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과 심리치료 - 대학원 스페셜 5

독서/심리 2018. 6. 18. 17:00

대학원 시절 읽었던 책 중에 몇권을 정리해 둔 파일들을 발견했다.

읽었던 모든 책들을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의미 있는 책 몇 권을 정리해 둔 것이라 현재 블로그에도 옮겨 둔다.

 

Bowlby의 중요한 기여는 아이가 양육자에게 애착하는 행동이 생물학적인 진화에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점이었다. Bowlby는 동기 체계로서 애착의 근본적 속성은 양육자와 물리적인 근접성을 유지하려는 유아의 절대적인 필요에 기초한 것으로, 이것은 단지 정서적인 안전을 증진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실상 문자 그대로 유아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 조상들이 적응해야 했던 자연 환경에서는 수많은 포식 동물과 목숨을 위협하는 다른 위험 요소들로 인해, 유아가 보호자와 떨져 몇 시간은 고사하고 몇 분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Main, Hesse, & Kaplan, 2005). 따라서 Bowlby가 말한 애착 행동 체계 (attachment behavioral system)는 생존과 재생산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진화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이처럼 애착 체계는 젖을 먹이고 짝짓기를 하는 것과 같이 인간 유전 프로그램의 한 요소인 것이다 (Bowlby, 1969/1982)


>메모: 본능적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것과 그에 대한 지혜가 유전에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는 것?

 

 

애착 대상은 특정한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러 명의 애착 대상으로 이루어진 작은 위계에 속한 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인물은 보통 친족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누구든 아이가 가장 밀접하게 관계하는 사람(엄마나 아빠 혹은 다른 양육자)이 애착 위계에서 맨 위에 있을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아이가 가장 선호하는 인물에게 돌아가는 이 자리는 실제로 주로 엄마가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아이가 엄마와 관계하는 정도와는 무관했다. -주석 : Bowlby에 의하면 유아가 엄마와의 근접성을 더 추구한다는 사실은 애착이 주로 가용성과 관련된다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Mary Main, 스웨덴에서 수행된 몇 개의 연구들을 인용하면서 ,심지어 엄마가 밖에서 일을 하고, 아버지가 사실상 주양육자인 경우에도 여전히 엄마가 강력하게 선호되는 사람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Main은 이런 놀라운 발견에 대한 설명으로 유아가 자궁에서 나오기 전부터 엄마가 주된 애착 대상이 될 것임을 어느 정도 보증해 주는 태내 경험(자궁 안에서 엄마의 목소리에 노출되었고 즉각적으로 그것을 선호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제안한다.

  ..

애착 행동의 목표는 현재의 위험에서 보호받는 것뿐만 아니라, 양육자의 지속적인 가용성(availability)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 또한 양육자가 물리적으로는 접근 가능하지만 감정적으로 부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Bowlby는 애착 대상의 가용성을 그저 접근 가능서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적인 반응성의 문제로도 정의했다.

 

 

그는 마침내 애착에 대한 이런 확장된 이해에 명백하게 내적인 차원을 추가하여, 애착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양육자의 가용성에 대한 아이의 평가이며, 현재 시점에서의 평가는 주로 아이가 과거에 양육자의 가용성에 대해 어떤 경험을 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역설했다(Bowlby, 1973).

 

 

신체적 친밀함은 유아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인데, 이것은 좀 더 연령이 높은 아도오가 성인에게도 감정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흔히 경험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 나는 스킨쉽을 평가절하 했던 사람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이 가장 애착되어 있는 대상의 신체적, 감정적인 행방, 즉 가용성과 반응성을 점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애착의 정해진 목표로서 근접성에 안전의 느낌이 추가된 이상, 애착은 우리가 성장하면서 탈피하는 유치한 의존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인간의 욕구로 간주되어야 한다. Bowlby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980)

 

다른 사람들에 대한 친밀한 애착은 한 인간의 삶이 그것을 구심점으로 해서 움직이는 것으로, 이는 걷기 이전의 유아나 걸음마를 뗀 유아일 때뿐만 아니라 사춘기와 성년기를 거쳐 노년기까지 지속된다 (p.442).

 

    

 

Bowlby(1969/1982)는 이런 영향이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처하기 위한 아동의 노력을 반영하는 일련의 반응에서 규칙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외상성의 분리에 대해 아동이 보인 최초의 반응은 항의(protest)였고, 그 뒤 절망(despair)으로 이어졌으, 마침내 거리두기(detachment)로 나타났다.

 

Ainsworth가 수행한 연구들은 Bowlby가 제안한 생각의 많은 부분을 분명히 확증해 주었지만, 그녀는 또한 애착이라는 개념의 진화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밝혀지는 데 독자적인 기여도 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기여는 선천적이고 생물학적인 애착 체계가 실제로 영향받을 수 있는 (malleable) 것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 개인의 애착 행동의 질적인 차이는 양육자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Grossman, 1995). 이 발견은 애착 이론이 심리칠에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인 유아와 성인기 애착 양식의 분류로 이어졌다.

.. 그녀는 안정이냐 불안정이냐의 핵심은 유아와 양육자 간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패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임을 깨달았다.

 

주목할 만한 예외적인 사례들을 보면서 Ainsworth는 중요한 것은 양육의 양이 아니라 질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녀는 엄마들을 면담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유아가 보내는 신호에 대한 엄마의 민감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또한 유아의 애착 안정과 엄마가 수유에서 누리는 즐거움 간에 정적인 상관이 있음을 발견했다 (Bretherton, 1995; Marvin & Britner, 1999). 이 발견은 건강한 발달이 애착 관계에서 엄마와 자녀 양자가 느끼는 즐거움에 의해 결정된다는 Bowlby의 초기 가설 (Bowlby, 1951)을 지지했다.

  

유아기 애착의 유형화

 

안정 애착

 

 

안정된 유아들은 안전하다고 느낄 때는 탐험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관계를 통해 위안을 얻고자 하는 두 가지 충동과 균등하게 접촉하는 것처럼 보인다. Ainsworth는 애착의 안정이나 불안정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보여 준 것은 분리가 아니라 엄마와 재회 했을 때 유아가 보인 반응이라고 결론 내렸다. 안정된 유아는 분리로 인해 아무리 심하게 고통 받았더라도 엄마와 다시 연결되면 거의 즉시 안심했고 선뜻 놀이를 재개했다.

이와 같은 유연성과 탄력성(resilience)은 유아가 보내는 신호와 의사소통에 반응을 보였던 민감한 엄마와의 상호작용의 산물로 보였다. 일반적으로 안정된 유아의 엄마들은 아기가 울면 재빨리 들어 올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안아 주었지만, 유아가 안겨 있고 싶어 하는 동안만 그렇게 했다. 이 엄마들은 유아에게 자신의 속도나 목적을 강요하기 보다는 자신의 리듬이 유아의 리듬과 순조롭게 맞물리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Winnicott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만하면 좋은(good-enough)’ 방식으로 이 엄마들의 행동은 잘못된 조율보다는 민감성을, 거절보다는 수용을, 통제보다는 협동을, 냉담함보다는 감정적으로 함께해 주는 능력을 보여 주는 경향이 있었다(Ainsworth et al., 1978).

 

회피형 애착

 

낯선 상황 절차에서 유아들이 본질적으로 위협적인 환경에 노출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회피적인 유아들의 무신경한 반응은 특이한 현상으로 보일 수 있다. 엄마가 떠나든 돌아오든 이들은 눈에 띌 정도로 태연한 가운데 끊임없이 탐험하기 때문에, 고통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모습은 침착한 것으로 오인받기 쉽다. 실제로 이 유아들이 엄마와 분리된 동안 일어난 심장 박동률의 상승은, 그런 상황에서 눈에 띄게 고통 받았지만 안정된 유아들의 수준과 같았다. 하지만 낯선 상황 절차 이전과 이후에 측정한 이들의 코르티솔(신체의 주요 스트레스 호르몬)은 안정된 유아에 비해 그 증가량이 유의하게 높았다(Spangler & Grossmann, 1993; Sroufe & Waters, 1977b).

Ainsworth는 회피형 아기가 보이는 표면적인 무관심과 애착 행동의 사실상 부재는 Bowlby가 부모로부터 장기간 떨어져 있어야 했던 2,3아기들에게서 관찰했던 거리두기(detachment)와 유사한 방어적인 적응을 나타낸다고 믿게 되었다. 이 회피형 아기들은 부모와의 분리와 상실로 인해 외상을 경험한 좀 더 연령이 높은 아이들처럼, 위로와 돌봄을 청하는 그들의 요구가 소용이 없을 것이라 결론짓고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체념한 것 같았다.

Ainsworth는 회피형으로 분류된 유아들의 엄마는 연결을 원하는 유아의 시도를 적극적으로 거부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Ainsworth et al., 1978), 이후에 다른 연구자들은 이런 엄마들이 유아가 슬퍼하는 것처럼 보일 때 뒤로 물러나는 것을 관찰했다(Grossmann & Grossmann, 1991). 이것은 뜻밖의 발견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신체적인 접촉을 회피하며, 접촉 했을 때 무뚝뚝하게 반응하는 것은 모두 회형 유아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양육의 징표인데, 이런 유아들은 엄마한테 안겼을 때도 엄마를 꼭 껴안거나 달라붙기보다 늘상 축 늘어졌다 (Main & Weston, 1982).

