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과학과 세대주의 -2017.09.26

독서/종교 2018. 6. 18. 17:20

 

 

<창조과학과 세대주의>를 읽으며, 예상치 못한 충격들에 마음만 점점 힘들어져 가며 쓰는 글.. 빡침주의

 [전도사들도 안 믿는 창조과학]
사실 창조과학은 내 인생이나 신앙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했었다. 그런게 다 뭔 소용이람ㅋ 창조과학 말고도 고민할 문제는 널리고 널렸다. 그러나 저 문구를 본 이 후 부터는 알 수 없는 불편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학을 전공하는 이들이 믿지 않는 내용이, 교회 대중들에게 열광을 받고 있는데.. 도대체 왜 그에 일말의 책임 있는 사람들은 입을 닫고 가만히 있는걸까. "어쩔 수 없다"고 하는걸까. 아니, 오히려 어쩔 수 없다며 침묵하고, 나아가 그를 옹호하는 선택을 하는 걸까. 이게 바로 내 불편함의 시작 포인트였다.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롬11]
그리고 일년 정도, 가볍게나마 과학과 신학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들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정말 귀한 기회였다. 우연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 아니. 어쩌면 내가 강연과 독서모임을 갈 수 있도록 해 준 것은 우연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ㅊ신대에 예정되었던 과학과 신학에 대한 강연을, 진화론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강제 취소시키는데 들었던 수많은 노력과 권위주의.. 당시엔 그 무례함과 개념없음을 전해 듣고, 신학교가 제 정신인가.. 싶긴 했다ㅋ 그런데 요즘 예장합동 하는 행태들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지금 돌이켜 보면 크게 놀랍진 않다. 
 결국 ㅊ신대생들은 그 명품강의를 듣지 못했는데, 덕분에(?) 신학생이 아닌 나에게 기회가 왔다. 권위주의와 은폐, 무례함과 반지성에 맞서서 꾸준하게 이 분야에 대해 학자적 양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내 오신 많은 분들을 비롯하여, 황당한 강의 취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장소에서나마 당일에 강연을 해 주셨던 우종학 교수님이 계셨기에 나는 완전히 새로운 강연, 불편함에 대한 답을 접할 수 있었다. 

[신학의 부재인가]
모임을 통해서는 주로, 과학에 대한 내용을 많이 접했지만 사실 내가 생각했을 때 창조과학의 진짜 문제는 "신학의 부재"였다. 그러나 신학생이 아닌 이상..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이에 대한 내 의견을 주변 목사들과 나누면 돌아오는 응답은 "너는 왜 다 아는 내용을 새로운 것처럼 얘기하냐" 혹은 "사람들의 관심사는 너의 관심사와는 좀 다르지"정도가 되겠다. 과연 "다 아는 내용"을 모두가 알고 있을까? 영향이야 조금 있겠지만, 그렇다고 성경을 "관심사"에 따라 가르쳐야 하는건가?

[창조과학의 신학적 둥지]
결국 나는 오늘, "창조과학과 세대주의"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의 부제가 "창조과학의 신학적 둥지"이다.  책은 고대로부터 19세기까지의 젊은 지구론을 다루며, 현대 세대주의 종말론까지도 다룬다. 세대주의? 처음에는 잘 이해하지 못 했다. 그렇지만 그를 이해하는 것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6000년에서 일만년을 주장한다는 창조과학의 젊은 지구론의 뿌리는 세대주의인데, 첫째 장부터 보면 이건 거의 신천지급 아닌가 싶을정도로.. 당황스럽다.
 젊은 지구론의 뿌리가 단순히 "문자적으로, 천지창조에서 그리스도 탄생까지 성경에 나온 연수를 계산해 보았더니 6000년쯤 되니, 지구의 역사도 그럴 것이다."라는 나이브한 관점을 넘어서서, 여섯개의 시대를 나누고 한 시대 당 천년, 즉 6000년 이후에 7000년대에는 주님께서 쉬셨듯이 우리도 안식, 즉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가적 뉘앙스.. 이것을 "무지함" 또는 "천진함"으로만 보아주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런 뿌리를 가진 흐름을 목회자들이 모른다고..? 그래, 공부 싫어하면 모를수도 있지...

