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를 수 있는 권리 - 2017.03.03

독서/기타 2018. 6. 18. 18:11

 

2011년 6월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두었던 기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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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은 김안중 선생님의 ‘신과 인간과 여가’라는 글에서 제시되었던 ‘여가’의 개념을 사용해 이야기하고 싶다. 글에서 김안중 선생님은 교육의 목표를 매우 분명하고 간단하게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여가’이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여가’란 인간과 대비되는 신들의 고유한 특성이다. 경쟁하고 생산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끊임없이 충족하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인간들의 삶은 여가를 통해 한층 더 우아하고 여유롭게 만들어 질 수 있다. 여가가 없는 인간들의 모습은 만족을 모른채 끝없이 파멸로 자신을 몰아넣는 피곤한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여가’라는 내용 자체를 배울 수는 없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다른 특정한 ‘내용’을 가르치게 된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때, 이 내용들이 모종의 생산을 위한 수단이 되는 내용들이 아니다. 이런 도구적 내용들은 ‘노예의 기술’이라고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노예의 기술과 반대되는 것이 바로 ‘자유인의 기술’로서 모종의 외재적 목적을 위해 가르쳐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목적으로 가치 있는 학문들을 말한다.

위의 교육목적을 살펴 볼 때, 과연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 대답을 이러한 여가가 ‘잘 가르쳐진’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라 본다. 제우스신이 보편적인 ‘인간’들에게 가지기를 원했던 자질. 그것은 끊임없이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을 욕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가를 즐길 줄 아는 능력이었다. 본인은 ‘여가’라는 단어를 ‘행복’이라는 단어로 해석할 때 우리가 더 손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가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상태이며 ‘일’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생산이 아니라는 점을 고려할 때, 행복이라는 단어는 이 상태를 매우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행복은 어떠한 도구적인 수단이 아니며 그 자체로 어떤 것을 생산해 내기 위함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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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써두었던 글에서도 지금의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이 글과 많은 교육들이 나로 하여금 현재의 모습이 되도록 이끌었던 것일지, 반대로 DNA 속에 내장된 특정한 성향들이 교육 내용들에 반응을 하고 큰 울림을 받게 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어쨋거나 오늘 (한주 간 기회를 엿보던) 슈크림라떼를 마시며  단숨에 읽어내린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도 게으름에 대한 찬사, 자유인의 모습을 충실히 반영한 여가에 대한 찬양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미 최근 나온 다양한 책들에서도, 자신이 하는 일과 자기 존재감 자체를 동일시 하는 현세태의 고통에 대해 지적하는 책들이 많은데

무려 마르크스의 사위라는 분께서... 100년 전에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창하셨다니 참 낭만적이고 고전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회생활을 하게 된 후에, '학교에선 도대체 왜 이런 것들을 안가르쳐 줬을까' '학교는 우리를 잘 못 길러냈다' 등의 원망 섞인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는데, 그 생각을 다시금 부끄러워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자유인의 기술들을 열심히 배웠다. 생각할 수 있는 힘과 질문 할 수 있는 능력. 그리고 연대의 가치. 자유롭고 인격을 가진 인간의 존엄성을 날마다 더 체감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솔직히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회와 문화에 길들여져서 생산되어 지는 인간의 지성에 대해, 나는 너무 많은 기대를 해 왔던 것이 아닐까 싶을 때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많은 욕구와 바람은 누군가의 욕망을 모방했거나 주입받은 것일 가능성이 높을테니까. 본문에서도 언급하듯이, 노동자들은 '와' 달려가길 좋아하고 내가 감탄해 마지않는 촘스키에 따르면, 언론은 항상 권력의 앞잡이여왔었으니까.

 결국 사유하는 것과 창조성을 지키는 것에서의 게으름 만큼은 피해야 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오는데, 이 조차도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참 모순적이고 재밌다.


