따뜻하게 대하셨다. 복음서 어디에서도 여성의 사악함을 거론하는 행동이나 설교나 비유를 찾아볼 수 없으며, 예수님의 말과 행동에서도 여성의 '우스꽝스러운 본성을 암시라도 하고 있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다.

바로 이 분이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시다.

 
posted by sergeant

여성 리더십 논쟁 - 2018.01.22

독서/종교 2018. 6. 18. 17:30

 

이 책은 여성리더십에 대한 평등주의적 관점과 상보주의적 관점으로 나뉜 두 토론에 대한 책이다. 상보주의적 관점이란 전통주의적 관점으로서 여성 리더십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책 이름을 접했을 때, 나는 내게 꼭 필요한 책이 드디어 새물결 플러스에서 발간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상보적 관점’을 소개한 책의 내용 일부를 먼저 접하고 약간 화가 났다.  평소 새물결 플러스의 책은 믿고 구매하는 편이지만, 과연 전통주의적 관점을 평등주의적 관점과 나란히 놓은 책이 내게, 그리고 이 책을 읽을 여성들에게 가치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전통주의 관점들은 이미 모두가 다 잘 알고 익숙해져 있기에 지면을 할애하지 않아도 무리가 없지만, 평등주의적 관점들은 가뭄에 콩은커녕 존재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기 때문이다. 책 제목이 아무래도 논쟁이니까, 필수불가결 하다는 것쯤은 머리로 이해하면서도, 마음은 불쾌했다.


  이러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출판사 이벤트에 응모했는데, 내게 책이 배달되었다. 나는 이벤트에 응모할 당시 페미니스트인 몇 지인들에게 내 글을 공공연하게 공유했다. ‘이렇게 응모했는데도 출판사에서 책을 보내주시면, 제가 책임지고 리뷰 하겠습니다.’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나의 지인들은 배달 된 책에 관심을 표했다. 그리고 나는 책을 통해 평등주의적 관점들로부터 얻은 귀한, 양질의 자료들을 그분들과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다. (그 중 일부는 책이름을 확인하여 구매하기도 했다.) 마치 저자들이 논쟁을 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따뜻한 인사를 잊지 않았던 것처럼, 나는 그런 인사를 차용한다고 말하기에는 적합하지 않게도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표현했으나, 귀한 책을 보내주신 새물결 플러스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평등주의적 관점을 읽으며, 나는 린다와 크레이그의 세련된 유머와, 핵심을 찌르는 주장에 감명 받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은 이제껏 알지 못했던 “사도들 중에 가장 뛰어난 자”인 유니아에 대한 발견이다. 그리고 194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번역본들은 그녀를 시종일관 남성으로 옮겼다는 사실까지도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녀가 성별이 바뀐 이유는 “사도”란 용어가 여성에게 사용될 수 없을 것이라는 추정 때문이다. 네 학자 모두가 동의하고 있는 ‘여성’이었던 유니아의 발견은 그러한 만연한 삭제들에서도 살아남은 기록일 수 있겠다. 이 시점에서 나는 유니아가 마치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유관순열사처럼 느껴졌다. 지우고 지워냈지만 결국 하나만 남겨져 있는 유명한 여성운동가처럼. 그마저 없어지지 않았으니 얼마나 다행인걸까, 그런 존재. 그리고 더 다행히도 린다와 크레이그는 유니아 외에도 다양한 여성 리더십의 대표들을 제시해 낸다. 미리암, 드보라, 훌다, 브리스길라... 특히 마리아에 대한 크레이그의 <마리아는 제자의 자세를 취했다> 해석은 만약 현대에 예수님이 활동하셨다면 그의 가장 수제자가 마리아가 아니었겠냐는 동료들의 의견을 다시금 곱씹게 해준다.
  지워지는 여성에 대한 문제는 비단 성경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실제 여성의 역사는 지워진다. 세탁기를 발명한 이는 여성이었으나(마가렛 플렁켓 콜빈) 얼마전 나는 유투브 Prager University에서 발간한 feminism 동영상에서 “세탁기를 발명한 것은 남자였다”고 말하며 현대 페미니즘에 대해 비판하는 여성인 교수를 보고 경악했다.(4분11초_https://www.youtube.com/watch?v=ZR9FHKKbMZo) 그 뿐일까, 대한민국 독립운동 역사에서 지워졌다는 수많은 여성운동가들의 존재는? 이러한 예는 굳이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겠다. 얼마 전 영화<1987>만 해도, 고문가해자 미화에 대한 비판과 별개로 여성의 존재를 축소하고 왜곡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예시들은 끝도 없으니 이 정도에서 그만두어야 할 것 같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아주 오래된 역사이다. 나는 책에서 자신들을 상보주의자라 부르는 전통주의자들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들의 시각에서는 아주 관대해 봤자, 여성을 여전히 도움을 주어야 할 시혜적인 대상으로 보는 태도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이러한 점에 대해서는 더 이상 굳이 지적하고 싶지 않다.

