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9/2020] 2019 올해의 문제적 소설

독서/기타 2020. 7. 29. 12:08

2020년 하반기인데,

이제서야 빌려두었던 2019 올해의 문제적 소설들을 다 읽었다.

2020년 버전이 대출중이라 못 빌렸기 때문에 가져온 것도 있고,

또 장류진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도 읽고 싶었기 때문에.

 

한국 고전 혹은 근대 소설들을 읽으며

내내 화자에 이입할 수 없고, 심하게 말하면 불쾌했던 경험들 때문에

(외국 고전들도 이에 대해서 자유롭기는 힘들다)

20대 후반까지는 한국 소설들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비문학 서적들을 선호했다.

그런데 요즘은 한국 소설이 좋다.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는 여성 작가분들께 감사하다.

 

불을 끄고 매미 소리를 들으며

차가운 커피 한잔을 마신다.

그리고 한국의 정서에 대해 생각해 본다.

절제된 표현들과 언어.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실주의적 시크함.

미국으로 다시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 오니까

하나 하나 더 귀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금방 져서 더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꽃들처럼.

오늘의 삶을 충만하게 채울 수 있을까.

지난주부터 이번주 상반기 나름 열심히 지냈는데,

어쩌면 조금 쉬는 시간도 필요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이번주까지만 열심히 하고

다음주부터 좀 쉬어야지, 그런 계획들도 만지작 거리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빈둥거려 봐야겠어.

 

비가 좀 그만 왔으면 좋겠다.

서울을 더 마음껏 담고 돌아가고 싶다.

posted by sergeant

벌새 - 2019.12.20

독서/기타 2020. 1. 3. 15:35

오랫동안 머리에 남는 장면들과 메시지.
긴 러닝타임이 무색한 영화.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라 하던데, 그래서일까.
원래부터 알고 있던 사람들만 같은 은희와 영지쌤.

하이퍼리얼리즘의 역기능적 가족, 그리고 우리가 성장하던 그 때 그 시절.
트라우마, 그리고 그럼에도 지속되는 삶.
아니 우리 삶의 일부인 트라우마.

posted by sergeant

호재 - 2020. 01. 03

독서/기타 2020. 1. 3. 11:53

 

추천의 말

 무심히 죄를 지은 이는 평생 그 무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기꺼이 무게를 나누려던 이는 삶 전체가 불행으로 말려든다. 그리고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던 아이가 있다. 아이의 이름은 '호재'. 행복과 기대가 담긴 거창한 이름을 붙여 준 어른들은 정작 자신의 운명에 허우적대느라 아이를 잊었다.

"호재"는 휘둘리고 뒤틀리느라 자라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다. 나 그리고 당신의 변명이고 진심이다. 커다란 몸 안에 웅크린 아이를 숨기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니 어떻게 이 이야기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한 때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였으므로. 이제 그 아이의 눈을 피하는 어른이 되었으므로.

성실과 호의는 성과와 예의로 돌아오지 않고, 행운과 불운은 언제나 가장 부적절한 순간에 찾아온다. 누구에게나 삶은 첫 번째 경험이고 우리는 매 순간 무능하다. 태연한 얼굴로 일상을 살아 내는 평범한 당신, 사실은 가혹하고 냉정한 운명 앞에서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는 당신, 당신의 눈물과 한숨 끝에 이 소설을 놓아 주고 싶다. - 조남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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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중 특히 소설의 백미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삶에 흠뻑 들어가 결국 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야 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철딱서니 없는 인간들, 책임지지 않는 어른들 때문에 망한다.'고 주구장창 말하고 다니는 내게, 담담한 어조로, 누구보다 어린이자 어른이었던 호재의 태도로, 사람들의 삶을 풀어내 준 작품. 그 누구도 혐오하고 증오하지 않고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게 해 준 황현진 소설가님, 감사합니다.

posted by sergeant

 

 

한 때는 방송 작가, 현재는 번역가, 미래는 작가라는 14년차 번역가 노지양님의 마음 번역 에세이라고.