 

양가적 애착

 

 

Ainsworth의 연구에서는 두 가지 유형의 양가적인 유아들이 확인되었는데, 이들은 분노하는 유아들과 수동적인 유아들이었다. 두 유형 모두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에 너무 집착해서 자유롭게 탐험할 수 없었고, 또한 엄마가 자리를 뜨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런 고통이 너무 심해 엄마와 분리되는 에피소드를 중단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을 정도였다. 엄마와 다시 만났을 때 분노하는으로 분류된 유아들은 엄마와 연결하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것과 거부를 표현하는 것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는데, 이때 거부는 엄마가 안으려고 할 때 몸을 뒤로 젖히는 것에서부터 분노 폭발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수동적인으로 분류된 유아들은 엄마에게 자신을 위로해 달라고 그저 미약하게 혹은 심지어 암시하듯이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마치 자신의 무력감과 고통에 너무나 압도 되어 엄마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불행히도 양가적인 유아들에게는 엄마와 다시 만나는 것이 그들의 괴로움을 줄여 주지도 못했고, 그들이 엄마의 행방에 집착하는 행동을 멈추게 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마치 엄마가 곁에 있음에도 이 유아들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엄마를 계속 찾고 있는 것 같았다.

Ainsworth가 알게 된 사실은 실제로 양가적인 유아의 엄마는 반응을 하더라도 기껏해야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반응했고, 그리고 이따금 감정적으로 유아와 함께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 엄마들은 회피형 유아의 엄마들처럼 언어적이거나 신체적으로 거부적이지는 않았지만, 유아의 신호에 대한 반응은 그들만큼 둔감했다. 마지막으로 양가적인 유아의 엄마들은 은근히 혹은 그다지 은근하지 않게 유아의 자율성을 좌절시키는 것 같이 보였다. 아마도 이것이 이 유아들의 특징인 탐험 행동에 대한 억제의 원인을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Ainsworth et al., 1978)


 

핵심은 의사소통

 

Ainsworth는 안정 애착과 여러 유형의 불안정 애착을 구분하면서 애착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유아와 양육자 간 의사소통의 질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안정 애착이 형성된 관계에서 유아는 분리 후에 위안을 받고 싶다는 욕구와 다시 엄마를 만났을 때 위로 받고 안도감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 결과 놀이를 재개할 준비가 됐음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엄마는 유아의 비언어적인 단서들을 정확하게 읽고 그에 맞게 반응했다. 엄마와 유아 간의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일종의 조율된 의사소통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협력적이고 상대방의 의도와 상태에 수반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 한 사람이 신호를 보내면 상대편은 행동으로 답하는데 그 행동이 말하는 것은 이른바, 나는 네가 무엇을 느끼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고 네가 필요로 하는 것에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Mary Main, 혼란된 애착

   

 

이후 애착 연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그녀가 고안했던 것은 성인 애착 면접(adult Attachment Interview: AAI)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느슨하게 구조화되고 속기 쉬울 정도로 단순한면접도구로서 여구에 참여한 부모들에게 상실과 거절 그리고 분리를 포함하여 그들의 부모와의 관계 내력을 회상하고 성찰해 볼 것을 요청한다.(George, kaplan, & Main, 1984, 1985, 1996; Slade, 2000, p. 1152).

 

.. 사실 낯선 상황 실험은 유아의 성격 특성보다는 관계를 확인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인의 유형화는 어떤 특정한 관계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Main(1995)은 성인 애착 면접이 실제로 응답자가 현재 갖고 있는 애착과 관련된 마음 상태를 측정한다고 제안했다(p. 437). - 각주. Main과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에서 이 상태(state)’는 특성(trait)이라고 기술해도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장시간에 걸쳐 안정성- 결코 불변의 특성은 아니지만- 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왔다.

 

 

언어는 그것이 드러낼 수 있는 것만큼이나 숨길 수도 있다. - 그리고 내적 표상은 주로 무의식적이어서 언어화할 수 없다- 는 것을 알았기에, Main은 자신의 연구에서 부모들이 사용한 특정한 단어보다는 단어를 사용하는 특정한 방식에 주의를 집중했다. , 말의 내용보다 과정과 형식에 더 집중했다. 성인 애착 면접을 이용한 그녀의 연구가 임상가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가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표상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이런 접근- 사람들이 무엇을 전달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전달하는가에 주로 주의를 기울이는 접근-을 취했기 때문이다.

 

 

p.61

원래는 행동적/의사소통적전략으로 구현됭던 규칙들이 또한 결국에 가서는 애착과 관련된 우리 자신의 느낌과 욕망 및 기억에 접근할 수 있는 정도와 본질을 결정하는 표상적/주의(representational/attentional)' 전략을 만들어 낸다고 덧붙였다. 앞서 Ainsworth가 안정 애착을 애착과 탐험 간의 유연한 균형 잡기 같은 것으로 여겼던 것처럼, Main도 그녀의 연구에서 가장 안정된 부모와 아이는 예측 가능하고, ’규칙 같은정규성과 패턴화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관계였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제는 초점 맞추기와 정서, 사고 및 기억의 유연성이야말로 안정성을 보여주는 표시라고 여겼다(Main, 1995; Main et al., 1985, p.101)

 

유아의 의사소통 패턴을 애착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맞춰진 초기의 표상적 전략으로 간주하면 대인 간 세계와 개인 내적 세계 모두에 대해 많은 것이 명료해 진다. 낯선 상황 실험에서 Ainsworth는 유아의 의사소통 행동의 특성이 유연성(안정 애착을 형성한 유아들의 경우)과 억제나 증폭(불안정 애차을 형성한 유아들의 경우)으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관찰했다. Main의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이런 다양한 대인 간 의사소통 패턴이 유아가 자기 자신과의 의사소통에서 보이는 이에 상응하는 다양한 패턴에 반영되었다느 점이었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임상적 함의는 환자들이 기존에 그들이 갖고 있던 기대와 현재의 행동을 지지하고 주관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그들의 주의를 무의식적으로 배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Main의 연구는 안정 애착은 부모의 유연성이 자녀에게 유연성을 가져다 준 결과라고 시사했다. 안정된 부모들은 행동과 정서의 범위가 넓고 자신의 주의를 기울이는 데 거리낄 것이 거의 없기에 유아가 보내는 신호에 민감한 반응성을 보일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부모의 이런 민감한 반응성은 Ainsworth와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를 통해 유아의 안정성을 생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져 왔다.\

 

    -> 안정-> 유연 -> 민감 -> 안정..의 패턴

 


~p.70 메타인지 매우 흥미로운 내용 언급.

 

p.71

마음 이론이라는 용어는 우리 모두가 그 정도는 각기 다르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신념과 감정 및 욕망을 포함한 기저의 정신적 상태를 토대로 하여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여기서 주된 생각은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의 생각에 비추어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고 또한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도록 어떤 이론을 발달시킨다는 것이다. Fonagy는 어쩌면 Main이 영향 받았던 마음 이론에 대한 문헌과 같은 자료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지만, 그 문헌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 Main보다 헐씬 더 광범위하게 개념화했다.

 

 

성찰적 기능은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심리적 깊이를 가진 존재로 보게 해 준다. 이런 기능은 관찰된 행동뿐만 아니라 욕망과 느낌 및 신념과 같은 행동 저변의 마음 상태를 토대로 하여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 반응하게 해 주는데, 이런 마음 상태는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성찰적 기능은 통찰하고 공감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정신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은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하고 또한 불안정 애착이 세대 간에 전이될 가능성을 줄이는 보호요인이었음이 분명했다.

 

부모의 정신화는 아이의 안정 애착 형성을 촉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안정 애착은 아이의 자재적인 정신화 능력을 활성화시키는 핵심적인 맥락을 제공한다. 환자에게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정신병리는 정신화를 억제하거나 혹은 애초에 정신화를 발달시키지 못한 상태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정신화 발달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안정적인 상황?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만족하면 발전하고자 하는 욕구는 없어지지 않을까?


Fonagy는 경험의 성찰적 양식으로 넘어가는 가교는 정서 조절을 토대로 세워진다고 믿는다.

 

Fonagy에 의하면, 자녀의 불아을 대체로담아내는(containing)' 부모의 유아들이 대개 정신화를 할 잠재력이 충분히 있는 안정 애착을 형성한다. 왜 그런 것일까? 그리고 정서 조저로가 애착의 안정성 및 정신화 간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성공적인 담아내기와 안정 애착

- 부모가 아이에게 전달하는 것은 (1) 그들이 아이의 고통의 원인과 그로 인한 감정적인 충격을 이해하고, (2) 그런 고통에 대처하고 그것을 줄여 줄 수 있으며 (3) 또한 점차 생겨나고 있는 아이의 의도적인 입장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의도적인 입장이란 행동, 특히 부모의 행동에 담긴 의도를 추론할 수 있는 아이의 능력을 뜻한다. 이 세 번째 요소, 즉 아기가 자신만의 마음이 있는 분리된 존재이고 또한 잠재적으로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부모의 마음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부모가 인식하는 것이 아마도 아기가 안정 애착을 형성할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데 가장 중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부모의 정서 표현은 아기 자신 정서의 최초 표상의 기초가 된다.

