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두 사람 - 2019.01.30

독서/기타 2019. 1. 31. 06:10



[본문 중]

언니, 제가 좋아하는 농담이 하나 있어요. 전에 어떤 일간신문 만화에서 본건데요. 어떤 남자가 교통방송에서 뉴스를 들어요. 고속도로 어느어느 구간에 역주행을 하는 승용차가 있으니 일대를 운행하는 차량들은 모두 주의하라는 거예요. 그는 문득 그 방면으로 출장을 간 친구가 떠올라서 전화를 걸어요. 

야, 그 부근에 역주행을 하는 미친놈이 하나 있대. 조심해.

그 친구가 이렇게 대답하는 거예요. 한둘이 아니야. 얼른 전화 끊어.

다들 충고들을 하지요. 인생의 바른길을 자신만은 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요. 친구여, 네가 가는 길에 미친놈이 있다니 조심하라. 그런데 알고 보면 그 전화를 받는 친구가 바로 그 미친놈일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미친놈도 언젠가 또 다른 미친놈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거예요. 인생을 역주행하는 미친놈이 있다는데 너만은 아닐 줄로 믿는다며. 그 농담의 말미처럼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미친놈은 아마 한둘이 아닐 거고 저 역시 그중 하나였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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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있는 E는 호기심이 많고 톡톡 튀는 매력적인 사람이다.

자고 일어나니 E가 보낸 메시지가 와 있는데, 
예전부터 내가 얘기하던 미드를 보게되었다고, 골때리게 웃긴다고.

그래서인지 오늘 오후에는 E가 얘기했던 김영하 작가의 [오직 두 사람]을 읽게 되었다.

나는 소설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데,

아무래도 길을 헤매는 주인공들을 보며 답답한 마음이 가장 많이 들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더더욱 자기 파괴적인 행동들을 하는 소설 속의 주인공들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소설의 목적이라는 것이, 
삶도 자신도 생각대로 되지 않고, 마음먹은 것처럼 모든걸 해낼 수 없는 
모든 이들과 인생을 위로하고, 
더욱이는 평생 이해할 수 없을 듯한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아 
공감과 연민의 확장을 불러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나서는
소설을 읽는 것이 이전보다는 즐거워 졌다.

어쩌면 generosity라는 특성이 부족한 내가
더 많이 접해야 할 장르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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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

윤동주 시집 - 2018.02.21

독서/기타 2018. 6. 18. 18:37

 

카카오톡의 행보는 매번 놀랍고,
지인으로부터 이런 선물은 또 처음이다.
굳이 또 시집을..ㅋ 감사합니다.. 향초도 있다ㅋㅋ 천천히 아껴가며 읽어야겠다.

 

 

 

 

치과 병원 오는길에 데려왔는데, 병원 냄새와 환자들과 더불어 괜히 그 처연함이 생각난다.

 

 

 

 

동주는 그 사촌 몽규에 비해 실천적이지 않고, 시로만 마음을 토로하며 부끄러워 하는 사람일 것 같은 편견이 있지만..

사실 부끄러움이란 행동하는 사람들의 것이었다는 점을 생각하게 한다. 부끄러움도 염치도, 빈익빈 부익부.

 

 

posted by sergeant

국가란 무엇인가 - 2017. 05. 29

독서/기타 2018. 6. 18. 18:24

 

오래전부터 붙들고 있었지만 차마 마지막 장 덮기가 아쉬웠던 책. 적시성이 있던 시기가 지나고 5월 장미가 아름답다.

최고의 행정수반 자리에 올라도, 결국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에 너는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에 따라 은퇴를 선언하고 작가생활을 하는 유시민의 삶은, 마음은, 생각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인 이유도 어쩌면, 그가 선택한 지식인으로서의 길에 대한 나의 찬사일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본래 진흙탕이고 전쟁이다. 그러나 예전과 다르게 그 문장이 읽혀지는 이유는, 그 속에서도 어떤 이는 진주를 찾아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그리고 또... 보잘것 없어보이나 고귀한 자신만의 진주를 가지고 묵묵히 불이익을 감수했던 많은 선배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두려움이 용기로, 좌절감이 자신감으로 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p.95

기나긴 자본주의 발전과 사회적 분화를 거치면서 상비군과 관료제가 발전하고 국가제도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길게는 8년, 짧게는 3년에 불과했던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만들어졌다. 우리의 국가는 시민사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p.115

밀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어떤 경우에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기본권으로 내세웠다.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줄이면 국가는 선을 행하려 하기보다 악을 저지르지 않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론의 핵심이다.


p.157

그는 네 가지로 그 이유를 정리했다. 첫째,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본적으로 틀린 전제가 없는 한 침묵을 강요당하는 어떤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검증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근거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하나의 편견으로 간직하게 된다. 넷째, 소수 의견에 침묵을 강요하면 다수 의견 또는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강력하고 진심 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


p.225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어떻게 정치제도를 조직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정치철학이 다루어야 할 올바른 질문이다. - 카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p.254

이론적으로도 그러려니와 세계 각국의 경험을 보아도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을 맡긴 예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히틀러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히틀러는 독일 국민이 보통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한 권력자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악하거나 무능한 또는 둘 다인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한 사례는 숱하게 많다.