  평등주의 관점을 통해 많은 쾌감을 얻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아쉬운 점도 있었다. 두 평등주의자들은 여성의 안수권과 리더십에 대한 내용은 적절하게 옹호하면서도 ‘세속 페미니스트’와 ‘동성애’를 자신들과 구분하는 의견을 공공연하게 표현한다. 실상은 세속 페미니스트들의 투쟁 덕분에 1918년에는 영국에서, 1920년에는 미국에서 여성들에게 참정권이 주어지게 되었는데도 말이다. 또한, 그들이 강하게 반대하는 동성애자들의 경우에는 일부의 목사님들께서 이미 당시 시대상황을 고려한 해석을 곁들여 동성애를 죄로 치부하는 것에 대해 반대 해석을 내놓고 있다.
 다만 나는, 평등주의자들이 배제하는 동성애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수용되어야 할 존재라는 것에 강하게 동의하면서도, 결국에는 그들이 오랜 시간 후에 모두 교회에서 환대받게 되었을 때에조차 여전히 교회의 허드렛일과 식당일과 온갖 잡무들을 다 맡아 하면서도 최종 리더십 자리에는 절대 오를 수 없다는 소릴 듣고 있을 것 같은 자매들을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을 많은 이들에게 추천할 것이다. 지워진 역사에 대한 발굴과, 맥락과 역사를 통해 성경을 읽어내는 통찰을 함께 하고 싶으니까. 각종 혐오의 선봉에 서 있는 기독교를 정화하고 더 많이 이루어져야 할 건전한 논쟁의 내용들이 이 책에 담겨 있으니까.

   다시 한번 좋은 자료들을 책으로 였어 주신 새물결 플러스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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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의 기도- 2017.11.02

독서/종교 2018. 6. 18. 17:27

 

'지렁이의 기도'는 추천사들부터 아주 화려하다. 추천사만으로도 약간 '간증' 분위기에, 재미있는 이야기들 한보따리. 주옥같은 통찰들.
저자 목사님은 성령의 은사(ex.방언)이 아니더라도 지성과 학문을 위해 봉사 할 수단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하셨다고 한다. 그 부분에서는 동의가 많이 되면서도 뒤 이어 나오는 신령하고 놀라운 이야기들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여전히 '참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제'하며 바른 앎과 지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에 국한되지 않으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를 맛보기에 ...부족함이 없는 책이다.비록 한국교회가 반지성주의로 몸살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성과 이성, 합리적인 것으로만 가두어 두기에 우리 하나님은 너무 크신 분이시다.

책은 나의 완악하고, 두려워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태도들을 회개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하나님은 크시고, 사랑이 많으시고, 참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다. 지인들에게도 자세하게 꼭꼭 씹어서 추천하고 싶다.

 


 

추천사 중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소원으로 삼아 드리는 간청이요 하나님 통치의 확장을 위해 드리는 몸의 봉헌이다. (김회권)
지렁이는 하나님 외에는 달리 아무것도 기댈 데 없는 존재를 상징한다(시22:6, 시41:14) 기도는 지렁이 같은 존재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며 아뢰는 말이다. (김근주)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의 은혜를 구한다고 생각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걔는 포유류라도 되지..나는 아직 멀었구나 싶었다...ㅋㅋ.

p.30
"하나님 왜 이러세요? 됐다니까요, 저는 (그딴 거)필요 없다니까요." .. 내게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어도 얼마든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봉사할 수 잇는 다른 수단이 있다고 나름 확신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도가 아닌, 지성과 학문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고 싶은 마음이 훨씬 더 컸다.

p.32
"아들이다, 됐냐?! 뭐, 그런 것 갖고 하루종일 화를 내고 그러느냐?"
> That's my man, 우리 주님ㅋㅋ 이분이 바로 내가 아는 나의 주님이시다.

p.73
우리는 기도를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유비적으로 참여하여, 하나님과의 사랑의 환대와 친교를 맛보는 가운데, 하나님이 주시는 신적 비밀을 배울 수 있다.

p.78
그렇지만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을 아빠라는 호칭으로 부르셨다. 여기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에 대해 가졌던 존경심과 함께 두 분 사이에 존재하는 기고 친밀한 관계성이 여과없이 잘 드러난다.

p.93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려서 응답받으리라고 확신할 수 잇는 이유는, 그 기도를 드리는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기도를 받으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에 달린 문제인 것이다. 즉 기도응답의 비결은 우리의 열심, 노력, 끈질김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선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의 신실한 성품에 기초한다.

p.96
기도할 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열심이나 태도 이전에,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바른 지식을 갖고 있으며, 그 지식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얼마나 신실하게 신뢰하고 있느냐다.