 

 

감정적으로 조율된 이런 반영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 이유는 유아가 드러내는 내적 상태에 공명하고 그것에 대해 성찰하며 표현해 줌으로써 부모는 아이가 점차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인식하고 공유할 수 있는 정신적인 상태로 발견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발견이 정서 조절과 충동 조절의 토대를 만든다.

 

그렇다면 대략적으로 말해 안정 애착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이되는 것은 이런 과정 - , 중요한 관계적 맥락에서 부모가 높은 수준의 수반성을 보이고 정신화를 함으로써 가능해진 상호작용을 통한 정서 조절-을 통해서다. Fonagy에 의하면 이 과정을 매개하는 것은 정신화이고, 이런 능력은 심지어 문제가 있는 애착의 역사를 가진 부모도 아이들이 안정 애착을 형성하도록 기를 수 있게 해 준다.

 

신체적 감각은 표상을 형성하는 감정의 한 요소이며, 또 표상은 이후에 일어나는 감각과 감정 및 표상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순환이나 겹쳐짐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개별적인 영역들을 확인하는 것은 상당한 임상적 가치가 있다. 그 이유는 이런 구분이 치료적 관계에 참여하는 환자 개개인의 통합의 본질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의 다양한 차원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접근될 수 있고 통합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로 애착 역사의 세부 내용들이다. 환자들은 어느 정도까지 신체적 감각을 경험하고 감정을 느끼며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 영역들을 통합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그들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생각을 불러올 수 있을까? 이 같은 질문들의 답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새로운 애착 관계에서 환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뭥인지를 명확히 밝히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Fonagy (2002)Schore(2003) 그리고 다른 학자들은 감정 조절이 자기의 발달에 근원적이고, 애착 관게는 우리가 정서를 조절하는- , 감정에 접근하고 그것을 조정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차적인 맥락이라고 제안한다. 우리의 최초 애착의 특성을 보여주는 관계 패턴은 근본적으로는 정서 조절 패턴이고, 이 패턴은 이후 경험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반응성의 본질- , 자기의 본질-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이와 유사하게, 치료자가 형성하려고 시도하는 새로운 애착 관계에서도 환자의 감정이 중심적인 것이고, 효과적인 감정 조절- 감정이 느껴지고, 조절되고, 소통되고, 이해되도록 해 주는 과정-은 대체로 환자들이 치유되고 성장하도록 해 주는 과정의 핵심에 있다.

 

p.102

우리의 초기 관계가 안정된 것이었다면, 그 결과 우리는 개방적이고 융통성 있게 반응하는 - , 생각하고 감지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 능력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새로운 경험에 비추어 오래된 표상을 수정할 수 있다. 이런 융통성 있는 표상은 우리의 느낌과 함께 우리의 의식적인 선택을 유연하게 형성하는 지침으로 이용될 수 있다. 한편, 우리를 형성하는 초기 관계의 두드러진 특성이 회피나 양가감정 혹은 혼란이라면, 이렇게 수정될 수 있는 표상들과 관련된 반응 유연성(response flexibility)'에 대한 우리의 역량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할 것이다.

 

Bowlby가 언급했듯이 애착 그리고/또는 애착의 혼란 경험은 가장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때문에 자신과 타인 그리고 관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단지 강력한 감정적 요소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자각되지 못한 채 표상의 밑받침이 되는 감정에 의해 사실상 지배받는다.

 

내적 표상들은 초기의 애착 관계 안에서 언어 습득 이전 시기에 형성되기 때문에 발달하고 있는 자기의 속성에 강력하고 대개는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암묵적인 표상을 명시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이 표상들이 의식적인 성찰의 통합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치료자는 환자의 언어적 의사소통뿐만 아니라 신체적, 감정적 실연을 통한 의사소통에도 조율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우리의 성찰적인 혹은 정신화하는 자기는 일반적으로 애착 인물을 안전 기지로 경험함으로써 우리가 내면 세계를 포함한 세상을 안전하게 탐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관계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Diana Fosha(2003)가 제안한 것처럼, 우리가 누군가에게 객체라기보다 사람-, 우리 행동의 의미가 그 저변에 있는 느낌과 의도 및 신념으로부터 밝혀질 수 있는 존재-으로 알려질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를) 사랑해 주고 아껴 주며 조율해 주는 침착한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또한 그 사람의 마음과 가슴속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는 것‘(p.228)이다. 우리의 마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정신적인 주체적 행위자가 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우리의 주관적 경험에 의해 압도되거나 그것으로부터 차단되기보다, 그 경험과 함께할 수 있다.

 

.. 우리가 치료자로서 이 환자들에게 성찰적 자기에 대한 역량을 길러 줄 수 있는 유형의 관계- , 새로운 애착 관계-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인지는 주로 우리의 정신화 능력에 달려 있다.

 

마음챙김은 정신화처럼, 그러나 다른 경로를 통해 우리가 경험에 빠지거나 해리되기보다 경험과 함께할 수 있게 해 준다. 왜냐하면 정신화가 우리가 정신적인 주체적 행위자로 행동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내적인 자유를 증진시킨다면, 마음챙김은 우리가 주의 기울이기에서 주체적인 행위자(attentional agents)'로 행동하게 하여 자유를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Schoresiegal은 기초 신경과학과 초기 관계들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익히 알고 있으면 치료자가 환자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돕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했고, 이는 나 자신의 임상 경험에서도 입증되었다.

 

뇌간

, 뇌의 다른 영역에 비해 경험과 학습에 의존하는 정도가 가장 적다. 뇌간은 촉주의 꼭대기에 자리하며, 심박동 수, 호흡, 소화와 같은 기초적인 신체기능을 조절하고, 애착 과정에 시동을 거는것을 포함한 반사 행동들을 활성화하는 데 필요한 신경 기제를 제공한다.

 

변연계

Paul MacLean(1990)이 제안한 삼위일체의 뇌(triune brain)' 모델에 따라 뇌간을 파충류의 뇌와 닮았다고 본다면, 변연계는 대략 우리가 다른 포유동물들과 공유하는 원시 포유동물의 뇌에 비유할 수 있다... 변연계는 또한 기억과 학습 및 동기- 애착과 관련된 동기도 포함-에 있어서도 핵심적이다.

 

편도체는 평가의 기관인 만큼 기억의 기관이기도 한데, 무의식적이고 상징화되기 이전의 감정적 기억의 형태로 경험을 저장한다. 언어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이런 과거의 흔적들은 자각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에 현재 경험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왜곡한다.

 

 

 

 

신피질

p.115 피질에서 가장 발달한 영역이면서 심리치료와 특히 관련성이 있는 영역은 전전두엽피질이다. 이 영역은 두 개의 주요 부위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는 인지적 지능을 위해 전문화된 배외측 부위로서 해마와 언어 지향적인 좌뇌와 연결되어 있다. 두 번째는 감정 지능을 위해 전문화 되고, Siegel(2006)중전전두엽피질이라고 부르는 부위로서 편도체와 감정 지향적인 우뇌와 많이 연결되어 있다.

배외측 영역은 이성적인 마음으로 그리고 의지적인 뇌의 핵심으로 묘사되어 왔다. 이 영역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경험에 대해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자각과 기억 그리고/또는 관념에 주의를 기울이며, 필요할 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 표상에 의지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뇌의 두 반구 사이에는 감정과 관련된 작업이 분업화되어 있는 것 같다. 좌뇌는 그 정도가 보통 수준이고 긍정적인 감정의 경험에 의해 활성화되는 것 같고, 우뇌는 아주 강렬한 그리고/또는 부정적인 색채를 띤 감정에 의해 활성화되는 것 같다. 이에 상응하여 좌반구는 우리가 접근하도록 중재하고 우반구는 물러나도록 중재하는 것 같다.

-> 나에 대한 생각. 부정적 색채를 띤 감정에 민감하고 그것에 대해 분석하게 되고, 물러나려고 하는 성향. 어쩌면 예술가들이 부정적인 감정에 활성화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생각 하게 된다.

 

여기서 살펴볼 연구 결과 중 첫 번째는 진화와 개인의 발달 모두에서 뇌의 상위구조는 하위구조 위에 만들어 지고 종종 하위 구조에 의해 지배된다는 암시를 주는 발견이다. 이런 패턴의 영향력과 궤를 같이 하듯 신경의 교통량은 하향식보다는 상향식, 즉 편도체에서 대뇌피질로 오는 양이 훨씬 많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심리치료에서도 이에 상응하여 치료 작업의 기반을 행동과 사고를 뒷받침해 주는 신체적 감각과 감정에 두는 상향식 접근이 요구된다. 또한 치료적인 관계에서 말로 표현되는 것보다 감지되고 느껴지며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해 표출되는 비언어적이고, 주로 우뇌에 의해 지배되는 차원에도 초점을 두는 접근이 요구된다.