p.260

훌륭하고 지혜로운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없다면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은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대가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부작용이다. 이러한 강정ㅁ과 약점을 시민들이 제대로 보지 못하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인물을 지도자로 뽑아 최대의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경우, 선거는 '다시 실망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비극적 이벤트'로 전락할지 모른다. 뽑아놓은 지도자가 알고 보니 최선의 인물이 아니었다거나, 선하기는 하지만 능력과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실망하게 되고, 그래서 대중이 선거 자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잃게 되면 민주주의는 그여말로 교묘한 위선으로 잘 무장한 최악의 인물이 달콤하지만 실현할 수 없는 약속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는 중우정치로 타락할 수 있다


p.280

국가주의를 신봉하는 지식인들중에는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혐오를 부추기는 이가 많다. 그들은 똑똑한 시민이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시민들이 정치에서 멀어지기를 바란다. 진보를 표방하는 지식인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정말로 이 문제에 관심이 적은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일부러 무관심을 가장하기도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된들 어차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p.290

애국심은 특별한 면이 있다. 국가는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물리적 폭력을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행사한다. 다른 어떤 사랑의 대상도 국가와 같지 않다. 그래서 애국심도 다른 사랑의 감정과는 다르다. 폭력조직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폭력에는 정당성과 합법성이 없다. 국가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다. ... 오로지 국가만이 국민에 대해서, 다른 국가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을 행사한다. 고귀한 사랑의 감정일 수 잇는 애국심 뒤에는 결코 사랑하기 어려운 야수가 숨어 있는 것이다.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에 대한 증오심 또는 혐오감이 그것이다. 애국심은 내가 속한 국가를 사랑하는 감정인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를 배척하는 감정이다. 국가는 때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쟁과 학살이라는 끔찍한 참화속으로 몰아간다. 다른 어떤 사랑의 감정도 이런 엄청난 악을 저지르도록 사람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p.344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고 소통한다. 합리적이든 아니든, 민중이 고귀하다고 여기는 어떤 말을 남이 독점하도록 허용하면 권력을 그들에게 넘겨줄 위험이 뒤따라온다. 물론 톨스토이처럼 지식인이 자기의 철학적 소신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은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당과 정치인이 그렇게 하는 것은 혀명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아니다.


p.349

사회를 계획하고자 하는 가장 열광적인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계획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계획을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된다. 성자와 같은 이편단심의 이상주의자와 미치광이 광신자의 거리는 단지 한 발짝에 불과할 때가 많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노예의 길'


p.401

유토피아적 공학(혁명의 길)을 버리고 점진적 공학(개량의 길)을 선택하자는 포퍼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세상 그 누가 폭력혁명을 좋아하겠는가? 만약 점진적 공학의 길이 넓게 열려 있다면 유토피아적 공학을 선택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논리에는 큰 허점이 있다.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량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았다는 점이다.


p.424

우리가 흔히 내세우는 공공의 이익이란 것도 허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수많은 개인의, 때로는 공존하고 때로는 대립하는 이익일 뿐이다. 국익 또는 사회 일반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을 합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에게 귀속될 수 없는 공공의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하이에크에게 자유는 더 높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유는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정치적 이상이다. 훌륭한 행정을 위해 자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민 사회와 개인의 삶에서 각자 최고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대상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p.490

 진보의 범위를 넓게 설정하면서도 그 목표와 방법을 한결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는 '진보를 연찬하다'에서 이남곡 선생이 제시한 견해를 들 수 있다. 이남곡에 따르면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을 지향하는 게 진보주의다.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는 것은 세 가지다. 불합리한 제도, 물질의 결핍, 낡은 생각이다. 진보는 첫째,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예제도, 신분제도, 계급제도, 독재, 자의적인 국가폭력 ㅡㅇ 불합리한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했다.

 실현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국가가 이런 일을 하는데 반대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국가를 만들어 국가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종국적으로 시민 각자가 훌륭해지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훌륭한 국가는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지혜와 윤리적 결단의 산물이다. 국가가 훌륭해지려면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훌륭해야 한다.


p.536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그러나 사회는 여러 면에서 어쩔 수 없이, 도더성이 높은 사람들이 결코 도덕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종국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이 두 도덕적 입장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양자 사이의 모순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조화되는 것도 아니다. -라인홀트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p.598

니버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적 선으로 상정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태도에 대해 조심스럽지만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절대주의는 종교적 정치적 이상을 추구하는 영웅적 행위를 촉진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상황에서는 위험천만한 안내자가 된다. 개인은 절대적인 것을 추구해도 정당하며 위험이 적다. 일이 잘못되어도 그 자신이 손해를 볼 뿐이다. 고귀한 비극이라는 감상이 좌절을 보상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사회가 절대적인 것을 얻고자 달려들면 수백만 명의 생명과 재산이 하루아침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절대주의는 정책의 수단인 국가의 강재력을 잔혹한 독재로 바꾸어 버린다. 개인에게 광신주의는 해롭지 않은 열정적 기행이지만, 이것이 국가의 정책으로 나타나면 인류에 대한 자비심을 파괴한다.


p.622

사회 전체에서 진보는 일반적으로 소수파이다. 그러나 그 이념을 인생의 신념으로 채택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르다. 그곳에서는 그 이념만이 공인받은 지배적 사유습성이 된다. 이것을 바꾸는 것은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드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진보주의자들도 그들 사이에서 공인된 지배적 사유습성을 바꾸려는 시도를 불온하게 본다. 베블런의 말대로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진보진영 안에서도 "혁신은 나쁜 것"이다. 모든 곳에서, 언제나, 인간은 보수적이다.


p.636

그래서 베버는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이러한 윤리적 역설을 인식해야 하며, 그 중압에 눌려서 변지뢴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정치는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인 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범우주적 인간 사라오가 자비를 역설한 위대한 대가들은 폭력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가지고 일한 적이 업삳. 정치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영혼과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정치의 과업은 전혀 다르며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순수한 신념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모든 정치적 행위에 개입되어 있는 악마적인 힘을 의식하지 못한다.


p.661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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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

빨강머리 앤이 하는말 - 2017.03.23

독서/기타 2018. 6. 18. 18:21

 

아무래도 전자책은 쉽게 읽히는 책들을 고르게 되고, 그만큼 후루룩 넘겨 읽게 된다.