p.124
하지만 방언은사의 진가를 알려면 방언통변을 받아봐야 한다. 방언통변을 받아보면, 방언은사가 얼마나 깊고 오묘한 그리고 유창하고 수려한 기도인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인간은 누구나 두려워한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실 그분은 진정한 자유를 주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신데도, 우리는 그 분앞에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 한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죄를 지었을 때도 그와 같았을까. 처음 방언 통변을 받을 때 내 마음은 그런 마음의 연장이었다. 내가 당시에 고민하고 있던 문제들과 은밀한 죄악들, 교만과 부끄러운 수치들이 방언 통변을 받으면 모두 드러나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이 컸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나는 방언 통변을 받으며 내가 그렇게 아름다운 언어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동시에 내 안의 성령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여드리는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하나님 안에서 우리는 자유한다. 오묘하고 깊은 기도를 하시며 우리를 항상 중보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 수 있음은 정말 귀한 경험이었다.

p.150
 믿음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값싼, 감정적인 긍정이나 승인이 아니다. 기분이 달콤해지면 덩달아 믿음도 생기고, 기분이 우울해지면 믿음도 바닥을 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참된 믿음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전제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정확히 그리고 자세히 알수록 우리의 믿음도 함께 커진다. 또한 참된 믿음은 우리의 의지와 정서를 삼위 일체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온전히 일치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 깊고 친밀한 연합을 경험할 수록 그에 비례하여 우리의 믿음 역시 더욱 깊어진다.

p.153
 성경은 두려움이 가장 큰 죄라고 가르친다.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는 계명은 "두려워하지 말라"다.

p.167
내가 믿기로는 지성과 영성은 하나이며, 성경도 분명히 그렇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p.172
분명한 것은 잘못된 지식이나 편견, 비뚤어진 이념이나 불건전한 가치관을 갖고 있으면 기도가 타락할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진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건전한 지성의 개발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p.296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이 한국 땅을 처음 방문하고서 받은 느낌은 한결같이 "한국인들이 더럽고 게으르고 거짓말을 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 그러나 그들은 곧바로 "그런데 이상하리만큼 한국인들이 너무 사랑스럽다"고 고백했습니다.
>읽다가 빵터졌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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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 2017.11.02

독서/종교 2018. 6. 18. 17:25

 

 

신앙 서적을 좋아하지 않았던 오래 전 시기도 있다. 성경의 가르침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려 깊고 풍부한 내용으로 작성된 신앙 서적은, 성경 만큼이나 특별한 은혜를 제공한다. 그래서 나는 성경은 일반식, 신앙 서적은 특식 혹은 별식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어느정도는 지금도 유효한 생각이다. 집에서 해 먹는 밥보다 남이 해주는 '맛있는' 밥을 항상 먹고 싶어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면, 바르고 좋은 신앙서적을 한 두권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과거 간사 시절, 신학과 성경 지식에 대한 부재 때문에 리더들을 양육하는 것에 나름대로의 부담을 느꼈다. 무식이 용감하다고, 사실 부담을 느끼기는 했지만 그 때 생각에는 '주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이끌어 주시겠지!'라는 자신감이 상당히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나를 긍휼히 여기셨던 주님은, 때에 맞는 은혜를 우리 팀에 부어주셨는데 내 머리나 생각으로 해 낼 수 없었던, 말씀에 대한 통찰들은 물론, 다양하고 좋은 신앙 서적들을 내게로 이끌어 주셨다. 우리는 다양한 책들을 함께 읽고 나누었었다. 이 책 또한 그러한 책의 목록들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봐도 놀라운 것은, 특히 '빛과 어둠이 영적 전쟁' 같은 종류의 책은 나 스스로는 절대 읽어 보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책이라는 점이다.

아마 많은 독자들이 나와 비슷할 것 같은데, 일단 이 책은 표지부터 제목까지 너무.. 너무나도 이단스러운 스멜을 풍긴다 (ㅋㅋ) 나는 '안전함'이 중요한 사람이라, 환상과 예언 등 지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거부감에 더해 나는 '지성제일주의' 또한 가지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이시며 합리적이시고 상식적이신 분이라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방언 기도를 하기는 하지만, 그 조차도 약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고, 불과 같은 성령 체험 등의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히 큰 편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 책을 손에 넣게 되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쨋거나 이 책을 처음 읽으며 많이 놀라웠던다. 책은 릭 조이너 목사가 어떻게 환상과 예언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제시하면서 차근차근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예언적 체험이라는 것은 많고 다양하지만, 주님께서 자기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는 방법 또한 지성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은 합리적으로 아주 그럴듯 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위대한 선구자들의 이야기들은 어느정도 보편적인 진리를 담고 있는데, 당시 나는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수준의 깊은 은혜의 체험까지 들어가기를 꺼려한다는 '후안 까를로스' 목사님의 말에 큰 공감을 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깊은 은혜의 바다에서 우리를 부르시지만, 우리는 해안가에서 찰랑찰랑이는 파도에 발목을 담그고 만족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을 지성과 합리의 영역으로 끌어 내렸지만, 주님은 결단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따라서 이러한 지지적인 말씀들에 힘입어 책을 더 수월하게 시작할 수 있었고 '예언과 꿈, 계시'에 대한 저자의 인정할 수 있을 법한 설명으로의 차분한 시작, 그리고 그 계시의 사용이 어떻게 이루어 져야 하는지에 대한 제언들까지 굉장히 분명하고 훌륭했다.