 

 

옮긴이 서문

p.9

이솝 우화의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부터 스티븐 코비라는 사람의 성공학에 이르기까지 게으름과 나태함은 한결같이 감시와 처벌의 대상이다. 그런데도 다름 아닌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사회주의 운동의 투사인 라파르그가, 그것도 감옥 안에서 '노동할 권리'가 아니라 '게으를 수 있는 권리(le droit a la paresse)'를 주창하고 나선 것은 아무래도 기이해 보인다. 더욱 신기하게도 이 책은 첫 출간된 100년 전 뿐만 아니라 몇 년 전에도 프랑스에서 대단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었다.

p.10

라파르그에 따르면 현대사회는 일에 중독되어 있고, 일부 유한계급은 강요된 여가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한 노동 중독은 아편 중독이나 알코올 중독과 하등 다를 바 없으나 기독교가 노동을 신성시하고, 부르주아의 실용주의 철학이 이를 정당화 한다. 따라서 마약 중독자가 사회적 범죄로 단죄되고 알코올 중독자가 사회적으로 격리되는 데 반해 노동 중독자는 경제 발전의 견인차로 성인으로 추앙받는다. 마치 아이들의 공부 중독이 출세라는 미명 하에 끊임없이 미화되듯이 아버지들의 노동 중독은 가족과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부단히 찬미된다. 이처럼 신성화된 노동 찬가는 리바이어던처럼 사회 전체를 옥죄면서 인간의 영육을 철저하게 지배해나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산업혁명'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인간이 손으로 처리하는데 24시간이나 걸리던 일을 기계가 한 시간 만에 해치우는데도 하루 노동 시간은 여전히 10여 시간이 넘는데다 어린아이고 부인이고 가릴 것 없이 사회 전체가 총력 노동 체제로 돌입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바 있다. 그러한 역설은 컴퓨터와 스마트 폰에 24시간 매달려 있다시피 한 오늘날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p.16

'무식 과격한' 자본주의에서 '세련되고 정치한' 자본주의로의 전환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이러한 '성숙'에 맞추어 과거에는 국가나 관료가 강압적인 힘으로 자본을 주도해나갔으나 이제는 역으로 자본이 경제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주도해나가는 형국으로 바뀌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본문 중

p.22

부르주아 계급은 사상의 자유와 무신론의 깃발을 높이 들어올렸다. 하지만 일단 승리하자 어투와 태도를 바꾸어, 오늘날에는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종교를 이용하고 있다. 15세기와 16세기에는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이도교들의 전통을 흡수하고, 기독교가 비난하는 육체와 육체의 열정을 찬미했다. 하지만 막상 현대에 들어와서는 자신들은 온갖 상품과 환락으로 배가 터질 지경이면서, 라블레나 디드로와 같은 자신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사상가들의 가르침을 부정하면서까지 임금 노동자들에게 금욕을 설교한다. 기독교 윤리를 비루하게 모방하고 있는 자본주의 윤리는 노동자의 육체를 저주한다. 그리고 생산자에게는 가능한 최소한의 필수품만 주고, 그들의 즐거움과 온갖 열정을 억누르며, 휴식이나 감사의 인사도 없이 계속해서 돌고 도는 기계의 일부로 남아 있는 저주받은 운명을 살도록 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p.32

(누가복음12:27) 수염도 제대로 깍지 않고, 무슨 일을 할 때면 화를 내곤 했던 여호와는 숭배자들에게 이상적인 게으름의 최고의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는 딱 6일만 일하고 영원히 휴식을 취했던 것이다.


ㅋㅋㅋ


p.38

우리 시대는 노동의 세기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고통, 불행, 부패의 세기이다.


p.45

소음에 귀먹어 머리까지 멍청해져버린 경제학자들은 이렇게 응답한다. "일하고 또 일하라. 잘 살려면 그렇게 하라." 기독교적인 순종을 내세운 영국 국교회의 성직자인 타운센드 목사는 다음과 같이 읊조린다. "일하라, 일하라, 밤낮으로 일하라. 일하면 더 가난해지고 가난해지면 우리는 법의 힘으로 일을 강요해야 하는 부담을 덜 수 있으리라." 법의 힘을 빌린 노동의 강요는 "너무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너무 많은 폭력을 요구하고, 너무 많은 소움을 만들어 낸다. 이와 반대로 굶주림은 평화롭고 조용하고 끊임없는 압력일 뿐만 아니라, 일과 산업의 가장 자연스러운 동기이고, 또한 가장 강력한 노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이여, 일하고 또 일하라. 사회적 부와 너 자신의 개인적 가난을 증대시키기 위해, 일하고 또 일하라. 더 가난해 지기 위해. 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으니 일하라. 그러면 그만큼 더 비참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생산의 헤어나올 길 없는 법칙이다.


누군가 당신의 구원자가 되길 원한다면, 그 전에 당신을 망가뜨리기를 원할 것이다.