차분히 숨고르기 하는 기분으로, 오후를 함께 보낼 좋은 친구같았던 책.

빨강머리 앤이 스웨덴 작가의 소설인데 일본인들이 애니메이션화 했다는 말 덕분에

오후에는 급 생각난 하울의 움직이는 성까지 다시 찾아서 보게 되었고..ㅎㅎ

이렇게 작품은 작품을 낳고 연결 되고

또 마음의 평온함과 따뜻함을 찾아 준다.


마지막 부분에 "앤의 말이 다 맞는건 아니야"라고 하신 작가님, 하하

책들을 읽으면서 그런 느낌을 받을 때가 많은데

나도 조각조각 부스러져있는 나의 내적 세계를 구축해서 짠하게 완성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냥 ...이 역시도 너무 에너지 드는 일이며.. '내 세계에 대한 심각하게 받아들임'은 이정도에서 멈추자 싶다.

 

 


 

전자책

p.22

 희망이란 말은 희망 속에 있지 않다는 걸.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는 꽃이라는 걸. 그 꽃에 이름이 있다면, 그 이름은 아마 '그럼에도 불구하고'일 거라고.


p.35

"인간의 행동 중 일부는 감정 없이, 의식적인 목적 없이, 자아와 목표 사이의 진정한 동화 없이 그저 습관처럼 이루어진다. 의미 없는 행동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끌지 않는다. 이와 반대로,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진심을 갖고 행동할 때 행복을 경험하고, 감각을 깨울 수 있다."

이런 저런 행복학 관련 책들을 읽다가 내가 느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을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직업적 성공, 발전적 진화, 자아 성장에 과도하게 관심이 큰 탓에, 나 이외에 다른 사람과의 진정한 관계에 투자하는 시간을 낭비라고 생각하는 문화 속에 살고 있다. 심지어 잠 역시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행복지수가 높은 대다수의 사람은 '내'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공감'을 구축해 낸 사람들이다.


p.38

(노인들의) 시간 시야가 좁아진다는건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미래'를 걱정하지 않은 채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간다는 뜻이다. 과거와 미래에서 자유로워지면, 자신에게 주어진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한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게 된다.


그러나 역시 이러한 말들은 젊은이들에게만 완벽하게 적용되기 어려운 구문이란게 아쉬웠다. 여전히 의미는 있다. 게으른 내가 요즘 실천하는 모토이기도 하다.


p.53

사실 쾌락주의는 절제를 통해 그것을 깊게 체험하라는 말과 같다. 꿀을 좋아하는 곰돌이 푸우가 가장 행복해 하는 시간은 사실 '꿀을 먹는 시간'이 아니라 '꿀을 기대하는 시간'이다. 꽃은 활짝 피기 전이, 꿀은 먹기 전이 가장 달콤하다.

 우리는 너무 즉각적인 만족의 세계에 사는 건 아닐까? 기다림은 우리에게 결과를 떠나 과정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오히려 만끽이라는 말은 이 설렘 뒤에만 따라오는 충만일지도 모른다.


p.82

부당함에 대응해 화를 낸다는게 요즘 같은 세상에서 얼마나 어려운가. 화를 내지 않는 게 매너를 넘어 약자들에게만 요구되는 부당한 감정 노동이 된 세상이다. 별것도 아닌 것에 참았던 화가 폭발하는 '분노장애'를 겪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제대로 화를 낼 수 없는 세상이 만든 부작용이다.


이젠 개인을 넘어서 사회 구조를 볼 수 있는 통찰들이 좋다.


p.86

"체 게바라의 혁명 정신도 스타벅스의 카페라테처럼 테이크아웃 할 수 있다고 믿는 이 시대에 혁명이란 몸사이즈가 66에서 44로 줄어들거나, 키가 160에서 170으로 늘어나는 일 뿐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이 없다고 친구가 얘기했는데, 말과 뇌가 일치하는 사람도 보기 힘든 세상이다.


p.89

 요즘같이 외모가 중요한 시대에 겉모습은 상관없다고 말하고 싶지 않다. 그건 사실도 아니고, 솔직한 말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체 자신만의 스타일을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나 같은 사람에게 스타일에 대해 묻는다면, 가장 쉬운 방법을 말해주고 싶긴 하다.

"그냥 계속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그걸'입으세요. 가장 중요한 건 '자주'보다 조금 더 '자주' 입어서 마치 '매일' 입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p.91

나는 한 때, 미인이 되는 건 예쁜 꽃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중요한 건 할미꽃이든 호박꽃이든 활짝 피어나는 것이다.


p.106

혼자 있기를 좋아한다는 말은, 같이 있음을 전제하기에 가능한 말이다. 이쯤 되면 이런 질문도 해봄직하다. 우리에겐 대체 몇 명의 진짜 친구가 필요한 걸까? 흥미롭게도 마지막 질문에 숫자로 대답한 살마이 있다. 옥스퍼드 대학의 진화생물학 교수인 로빈 던바는 진짜 친구의 수는 최대 150명이라고 여러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던바의 수'다.


...예상보다 너무 많아서 깜짝 놀랐다 ㅋ


p.108

사랑을 가장한 욕망, 우정으로 포장된 필요가 아니라 진짜 감정 말이다. 나는 종종 그런 관계를 꿈꾼다. 모든 곳에 있고, 어디에도 없는 관계. 그리하여 우리 각자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관계를.


p.178

"데제생트는 짐 16개와 하인 2명을 거느리고 네덜란드 자체를 여행했을 때보다 박물관에서 골라놓은 네덜란드의 이미지들을 볼 때 네덜란드 안에 더 깊이 들어가 있다."