본문으로 들어가며, 나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책을 읽을 수 밖에 없었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책이 끝머리 쯤에는 "여기 있는 사람, 심지어 왕의 보좌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까지도 만일 그들이 한 번 더 살 수 있다면 모두 자신의 삶을 달리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p.180) 라는 말이 나온다. 이 책을 읽은 나의 마음 또한 정확히 그것과 같았다. 릭 조이너 목사가 보았던 환상과 계시들은 성경내용의 전체를 아우르고 있으며 지혜와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현재에서 지금 이루어 지고 있는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들에 대한 엄청난 통찰을 준다. 더불어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그분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그 분의 위엄은 어떠하신지를 아주 희미하게 엿볼 수 있다.

나는 책을 복사해서 붙여놓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책의 모든 부분들이 주옥같고 중요하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발췌할 수가 없다. 내가 아는 소중한 이들에게 이 책을 몇 권 씩이나 선물했고, 또 다시 책을 사곤 했다. 그리고 어제 다시금 이 책을 읽으며, 기도 해야 겠다는 마음을 다잡았다.

책을 읽고 나서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망각하고 희미해져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억이 떨어지게 되는 것 같다. 사람은 얼마나 약하고 악한 동물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반복해서 나를 일깨우시고 기억하게 하시는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싶다. 더불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뜨거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보혈, 그리고 성령님의 따뜻하심을 경험하기를 바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빛과 어둠의 영적 전쟁에서 더 많은 이들이 함께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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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넘어 아침으로!" 책 표지에 저자교수님께서 사인을 해 주시며 적으신 문구이다.

기독교 역사에는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밤(?)이 있고, 그 밤에서 새벽으로, 결국에는 새벽에서 아침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선하심..? 동 트기 전 새벽이 가장 어둡다는 말,,?


창조과학회는 물론, 여성주의 및 동성애 반대, 세습과 성문제로 바람 잘 날 없는 우리 한국 기독교.

동 트기 전 가장 어두운 새벽이 바로 지금인 걸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책은 6월에 읽었으나 계속 정리하지 못하고 넘어갔는데, 토르3 개봉한 기념으로(??!!) 생각나서 찾아보니, 블로그에 정리가 안 되어 있다는걸 알게됐다ㅋㅋ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토르 영화 좋아해서 배우자와 킬링 타임 용으로 1,2편 가끔 봤었는데.. (어벤져스 및 아이언맨, 캡틴 시리즈 너무 자주 봐서 질렸음.. 나의 대안 토르..) 과도기를 읽던 중에 2편을 다시 봤었다. 그 때 약간 당황스러움을 느꼈는데..(ㅋㅋ)

이 책을 읽고 나서 과학적인 마인드가 나도 모르게 스며들고 장착이 된건지..

음, 아스가디언들이 5천년 밖에 못 산다고? 설정이 너무 후잡하잖아.. 지구 나이가 몇년인데....

음.. 토르가 지금 바이프로스트를 통해서 거의 날라댕기는데.. 저거 너무 진짜 과학적으로 말도 안되는 설정.. 뭐임.. 하 너무 판타지야..

이렇게 비평하고 있는 나를 발견해서 너무 고통스러웠다..ㅋㅋ


그만큼 쉽고 재밌게, (전문가까지는 못 되더라도) 과학적인 기본 교양을 쌓을 수 있는 너무 좋은 책이다 ㅋㅋㅋ

사진도 많이 들어가있고, 게다가 우주사진 너무 예쁨 ㅋㅋ 표지도 예쁨..


창조과학자들이랑 싸우다 보면 "한낱 미천한 과학이 어찌 하나님의 뜻을 블라블라" 이런 얘기 나오는데

제발 '한낱 미천한 과학'이 만든 인터넷과 스마트폰 좀 갖다버리고 와서 다시 얘기했으면 좋겠다.

무크따 선물로 보낸 오빠 목사님에게 조만간 과도기도 한권 놔드려야 겠다.


한국교회의 지성 회복을 위하여, 새벽을 넘어 아침으로.

 


p.159

 과학의 영역에 관해서 그리스도인이 무신론자와 대화할 때는, 과학은 유신론이나 무신론을 직접적으로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 즉 과학이 중립적이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과학을 넘어서는 수많은 형이상학적인 질문들에 관해서 그리스도인들은 무신론자들보다 더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기독교 신앙의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 과학의 영역과 과학 외적인(형이상학의) 영역을 구분하는 일은 비그리스도인들이나 무신론자들, 혹은 불가지론자들과 대화할 때 우리가 무엇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하고 서로 오해하지 않도록 도움을 준다. 안타까운 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뒷받침하는 지적인 토대를 거의 갖고 있지 않거나 혹은 너무 약한 토대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누가 신을 만들었는가"와 같은 성립하지 않는 질문을 던지는 무신론자들과의 대화나 토론에서 밀리고 만다.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을 명확히 이해하는 일, 과학주의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명확히 파악하는 일, 그리고 신앙의 지적 토대를 굳건히 다지는 일이다.


p.167

"신학에 대한 이해가 원초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무신론자는 외계인에게 납치당한 적이 없는 미국인만큼이나 드물다."