 

 

치료 실제에 주는 함의는 환자, 특히 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환자들과 함께 힘든 감정에 대한 생각을 그저 소리 내어 말하는 작업은 어느 정도 유용할 수는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p.125

 

    신체적 경험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을 통해 환자는 단순히 그 경험과 동일시하고 그것에 의해 압도되기보다 그것을 관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정신화 및 마음챙김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신경과학적 연구 결과가 있다. 먼저 정신화와 관련하여 여러 연구에서 정신화가 전두엽피질뿐만 아니라 편도체도 활성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주는 함의는 환자들이 실제로 정신화 능력을 발휘하려면 고통스러운 느낌을 실제로 느끼고 있는 동안 그 느낌을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 그렇지 않으면 유사 정신화만 일어날 뿐이다. 이 연구들은 더 나아가 명시적인 정신화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에 언어가 영향을 주도록 함으로써 그것이 신경계에 주는 충격을 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Stern의 정서조율

정서 조율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데, 그는 아동이 자신의 주관적인 상태가 타당하고 공유될 수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중요한 부분은 아동의 감정적인 경험을 공명해 주지만, 결정적으로는 아동의 표현과는 다른 감각 양식을 통해 공명해 주는 부모의 반응이라고 말한다.

 

posted by sergeant

정신 분석적 진단 - 대학원 스페셜 4

독서/심리 2018. 6. 18. 16:58

대학원 시절 읽었던 책 중에 몇권을 정리해 둔 파일들을 발견했다.

읽었던 모든 책들을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의미 있는 책 몇 권을 정리해 둔 것이라 현재 블로그에도 옮겨 둔다.

 

 

진단에 대한 구체적 내용들 보다는 염두에 두어야 할 태도를 위주로 요약해 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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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자라면 갖추어야 할 기본 태도가 있다. 호기심, 내담자를 존중하고 위하는 마음, 헌신, 성실성 ,실수와 한계를 기꺼이 인정하는 자세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의 중요성을 넘어서서, 내담자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치료자에게 그 이상의 어떤 특별한 기법을 가르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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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사용]

또 어떤 주제들은 원래부터 인간을 불편하게 하는 면이 있으며, 우리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비판단적인 언어를 사용해 그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 언어에도 역시 경멸적인 느낌이 드리워지게 된다.

여기에 해당하는 예가 오늘날 반사회적 성격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1835년에 도덕적 광기라는 이름을 얻었고, 나중에는 정신병질’, 그 다음에는 사회병질이 되었다. 매번 기존 언어에 스며든 비난의 요소를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새로운 기술적 용어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정신병질 현상은 사람들에게 크게 충격을 주는 것이어서, 이 개념을 도덕적 영역으로부터 보존하고자 만든 용어들이 결국은 모두 오염이 되고 말았다. 비슷한 운명을 걸었던 또 다른 단어를 들자면, 처음에 성도착이었던 것이 성적 일탈’, ‘동성애’, ‘게이로 변화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게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언젠가는 없어지게 될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2013년도 당시 메모]]]]]]

 

... 어떤 이유에서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현상은 이렇게 낙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바복해서 촉발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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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을 모르는 임상가들과 학식이 높은 대중드리 그 개념들을 가로채서는 입심 좋게, 혹은 때로는 사람을 경멸하는 용도로 그 의미를 왜곡하여 널리 퍼뜨려 왔다.

심리학적 개념들이 일상용어에 편입되면서 또 한번의 물타기가 이루어졌다. ‘외상은 재앙에 해당하는 원래 의미를 상실하고 불편한 일이나 상처정도의 의미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우울은 기분이 좀 저조한 거소가 구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공황장애라는 용어는 불안신경증혹은 불안발작이라는 말에 담겨 있던 매우 유용하였던 옛 의미를 되살리려는 목적에서 새로 창안되었다. 사업상의 점심 식사를 하게 된 사람들의 느낌에서부터 사형 집행관 앞에 선 죄수의 느낌에 이르기까지 불안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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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3

심리지단적 용어의 남용은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남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버리는 정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종류의 악이 고상한 이상(그것이 사랑이든, 애국심이든, 기독교 정신이든 간에)의 이름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은 원래 그것이 가진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왜곡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심리진단적 개념을 조심스럽게, 남용하지 않고 잘 적용할 때 내담자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지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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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하게 훈련을 받고 세심하게 진단을 할 때 얻을 수 있는 다섯 가지 장점이 있다. 진단은 (1) 치료 계획을 수립하는 데 유용하고, (2) 예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3) 정신건강 서비스 소비자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고, (4) 치료자의 공감 전달을 가능하게 하며, (5) 쉽게 겁을 먹는 사람들이 치료로부터 도피할 가능성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이 외에도 진단 과정에는 치료를 간접적으로 촉진시킬 수 있는 부가적인 이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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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진단 과정이라는 말은, 위기 상황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내담자를 만나면 우선 분석적 배경의 정신과적 훈련에서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정보들을 수집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사례는 심리검사나 구조화된 면접을 실시할 수 있다. 나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도록 그냥 놔두면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가 생기고, 모든 관련 자료들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믿지 않는다. 일단 환자가 치료자를 가깝게 느끼면 자신의 과거사나 행동의 어떤 측면을 꺼내놓기가 오히려 더 어려울 수가 있다. 알코올 중독자 익명집단 모임에는 수년간 분석을 받거나 여러 전문가들을 만나면서도 약물남용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없거나, 심지어 질문을 받아 본 일조차 없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진단 회기가 권위주의적이고 위압적으로 거리를 두는 장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심층 면접이 내담자를 진실로 존중하는 평등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고 싶다. 대개 환자들은 철저한 전문가적 자세에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여러 치료자들을 만나 본 경험이 있는 한 여성을 면접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도 이렇게 나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어요!”

 

posted by sergeant

긍정적 중독 - 대학원 스페셜 3

독서/심리 2018. 6. 18. 16:56

대학원 시절 읽었던 책 중에 몇권을 정리해 둔 파일들을 발견했다.

읽었던 모든 책들을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의미 있는 책 몇 권을 정리해 둔 것이라 현재 블로그에도 옮겨 둔다.

 

 

 

긍정적 중독은 꽤 특이한 책이었고, 윌리암 글라써도 유명한 저자로, 긍정적 중독을 촉진시키는 것에 이 책의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만 오히려 나는 그의 우울증에 대한 비유들이나 중독자들에 대한 깊은 통찰들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긍정적 중독 자체는 내게 큰 매력이 되지는 못했었지만 참고할 만한 내용을 아래에 옮겨둔다.

 


<책 발췌>


p.17

고통, 통증, 비탄의 분명한 목적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으니 그것을 고치고, 바꾸고, 개선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당신에게 알려 주는 데에 있다. 그럴 힘이 없으면 그 고통들에 매여 있게 될 뿐이다. 이것은 힘을 가진 사람들은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도 고통을 받는다. 그들도 삶의 고통에 면역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을 느낄 때 어떤 식으로든 행동하고 최소한 무엇을 하려 노력한다. 힘이 많을수록 그 노력의 결과는 성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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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포기란, 가능한 선택사항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아직 갖지 못한 것, 즉 충분한 사랑과 가치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게 유일한 행복의 길일 때 어느 누가 포기하는 걸 생각조차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더 많은 이들이 일부만을 포기한다. 그들이 행복을 원치 않아서가 아니다 - 그들도 다른 이들만큼 그 모든 것을 원한다. 인생의 그 비참한 순간에 그들 마음속에 조차 행복이 없으니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포기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고 앞으로도 결코 가질 수 없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생긴 끊임없는 비참함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희망을 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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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책에서 포기란, 자살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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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을 계속하는 것이 단지 미래의 실패만 만드는 일이고, 결국 당신의 한계로 고통 받게 된다는 것에 공감을 하게 되어 이렇게 결론지을지도 모르겠다. “, 노력을 해야만 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안 하겠어!” 수많은 이들이 포기하는 이유는 비참한 삶을 받아들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계속해서 시도하는 노력들이 항상 실패할 때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삶이 비참할 것이라고 이미 인정해 버렸고 마음속은 좀 덜 비참하고 싶다는 생각 뿐인 것이다.