내게 있어 여행이란 끝없이 집을 떠나는 일이 아니라, 끝없이 집으로 되돌아오는 일이다. 내게 떠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되돌아오는 일이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다시 길이 시작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 집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라면, 이 보다 더 좋을 순 없는 일.


p.202

누군가의 성공담에는 교훈이 있지만 위안은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실패에서 위로받는다.


역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있는 민족다운 구절이라 썩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보편적인 현상이려니.


p.210

돈을 버는 이유를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말한 시니컬한 후배가 있었는데, 그때 나는 그녀에게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불행해지지 않기 위해' 사는 건 100퍼센트의 삶이 아니며, 또 합리적이지도 않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인생의 목표를 행복에 맞추면 아이러니하게도 행복해지기 힘들다는걸 알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생각을 바꾸셔서 반가웠다. 돈을 번다는 것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나 지향점은 아닐테니까. 그다시 시니컬하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후배 생각이랑 내 생각이 너무 비슷해서 그런가........어쨋거나 우리사회는 피로도가 높은 사회다.


p.428

이제 나는 종종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자유가 아니라, '해야 하지만 하지 않을 자유'에 대해 말하게 된다. 앤과 함께 30년 가까운 시간을 보내 온 나는 이제 '결핍'을 채우는 일 보다 더 중요한 건, 어쩌면 '과잉'을 덜어내는 쪽이 아닐까란 생각도 한다.


그래, 우리 세대는 아무래도 과잉의 세대이다. 그리고 그 과잉은 쓸데없는 것들의 과잉이기 때문에 진정한 결핍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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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

게으를 수 있는 권리 - 2017.03.03

독서/기타 2018. 6. 18. 18:11

 

2011년 6월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두었던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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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김안중 선생님의 ‘신과 인간과 여가’라는 글에서 제시되었던 ‘여가’의 개념을 사용해 이야기하고 싶다. 글에서 김안중 선생님은 교육의 목표를 매우 분명하고 간단하게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여가’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여가’란 인간과 대비되는 신들의 고유한 특성이다. 경쟁하고 생산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충족하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은 여가를 통해 한층 더 우아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질 수 있다. 여가가 없는 인간들의 모습은 만족을 모른채 끝없이 파멸로 자신을 몰아넣는 피곤한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여가’라는 내용 자체를 배울 수는 없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다른 특정한 ‘내용’을 가르치게 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때, 이 내용들이 모종의 생산을 위한 수단이 되는 내용들이 아니다. 이런 도구적 내용들은 ‘노예의 기술’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노예의 기술과 반대되는 것이 바로 ‘자유인의 기술’로서 모종의 외재적 목적을 위해 가르쳐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목적으로 가치 있는 학문들을 말한다.

위의 교육목적을 살펴 볼 때, 과연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 대답을 이러한 여가가 ‘잘 가르쳐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 본다. 제우스신이 보편적인 ‘인간’들에게 가지기를 원했던 자질. 그것은 끊임없이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을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가를 즐길 줄 아는 능력이었다. 본인은 ‘여가’라는 단어를 ‘행복’이라는 단어로 해석할 때 우리가 더 손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가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상태이며 ‘일’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생산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할 때, 행복이라는 단어는 이 상태를 매우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행복은 어떠한 도구적인 수단이 아니며 그 자체로 어떤 것을 생산해 내기 위함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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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써두었던 글에서도 지금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이 글과 많은 교육들이 나로 하여금 현재의 모습이 되도록 이끌었던 것일지, 반대로 DNA 속에 내장된 특정한 성향들이 교육 내용들에 반응을 하고 큰 울림을 받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쨋거나 오늘 (한주 간 기회를 엿보던) 슈크림라떼를 마시며  단숨에 읽어내린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도 게으름에 대한 찬사, 자유인의 모습을 충실히 반영한 여가에 대한 찬양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미 최근 나온 다양한 책들에서도, 자신이 하는 일과 자기 존재감 자체를 동일시 하는 현세태의 고통에 대해 지적하는 책들이 많은데

무려 마르크스의 사위라는 분께서... 100년 전에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창하셨다니 참 낭만적이고 고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생활을 하게 된 후에, '학교에선 도대체 왜 이런 것들을 안가르쳐 줬을까' '학교는 우리를 잘 못 길러냈다' 등의 원망 섞인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는데, 그 생각을 다시금 부끄러워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자유인의 기술들을 열심히 배웠다.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질문 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연대의 가치. 자유롭고 인격을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날마다 더 체감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솔직히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회와 문화에 길들여져서 생산되어 지는 인간의 지성에 대해, 나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해 왔던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많은 욕구와 바람은 누군가의 욕망을 모방했거나 주입받은 것일 가능성이 높을테니까. 본문에서도 언급하듯이, 노동자들은 '와' 달려가길 좋아하고 내가 감탄해 마지않는 촘스키에 따르면, 언론은 항상 권력의 앞잡이여왔었으니까.

 결국 사유하는 것과 창조성을 지키는 것에서의 게으름 만큼은 피해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 조차도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참 모순적이고 재밌다.