잊지 말라, 당신을 후려치길 원하는 인간은 당신의 값을 땅에 떨어트린 후 헐값에 당신을 주워먹으려는 자이다.



p.46

맹목적인 노동숭배 때문에 야수가 되어버린 프롤레타리아들은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한 과잉 노동이 자신들에게 해를 입히고 현재의 비참함을 만들어낸 원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도 못한 채, 말 창고로 달려가지는 않고 울기만 한다.


p.51

원기 왕성한 힘을 실제로 보여주려면 프롤레타리아는 기독교 융ㄴ리, 경제 윤리와 자유사상가들의 윤리에 내포되어 잇는 온갖 편견을 짓밟아 뭉개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자연의 본능으로 돌아가야 한다. 프롤레타리아들은 매우 형이상학저인 법률가들이 꾸며낸 부르주아 혁명기의 인권선언보다 천 배는 더 고귀하고 신성한 이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선언해야만 한다. 하루에 세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낮과 밤 시간은 한가로움과 축제를 위해 남겨두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p.57

 대개는 소박하게 세상 만사를 있는 그대로 굳게 믿는 성향을 가진 노동자 계급은 이런 식으로 세뇌받는다. 또 본래 성급한 노동자 계급은 아무 생각 없이 노동과 금욕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은 나태함, ㄱ아제적인 향유, 비생산, 과소비를 평생 동안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리하여 노동자들이 과잉 노동으로 몸이 멍들고 정신적으로 고통받는 다른 한켠에서 자본가들은 남의 고통 속에서 풍요로움을 맛보는 것이다.


p.58

자본주의 생산이 막 시작되던 1,2세기 전만 해도 자본가는 합리적이고 온화한 습관을 지닌 착실한 사람이었다. 부인에다 그저 그런 환경이면 만족했다. 갈증이 날 때만 마셨고, 배고플 때만 먹었다. 그는 호화 방탕함이나 무절제는 궁중의 귀족들이나 주인마나님들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로 여겼다. 하지만 오늘날 벼락부자의 자식들은 하나같이 마치 수은 고아산 노동자의 고역을 합리화 하기라도 하듯 오직 수은으로만 치료할 수 있는 병(성병-옮긴이)을 기르는 것을 일종의 의무처럼 여기고 있다. 자본가들은 토종 가축 사육자들과 보르도 지방의 농민들을 격려라도 하듯, 최고급 송로버섯과 최상품 포도주로 조리한 최고급 닭요리로 온몸에 살을 피둥피둥 찌우느라 정신이 없다.


ㅋㅋ 현대에 쓰신줄.....


p.63

 현대의 군대의 역할에 대해 환상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음은 불문가지이다. 이들은 '내부의 적'을 진압하기 위해서 영원히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파리와 리옹의 요새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건설된 것이다. 만약 의문의 여지가 없는 예가 필요하다면, 자본주의의 천국인 벨기에를 보자. 유럽 열강들이 벨기에의 중립성을 보장해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나라의 군대는 인구에 비하면 유럽 최강이다.


p.67

(과거) 이 옷은 정확히 선량들이 유권자들에게 하는 약속만큼의 내구성을 갖고 있었다. 리옹에서는 비단을 자연 그대로의 순수하고 유연한 상태로 놔두는 대신에 광물성 염을 입혔다. 그리하여 섬유의 무게는 늘어났지만 부서지기 쉽고 내구성이 떨어지게 되었다. 장사하기 좋게 모든 생산물에 다른 물질을 섞지만, 그 결과 수명이 단축되어 버렸다. 인류 최초의 시대를 생산 도구의 특징에 따라 '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라고 부르듯이, 우리 시대를 '불순품(adultera-tion)의 시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일부 순진한 사람들은 위선적인 제조업자들을 사기꾼으로 고발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들 제조업자들은 어떻게 하면 노동자들에게 일거리를 마련해줄까 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노동자들은 단 하루도 팔짱을 끼고는 살아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도주의적인 마음 씀씀이에서 우러나온 이러한 불순품은 제조업자들에게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 준다. 상품의 질을 참혹하게 저하시키고, 인간 노동을 엄청나게 낭비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p.68

 하지만 상품의 과잉 생산과 제조 과정에서의 질의 저하에도 불구하고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의 노동자들이 일을 달라! 일을 달라!고 애원하며 시장을 가득 메웠다. 이처럼 일손이 엄청나게 남아났기 때문에 이들은 열정을 억제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갑작스런 폭발이 빈발하게 되었다. 즉 일단 일할 기회가 생기면 모두 와 하고 그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일이 아니라 돈을 달라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구구절절이다.