딸 수 없다는 이유로, 포도가 익지 않아서 시다고 여우가 말했다고 해서 그 포도를 시게 만들 수는 없다. 이 행위는 다만 뛰어오르는 노력을 중단케 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더 민첩한 동료 여우가 달콤한 포도송이를 가져다 주어 그것이 잘 익었음을 그에게 증명한다면, 여우는 그 친구를 골칫덩이라고 부르며 피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포기하는 사람들은 성공한 자들을 기피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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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어도 의지가 약해지고 부족함에 안주하고, 또 내가 두통을 선택했듯이 어떤 증상을 선택할 경우는 많을 것이다. 비참한 생활의 대부분은 당신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나은 선택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불행이 단순히 당신에게 일어난 것뿐이라서 스스로는 그 불행을 전혀 제어할 수가 없다고 믿으면 당신의 인생에서 현재 얻고 있는 것보다 더 이상의 것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나가면서 우리들이 불행한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우리에게 세상은 비참하게 비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옳은 선택을 못해내는 무능함에 대한 책임이 세상에 있다고 한다면 그 주장 속에는 많은 진실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분 굉장히 쎈 상담가구나, 다시 읽으며 놀라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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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치 않는 요소들이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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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또 교육자로서의 나의 의무는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약한 이들을 강하게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시민으로서 나는 세상을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 이는 여러분들이나 나에게나 모두의 의무이다. 그러나 이 책의 논제는 강하든 약하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도와 더욱 강하게 될 수 있으며 힘을 향해 가는 새롭고도 중요한 길이 바로 긍정적 중독일 거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 중 힘을 가진 자가 더 많이 있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중 나약한 이가 더 많다면 그렇게 될 기회는 적을 것이다.

삶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포기라는 첫 번째 선택은 더 이상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고통이 돌아오고, 그러면 장래에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한 시도로써 일반적으로 두 번째 선택 중 하나를 고른다. , 우울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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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의 잘못이건 아니건, 그가 느끼는 것은 그에게 실재하는 것이고,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그는 지금 뜨거운 스토브에 앉아 있으면서도 내려설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나는, 여기 당신 방에 오기 위해 수없이 생각해야 했어요 - 우울증 환자로서는 정말 힘든 일이다 -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나를 이 불행에서 건져 줄 수 있길 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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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 삼아 얘기한다. “내가 해줄 말은 힘 좀 내란 말 뿐이요.” 내가 그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면 그들은 언제나 웃어 버린다.

그러나 왜 그것이 우습게 들리는 걸까? 내 충고가 잘못된 것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흥분되고, 우울하고, 비참한 기분이라고 말한다. 그가 도움을 원해서 나는 힘내라구. 상처받는 짓은 그만하구.”라고 말했을 뿐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간단한 조언을 대단찮게 생각해서 웃는 것이다. 우리는 우울해지면 선의의 농담을 들으면서 힘을 낸다. 찻잔으로 타이타닉호를 구해 내는 것 같은 도움,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작은 충고 말이다.

내담자들은 그럴 때 심각해져서 이야기한다. “힘내라니, 무슨 뜻이요? 내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말 못 들었소? 내가 힘낼 수 있다면 그랬을거요. 문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거고, 그래서 여기 온거잖소?”

그의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왜 그는 힘내지 않는 것인가? , 그는 그토록 자신의 불행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는 집착하고 있다. 나는 그가 비참하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우울증에 시달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우울증이 최악이라고 믿는다.

비록 그가 자신의 선택적인 믿음을 알아채진 못해도 자기가 만일 우울을 떼내 버린다면 지니고 있을 때보다 상처를 더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우울을 포기하지 않을거라고 나는 주장하는 바이다. 그가 선택한 우울증은 다른 모든 두 번째 선택들과 마찬가지로 포기라는 첫 번째 선택 만큼 고통스럽진 않다. 모든 심각한 상태의 우울증 환자들은 (그리고 내가 간략히 다룰 다른 이들도 역시) 첫 번째 선택 이후 바로 네 가지 증후의 종류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들은 사랑이나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는데서 오는 심각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포기를 선택한다. 불행하게도 여러분이 포기할 때 고통은 잠시 동안 줄어들지만 다시 돌아오게 된다. 여러분은 고통 없는 행복을 영원히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내담자의 경우, 두 번째 선택을 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자기의 선택임을 전혀 모른 채로 우울을 선택한 것이다. 우울증은 가장 일반적인 선택,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증상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고통을 줄이는 것일까?

설명을 위해, 내담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글라써 선생님, 보세요. 나는 의욕을 잃었어요. 갑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떠나버렸어요.” 그는 그가 겪었던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가 왜 의욕을 잃었는지 확실히 하기 위해 설명하려 노력한다. 나는 그럼 나가서 다른 여자나 찾아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이미 충분한 충고를 들었다.

그는 어쩌면 나의 의도를 알고 선생님, 다른 사람을 찾아 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지금 나에게 누가 관심을 가질 수 있겠어요.” 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부적절함, 포기와 무능함, 그리고 얘기가 진행됨에 따라 우울증 핵심부에 있는 문제들까지 비난한다. 그는 스스로 우울해지기로 선택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한다. 그는 우울증세가 자신의 문제를 합리화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를 부적절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부적절함을 이제는 대면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고통스러운 만큼 든 것이다. 그가 선택한 우울증은 자신의 부적절함과 자포자기를 대면하는 것보다 덜 고통스럽다. 포기함으로써 그는 책임도 회피한다. 그러나 우울증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지금 자신의 역량 부족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고, 다른 이에게 책임을 미룰 수 있게될 것이다.

그 여우같이 그는 포도가 덜 익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쨋거나 더 이상 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완벽한 핑계거리를 가진 것이다. 누가 우울증에 걸렸는데 뛸 것인가? 더구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보고 자신의 불행에 대해 책임지시오라고 말할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는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보다 좋은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도움을 받아들이면 자기 자신을 도와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타인의 도움을 거부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불평을 더 하게 되고 상처를 덜 받게 된다. 이제는 그의 우울증이 자신의 미숙함에 대한 보호장치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가 느끼는 고통스런 감정에 점점 익숙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사랑이나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믿게 되고, 그 우울증이 그것들을 대신하게 되어 우울증에 집착한다. 이것이 그가 가진 최고의 것일지는 모르지만 좋은 대체물은 못된다. 다시 말해, 그는 첫째 그의 본분을 포기한 행동을 합리화하고 보다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하며, 둘째,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누군가의 도움으로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입장을 만들기 때문에 스스로 점점 더 깊이 빠진다는 것이다.

그는 포기했을 때 자신이 포기자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장 도움을 요청할 때, 나의 명백한 고통에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라고 할 때 그는 고통받는다. 이는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다른 이들이 얼마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지 알아보기 위해 제발, 날 혼자 둬.”라고 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시험해 보기 위한 흔한 방법을 쓴다. 협조적이든 아니든 어쨋거나 그는 내 사무실에서 움을 받거나 최소한 관심이라도 끌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진지하게 도울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가 힘을 가졌다면 결코 우울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조차 내담자가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느니보다, 직접 돕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도 있다. 친구나 가족들도 종종 그럴 것이고, 나 자신도 그런 실수의 경험을 인정한다.

나는 문제를 부드럽고 정확하게 짚어낸 후 그가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분관계를 맺고 그와 함께 그렇게 할 수 있는 계획을 만든다. 그러면 그는 지금 유일한 친구를 얻게 되므로 더 이상 우울증이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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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울증으로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 사람들만큼 심한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이런 사례를 염두에 두고 네 가지 증상 분류를 해 놓은 아래의 차트를 살펴보자. 약한 사람들은 흔히 아래의 증상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두 번째로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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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주 증상의 범위

일반적인 증상의 예

1. 행위로 표출하기

울화, 태만 범죄, 반사회적-정신병적 행위

2. 감정과 관계되는 것

우울, 두려움, 공포증, 긴장, 걱정, 슬픔, 낙심, 심술, 의존, 오만, 비열, 분노, 히스테리, 의심

3. 미치게 되는 것

정신이상, 편집증, 환각, 망상, 전환행동

4. 심인성 신체화

두통, 목의 통증, 등의 통증, 공동장애, 편두통, 고혈압, 심장병, 천식, 각종 앨러지, 십이지장 궤양, 회장염, 대장염, 만성설사, 비뇨기장애, 관절염

[나약한 자들이 하는 두 번째 선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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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종종 좌절하거나 거부당할 때 우리가 증상을 선택하지 않으려면 초인적인 힘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강해질수록 우리는 그 선택의 고통으로부터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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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이 완전히 통제불능 상태의 자녀에 절망하여 나를 찾아오면, 내가 해주는 충고는 보통 소년원에 보내라는 것이다. (겁나 쎄고 겁나 웃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은, 내담자들 보다는 상담자들이 읽고 참고할 정도가 딱 좋은 것 같은데.... 모르지, 또 대가의 당당함에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ㅎㅎ) 그 밖에는 어떤 방법도 없을 것이다. 만일 보호관찰이나 그 외의 법적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좋은 보호관찰관이나 임상의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런 행위가 제지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비로서 안정할 수 있고, 또 그의 행동에 대한 선택이 얼마나 부정적이고 그를 사랑과 가치있는 것으로부터 격리시키게 했는지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멋대로 행동하는 이들이 줄어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어린 시절 이후로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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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폭발하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선생님이나 엄격한 부모로부터 일찌감치 배웠다. 우리의 충고자들이 우리 행동을 막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사랑과 가치있는 것을 찾을 수 잇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는 못한다. 흔히 감정적으로 다른 증상을 선택할 수 있다. 마치 내 사무실에 찾아왔던 우울증 환자처럼 말이다.