 

 

옮긴이 서문

p.9

이솝 우화의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부터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의 성공학에 이르기까지 게으름과 나태함은 한결같이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다. 그런데도 다름 아닌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사회주의 운동의 투사인 라파르그가, 그것도 감옥 안에서 '노동할 권리'가 아니라 '게으를 수 있는 권리(le droit a la paresse)'를 주창하고 나선 것은 아무래도 기이해 보인다. 더욱 신기하게도 이 책은 첫 출간된 100년 전 뿐만 아니라 몇 년 전에도 프랑스에서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었다.

p.10

라파르그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일에 중독되어 있고, 일부 유한계급은 강요된 여가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한 노동 중독은 아편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과 하등 다를 바 없으나 기독교가 노동을 신성시하고, 부르주아의 실용주의 철학이 이를 정당화 한다. 따라서 마약 중독자가 사회적 범죄로 단죄되고 알코올 중독자가 사회적으로 격리되는 데 반해 노동 중독자는 경제 발전의 견인차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마치 아이들의 공부 중독이 출세라는 미명 하에 끊임없이 미화되듯이 아버지들의 노동 중독은 가족과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부단히 찬미된다. 이처럼 신성화된 노동 찬가는 리바이어던처럼 사회 전체를 옥죄면서 인간의 영육을 철저하게 지배해나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산업혁명'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인간이 손으로 처리하는데 24시간이나 걸리던 일을 기계가 한 시간 만에 해치우는데도 하루 노동 시간은 여전히 10여 시간이 넘는데다 어린아이고 부인이고 가릴 것 없이 사회 전체가 총력 노동 체제로 돌입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바 있다. 그러한 역설은 컴퓨터와 스마트 폰에 24시간 매달려 있다시피 한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p.16

'무식 과격한' 자본주의에서 '세련되고 정치한'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이러한 '성숙'에 맞추어 과거에는 국가나 관료가 강압적인 힘으로 자본을 주도해나갔으나 이제는 역으로 자본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주도해나가는 형국으로 바뀌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문 중

p.22

부르주아 계급은 사상의 자유와 무신론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지만 일단 승리하자 어투와 태도를 바꾸어, 오늘날에는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있다. 15세기와 16세기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이도교들의 전통을 흡수하고, 기독교가 비난하는 육체와 육체의 열정을 찬미했다. 하지만 막상 현대에 들어와서는 자신들은 온갖 상품과 환락으로 배가 터질 지경이면서, 라블레나 디드로와 같은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사상가들의 가르침을 부정하면서까지 임금 노동자들에게 금욕을 설교한다. 기독교 윤리를 비루하게 모방하고 있는 자본주의 윤리는 노동자의 육체를 저주한다. 그리고 생산자에게는 가능한 최소한의 필수품만 주고, 그들의 즐거움과 온갖 열정을 억누르며, 휴식이나 감사의 인사도 없이 계속해서 돌고 도는 기계의 일부로 남아 있는 저주받은 운명을 살도록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p.32

(누가복음12:27) 수염도 제대로 깍지 않고, 무슨 일을 할 때면 화를 내곤 했던 여호와는 숭배자들에게 이상적인 게으름의 최고의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는 딱 6일만 일하고 영원히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


ㅋㅋㅋ


p.38

우리 시대는 노동의 세기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통, 불행, 부패의 세기이다.


p.45

소음에 귀먹어 머리까지 멍청해져버린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응답한다. "일하고 또 일하라. 잘 살려면 그렇게 하라." 기독교적인 순종을 내세운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인 타운센드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일하라, 일하라, 밤낮으로 일하라. 일하면 더 가난해지고 가난해지면 우리는 법의 힘으로 일을 강요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으리라." 법의 힘을 빌린 노동의 강요는 "너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너무 많은 폭력을 요구하고, 너무 많은 소움을 만들어 낸다. 이와 반대로 굶주림은 평화롭고 조용하고 끊임없는 압력일 뿐만 아니라, 일과 산업의 가장 자연스러운 동기이고, 또한 가장 강력한 노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이여, 일하고 또 일하라. 사회적 부와 너 자신의 개인적 가난을 증대시키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하라. 더 가난해 지기 위해. 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일하라. 그러면 그만큼 더 비참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헤어나올 길 없는 법칙이다.


누군가 당신의 구원자가 되길 원한다면, 그 전에 당신을 망가뜨리기를 원할 것이다.

잊지 말라, 당신을 후려치길 원하는 인간은 당신의 값을 땅에 떨어트린 후 헐값에 당신을 주워먹으려는 자이다.



p.46

맹목적인 노동숭배 때문에 야수가 되어버린 프롤레타리아들은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한 과잉 노동이 자신들에게 해를 입히고 현재의 비참함을 만들어낸 원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도 못한 채, 말 창고로 달려가지는 않고 울기만 한다.


p.51

원기 왕성한 힘을 실제로 보여주려면 프롤레타리아는 기독교 융ㄴ리, 경제 윤리와 자유사상가들의 윤리에 내포되어 잇는 온갖 편견을 짓밟아 뭉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연의 본능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매우 형이상학저인 법률가들이 꾸며낸 부르주아 혁명기의 인권선언보다 천 배는 더 고귀하고 신성한 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해야만 한다.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낮과 밤 시간은 한가로움과 축제를 위해 남겨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p.57

 대개는 소박하게 세상 만사를 있는 그대로 굳게 믿는 성향을 가진 노동자 계급은 이런 식으로 세뇌받는다. 또 본래 성급한 노동자 계급은 아무 생각 없이 노동과 금욕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나태함, ㄱ아제적인 향유, 비생산, 과소비를 평생 동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노동자들이 과잉 노동으로 몸이 멍들고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다른 한켠에서 자본가들은 남의 고통 속에서 풍요로움을 맛보는 것이다.


p.58

자본주의 생산이 막 시작되던 1,2세기 전만 해도 자본가는 합리적이고 온화한 습관을 지닌 착실한 사람이었다. 부인에다 그저 그런 환경이면 만족했다. 갈증이 날 때만 마셨고, 배고플 때만 먹었다. 그는 호화 방탕함이나 무절제는 궁중의 귀족들이나 주인마나님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 벼락부자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마치 수은 고아산 노동자의 고역을 합리화 하기라도 하듯 오직 수은으로만 치료할 수 있는 병(성병-옮긴이)을 기르는 것을 일종의 의무처럼 여기고 있다. 자본가들은 토종 가축 사육자들과 보르도 지방의 농민들을 격려라도 하듯, 최고급 송로버섯과 최상품 포도주로 조리한 최고급 닭요리로 온몸에 살을 피둥피둥 찌우느라 정신이 없다.