 

글을 쓰고 싶다는 글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14년간 해 온 번역에 대한 깊은 애정이 뚝 뚝 묻어나는 책.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아무래도 빛이 나는 법이다.

posted by sergeant

 

 

작가의 말

우리는 서로를 선택할 수 없었다.

태어나보니 제일 가까이에 복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몹시 너그럽고 다정하여서 나는 유년기 내내 실컷 웃고 울었다.

복희와의 시간은 내가 가장 오래 속해본 관계다. 이 사람과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자라왔다. 대화의 교본이 되어준 복희. 그가 일군 작은 세계가 너무 따뜻해서 자꾸만 그에 대해 쓰고 그리게 되었다. 그와 내 역사의 공집합을 기억하며 만든 창작물 중 일부가 이 책에 묶였다.

(...) 나를 낳은 사람에 대한 이해와 오해로 쓰인 책이다.

(...) 그렇지만 엄마의 훌륭한 교본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님을 내내 기억하며 용기를 내어 책을 만들었다. 서로가 서로를 고를 수 없었던 인연 속에서 어떤 슬픔과 재미가 있었는지 말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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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어떤 글이나 말도, 깔끔하게 단정짓기가 어려워 지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나는 나의 모친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에게 우리 엄마란, 날 때부터 부모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태어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을 오랫동안 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유년시절은 든든한 산과도 같은 부모 슬하에서 안정감 있게 자라났지만,

모든 일에 양면이 있듯이 내가 부모 또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 오랜 시간이 들었다.

사실은 아직까지도, 나는 부모 울타리 안에서 자라고 있는 자식의 역할이 익숙하다.

나는 부모가 되지 않기로 선택했으니, 아마 나는 영원히 부모됨이라는 것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이해할 수 없음이 그리 아쉽지 않은 이유는

내가 설령 부모가 된다고 하더라도 내 부모의 마음을 백퍼센트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삶은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내고 이해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너무 연민하지도 그렇다고 매정하지도 않은 사람이 되고 싶고,

나의 엄마와도 이번 여행에서는 아주 조금 더 친구처럼 지내게 되려나,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되는 시간이었다.

posted by sergeant

골든아워 - 2019.07.07

독서/기타 2019. 7. 23. 13:20

이국종 교수님의 저작, 골든아워 1,2를 읽었다.

대의를 위해 자신의 삶을 주저없이 갈아넣는 영웅의 이야기인데, 수필집이라니. 충분히 읽어볼 가치가 있다. 이런 인물이 현 세대에 같이 공존하고 있다니 신기하다. 어느 시대에나 영웅은 있지만, 사실 영웅은 눈에 잘 보이지 않으니까. 이 교수님은 특별한 분인듯 하다.

본인의 글쓰기를 김훈의 <칼의 노래>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시는 것도 재밌다. 동의가 되면서도, 인간의 자의식이란 흥미로운 기제라는 생각이 든다.

인상 깊었던 부분은, 얼마전 세상을 떠난 윤한덕 센터장에 대한 챕터였다. 난세의 영웅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지만, 동시에 처참하다는 느낌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인생은, 사회는, 구조는 왜 이렇게 엉망진창인걸까 싶은 회의감이 짙게 생긴다. 모두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는 기만이라는 마음도.
그러한 기만과 진창 속에서 나는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 선택이라는 진실만이 남는다. 어느쪽을 선택하든 상관이 없어진 것은 최근이다. 고귀한 영혼들과는 다르게 나는 나이가 들며 비겁해지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그 또한 그리 비하하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책을 읽으며 친구의 죽음에 대해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외상이나 상담에 관심을 가지게 된 부분에 많은 기여를 한 친구의 죽음도, 교통사고 후 응급실을 전전하던, 이국종 교수가 말하는 예방 가능한 죽음 중 하나였다.