p.69

왜 1년만에 할 일을 반년 만에 해 치우나? 왜 12달 동안 동일하게 분배하지 않고, 또 왜 6개월동안 하루 12시간 일하느라 소화 불량에 걸리는 대신 1년 내내 5~6시간씩만 일하도록 하지 않나? 일단 하루 할 일의 양이 정해지면 노동자들은 더이상 서로 시기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사람의 손에서 일자리를 빼앗고 다른 사람의 입에서 빵을 빼앗기 위해 싸우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면 몸과 마음도 지치지 않을 것이며, 게으름의 미덕을 실천할 것이다.

 이처럼 병적인 노동 숭배 때문에 거의 야수화된 노동자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할 정도로 성장할 수가 없었다. 즉 모든 사람이 곧바로 일자리를 얻으려면 조난당한 배에서 식수를 나누듯이 일을 똑같이 할당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p.72

(노동자들은) 자신뿐만 아니라 후손들의 힘까지 소진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또 결국 온 힘을 다 써버려, 결국에는 죽기 오래 전부터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되리라는 사실도, 노동이라는 천하의 악덕에 빨려들어가고 야수화되어, 자신이 더이상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파편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또 온갖 뛰어난 재능을 죽여버리고, 노동에 대한 격정적인 열정 말고는 살아 생동하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사실도 말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이상향이었던 아르카디아의 앵무새들처럼 이들은 경제학자들의 강의를 그대로 반복한다. "일하게 해주시오. 국가의 부를 증가시키기 위해 일하게 해주시오." 오, 바보 같으니. 산업 시설이 느리게 발전하는 것은 바로 당신들이 너무 많이 일하기 때문이다. 제발 그런 식으로 시끄럽게 울지 말고, 한 경제학자의 얘기를 들어보자. 다행히 몇 달전에 죽은 레이보의 말을 경청해 보자. "노동 방법의 혁신은 일반적으로 수작업 노동의 조건에 의해 제한된다. 낮은 가격에 제공되는 한 아낌없이 수작업 노동을 쓸 수 있지만, 일단 가격이 오르면 비용을 줄이기 위한 온갖 시도가 나타나게 된다."


p.73

증거가 필요하다고? 수백개의 증거가 있다. 방적업에서는 스스로 작동하는 뮬 방적기가 발명되어 맨체스터에서 처음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방적공들이 전처럼 긴 시간 동안 일하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기계는 버터 제조부터 밀밭의 잡초 제거에 이르기까지 농업 생산의 모든 분야로 파고들고 있다. 왜냐고? 자유롭고 한가로운 미국인들은 수천 번이라도 프랑스 농부의 소 같은 삶보다는 죽음을 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영광스러운 프랑스에서는 너무나 고통스러워 사람의 몸을 망치기까지 하는 밭갈이가 미국 서부에서는 앉아서 태연히 담배를 피며 즐기는 기분 좋은 야외 소풍 같은 것이다.


 노동 중독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큰 일침이 될 수 있겠고, 뒤로 갈수록 더 흥미로운 내용들이 다루어진다.


p.89

 병적인 노동 숭배 때문에 야수가 되다시피 한 프롤레타리아들이여, 지금까지 혹시라도 당신들이 들을까봐 노심초사 당신들에게는 은폐되어왔던 이들 철학자들의 목소리를 들어보라. 돈 때문에 노동하는 시민은 스스로를 노예로 전락시키며, 수년의 징역을 살아 마땅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기독교의 위선과 자본가들의 실용주의도 이 고대 공화국의 철학자들의 판단을 왜곡할 수는 없다. 자유인을 옹호하기 위해 이들은 각자의 생각을 꾸밈없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실로 지적인 거인들로, 이들과 비교해 후일의 철학자들은 피그미에 불과하다(ㅋㅋㅋ) 이들은 자신들이 구상한 이상적 공화국의 시민들이 완전한 여가를 누리며 살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크세노폰이 지적하듯이 "노동이 모든 시간을 빼앗아가며, 따라서 그로 인해 공화국이나 친구들을 위해 전혀 여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p.90

... 우리의 기독교와 자본주의 도덕가들은 이에 대해 "이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은 노예 제도를 찬양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나도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당시의 경제적, 정치적 조건 속에서 과연 어떻게 그와 달리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고대 사회는 거의 언제나 전쟁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자유인들은 국사와 국가 방위를 논하는 데 모든 시간을 할애하지 않을 수 없었다. ... 하지만 오늘날의 자본주의 도덕가들과 경제학자들은 임금 노동자, 즉 현대의 노예제를 찬양하지 않는가? 그리고 자본주의 노예제는 어떤 사람들에게 여가를 제공해주고 있는가?