ㅋㅋ 현대에 쓰신줄.....


p.63

 현대의 군대의 역할에 대해 환상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음은 불문가지이다. 이들은 '내부의 적'을 진압하기 위해서 영원히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파리와 리옹의 요새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만약 의문의 여지가 없는 예가 필요하다면, 자본주의의 천국인 벨기에를 보자. 유럽 열강들이 벨기에의 중립성을 보장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군대는 인구에 비하면 유럽 최강이다.


p.67

(과거) 이 옷은 정확히 선량들이 유권자들에게 하는 약속만큼의 내구성을 갖고 있었다. 리옹에서는 비단을 자연 그대로의 순수하고 유연한 상태로 놔두는 대신에 광물성 염을 입혔다. 그리하여 섬유의 무게는 늘어났지만 부서지기 쉽고 내구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장사하기 좋게 모든 생산물에 다른 물질을 섞지만, 그 결과 수명이 단축되어 버렸다. 인류 최초의 시대를 생산 도구의 특징에 따라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라고 부르듯이, 우리 시대를 '불순품(adultera-tion)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순진한 사람들은 위선적인 제조업자들을 사기꾼으로 고발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 제조업자들은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마련해줄까 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노동자들은 단 하루도 팔짱을 끼고는 살아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도주의적인 마음 씀씀이에서 우러나온 이러한 불순품은 제조업자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준다. 상품의 질을 참혹하게 저하시키고, 인간 노동을 엄청나게 낭비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p.68

 하지만 상품의 과잉 생산과 제조 과정에서의 질의 저하에도 불구하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노동자들이 일을 달라! 일을 달라!고 애원하며 시장을 가득 메웠다. 이처럼 일손이 엄청나게 남아났기 때문에 이들은 열정을 억제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갑작스런 폭발이 빈발하게 되었다. 즉 일단 일할 기회가 생기면 모두 와 하고 그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일이 아니라 돈을 달라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구구절절이다.


p.69

왜 1년만에 할 일을 반년 만에 해 치우나? 왜 12달 동안 동일하게 분배하지 않고, 또 왜 6개월동안 하루 12시간 일하느라 소화 불량에 걸리는 대신 1년 내내 5~6시간씩만 일하도록 하지 않나? 일단 하루 할 일의 양이 정해지면 노동자들은 더이상 서로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손에서 일자리를 빼앗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빵을 빼앗기 위해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몸과 마음도 지치지 않을 것이며, 게으름의 미덕을 실천할 것이다.

 이처럼 병적인 노동 숭배 때문에 거의 야수화된 노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할 정도로 성장할 수가 없었다. 즉 모든 사람이 곧바로 일자리를 얻으려면 조난당한 배에서 식수를 나누듯이 일을 똑같이 할당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p.72

(노동자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힘까지 소진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 결국 온 힘을 다 써버려, 결국에는 죽기 오래 전부터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리라는 사실도, 노동이라는 천하의 악덕에 빨려들어가고 야수화되어, 자신이 더이상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파편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또 온갖 뛰어난 재능을 죽여버리고, 노동에 대한 격정적인 열정 말고는 살아 생동하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사실도 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상향이었던 아르카디아의 앵무새들처럼 이들은 경제학자들의 강의를 그대로 반복한다. "일하게 해주시오.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 일하게 해주시오." 오, 바보 같으니. 산업 시설이 느리게 발전하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 너무 많이 일하기 때문이다. 제발 그런 식으로 시끄럽게 울지 말고, 한 경제학자의 얘기를 들어보자. 다행히 몇 달전에 죽은 레이보의 말을 경청해 보자. "노동 방법의 혁신은 일반적으로 수작업 노동의 조건에 의해 제한된다. 낮은 가격에 제공되는 한 아낌없이 수작업 노동을 쓸 수 있지만, 일단 가격이 오르면 비용을 줄이기 위한 온갖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p.73

증거가 필요하다고? 수백개의 증거가 있다. 방적업에서는 스스로 작동하는 뮬 방적기가 발명되어 맨체스터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방적공들이 전처럼 긴 시간 동안 일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기계는 버터 제조부터 밀밭의 잡초 제거에 이르기까지 농업 생산의 모든 분야로 파고들고 있다. 왜냐고? 자유롭고 한가로운 미국인들은 수천 번이라도 프랑스 농부의 소 같은 삶보다는 죽음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영광스러운 프랑스에서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사람의 몸을 망치기까지 하는 밭갈이가 미국 서부에서는 앉아서 태연히 담배를 피며 즐기는 기분 좋은 야외 소풍 같은 것이다.