언급했듯이, 우울증은 우리가 멋대로 행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사랑이나 가치있는 것이 부족한 순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가 강하면 그런 일은 줄어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린 친구나 친척에게 평생 동안 매여 있게 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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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 선택된다는 사실은 심리학의 역사를 통틀어도 많은 정신의학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아주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시각이고, 종종 임상 장면에서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지만, 크게 의미 있다. 요즘은 많이들 받아들이는 시각이다.) 이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은 이것이 환자의 의식 밖에서 온 것, 마치 에 걸린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정신적인 수두 같은 병의 일종처럼..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우울증은 행위표출일 뿐이며 외부로부터 온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울을 수두처럼 파악하진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의 고통은 원치 않아 우울해지기로 선택한 우리의 나약함에서 기인된 것이다.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이 두 번째 선택의 목적이다.첫번째 선택이- 포기하는 것- 성공했다면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든, 특히 무심한 학생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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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증상들 - 정신병 환자가 되는 것.

그가 (정신병자) 만약 사랑이나 가치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즉시 그 미치기로 한 선택을 포기할 것이다- 정말이지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좋은 병원이나 진료소에서 퇴원하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닌가. 적절한 치료를 받아 그들은 그런 미친 짓을 그만둘 수 잇게 될 만큼 강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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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Glasser is the genius for metap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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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당신이 축구스타가 되어 3쿼터에서 발목을 삐게 되는 경우와 같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지만 코치는 당신을 절실히 원한다. 마지막 결승전인 것이다. 그때 당신과 코치는 우승을 원해 장래의 건강 따위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팀 의사가 발목에 마취제를 뿌려 고통은 사라지고 결국 우승을 맛보게 된다. 당신은 영광스럽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발목은 부서져 버려 평생동안 절름발이 신세가 된다.

영광스런 시간이 지나가면 영원한 고통만이 남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중독자들도 자신의 인생을 갈갈이 찢어버리는 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고통 밖에 없을 때 영광을 준 중독은 그의 다른 어떤 의욕도 능가해 버려 평생동안 약이나 습관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중독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나 보다)

결국에는 그는 기꺼이 자신의 재산, 이성, 가족, 친구, 심지어 배우자까지 포기하려 할 것이다. 그의 삶의 어떤 것도 마약이나 다른 중독물에 대항할 수 없다. 그는 오직 한 가지 가치로써 살아간다. 그의 중독을 가일층하는 이외의 모든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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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그만두면 모두 고통을 받게 된다. 여러분은 자신이 가졌던 것을 그리워하며 고통받는다.

그것은 그동안 약물이 주었던 습관성 쾌락과 맞먹는 고통이다. 끊는 것은 고통스런 증상과 금단증상의 고통 모두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며 그 모든 고통을 상쇄할 만큼 많은 양의 사랑과 가치가 중독자에게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전에 이미 사랑과 가치를 얻을 수 없어서 중독자가 된 마당에 지금 그 일이 가능하겠는가? , 중독자로부터 단순히 중독제를 빼앗는다고 해서 그의 습관을 약화시키거나 끊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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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자가 약하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느 중독자도 열심히 일하거나 끈질긴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일단 중독의 쾌락에 빠지면 그는 극히 강하다. 어쩌면 가장 자부심 강한 시민들도 매일같이 습관을 밀고 나간다는 점에선 헤로인 중독자와 비슷하다. 그들은 자기 일에 대한 윤리에 철저해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선 잡다한 모든 것에 대항해 싸운다. 하지만 모든 힘은 중독에 한정되어 있다. 사랑과 가치를 발견하는 일에는 전혀 힘이 없는 듯 하다. 분명 중독습관에서 오는 즐거움은 사랑이나 가치있는 것을 기억하거나 상상하는데서 오는 즐거움보다 강하다.

중독자가 중독에 쏟는 모든 노력을 사랑과 가치있는 것을 찾는 데에 쏟는다면 분명 성공할 것이나 특히 그것을 그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그런 종류의 힘은 없다. 그가 가진 것은, 내가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어귀인데, 단기적인 힘이다. 그는 중독약물을 찾기 위해선 어떤 단기적인 힘이라도 소유한다. 그렇지만 사랑과 가치를 찾는 일은 장기간에 걸친 불확실한 탐색이며 그럴 힘을 그는 갖지도, 원치도 않는다. 짧은 길이 있는데 왜 긴 길을 택하겠는가? 억지로 손을 잡아 끌지 않는 한 절대 할 리 없다. 여기서 억지로 잡아 끄는 자는 아무래도 상담자가 되겠지만, 그리 큰 힘을 가질 여건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최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의 발견을 위해 우리는 타인이 필요한 반면 중독자는 오직 자기 자신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자신에만 의존해서 중독을 계속 추구할 수 있다는 걸 알며, 단 한가지 목적에만 헌신한다는 것을 훤히 볼 수 있다. 당신을 약하게 하는 대신 당신을 강하게 하는 중독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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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이 엄청나게 자기 단련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루에 16시간씩 피아노를 쳤던 위대한 피아니스트와 수년 동안 하루에 20마일씩 달렸던 육상선수가 있으며, 그들이 했던 행동이 그들의 목표에 곧장 적용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만약 슈바가 자기에게 공이 던져지도록 하는 장치를 해 놓았더라면 나는 그가 매일 두 시간씩 배팅 연습을 하는 것을 내 마음속에 더욱 선명히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우연하게도 그가 수년간 지하실에서 홀로 배팅 연습을 하게 된 것, 즉 무언가를 신들린 듯이(종교처럼) 했다는 사실에 나는 골몰하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어떻게 그가 그것을 할 수 있었지? 그는 그것을 어떻게 계속할 수 있었지?’ 하고 말했다. 그때 내 마음에서 일었던 것은, 그가 그것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우리가 보통 의지력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가 초월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했던 모든 것이 의지력에 의한 것이었다면, 나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거기에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비록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에 대한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일어났던 일은 그가 야구 방망이를 스윙하는 데에 중독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거다. 야구 방망이를 스윙하는 데에 꿰었다는 생각은 어리석어 보였고, 가족들과 이 생각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 우리는 모두 웃었으나, 나는 여전히 그것을 내 머리에서 없앨 수가 없었다.

이 생각에 대해 거의 최근 18개월간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어리석게 느껴지지 않으며, 나는 그것이 정확하게 일어났었다고 믿는다. 그는 한동안, 아마 3-4개월 간은 순수한 의지력으로 야구 방망이를 스윙했을 것이다. 그 때에 천천히, 그리고 무의식중에 이 연습에 중독이 되었다. 만약 그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는다면, 그는 일종의 통증이나 불안함, 가라앉음, 일종의 죄의식을 느꼈을 것이고, 그것은 그가 그것을 하도록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중독의 전통적인 신호가 거기에 있다. 그가 멈추었을 때 그는 고통스럽고, 그 고통은 단지 중독 활동에 의해서만 제거된다. 그가 만약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불편하였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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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중독은 당신의 정신적 힘을 증가시켜 주고, 반대로 부정적 중독은 그 중독 부분을 제외한 당신 삶의 다른 모든 부분의 힘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긍정적 중독자는 중독을 즐기나 그것이 그의 인생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긍정적 중독으로부터 그는 정신적 힘을 얻어 사용함으로써 본인이 하고자 하는 것을 더욱 성공적으로 성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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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중독상태에서 살 때만 완전히 만족하게 되는 부정적 중독과는 달리긍정적 중독은 더 많은 사랑과 가치, 기쁨, 의미 등 일반적으로 삶에 대한 더 많은 열정을 얻기 위해서 그의 특별한 힘을 이용한다. 긍정적 중독은 누구라도 혼자서 그의 힘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가치가 있다. 여타 방법으로 힘을 얻으려 하면 더 많은 사랑이나 인정을 받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외롭거나 보잘것없다손 치더라도, 당신이 긍정적으로 중독될 수만 있다면 당신은 힘을 얻을 수 있다.

약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과 우정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돕는 주요한 방법에서 차단되어 있다. 그들은 허약함과 악순환에 갇혀 있다. 만약 우리가 긍정적 중독을 통하여 이 순환구조를 깨는 것을 배운다면 (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데), 그때에 그는 약하거나 강하거나 간에,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친구나 인정 없이도 더 강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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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처음에는 그것이(명상) 내게는 긍정적 중독과는 별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긍정적 중독은 하루종일 길게 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모든 시간을 거기에 투자하게 되는 헤로인이나 음주, 도박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적당한 시간 동안, 흔히 하루 한 시간 정도 하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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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내가 다양한 형태의 긍정적 중독을 공부할수록, 그것을 하는 시간은 하루에 한 시간 정도인 것 같았다. 따라서, 만약 긍정적으로 중독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루에 40분을 기꺼이 투자하지 않으면 그가 중독되고자 시도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성공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긍정적 중독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40분에서 한 시간씩 한번 또는 두 번, 보통 두 번 이상은 아니더라도 한 두 번 미만으로는 긍정적 중독을 거의 발전시킬 수 없다.