십년 정도가 지난 지금, 더 이상 감상에 젖지는 않지만
금번에 고향에 내려갔을 때 티비를 보다가 문득 아무렇지 않게 그 친구 이야기를 꺼내는 엄마를 보며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제는 우리 모두가, 사실은 내가, 아무렇지 않게 이런 얘기들을 할 수 있구나.

시간이 약이라는 말도,
생각보다 너무 가까운 죽음이 오히려 삶을 더 생생하게 만든다는 사실도
모두 너무 진부한 클리셰이지만

진부함을 넘어설 수 없는 나도 그저 특별할 것 없는 나약한 인간인가보다.

posted by sergeant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 beyond the curve, 2018>

흥미로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속담을 조언으로 여러번 들었다. 그 속담은 완전히 틀린거라고 대답하면서도, 떠나지 못하는 내 자신이 이해할 수 없고 한심스럽게 느껴 질 때 쯤, 조금은 위안이 되는 메시지들.
안아키. 일베. 타진요. 그리고 창조과학.. 자정작용을 잃은 채 고립된 단체들이 괴물로 돌아와 일으켰던, 그리고 현재도 진행 중인 한국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을 생각나게 한다.

I saw an interesting documentary on Netflix, which is about flat earthers. Many friends of mind advised me that I should leave my religion if I am suffering too much there. I responded that it is not my option, but I know I am exhausted. In those fluctuations of the mind, this documentary gives me some consolation.

------아래: 일부내용 the part of contents is below

평면 지구인들이 해를 끼치는 건 아니잖아요?
시간을 많이 쏟아 생각해야하지 않는다면, 좀 웃기기도 해요. 그런데 문제는 이 현상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준다는거죠.
So flat earthers, pretty innocuous, right?
It's a little bit funny if you do not spend too much time thinking about it.
But the problem is that this is not a phenomenon restricted to flat earthers.

점점 많은 수의 사람들이 비평적 사고를 할 줄 모르고 전문 지식을 평가할 줄 모르면 선동하기도 쉬워지죠.
If you have a growing section of the population that does not know how to think critically and does not know how to evaluate expert resources, they are gonna be easy to manipulate.

백신 접종 거부자부터 시작해서 예를 들면 진화론도 거부하죠. 성경과 안 맞기 때문이에요. 이런 일이 계속되면 언젠가 공무원 중에도 날씨 전문가 의견 중 97퍼센트를 안 믿는,사람도 생기겠죠.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결정을 내리게 될 거예요. 그건 모두에게 영향을 주죠.
It runs the gamut from people that are anti-vaxxers. Denial of evolution because it conflicts with the bible, for example. Then all of a sudden you get people that may work in our government that does not believe what 97 percent of all climate experts say. And so they are making uninformed or poorly informed decisions, and that affects all of us.

그들과 대면하지 않으면 변화를 기대해서도 안 되죠.
If you are not willing to engage with them, you can't expect them to change.

어떨 땐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면 창피를 주는 수 밖에 없다고 한 친구가 그러더군요. 전 창피 주는게 해결책이 될 순 없다고 봐요. 그건 수업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가 있으면 선생님이 아니라 아이 잘못이라는 건데 전 동의 안합니다.
My friend said, "Sometimes the way to change somebody's mind is to shame them." And I say. I don't think that it is the last resort, ever. This is the same as saying that if a kid doesn't get a particular subject, it is not your fault as their teacher, it is their fault. I cannot believe t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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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

The Displaced - 2019. 3. 6

독서/기타 2019. 3. 7. 11:39

독서 모임을 시작했다. 금주는 이번 학기의 peak week였는데, 2nd 통계시험과 발표 두개가 끝났다. 이제 2시간짜리 발표하나와 페이퍼들만 완료하면 된다. 마음이 가볍다. 여름에 데이터 모을 연구에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 기분이 좋다.