 노동 중독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큰 일침이 될 수 있겠고, 뒤로 갈수록 더 흥미로운 내용들이 다루어진다.


p.89

 병적인 노동 숭배 때문에 야수가 되다시피 한 프롤레타리아들이여, 지금까지 혹시라도 당신들이 들을까봐 노심초사 당신들에게는 은폐되어왔던 이들 철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라. 돈 때문에 노동하는 시민은 스스로를 노예로 전락시키며, 수년의 징역을 살아 마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기독교의 위선과 자본가들의 실용주의도 이 고대 공화국의 철학자들의 판단을 왜곡할 수는 없다. 자유인을 옹호하기 위해 이들은 각자의 생각을 꾸밈없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실로 지적인 거인들로, 이들과 비교해 후일의 철학자들은 피그미에 불과하다(ㅋㅋㅋ) 이들은 자신들이 구상한 이상적 공화국의 시민들이 완전한 여가를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크세노폰이 지적하듯이 "노동이 모든 시간을 빼앗아가며, 따라서 그로 인해 공화국이나 친구들을 위해 전혀 여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p.90

... 우리의 기독교와 자본주의 도덕가들은 이에 대해 "이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은 노예 제도를 찬양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당시의 경제적, 정치적 조건 속에서 과연 어떻게 그와 달리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고대 사회는 거의 언제나 전쟁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자유인들은 국사와 국가 방위를 논하는 데 모든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하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 도덕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임금 노동자, 즉 현대의 노예제를 찬양하지 않는가? 그리고 자본주의 노예제는 어떤 사람들에게 여가를 제공해주고 있는가?


그 밖에 여러 필자들의 글


p.139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자유인과 노예 모두 약 115일의 공휴일을 지켰다. 이집트에서는 나일 강의 순환기가 있어 반년은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 중세 초기에는 약 80여개의 성인 축일(Saint day)에다 고대 이스라엘의 안식일이 합쳐져 로마 시대의 휴일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일부만을 단축시켰었다. 노동일은 겨울에는 짧고 여름에는 길었다. ... 식사 시간을 뺀 평균적인 하루 노동 시간은 약 9시간 정도였으며, 노동 강도 또한 20세기의 공장들보다 훨씬 떨어졌던 것처럼 보인다.


p.148

태어나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이윤 추구의 기회라고는 전혀 가져볼 수 없는 우리가 애써 겨우 얻어낸 한 줌의 자유시간 마저도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산업의 토대가 되고 만다. 1972년 9월 18일자 비즈니스 위크지는 거대 복합 기업들이 예상 외의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레져 산업을 대대적으로 인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소득이 1퍼센트만 증가하면 레저 상품이나 용역에 대한 수요는 2퍼센트 이상 증가한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 어떤 문화 속에서 살고 있건 모든 젊은이들은 여가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어 있는데,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를 위해 돈을 내거나 사용료를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능력이 없는 젊인이는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 채 빈둥거리거나 여자 친구의 얼굴만 시무룩하게 쳐다보고 있게 된다.


p.153

 자본주의적 시장 메커니즘은 이런 결과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처럼 술수를 부리지만, 실제로 이런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의 시간과 재화를 모두 빨아먹는다. 우리의 문화 체제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착취할 고용주를 찾아다니고 우리를 지배할 정치가를 선출하여, 이들이 마음대로 조직하는 살므이 양식을 자유라고 느끼며 살아가도록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소비에트 세계의 동료 노동자들과는 달리 일이 끝난 후에도 정치 집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p.170

 오늘날에는 여가 자체가 극히 소외된 노동의 거울상이 되었다. 따라서 여가가 철저하게 산업화되고 관료화된 강제적 소비주의에 물들어 죽음을 초래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각종 기구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치명적인 속도 숭배 문화에 종속되어 있는 한, 임금 노예 제도 자체를 없애지 않는 모든 해결책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노동 운동이 정말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려면 초현실주의자들의 유명한 슬로건인 "노동 타도!"가 핵심 슬로건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이 슬로건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일시적인 저항 행동이 궁극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p.172

약 40여전 전에 제임스가 지적한 대로 '인간이 노역의 열매가 아니라 노역 자체에 대해 질문할 때에만 비로소 마르크스적 의미의 인간 활동의 철학은 현실화 될 수 있다.;

 여가에 대한 공허한 철학적 논의를 일삼거나,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의 경쟁력에 대해 괜히 당치않은 헛소리나 하면서 몇시간이나 며칠의 시간을 놓고 흥정하거나, 1~2년 더 은퇴 시기를 앞당기는 문제를 둘러싸고 떠들어보아야 아무 소용 없다. 그 대신 노동의 폐지를 일정에 올리지 않으면 안된다. ...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해보자. 세계의 노동자들은 반인간적인 노동 체계, 즉 개인의 자유와 자연적 창조성을 말살시키는 사회 과정 전체에 대항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 여가에 맞선 사주들의 투쟁은 노동에 맞선 노동자들과의 전재에서 패배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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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

학력파괴자들 - 2017.01.26

독서/기타 2018. 6. 18. 18:09

 

 

SNS에서 추천받아서 읽게 된 학력파괴자들, 창의성이 죽고 있는 작금의 현실에서 다시금 생각해 볼 내용들이 풍성하였으나,
덧붙여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세상은 역시 우리의 예상만큼 핑크빛이거나 결코 만만하지는 않다."

 


 

 

p.182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중략) 다른 사람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말을 하려는 사람입니다. 삶의 궁극적인 동력은 결국 나를 표현함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침해하는 어떤 것에도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때로는 거칠어 보일 수도 있겠으나 나의 주체성, 나의 존재성, 나의 존엄을 침해하는 것에는 거침없이 저항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최진석 '나는 누구인가'

여러분은 얼마나 당신의 말과 생각을 표현하며 살았는가? 우리는 학교에서 정답을 마음껏 섭취하라고는 배웠어도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표현하라고 배운 적은 없다. 세스 고딘은 순종에서 벗어나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아티스트가 되라고 강조하는 저서 '이카루스 이야기'에서 사회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주입시키고 받아들이도록 강요하고 있다고 말한다.
- 소란을 피우지 마라
- 지도자를 따라라
- 그대로 있어라
- 아이들에게 복종을 가르쳐라
- 모난 돌이 정 맞는다
- 사회가 지켜줄 것이라 믿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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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

커피 상식사전 - 2017.01.09

독서/기타 2018. 6. 18. 18:08

 

커피 진짜 너무너무 좋아하고,

사무실에서도 매일 커피 내려 마시고, 학교 안에 카페에서 한잔 이상씩 꼭 사마셨었고..