긍정적 중독자들은 자신들의 실제적인 중독상태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에게 좋은 것이다. 반면에, 부정적 중독은 비록 그것이 그들을 해칠지라도, 그것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부정적 중독은 즐겁지만 해롭고, 긍정적 중독은 변변찮게 느껴지지만 유익하다는 것은 너무나 깔끔하게 이를 요약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 생각을 인정하는 것이 싫었다. 알콜중독에서 승려가 된 청년은 만약 당신이 그것을 싫어한다면, 왜 그것을 계속하느냐?”라고 내가 물었을 때, 산뜻한 결론을 제공했다.

나는 꿰어져버렸어요. 만약 내가 노래 부르지 않는다면, 더 고통스러울 거예요.” 그는 그가 술을 끊으려고 할 때 종종 느꼈던 불편함과 같은 종류의 금단고통을 기술하였다. 그것이 너무나 합리적인 것처럼 보여 나는 그것을 믿기를 원했고, 더 이상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슈바가 야구방망이 스윙하는 것을 즐겼을까 하고 내가 의심하듯이 그도 찬송가를 부르는 실제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질문을 계속했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을거다. , 그의 뇌에 무언가 기쁨이 일어나 그가 선택한 중독과정의 지루함을 역전환 시켰다는 것이다.

중독자의 마음 안에서 뭔가가 극도로 기분 좋게 느껴지고 이 특별한 기쁨은 경험할수록 본인들에게 극히 중요하게 되어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비록 행위 그 자체는 힘들고 지루할지 몰라도 정신에 주는 기쁨의 효과 때문에 자주 할수록 전 과정이 즐거워져서 중독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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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들은 내 생각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는데, 그는 웃으며 몇 마디를 더 추가했고 나는 내가 믿는 바 모든 긍정적 중독의 진정한 본성 - 긍정적 중독의 심적 상태에 대한 기본적인 성찰에 도달했다. 즉 자신이 달리는 데에 문제가 한가지 있으며, 그것은 위험한 것이라고 그가 말했을 때다. 그가 말할 때 방에 있던 모두가 그를 보았고 우리는 다 웃었다. 내가 토론토에서 아침에 혼자 한 시간 동안 뛰는데 무엇이 제일 위험합니까?”라고 묻자, 그는 그가 달릴 때 거의 매일 빠르게 일종의 무아지경의 정신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을 설명하여 갔다.

나는 단지 내 마음이 가도록 허락을 하고, 정말로 달리기에 빠져들면, 나는 완전히 내 주변을 자각하지 않게 돼요. 나는 거리를 가로질러 달릴 것이고, 빨간 신호등에서도 달리고 여러 번 거의 차에 칠뻔했어요.”

내가 신체적으로 중독된 많은 사람들, 달리기나 그 외의 것을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 거의 모두가 기술하는 것이 이러한 마음의 상태, 즉 중독 실스에 동반하는 무아지경의 직관적인 정신상태였다. 나는 이제 이것이 긍정적 중독의 심적 상태이고, 신체단련자들은 간접적으로 도달하고, 명상가들은 직접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긍정적 중독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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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 그들은 모두 자기 스스로 연습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중독상태에 이르려면 어떤 개인적인 결단이 필요한 것으로 보이며, 무엇이든 당신 스스로 중독되겠다고 결심하지 않고 어떤 공적인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중독상태에 도달하기가 한층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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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긍정적 중독에 한 가지 첨가해야 할 요소가 있는데, 긍정적 중독상태가 어떠한 것이든 당신 나름대로 하겠다고 결정해야 중독상태에 도달하기가 쉽다는 거다. 그것은 집단활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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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활동이건 간에 여섯 달 미만 안에 도달하는 경우는 드물다. 몇몇의 달리기 경주자나 사색가들은 긍정적 중독에 도달하는 데 2년이 걸린다고 한다. 여기에서 사색이나 달리기 같은 긍정적 중독활동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이 긍정적 중독에 도다하는 것은 아님을 명백히 해야겠다. 사람들은 신념을 갖고 오랫동안 계속 그 활동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1년 동안 대부분 혼자서 달린다면, 그리고 적어도 하루 한 시간씩 6에서 8마일 또는 그 이상을 달린다면, 당신은 아마도 달리기에 긍정적으로 중독될 것이다. 일단 중독이 된다면, 당신은 달리기를 할 수 있는 한 계속할 것이다. 80대의 달리기 경주자들이 드물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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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내 생각을 요약하자면, 긍정적 중독이란 사람들이 하기로 선택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일정기간 동안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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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테니스

그는 교사 또는 코트나 TV에서 훌륭한 선수들을 지켜 보라고 충고하였다. 이때 그는 모방하려는 특별한 생각 없이 전문가가 하는 것을 조용히, 평화스럽게 마음 속에 깊이 새기면서 관찰하여야 한다. 그는 설명하고, 격려하며, 비판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학생이 스스로를 비판하지 않도록 가르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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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이러한 경쟁상대를 만나게 된다면 그를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그에게 단지 그가 그렇게 잘 경기를 하는 이유를 한 번 물어보라고 갤웨이는 농담조로 말하고 있다. 그는 대답을 위해 생각을 하자마자 그 상태를 잃을 것이다. 그것은 도달하기 매우 어렵고 또한 깨어지기 매우 쉬운 사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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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긍정적 중독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자신에 대한 무비판적일 수 있는 능력과 동시에 자신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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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긍정적 중독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과도 경쟁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향상되고자 노력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자신을 비판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강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이 아무리 힘든 역경에 처하더라도 언제나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포기한 후 고통을 감소시키고자 부정적 증상을 선택하고 삶 속에서 다소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부정적으로 중독되어 버리는 약한 사람들과는 달리, 강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결코 로프의 맨 끝으로 몰아붙이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한 가지의 사고 패턴이나 행동 패턴으로 결코 자신들을 구속하지 않는다. 그들도 분명히 잠시 동안 혹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때때로 난국에도 봉착하고 좌절도 하지만, 그때조차도 그들은 약한 사람들이 생각해 낼 수 없는 대안들을 선택하는 연습을 한다.여기서 말하는 대안의 선택이란, 시간이 지날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며 고통과 좌절을 견디어 내겠다는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는 이 어려움을 타개해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낯선 새로운 상황에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혼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그의 힘은 어쩌면 거의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듯이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이 힘이 두뇌의 힘에 대한 그들의 깊은 내적인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려운 문제나 선례가 없는 문제를 풀기 위해, 이 복잡한 사고기관에 의지하는 것을 터득했다. 경험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으며, 많은 경우 경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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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사람들은 강한 기쁜 느낌이라든지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느낌이란, 어려울 때 그들의 두뇌가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으로써 경험에 의해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느낌이며, 이것으로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구분된다.

이 느낌은 아주 확실해서 우리가 그 느낌을 갖고 있을 때는 우리가 그 느낌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또한, 이 느낌을 갖고 있지 않을 때 역시 우리는 그 느낌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남들이 그 느낌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거의 언제나 감지해 낼 수 있다. 강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만일 그가 우리 편이라면, 그의 힘은 전염된다. 그의 힘은 우리에게 믿음을 준다. 강한 사람과 한편이 되어 카드놀이를 하거나 테니스를 칠 때 당신의 실력이 얼마나 빨리 향상되는지 보라. 강한 팀과 대적해서 게임을 하면 종종 그 반대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때로는 강한 사람과 대결할 때 그의 힘이 나에게 전염되어 나로 하여금 위기에 대처하여 수완을 발휘하도록 자극시키기도 한다.

강한 사람의 또 다르 특징은 카리스마인데, 그렇다고 해서 카리스마적인 모든 사람들이 다 강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가진 카리스마가 장기간 우리를 압도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일 것이다. 링컨이나 처칠, 그리고 일리노이 루즈벨트 같은 사람들은 생존시 뿐 아니라 사후에도 후세에 불멸의 영향을 끼쳤는데, 그들은 힘과 카리스마를 모두 지녔던 사람들이다.