 마르크스주의자인 이글턴은 오히려 기독교 복음의 진수를 꿰뚫어 보고 있다. 우리나라 상황으로 번역하자면, 목사의 성추행, 대기업으로 전락한 교회, 샤머니즘과 기복 신앙을 파는 타락한 종교문화, 여성에 대한 불평등 등에 관해서는 도킨스나 히친스의 비판에 공감하지만 그러나 사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그는 대변한다. 그러면서 예수의 삶은 희생과 섬김의 삶이었고 그의 가르침은 오히려 정의와 사랑을 강조했으며 성경은 자유주의자들의 낭만적인 생각보다 훨씬 더 인간과 세상에 대한 회의를 품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희망을 제시하는 종교라고 일갈한다.


p.187

과학은 자연을 다룬다. 자연은 사람의 힘이 가해지지 않은, 저절로 일어나는 일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으로 설명되는 자연현상이 왠지 신을 배제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중력에 따라 스스로 운행되는 행성의 운동이나 스스로 자기복제를 하는 세포나 자연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종의 분화도 비슷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가 확연하게 보이지 않고 과학으로 검출되지 않더라도 이 모든 자연현상은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자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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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과학과 세대주의 -2017.09.26

독서/종교 2018. 6. 18. 17:20

 

 

<창조과학과 세대주의>를 읽으며, 예상치 못한 충격들에 마음만 점점 힘들어져 가며 쓰는 글.. 빡침주의

 [전도사들도 안 믿는 창조과학]
사실 창조과학은 내 인생이나 신앙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었다. 그런게 다 뭔 소용이람ㅋ 창조과학 말고도 고민할 문제는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저 문구를 본 이 후 부터는 알 수 없는 불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학을 전공하는 이들이 믿지 않는 내용이, 교회 대중들에게 열광을 받고 있는데.. 도대체 왜 그에 일말의 책임 있는 사람들은 입을 닫고 가만히 있는걸까. "어쩔 수 없다"고 하는걸까. 아니, 오히려 어쩔 수 없다며 침묵하고, 나아가 그를 옹호하는 선택을 하는 걸까. 이게 바로 내 불편함의 시작 포인트였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롬11]
그리고 일년 정도, 가볍게나마 과학과 신학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귀한 기회였다. 우연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니. 어쩌면 내가 강연과 독서모임을 갈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ㅊ신대에 예정되었던 과학과 신학에 대한 강연을, 진화론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강제 취소시키는데 들었던 수많은 노력과 권위주의.. 당시엔 그 무례함과 개념없음을 전해 듣고, 신학교가 제 정신인가.. 싶긴 했다ㅋ 그런데 요즘 예장합동 하는 행태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지금 돌이켜 보면 크게 놀랍진 않다. 
 결국 ㅊ신대생들은 그 명품강의를 듣지 못했는데, 덕분에(?) 신학생이 아닌 나에게 기회가 왔다. 권위주의와 은폐, 무례함과 반지성에 맞서서 꾸준하게 이 분야에 대해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 오신 많은 분들을 비롯하여, 황당한 강의 취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소에서나마 당일에 강연을 해 주셨던 우종학 교수님이 계셨기에 나는 완전히 새로운 강연, 불편함에 대한 답을 접할 수 있었다. 

[신학의 부재인가]
모임을 통해서는 주로, 과학에 대한 내용을 많이 접했지만 사실 내가 생각했을 때 창조과학의 진짜 문제는 "신학의 부재"였다. 그러나 신학생이 아닌 이상..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이에 대한 내 의견을 주변 목사들과 나누면 돌아오는 응답은 "너는 왜 다 아는 내용을 새로운 것처럼 얘기하냐" 혹은 "사람들의 관심사는 너의 관심사와는 좀 다르지"정도가 되겠다. 과연 "다 아는 내용"을 모두가 알고 있을까? 영향이야 조금 있겠지만, 그렇다고 성경을 "관심사"에 따라 가르쳐야 하는건가?