그 밖에 여러 필자들의 글


p.139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자유인과 노예 모두 약 115일의 공휴일을 지켰다. 이집트에서는 나일 강의 순환기가 있어 반년은 거의 일을 하지 않았다. 중세 초기에는 약 80여개의 성인 축일(Saint day)에다 고대 이스라엘의 안식일이 합쳐져 로마 시대의 휴일을 그대로 유지하거나 일부만을 단축시켰었다. 노동일은 겨울에는 짧고 여름에는 길었다. ... 식사 시간을 뺀 평균적인 하루 노동 시간은 약 9시간 정도였으며, 노동 강도 또한 20세기의 공장들보다 훨씬 떨어졌던 것처럼 보인다.


p.148

태어나서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이윤 추구의 기회라고는 전혀 가져볼 수 없는 우리가 애써 겨우 얻어낸 한 줌의 자유시간 마저도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산업의 토대가 되고 만다. 1972년 9월 18일자 비즈니스 위크지는 거대 복합 기업들이 예상 외의 높은 이윤을 얻을 수 있는 레져 산업을 대대적으로 인수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소득이 1퍼센트만 증가하면 레저 상품이나 용역에 대한 수요는 2퍼센트 이상 증가한다"고 결론지은 바 있다. ... 어떤 문화 속에서 살고 있건 모든 젊은이들은 여가를 적절하게 이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어 있는데,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를 위해 돈을 내거나 사용료를 내야 하는 것이다. 그럴 능력이 없는 젊인이는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한 채 빈둥거리거나 여자 친구의 얼굴만 시무룩하게 쳐다보고 있게 된다.


p.153

 자본주의적 시장 메커니즘은 이런 결과가 우연히 이루어진 것처럼 술수를 부리지만, 실제로 이런 결과에 이르는 과정에서 우리의 시간과 재화를 모두 빨아먹는다. 우리의 문화 체제는, 우리 스스로 우리를 착취할 고용주를 찾아다니고 우리를 지배할 정치가를 선출하여, 이들이 마음대로 조직하는 살므이 양식을 자유라고 느끼며 살아가도록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소비에트 세계의 동료 노동자들과는 달리 일이 끝난 후에도 정치 집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p.170

 오늘날에는 여가 자체가 극히 소외된 노동의 거울상이 되었다. 따라서 여가가 철저하게 산업화되고 관료화된 강제적 소비주의에 물들어 죽음을 초래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각종 기구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고 있는 치명적인 속도 숭배 문화에 종속되어 있는 한, 임금 노예 제도 자체를 없애지 않는 모든 해결책은 오히려 문제를 악화시킬 뿐이다. 노동 운동이 정말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으려면 초현실주의자들의 유명한 슬로건인 "노동 타도!"가 핵심 슬로건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사람이 이 슬로건을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이것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일시적인 저항 행동이 궁극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p.172

약 40여전 전에 제임스가 지적한 대로 '인간이 노역의 열매가 아니라 노역 자체에 대해 질문할 때에만 비로소 마르크스적 의미의 인간 활동의 철학은 현실화 될 수 있다.;

 여가에 대한 공허한 철학적 논의를 일삼거나, 일본인이나 한국인들의 경쟁력에 대해 괜히 당치않은 헛소리나 하면서 몇시간이나 며칠의 시간을 놓고 흥정하거나, 1~2년 더 은퇴 시기를 앞당기는 문제를 둘러싸고 떠들어보아야 아무 소용 없다. 그 대신 노동의 폐지를 일정에 올리지 않으면 안된다. ... 이를 다른 식으로 표현해보자. 세계의 노동자들은 반인간적인 노동 체계, 즉 개인의 자유와 자연적 창조성을 말살시키는 사회 과정 전체에 대항하기 위해 단결해야 한다. 여가에 맞선 사주들의 투쟁은 노동에 맞선 노동자들과의 전재에서 패배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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