집에 있으면서는 네스프레소 기계로 2잔 이상은 꼭 마시는 요즘..

또 주말에는 모카포트로 카푸치노 만들어 먹는게 주중행사인 나같은 사람이

오늘처럼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에 이불 속에서 읽기 좋은 책.


난 모카포트가 에스프레소 내려주는 기계로만 알고있었는데, 커피를 좋아하는 것에 비해 참 무지한 축이었고..

결과적으로 에스프레소는 담당 머신으로밖에 내릴 수 없다는게 좀 아쉽긴 하지만

정말 재밌었습니다 :) 좋아하는 카페 가서 갈색 크레마가 컵의 반쯤 차지하는 아메리카노 한잔 하고 싶다..

에스프레소 아름다운 크레마는 역시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있는것이 아니었군. 숭배하고 싶어진다...

 


 

 

전자책p.32

커피는 정신을 맑게 해 대화와 토론을 활성화 시켰다.

1674년 무명의 한 영국 시인은 커피를 일컬어

"아픈 속을 낫게 하고, 천재를 더욱 기민하게 하며,

기억을 돕고, 슬픈 이를 되살리며, 기운을 북돋는,

그러나 취하지는 않는, 엄숙하고 건전한 술"이라고 칭송했다.

이것이 영국에서 커피하우스가 유행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이다.


p.36

"커피 하우스에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정해진 자리가 없으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면 누구나 의자를 차지하고 앉을 수 있다. 평등이라는 이러한 위대한 특권은 인류의 황금시대와 커피하우스에서만 찾아볼 수 있었다."

: 아 물론 여기서 사람은 여자를 제외한 사람이었다는 부분이 매우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으나 ..하하 그랬구나. 재밌었다.


p.37

영국 국왕 찰스 2세(1660-1685)는 런던의 커피하우스 곳곳에 스파이를 심어두기도 했고, 1675년에는 커피하우스 폐쇄령을 선포하기까지 했다. 찰스 2세는 사람들이 커피하우스 때문에 "마땅한 직분과 의무를 잊고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고 주장했는데, 커피하우스 운영자와 정치인들이 합심해 반발한 탓에 결국 폐쇄령은 통과되지 못했다.

p.67

이탈리아 외의 도시에 에스프레소 바가 문을 연 것은, 1950년대로, 런던, 멜버른, 웰링턴, 샌프란시스코 등지에서 생겨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이런 에스프레소 바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어떤 이들에게는 겉멋만 잔뜩 든 과시적인 장소로 비치기도 했다. 1957년 사회학자 리처드 호바트는 런던의 한 에스프레소 바를 일컬어 "썩어 빠진 정신머리로 가득 찬, 우유 끓는 내가 진동하는 곳"이라고 묘사했다. 에스프레소 바를 찾는 것은 주로 젊은 층이었는데, 어른들의 눈에는 에스프레소 바를 채운 젊은이들이 제멋대로이고 문란하며 무책임한 이들로 ㅣ쳤다. 사실 위 세대가 아래 세대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하루이틀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 ㅋㅋㅋㅋㅋㅋ현대 한국의 '스타벅스 된장녀' 비판이 왜 오버랩 되는걸까..역시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



p.38

 아이작 뉴턴이 처음으로 중력 이론에 대해 쓴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rincipia)>는 1687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위대한 저작이 탄생한 데는 사과의 낙하보다 케임브리지 커피하우스의 공이 더 컸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또한 스코틀랜드 출신 학자인 애덤 스미스는 런던의 브리티시 커피숍에서 경제학 분야에서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저서로 꼽히는 국부론의 상당 부분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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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

호밀밭의 파수꾼 - 2016. 11. 14

독서/기타 2018. 6. 18. 18:06

 

그의 과한 순수성의 추구 역시 너무나도 어지럽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나 또한 참으로 기성세대이자 참으로 속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 부적응자의 한 사람으로서, 반갑다. 모든 암살자들의 바이블!



아래: 네이버 지식백과 참조. 호밀밭의 파수꾼이란 어떤 작품인가-------
현실세계와 타협하지 않는 방법은, 또는 저항의 상징적 제스처는, 미치거나 아니면 미치는 척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적절하게도 『호밀밭의 파수꾼』은 홀든이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요양소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회상하며 이야기하는 식으로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홀든은 이상적인 반항아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부적응자이기도 하다.

posted by sergeant

상실의 시대 2016. 11. 07

독서/기타 2018. 6. 18. 18:05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

세상의 천재들 대부분이 자신의 삶에 잠재된 죽음의 능력을 극대화 시키기에, 우리는 그들의 빛을 강렬하지만 짧게 목도할 수 밖에 없다. 마치 불꽃처럼. 그렇지만 와타나베처럼 철저하고 끈질기게 죽음과의 대결에서 다른 길을 선택하는 이들 덕에, 우리는 그들의 빛을 조금이나마 더 구경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좋다는걸 다시금 일깨워준 책. 커피한잔과 책 한권을 이렇게 평생 나누어가며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배우자가 나한테 바란다는 그 소소한 행복이 이런것인가보다.

 

 

posted by sergeant

상냥한 폭력의 시대 2016. 11.03

독서/기타 2018. 6. 18. 18:04

제목이 매력적이라 집게된 소설,
강남 교보에서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좀 더 천천히 읽었어도 좋았을 법 한 책.

메마른 분위기, 차분한 공허함 그리고 그 속에 녹아져 있는 우리 시대의 속물성.
먼 곳으로의 여행이 아닌 철저한 우리네 삶으로의 여행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