[창조과학의 신학적 둥지]
결국 나는 오늘, "창조과학과 세대주의"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부제가 "창조과학의 신학적 둥지"이다.  책은 고대로부터 19세기까지의 젊은 지구론을 다루며, 현대 세대주의 종말론까지도 다룬다. 세대주의?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 했다. 그렇지만 그를 이해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6000년에서 일만년을 주장한다는 창조과학의 젊은 지구론의 뿌리는 세대주의인데, 첫째 장부터 보면 이건 거의 신천지급 아닌가 싶을정도로.. 당황스럽다.
 젊은 지구론의 뿌리가 단순히 "문자적으로, 천지창조에서 그리스도 탄생까지 성경에 나온 연수를 계산해 보았더니 6000년쯤 되니, 지구의 역사도 그럴 것이다."라는 나이브한 관점을 넘어서서, 여섯개의 시대를 나누고 한 시대 당 천년, 즉 6000년 이후에 7000년대에는 주님께서 쉬셨듯이 우리도 안식, 즉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가적 뉘앙스.. 이것을 "무지함" 또는 "천진함"으로만 보아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뿌리를 가진 흐름을 목회자들이 모른다고..? 그래, 공부 싫어하면 모를수도 있지...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결국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창조과학이 말이 안 된다는걸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입 다물고 있는" 목회전공 및 신학 전공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누지 않을 수 없다. 몰라서 안가르친건가, 알고도 안가르치는건가? 어느쪽인가? 물론 어느쪽이든 비난을 피해갈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목회 전공인들이 이러한 내용을 몰랐다는 것은 좀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소명 받았다며.. 성경 좀 잘 공부해서 제대로 전해줘야 할 것 아닌가..
 그들의 직무유기 덕분에 나는 전공책을 한권 더 읽거나, 성경을 한 구절 더 묵상할 시간에 창조과학을, 세대주의를 공부하고 있다. 그렇다. 사실 예전에도 나는 항상 그 점이 불만이었다. 교회에서는 왜 자꾸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려고 하는가? 내가 내 삶에서 열심히 그 자리를 지키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리더의 자리에서 왜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도록 팔로워들을 촉진시켜야 하는 것인가. 왜 지금 평신도는 말씀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목회를 흉내내야 하고, 목회자들은 제대로 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말씀을 전해주지 않는 건가...?
 아무튼간에 그들의 직무유기 덕분에 오늘의 긴 밤에도 나는 "한낮의 우울"을 다시 펼치기 보다는 "창조과학과 세대주의"책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한다. 어쩌면 나 또한 내 내담자를 대하기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 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나는 비난의 화살을 그들에게 돌린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자기 필요대로 해석하는 사람들. 창조과학을 신봉하고, 교인들을 몰지성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고 천박한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목자랍시고, 자신에게 '님'자를 꼬박꼬박 붙이기를 무언으로 강요하며 나에게 봉사를 요구하는 이들. 필요할 때는 하나님을 운운하다가, 결정적일때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이들. 당신들의 무지와 게으름 덕분에 내가 들여야 하는 수고에 애도를 표한다. 

그러나 어쩌겠나.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신앙에 자기만 책임 질 수 있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목회자나 존경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혐오하고, 강한 힘과 결탁하는 당신들에게 나는 오늘도 화가난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현장에서 그에 맞서고 싶다. 무지하고 게으르고 싶은 나의 욕망에 나도 반기를 들고자 한다. 그러니 제발 목회자들도 좀 그래주기를 바란다. 

이 글에 "좋은 목사님도 있어."라는 반발심 들어도 나를 가르치려 들지는 말길. 나도 진심으로 존경하는 목사님/훌륭한 선교사님들이 주변에 계시니까. 그러나 그 비율은 현저하게 낮은 것이 사실이니까.

 

 

이후 참고할 법한 책의 발췌 내용들
p.202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라는 용어는 침례교도 커티스 리 로스가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집지 '워치맨 이그재미너'의 1920년 7월자 사설에서 그가 "대근본교리들에 여전히 매달리며 근본교리들을 위해 대 혈투를 벌일 뜻이 있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드이라 부를 것을 제안"하면서 유행했다. 근본주의자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복음주의자들인 셈이다.
1920년대에 자유주의와의 투쟁에서 패하면서 1930년대에 근본주의는 분리주의적 성향이 농후해졌다. 데이비드 비일의 근본주의의 역사는 근본주의자가 서술하는 근본주의의 역사서다. 그는 근본주의의 역사에 관해서 1930년 전을 비순응주의적 근본주의, 이후를 분리주의적 근본주의로 나누고 있다. 이 책에서 "전투적," "분리적"이라는 형용사는 근본주의를 묘사하는 미사여구이다. 이 책의 영문제목처럼 "순결함을 추구함에 있어서" "분리와 전투"는 마땅히 치러야 할 댓가이다. 근본주의자가 전투적이지 못한 복음주의를 형용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는 "포용적"이라는 것이다. 이 포용적 복음주의자들은 "순결함을 추구함에 있어서" 전투적이지 못하고 분리적이지 못한 타협주의자들인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의 전투성은 반계몽적, 반지성적, 반문화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근본주의라는 단어는 문화적 고정관념으로서 변질되어 버렸다. 세계저인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에서 근본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사고방식의 8가지 경향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
1. 학문과 과학에 대한 전체적 의심
2. 기계적 성경 영감설 혹은 '구술 영감설'
3. 킹제임스역(에 대한 미신적인 경외심)
4. 모든 성경말씀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
5. 분리주의적인 교회론
6. 문화적인 폐쇄성
7. 복음에 함축된 사회적인 의미들을 거부
8. 전천년설 종말론 주장
이처럼 근본주의는 패키지화된 신앙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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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송아지- 2017.03.10

독서/종교 2018. 6. 18. 17:18

 

친절하고 쉽게 읽히면서도 속 시원하고 내용이 풍부한 글을 쓰는 능력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걸까?