... 자기 비난이나 낮은 자신감은 두뇌를 우리로부터 차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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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선생님들이 아인슈타인에 대해 불평을 하자, 그의 부모는 아들을 비판하지 않고 격려하는 분위기의 비전통적인 학교로 전학시킬 만큼 지혜로웠다. 이곳에서 그는 수용되고 지지되며 비구조화된 지적 분위기 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학교를 지배하고 있는 상징적인 언어의 한계 내에 갇혀 학생들에게 주의집중만을 강요하는 교사들의 독재로부터 그가 도망칠 수 없었다면, 아인슈타인은 자기 자신을 몹시 비난하는 사람이 되어버려서, 그의 정신에 내재해 있는 천재성을 결코 발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교육체제에 의해서 이런 식으로 망쳐진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한 명의 아인슈타인을 잃는다는 것은, 규범에 잘 따르지 않고 멍하게 있곤 하는 학생을 질식시켜 버리는 그런 학교가 지불하기에는 너무나 큰 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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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이 느낌은 수동적이며, 전적으로 우리 두뇌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나 거의 정신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때 느껴지는 그런 느낌인 듯 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즐거움을 만들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이 즐거움을 만들 수 있다면 그 느낌은 아마도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느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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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의 긍정적 중동상태에 이르는 확실한 방법은, 우선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긍정적 중독상태에 이르도록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당신의 마음은 무엇니가에 개입하고 싶어한다. ... 노련한 프로는 압력을 가하지 않고 그거시 저절로 일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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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유능한 두뇌란 마치 줄에 묶인 잘 훈련된 개와 같아서, 당신이 데려가는 대로 충성스럽게 당신의 뒤를 흥분한 채 쫓아다닌다. 긍정적 중독상태에 있는 두뇌는 주인의 신뢰를 받고 있는 잘 훈련된 개가 잠시 주인의 끈에서 풀려난 상태와 유사하다. 이런 상태의 두뇌는 당신과 당신의 유능함을 지니고 황홀한 자유로움으로 당신을 새로운 경험의 절정 상태로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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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며 캐나다 총독인 존 부샨(John Buchan)은 맑고 청량한 어느 봄날 말마니 우그(Malmani Oog)라고 불리우는 아프리카의 칼라하리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중 그에게 일어났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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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거기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을 경험했었다. 배가 몹시 고팠음에도 나는 아침식사하는 것을 잊었다. 향기로운 주변 경치와 소리가 뒤섞여 너무나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것은 인간의 표현, 심지어는 인간의 사고를 초월하였다. 그것은 마치 영원한 평화의 섬광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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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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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샨과 동시대 인물인 하폴드 (F.C.Happold)191321일 캠브릿지의 자기 방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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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압도적으로 매혹되어 있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내가 내 자신임을 느꼈다. 나는 이전에는 결코 알지도 못했고 경험해 보지도 못했던 강렬한 행복감과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평화로움과 안정감과 확실서에 대한 깊은 느낌은 정말 강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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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자저들은 이렇게 보고하면서도, 이 경험들이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이와 똑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아도, 앞서 설명한 것과 유사한 신비로운 긍정적 중독상태의 체험을 보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두 저자들은 크게 놀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하기로 결저앻. 연구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이런 경험이 종교적인 체험이라고 믿고서, 이와 같은 종교적인 토대를 그들의 연구에 사용하였다(나는 이것이 응답을 다소 왜곡시키는 듯이 보였다).

p.103

그들은 1,500명의 사람들에게 당신은 당신을 당신 밖으로 끌어올리는 듯한 강렬한 영적인 힘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 1,500명 중 약 5분의 26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300명은 여러 번 경험했다고 했고 75명은 자주 경험한다고 했다. 나는 이들 75명 중의 일부가 긍정적 중독자라고 생각한다. 저자들은 공정을 기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들은 질문을 종교적인 토대 위에서 하기는 하였으나 이 체험이 반드시 종교적인 것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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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우리는 자신들이 강력한 영적인 힘에 의해 끌어올려지는 듯한 강렬한 체험을 했다고 보고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우리는 사실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다. 그 중 몇몇 체험이 )많은 체험들이, 대부분의 체험들이) 단어의 고전적인 의미 그대로 신비한’(종교적으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응답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강렬한 경험을 보고했다는 것은 놀라운 현상이라고 본다. 이 경험의 성질이 무엇이건 간에, 보고된 경험들이 전통적인 신비주의 (traditional musticism)의 정의에 어느 정도 부합되는지 그 자체를 조사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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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모든 경험들이 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아니라고 점잖게 부인했으나, 사실상 그들의 논문에서 전체적으로 종교적인 신념을 고수했다. 만일 이 경험을 종교적이라든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다면 이 논문은 긍정적 중독상태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로서 좋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p.104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응답을 보냈던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의 특권층이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했고 대부분이 대학 졸업자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아동기를 행복하게 보냈다고 회상했고, 그들의 부모들끼리도 금슬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부모들과도 좋은 관계였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경험들 때문에 그들은 자기 비난을 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긍정적 중독상태로까지 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수용하기 어렵게 만드는 죄의식 중심의 종교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의 부모는 충만된 기쁨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는 종교적인 접근방식을 지녔었다고 보고하였다. 이 저자들은 그들의 정신력에 관해 매우 의미 심장한 결과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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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기에 황홀경에 잘 빠지는 사람들이 사회적, 심리적으로 결핍했거나 장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노먼 브래드번(Norman Bradburn) 교수가 개발한 간이심리척도를 적용시켜 본 결과 (The Brief Psychological Well-being Scale) 황홀경의 체험 빈도와 심리적 건강(Psychological well-being)과의 상관계수는 40으로서 브래드번 교수가 여태까지 연구한 것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었다. 우리는 여러 변인들을 고려하여 이 상관관계의 강도를 줄여보려 애써 보았으나 그 결과는 상관관계가 .40에서 .39로 줄었을 뿐,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

비록 사람들이 매우 제한된 긍정적 중독의 상태만을 경험했다 해도 그들의 심리적 건강상태에 대한 점수는 매우 높았으며, 나의 용어로 라하자면 그들에게는 심리적인 힘이 있었다는 것이 여기서 증명은 되지 못했어도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두 저자들이 이 결과를 정신건강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료 전문가들에게 보고하였을 때, 그들은 이 사람들이 종교적인 체험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논박을 했다고 한다. 사회과학자들은 나처럼 긍정적 중독상태의 체험에서 종교적이 측면을 믿지 낳았다.

그러나 그들이 나와 다른 점은, 그들은 긍정적 중독상태의 전체적인 개념조차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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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중독이 되었건 안 되었건 내가 주장하는 바는, 당신이 긍정적 중독상태를 경험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 도안 두뇌를 혼자 남겨둘 수 있을 정도로 자기 자신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긍정적 중독을 통해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전 과정의 열쇠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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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불평하는 것은 약자의 특징이며, 이는 곧 자기 비난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약한 사람일수록 긍정적 중독상태를 경험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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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기법으로서 비판을 사용할 경우에도 그가 쉽사리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하면 안된다. 그의 용모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으나 학교나 직장에서의 실패는 비판할 수 없다. 예컨대, 용모에 대해서 비판할 때조차도 더 나아 보일 수 있게 도와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의 핵심은 증상이란 실패라는 능동적인 고통을 덜 고통스럽고 수동적인 대뇌 내부의 고통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사실상, 대체된 증상도 여전히 고통스럽기는 한다.

프로이드도 한때 코카인에 굉장한 흥미를 가졌으며, 코카인에 의해 유발되는 중독의 심적 상태가 정신과적 만병통치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부정적 중독자는 사랑과 가치를 오랫동안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쉽사리 빨리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된다. 그는 또한 사랑과 가치를 다시 얻게 해 주거나 적어도 그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새로운 행복한 힘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이 처음에는 강력한 수동적인 즐거움을 똑같이 복사해 낼 수 있지만, 능동적인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사랑과 가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곧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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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0

물론, 누구에게나 대체물이 원래의 습관만큼은 만족스럽지 않다. 어떤 점에서 보면 긍정적 중독이 부정적 중독과 유사하기도 하지만, 긍정적 중독의 금단상태 고통은 부정적 중독에서처럼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다. 만일 긍정적인 중독자가 평소에 하던 습관을 중단해야만 한다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모든 중독의 특징이 그렇듯이) 아마도 그는 그 습관을 항상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약해지지 않고 강해지기 때문에 부정적 중독자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심하게 고통받지는 않는다. 만약에 당신이 긍정적 중독자이고 어떤 이유로 해왔던 습관을 중단해야만 한다면, 고통받을 준비를 하라. 그리고 전보다 더 강해질 준비도 하라. 그러면 결국 고통은 멈추게 되고 여분의 힘도 절대로 잃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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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4

이제는 다른 가능한 긍정적 중독에 대해서 살펴보자. 긍정적 중독은 한 개인이 다음 여섯 가지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한에서 하기로 선택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1) 당신이 하기로 선택하고, 매일 1시간 정도 그것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경쟁적이지 않은 것. (2) 당신이 그것을 쉽게 할 수 있고, 잘하기 위해서 많은 정신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3) 당신은 그것을 혼자 할 수 있거나 혹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하지만, 그것을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 (4) 당신이 그것에는 당신을 위한 가치(신체적, 정신적, 혹은 영적)가 있다고 믿는 것 (5)당신은 그것을 계속한다면 향상되리라고 믿지만, 그것은 오나전히 주관적인 것이다 - 당신이 그 향상 여부를 측정하는 유이한 사람이다. (6) 그 활동은 당신이 자신을 비판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성질을 가져야만 한다. 당신이 이 활동을 하는 동안 자신을 수용할 수 없다면 이 활동에 중독되지 않을 것이다. 그 활동을 혼자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에 대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동안 당신은 경쟁이나 비판 또는 그 둘 다에 휘말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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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위의 여섯 가지 기준을 따른다고 할 지라도 중독되는데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절대 없다. 중독되기 위해서 당신은 일주일에 몇 번씩, 매번 1시간에 몇 분씩 규칙적으로 긍정적 중독 상태에 이르러야만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원하던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당신이 3-4일 동안 긍정적 중독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신체적,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