[악하고 게으른 종아]
결국 처음에 생각했던 것처럼, 창조과학이 말이 안 된다는걸 알면서도 "어쩔수 없이 입 다물고 있는" 목회전공 및 신학 전공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겨누지 않을 수 없다. 몰라서 안가르친건가, 알고도 안가르치는건가? 어느쪽인가? 물론 어느쪽이든 비난을 피해갈 수 없다. 책을 읽으며, 목회 전공인들이 이러한 내용을 몰랐다는 것은 좀 심각한 직무유기에 해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소명 받았다며.. 성경 좀 잘 공부해서 제대로 전해줘야 할 것 아닌가..
 그들의 직무유기 덕분에 나는 전공책을 한권 더 읽거나, 성경을 한 구절 더 묵상할 시간에 창조과학을, 세대주의를 공부하고 있다. 그렇다. 사실 예전에도 나는 항상 그 점이 불만이었다. 교회에서는 왜 자꾸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려고 하는가? 내가 내 삶에서 열심히 그 자리를 지키고 최선을 다 하는 것이 왜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것이 되어야 하는가. 나는 리더의 자리에서 왜 삶과 신앙을 분리시키도록 팔로워들을 촉진시켜야 하는 것인가. 왜 지금 평신도는 말씀을 다 알지도 못하면서 목회를 흉내내야 하고, 목회자들은 제대로 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말씀을 전해주지 않는 건가...?
 아무튼간에 그들의 직무유기 덕분에 오늘의 긴 밤에도 나는 "한낮의 우울"을 다시 펼치기 보다는 "창조과학과 세대주의"책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한다. 어쩌면 나 또한 내 내담자를 대하기에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기 위해 더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 나는 비난의 화살을 그들에게 돌린다. 하나님이 전하라고 하신 말씀을 자기 필요대로 해석하는 사람들. 창조과학을 신봉하고, 교인들을 몰지성화하고, 사회적 약자를 혐오하고 천박한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러면서도 목자랍시고, 자신에게 '님'자를 꼬박꼬박 붙이기를 무언으로 강요하며 나에게 봉사를 요구하는 이들. 필요할 때는 하나님을 운운하다가, 결정적일때 자본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 그게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이들. 당신들의 무지와 게으름 덕분에 내가 들여야 하는 수고에 애도를 표한다. 

그러나 어쩌겠나. 신앙인이라면 자신의 신앙에 자기만 책임 질 수 있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목회자나 존경하지 않는다. 침묵하고, 혐오하고, 강한 힘과 결탁하는 당신들에게 나는 오늘도 화가난다. 그래서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현장에서 그에 맞서고 싶다. 무지하고 게으르고 싶은 나의 욕망에 나도 반기를 들고자 한다. 그러니 제발 목회자들도 좀 그래주기를 바란다. 

이 글에 "좋은 목사님도 있어."라는 반발심 들어도 나를 가르치려 들지는 말길. 나도 진심으로 존경하는 목사님/훌륭한 선교사님들이 주변에 계시니까. 그러나 그 비율은 현저하게 낮은 것이 사실이니까.

 

 

이후 참고할 법한 책의 발췌 내용들
p.202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라는 용어는 침례교도 커티스 리 로스가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집지 '워치맨 이그재미너'의 1920년 7월자 사설에서 그가 "대근본교리들에 여전히 매달리며 근본교리들을 위해 대 혈투를 벌일 뜻이 있는 사람들을 근본주의자드이라 부를 것을 제안"하면서 유행했다. 근본주의자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복음주의자들인 셈이다.
1920년대에 자유주의와의 투쟁에서 패하면서 1930년대에 근본주의는 분리주의적 성향이 농후해졌다. 데이비드 비일의 근본주의의 역사는 근본주의자가 서술하는 근본주의의 역사서다. 그는 근본주의의 역사에 관해서 1930년 전을 비순응주의적 근본주의, 이후를 분리주의적 근본주의로 나누고 있다. 이 책에서 "전투적," "분리적"이라는 형용사는 근본주의를 묘사하는 미사여구이다. 이 책의 영문제목처럼 "순결함을 추구함에 있어서" "분리와 전투"는 마땅히 치러야 할 댓가이다. 근본주의자가 전투적이지 못한 복음주의를 형용하기 위해 선택한 단어는 "포용적"이라는 것이다. 이 포용적 복음주의자들은 "순결함을 추구함에 있어서" 전투적이지 못하고 분리적이지 못한 타협주의자들인 것이다.
근본주의자들의 전투성은 반계몽적, 반지성적, 반문화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래서 근본주의라는 단어는 문화적 고정관념으로서 변질되어 버렸다. 세계저인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는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에서 근본주의라고 일컬어지는 사고방식의 8가지 경향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한다. (...)
1. 학문과 과학에 대한 전체적 의심
2. 기계적 성경 영감설 혹은 '구술 영감설'
3. 킹제임스역(에 대한 미신적인 경외심)
4. 모든 성경말씀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
5. 분리주의적인 교회론
6. 문화적인 폐쇄성
7. 복음에 함축된 사회적인 의미들을 거부
8. 전천년설 종말론 주장
이처럼 근본주의는 패키지화된 신앙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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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의 송아지- 2017.03.10