The Displaced, 부제 Refugee writers on refugee lives. 
난민의 삶을 풀어낸 글들의 모음이다. 퓰리쳐 상을 받은 책이라고.

독서모임 가입했더니 무료로 나눠주셨다 :) 역시 풍요로운 나라, 그 중에서도 부유한 곳 대학... 
금주에는 시험시간이랑 겹쳐서 못 갔지만, 다음주부터 참여할건데 꽤 기대가 된다.
읽으며 주옥같은 구절들이 있어 남기고 싶다. (추후 계속 업데이트 예정)




첫구절부터 강렬했다.

I was once a refugee, although no one would mistake me for being a refugee now. Because of this, I insist on being called a refugee, since the temptation to pretend that I am not a refugee is strong. It would be so much easier to call myself an immigrant, to pass myself off as belonging to a category of migratory humanity that is less controversial, less demanding, and less threatening than the refugee. 

I remember all these things because if I did not remember them and write them down then perhaps they would all disappear ...

The other exists in contradiction, or perhaps in paradox, being either invisible or hypervisible, but rarely just visible.

Invisible and hypervisible, refugees are ignored and forgotten by those who are not refugees until they turn into a menace.

A writer is supposed to go where it hurts, and because a writer needs to know what it feels like to be an other. A writer's work is impossible if he or she cannot conjure up the lives of others, and only through such acts of memory, imagination, and empathy can we grow our capacity to feel for others.

We need stories to give voice to a writer's vision, but also, possibly, to speak for the voiceless.

Readers and writers should not deceive themselves that literature changes the world. Literature changes the world of readers and writers, but literature does not change the world until people get out of their chairs, go out in the world, and do something to transform the conditions of which the literature speaks.

윗부분은 좀 반박하고 싶긴함.


The problem here is that the people we call voiceless often times are not actually voiceless. Many of the voiceless are actually talking all the time. They are loud, if you get close enough to hear them, if you are capable of listening, if you are aware of what you cannot hear. The problem is that much of the world does not want to hear the voiceless or cannot hear them.

난민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도, 그 지독한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성들을 생각하게 된다. 난민들의 자전적인 이야기들을 엮어 이 책을 만든 저자는 피난길을 시작할 때 가족의 '재산을 지키도록' 남기고 왔다는 누이에 대해 짧게 언급 했다.
살아남지 못한 사람들. 말을 할 수 없었던 사람들. 말해도 신뢰를 얻지 못했던 이들. 그렇게 꾸준하고 철저하게 지워져나간 존재들.
이 세상의 가장 마지막 식민지, 여성.

posted by sergeant

희랍어 시간 - 2019.01.31

독서/기타 2019. 2. 1. 06:42



흉터 많은 꽃잎들을 사방에 떨구기 시작한 자목련이 가로등 불빛에 빛난다. 가지들이 휘도록 흐드러진 꽃들의 육감, 으깨면 단 냄새가 날 것 같은 봄밤의 공기를 가로질러 그녀는 걷는다. 자신의 뺨에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이따금 두 손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문장에 흐드러지게 담겨있는 봄의 밤. 작가의 글이란 이런거구나.

침묵 속에서 어어, 우우, 하는 분절되지 않은 음성으로만 소통하던 인간이 처음 몇 개의 단어들을 만들어낸 뒤, 언어는 서서히 체계를 갖추어나갑니다. 체계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언어는 극도로 정교하고 복잡한 규칙들을 갖습니다. 고어를 배우기 어려운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요. ... 정점에 이른 언어는 바로 그 순간부터, 더디고 완만한 포물선을 그리며 좀 더 사용하기 편한 형태로 변화해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쇠퇴이고 타락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진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겁니다. ... 말하자면, 플라톤이 구사한 희랍어는 마치 막 떨어지려 하는 단단한 열매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의 세대 이후 고대 희랍어는 급격하게 저물어갑니다. 언어와 함께 희랍 국가들 역시 쇠망을 맞게 되지요. 그런 점에서, 플라톤은 언어 뿐 아니라 자신을 둘러 싼 모든 것의 석양 앞에 서 있었던 셈입니다.