아론의 송아지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책은 하나님을 우리의 입맛대로 맞추고 가두려 하고 나아가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그 하나님'을 숭배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창조과학, 특히 젊은 지구론에 대한 비판이다.

  실제로 내가 창조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건 '전도사들도 안 믿는 창조과학' 이라는 묘한 구문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수식어들에 대한 궁금증을 말끔하게 해소시켜 준다. 아... 이래서 전도사들도 안 믿는 구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 과학, 그리고 과학의 눈으로 바라본 신앙 이라는 두가지 챕터로 나누어 져있는 이 책을 통해

신앙과 과학을 이상하게 뒤섞거나 반대로 완전히 단절시켜 버리는 몰지성적인 논리를 반성하고

 세계관과 학문의 바른 층위에 따른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나아가 이 논의들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삶의 태도도 정립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참 의미있었다.

 


<책발췌>

 

p.15

우매함은 선의 적으로서 사악함보다 훨씬 위험하다. 우리는 악에 맞서 항거할 수도 있고, 악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힘으로 저지할 수도 있다. 악은 자멸의 싹을 지니고 있다. 최소한 사람 속에 불쾌감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매함에는 백약이 무효다. 우매함에는 저항도 힘도 소용이 없고, 기본 지식도 쓸모가 없다. 우매한 자는 제 선입견에 어긋나는 사실들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p.88

기독교 종말론에서 "때"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내세의 일만 가치가 있는 것이고 현세의 삶과 역사는 하찮은 것이라는 이원론에 빠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현재 이 땅에서의 삶은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이비 여성 예언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가족을 팽개치고 해외로 도피 행각을 벌였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소명을 얼마나 무가치하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한 가정의 어머니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어린 자식을 버리고 해외로 도피해버리는 것, 또는 한 가정의 아버지가 종말의 파국을 피하겠다고 가족을 등지고 나홀로 해외로 도피해버리는 것,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양식과 감정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종말 신앙은 결코 인간의 지성과 양식을 저버린 몰역사적인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이다.


p.94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의외로 이원론적 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원론이란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선한 일이고, 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활동은 생존을 위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선하지도 의미가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이것은 교회를 빛의 영역으로, 세상을 어둠의 영역으로 극단적으로 나눠 접근하는 태도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는 물론 타락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실체가 동등하게 다투고 있는 혈투의 장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우주 전체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이미 가지고 있는 화가와 진지의 절반을 적에게 내어주고 전쟁을 시작하는 거소가 같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면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필요한 동시에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해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오늘날 과학은 인류의 삶에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실체다. 과학 기술의 진보는 경제적으로 막강한 재화를 창출할 수 있고, 이런 경제적 힘은 당연히 정치, 사회, 문화 등 우리를 에워싼 삶의 모든 분야에 강력한 입김을 미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는 것, 그리고 그 과학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 더 나아가 자연 과학적 인과 관계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혜안을 갖추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sergeant

 

 

한창 심취해 있는 독서모임과, 새롭게 발족된 '과학과 신학의 대화'라는 단체를 통해 다양한 책들을 접하고 있다.

근 1년간, 기독교 상담에 대한 고민에 실질적인 행동들로 답하고 한발짝씩 나아가면서, 신학과 성경의 바른 해석에 대하여 제대로 된 앎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그런데 의외의 장소에서 추천받은 여러 책들을 통해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서 감사했다. 비록 내가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는 아니지만, 바른 성경의 이해와 바른 세상에 대한 이해는 바른 제자의 길을 안내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은 사회과학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문제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고군분투하지 않는 우리의 게으름으로부터 비롯되는 것 같다.


교회에서 과학을 접하는 것은, 아무래도 창조과학이 먼저가 아닐까 싶다.

어릴 때부터 받아왔던 기독교 교육들은 문자주의적인 성경 해석을 자연스럽게 요구한다.

그리고 창조과학은 문자주의적 해석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기독교=문자주의적 성경해석=창조과학 인 것인가??

창조과학을 부정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것일까??

위와같은 고민들을 가지고 무신론 기자에 감정이입을 하며 과학과 성경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입문자에게 적합한 책. 그동안 가지고 있었던 해결되지 않았던 의문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시는 한 교수님의 발언이 참 따뜻한 이유는

저자이신 교수님이 가지고 계신 사명감과 한국교회 다음세대를 향한 사랑으로 부터 비롯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을 해 보았다.

 

책과 별개로,

처음에는 참석한 포럼에서 교수님께서 '과신대'라고 자꾸 하시길래, 과기대를 헷갈리시는건가 싶었는데(ㅎㅎ) 사명감을 갖고 만드신 단체 이름이었다. 그리고 '무크따'도 책 이름...ㅋㅋㅋ 나도 모르게 '무신론 기자, 크리스천 과학자에게 묻다'에서 강조하시려고 다를 쎄게 발음하시나보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책을 보고 '따지다'여서 놀랐음...하하하


읽기 쉽고, 재밌다.