독서/종교 2018. 6. 18. 17:18

 

친절하고 쉽게 읽히면서도 속 시원하고 내용이 풍부한 글을 쓰는 능력은 어떻게 가질 수 있는걸까?

아론의 송아지라는 제목에 걸맞게, 이 책은 하나님을 우리의 입맛대로 맞추고 가두려 하고 나아가 자신들이 만들어 낸 '그 하나님'을 숭배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창조과학, 특히 젊은 지구론에 대한 비판이다.

  실제로 내가 창조과학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건 '전도사들도 안 믿는 창조과학' 이라는 묘한 구문 때문이었는데, 이러한 수식어들에 대한 궁금증을 말끔하게 해소시켜 준다. 아... 이래서 전도사들도 안 믿는 구나...

신앙의 눈으로 바라본 과학, 그리고 과학의 눈으로 바라본 신앙 이라는 두가지 챕터로 나누어 져있는 이 책을 통해

신앙과 과학을 이상하게 뒤섞거나 반대로 완전히 단절시켜 버리는 몰지성적인 논리를 반성하고

 세계관과 학문의 바른 층위에 따른 올바른 시각을 가질 수 있다.

나아가 이 논의들을 통해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으로서 삶의 태도도 정립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참 의미있었다.

 


<책발췌>

 

p.15

우매함은 선의 적으로서 사악함보다 훨씬 위험하다. 우리는 악에 맞서 항거할 수도 있고, 악을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으며, 부득이한 경우에는 힘으로 저지할 수도 있다. 악은 자멸의 싹을 지니고 있다. 최소한 사람 속에 불쾌감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매함에는 백약이 무효다. 우매함에는 저항도 힘도 소용이 없고, 기본 지식도 쓸모가 없다. 우매한 자는 제 선입견에 어긋나는 사실들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


p.88

기독교 종말론에서 "때"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내세의 일만 가치가 있는 것이고 현세의 삶과 역사는 하찮은 것이라는 이원론에 빠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현재 이 땅에서의 삶은 무가치하거나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사이비 여성 예언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가족을 팽개치고 해외로 도피 행각을 벌였다는 것은, 그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 소명을 얼마나 무가치하게 생각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한 가정의 어머니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어린 자식을 버리고 해외로 도피해버리는 것, 또는 한 가정의 아버지가 종말의 파국을 피하겠다고 가족을 등지고 나홀로 해외로 도피해버리는 것, 이런 일들은 우리의 일반적인 양식과 감정으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종말 신앙은 결코 인간의 지성과 양식을 저버린 몰역사적인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종말론적 신앙이다.


p.94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의외로 이원론적 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다. 이원론이란 예배당에 모여 기도하고 찬송하고 성경을 공부하는 것은 선한 일이고, 반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활동은 생존을 위해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다지 선하지도 의미가 있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이것은 교회를 빛의 영역으로, 세상을 어둠의 영역으로 극단적으로 나눠 접근하는 태도다. 하지만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는 교회는 물론 타락한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두 실체가 동등하게 다투고 있는 혈투의 장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우주 전체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며, 이미 가지고 있는 화가와 진지의 절반을 적에게 내어주고 전쟁을 시작하는 거소가 같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한 손에는 성경을, 한 손에는 신문을" 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그의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려면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이 필요한 동시에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이해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는 뜻이다. 오늘날 과학은 인류의 삶에 막대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실체다. 과학 기술의 진보는 경제적으로 막강한 재화를 창출할 수 있고, 이런 경제적 힘은 당연히 정치, 사회, 문화 등 우리를 에워싼 삶의 모든 분야에 강력한 입김을 미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과학에 대한 바른 이해를 도모하는 것, 그리고 그 과학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 더 나아가 자연 과학적 인과 관계 이면에 자리 잡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궁극적인 의미를 찾아낼 수 있는 혜안을 갖추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