언어의 가장 중요한 본질은 의미의 전달이다. 이 단순한 사실을 이전에는 잘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다채롭고 풍성하며 의미있는 나의 세계들을 언어로 완전하게 표현해 낼 수 있을까? 그리 소질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글을 쓰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노력 중이었다. 책을 읽으며 표현하고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한번쯤은 다시 묻게 된다. 이 마음을 모든 삶을 걸고 꼭 전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꼭 완벽하게 표현해야만 하는 걸까? 사실 그것은 불가능한 목표인 것을.

무심히 강가를 산책하는 당신을 먼발치에서 볼 때마다 나는 라일락 냄새를 갑자기 들이마신 것처럼 멍해지곤 했습니다.


이 세계에는 악과 고통이 있고, 거기 희생되는 무고한 사람들이 있다.
신이 선하지만 그것을 바로잡을 수 없다면 그는 무능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 않고 다만 전능하며 그것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는 악한 존재이다.
신이 선하지도, 전능하지도 않다면 그를 신이라고 부를 수 없다.
그러므로 선하고 전능한 신이란 성립 불가능한 오류다.

그렇다면 나의 신은 선하고 슬퍼하는 신이야. 그런 바보 같은 논증 따위에 매력을 느낀담다면, 어느날 갑자기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걸.


나는 신에게 왜 그토록 어리석은 연인이었을까요. 당신에 대한 사랑은 어리석지 않았으나 내가 어리석었으므로, 그 어리석음이 사랑까지 어리석은 것으로 만든 걸까요. 나는 그만큼 어리석지는 않았지만, 사랑의 어리석은 속성이 내 어리석음을 일깨워 마침내 모든 것을 부숴버린 걸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한다는 중간태의 희랍어 문장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진실이 어리석음을 파괴할 때, 진실 역시 어리석음에게서 영향을 받아 변화할까요. 마찬가지로 어리석음이 진실을 파괴할 때, 어리석음에도 균열이 생겨 함께 부섲서질까요. 내 어리석음이 사랑을 파괴했을 때, 그렇게 내 어리석음 역시 함께 부서졌다고 말하면 당신은 궤변이라고 마말하겠습니까. 목소리. 당신의 목소리. 지난 이십년 가까이 잊은 적 없는 목소리. 내가 아직 그 목소리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면, 당신은 다시 내 얼굴에 그 단단한 주먹을 날리겠습니까.


자라면서 그녀는 이 일화를 반복해 들었다. 하마터면 넌 못 태어날 뻔했지. 주문처럼 그 문장이 반복되었다.

자신의 감정을 잘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린 나이였지만, 그녀는 그 문장이 품고 있는 섬뜩한 차가움을 분명하게 느꼈다. 그녀는 태어나지 못할 뻔 했다. 세계는 그녀에게 당연스럽럽게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실, 건강이 걱정스러운 사람은 오히려 너야.

너는 불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지 않니. 무엇에든 몰두하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여서, 결국엔 병을 얻고 마는 사람이지 않니. 계집애 같은 오빠와 사내애 같은 여동생. 친척들은 늘 우릴 그렇게 비교했지. 넌 그런 말을 죽기보다 싫어했지. 나처럼 서랍을 정리하라는 말. 나처럼 책가방을 미리 챙겨두라는 말. 나처럼 글씨를 반듯하게 쓰라는 말. 나처럼 공손하게 어른의 얼굴을 올려다보라는 말.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로 너는 엄마에게 소리지르곤 했지. 그만 좀 해요. 열이 나서  살겠어. 냉장고에라두 뛰어들고 싶을 지경이라구.


이곳의 여름밤을 기억하니.