 


 

p.40

세계관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우주를 보는 하나의 틀이다. 세계관은 우주의 근원적인 질문들에 대한 믿음으로 구성되는데, 가령 '신은 존재하는가', '우주는 창조되었는가'와 같은 기본적인 전제들을 포함한다. 대표적인 세계관으로는 유신론과 무신론을 꼽을 수 있다. 반면 과학 이론은 어떤 현상을 자연과학의 방법을 이용하여 이해하는 방식이며 과학 이론은 세계관적 논의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 이론은 유신론과 무신론의 세계관 각각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더 읽을 거리

- 신국원, '니고데모의 안경' <-이거 예전에 읽었었는데 다시 읽어야 할듯...

- 제임스 사이어,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 사상'

- 로널드 넘버스, '과학과 종교는 적인가 동지인가'

- 프랜시스 콜린스 '신의 언어'


p.92

보통 누군가 의도하지 않은 일이 발생하면 우연이라고 하지. 그러니까 우연히 발생한 사건은 누군가 계획(혹은 설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지.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진화가 우연이라고 할 때, 진화는 신의 설계일 수 없다는 뜻이 되네.

 하지만 과학에서 사용하는 우연이라는 개념은 그런 개념이 아니지. 과학에서는 가능한 여러 가지 일 중에 하나가 발생하는 것을 우연이라고 표현하네. 꼭 그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 하나가 실현되는 것이지. 주사위를 던지면 1에서 6까지의 숫자 중에 어떤 숫자도 나올 수 있네. 만일 주사위를 던졌는데 5가 나왔다면 이런 경우를 우연이라고 표현하네.


p.106

휴 로스(Hugh Ros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학이 신학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는 자연의 사실과 성경 말씀 중 어느 하나도 거부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는 자연의 사실과 성경 말씀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점검해 봐야 한다. 그 이유는 건전한 과학과 건전한 성경 해석은 항상 조화롭기 때문이다."

posted by sergeant

최초의 7일 - 2016. 11. 29

독서/종교 2018. 6. 18. 17:14

 

처음으로 방문할 과신대 서울 남부지구 독서모임을 위해 읽게 된 책. 중간중간에 꽤나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고 생각의 틀을 깨어 주기에는 더 없이 좋은 책이 아니었나 싶었다.
 
독서모임 토론을 통해 인상 깊었던 내용은, imago dei 즉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질문과 그에 대한 답이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아마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씀으로 세계를 창조하신, 그 말씀의 권위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애초에 천지 창조에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것이 말씀이고, 아무래도 동물과 비교했을 때.. 초보적인 수준에서 동물도 언어가 존재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문명을 이룩하는 것에 고차원적 수준의 문자 사용이 기여를 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어 자체를 극도로 신봉하게 된 계기에는 아무래도 학부를 언어관련 학과로 전공했기 때문도 있을거라고 솔직하게 덧붙여둔다. 그런 의미에서 학부 동안 바벨탑 사건이 갖는 의미와 나의 진로에 대해 한동안 고민하기도 했었다. (돌이켜 보면 참 진정성 있기도 하면서 자신이 귀엽기도 하다.) 어쨋거나 혼자서 생각했을 때 나의 답은, 입술과 말에 있는 권세가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닮은 특징이 아닐까 싶었고, 그래서 말 조심 해야한다는 부분이 더 와닿았었다.
 
그런데 논의에서 나온 내용은 꽤나 흥미로웠고 정답에 가깝다고 여겨졌다.
처음에는 한 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물리적인 속성'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다른 어떤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컨대 선하심과 같은 종류의 것이다. 사실 물리적인 속성이 아니라고 말을 하면, 바로 꼬리를 무는 의문은 그렇다면 역집합 말고, 바로 그 정집합이 뭐냐는 의문이었는데,
이 의문을 미처 제기하기도 전에 다른 분이 속성론은 현재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왜냐하면 속성론 자체가 앞서 말한 '선하심'이라는 부분에서 하나님을 선이라는 속성에 가두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요즘 합쳐지고 있는 의견은, 아무래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이 땅을 통치하도록, 섭정하도록 그 권한을 위임하셨다는 부분에서 그 위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란다. 다스리고 통치하는 권한은 아무래도 창조주인 하나님만 가지셨던 부분인데, 그걸 인간에게 위임하셨다니. 꽤나 그럴듯 한 부분이다. 다스려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려야 할 의무와 책임까지도 있다는 생각까지 미치게 되면,
 
현 시국이나 주위의 삶에 대해서.. '잘 다스려져야 하는 것들'에 전반적으로..너무 방관자적인 태도로 임했던 것은 아닐까. 그런 반성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엄마가 좋아하는 말 중 하나는 '공짜가 없다'는 것. 뭐든 정성이 들어가기 마련이니까. 다시금 노력과 정성의 중요함을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