한낮의 무더위를 보상하는 듯 서늘하게 젖은 공기.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 할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이야 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아무래도 넌 문학을 하는게 좋겠어.' 그렇게 넌 까다로운 친구, 지지독히 까다로운 동갑내기 스승이었지.
그 스승이 나에게 충고했던 것이 아마도 옳으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어. 문학 텍스트를를 읽는 시간이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린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 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그렇게 남루한 맥락에서 나는 플라톤을 이해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라고. 그 역시 아름다운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거라고.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간절한, 숨길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샅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posted by sergeant

살인자의 기억법 - 2019.01.30

독서/기타 2019. 1. 31. 11:38



본문

몽테뉴의 수상록
우리는 죽음에 대한 근심으로 삶을 엉망으로 만들고 삶에 대한 걱정 때문에 죽음을 망쳐버린다.


카그라스 증후군이라는 게 있다. 뇌의 친밀감을 관장하는 부위에 이상이 생길 때 발생하는 질병이다. 이 병에 걸리면 가까운 사람을 알아보기는 하지만 더이상 친밀감을 느낄수가 없게 된다.

니체의 차라우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쓰인 모든 글들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정신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리라. 타인의 피를 이해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책 읽는 게으름뱅이들을 증오한다.

김경주의 비정성시
내 고통은 자막이 없다 읽히지 않는다
내가 살았던 시간은 아무도 맛본 적 없는 밀주였다. 나는 그 시간의 이름으로 쉽게 취했다.

나는 그 뒤로 시인으로 불렸다. 아무도 읽지 않는 시를 쓰는 마음과 누구에게도 말할 수 옶는 살인을 저지르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

(전쟁에서 사람을 죽인) 그놈들이 다 밤잠을 설치고 있을까? 아닐거다. 죄책감은 본질적으로 약한 감정이다. 공포나 분노, 질투 같은 게 강한 감정이다. 공포와 분노 속에서는 잠이 안 온다. 죄책감 때문에 잠 못 이루는 인물이 나오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나는 웃는다. 인생도 모르는 작자들이 어디서 약을 팔고 있나.

내 명예를 걸고 말하건대 친구여, 차라우스트라가 대답했다. 당신이 말한 것 따위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마도 없고 지옥도 없다. 당신의 영혼이 당신의 육신보다 더 빨리 죽을 것이다. 그러니 더이상 두려워하지 마라.

꽃을 오래 보고 있으면 무서웠다. 사나운 개는 작대기로 쫓지만 꽃은 그럴 수가 없다. 꽃은 맹렬하고 적아라하다. 그 벚꽃길, 자꾸 생각난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그저 꽃인 것을.

인간은 시간이라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치매에 걸린 인간은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숨이 막힌다.

세이렌과 칼립소가 원했던 것은 오디세우스가 미래를 잊고 현재에 못박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끝까지 망각과 싸우며 귀환을 도모했다. 왜냐하면 현재에만 머무른다는 것은 짐승의 삶으로 추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잠이 오지 않아 밖으로 나오니 밤하늘에 별들이 찬란하다. 다음 생에는 천문학자나 등대지기로 태어나고 싶다. 돌이켜보면 인간이라는 존재를 상대하는 일이 제일 힘들었다.


너는 너 자신이 “빈말을 일삼는 놈들이 싫어” 하고 그래서 한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너는 마지막 희생자, 은희 엄마의 소원에 따라 그녀의 딸을 살려줬고 입양했으며 지금은 새로운 연쇄살인범 박주태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 그러나 네가 생각하는, 약속을 지키는 너는 없다.

없고, 없고, 없으니 그것은 평온이며 무아의 경지인가?

이것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공포의 기록이다. 사람들을 공포에 질리게 하는 악마적 연쇄살인범조차도 감당할 수 없었던 공포. 우리 가운데 누구도 이겨낼 수 없는, 인생이 던진 악마적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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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