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란 무엇인가 - 2017. 05. 29

독서/기타 2018. 6. 18. 18:24

 

오래전부터 붙들고 있었지만 차마 마지막 장 덮기가 아쉬웠던 책. 적시성이 있던 시기가 지나고 5월 장미가 아름답다.

최고의 행정수반 자리에 올라도, 결국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에 너는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에 따라 은퇴를 선언하고 작가생활을 하는 유시민의 삶은, 마음은, 생각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인 이유도 어쩌면, 그가 선택한 지식인으로서의 길에 대한 나의 찬사일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본래 진흙탕이고 전쟁이다. 그러나 예전과 다르게 그 문장이 읽혀지는 이유는, 그 속에서도 어떤 이는 진주를 찾아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그리고 또... 보잘것 없어보이나 고귀한 자신만의 진주를 가지고 묵묵히 불이익을 감수했던 많은 선배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두려움이 용기로, 좌절감이 자신감으로 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p.95

기나긴 자본주의 발전과 사회적 분화를 거치면서 상비군과 관료제가 발전하고 국가제도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길게는 8년, 짧게는 3년에 불과했던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만들어졌다. 우리의 국가는 시민사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p.115

밀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어떤 경우에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기본권으로 내세웠다.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줄이면 국가는 선을 행하려 하기보다 악을 저지르지 않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론의 핵심이다.


p.157

그는 네 가지로 그 이유를 정리했다. 첫째,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본적으로 틀린 전제가 없는 한 침묵을 강요당하는 어떤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검증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근거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하나의 편견으로 간직하게 된다. 넷째, 소수 의견에 침묵을 강요하면 다수 의견 또는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강력하고 진심 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


p.225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어떻게 정치제도를 조직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정치철학이 다루어야 할 올바른 질문이다. - 카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p.254

이론적으로도 그러려니와 세계 각국의 경험을 보아도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을 맡긴 예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히틀러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히틀러는 독일 국민이 보통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한 권력자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악하거나 무능한 또는 둘 다인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한 사례는 숱하게 많다.


p.260

훌륭하고 지혜로운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없다면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은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대가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부작용이다. 이러한 강정ㅁ과 약점을 시민들이 제대로 보지 못하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인물을 지도자로 뽑아 최대의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경우, 선거는 '다시 실망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비극적 이벤트'로 전락할지 모른다. 뽑아놓은 지도자가 알고 보니 최선의 인물이 아니었다거나, 선하기는 하지만 능력과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실망하게 되고, 그래서 대중이 선거 자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잃게 되면 민주주의는 그여말로 교묘한 위선으로 잘 무장한 최악의 인물이 달콤하지만 실현할 수 없는 약속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는 중우정치로 타락할 수 있다


p.280

국가주의를 신봉하는 지식인들중에는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혐오를 부추기는 이가 많다. 그들은 똑똑한 시민이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시민들이 정치에서 멀어지기를 바란다. 진보를 표방하는 지식인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정말로 이 문제에 관심이 적은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일부러 무관심을 가장하기도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된들 어차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p.290

애국심은 특별한 면이 있다. 국가는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물리적 폭력을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행사한다. 다른 어떤 사랑의 대상도 국가와 같지 않다. 그래서 애국심도 다른 사랑의 감정과는 다르다. 폭력조직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폭력에는 정당성과 합법성이 없다. 국가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다. ... 오로지 국가만이 국민에 대해서, 다른 국가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을 행사한다. 고귀한 사랑의 감정일 수 잇는 애국심 뒤에는 결코 사랑하기 어려운 야수가 숨어 있는 것이다.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에 대한 증오심 또는 혐오감이 그것이다. 애국심은 내가 속한 국가를 사랑하는 감정인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를 배척하는 감정이다. 국가는 때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쟁과 학살이라는 끔찍한 참화속으로 몰아간다. 다른 어떤 사랑의 감정도 이런 엄청난 악을 저지르도록 사람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p.344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고 소통한다. 합리적이든 아니든, 민중이 고귀하다고 여기는 어떤 말을 남이 독점하도록 허용하면 권력을 그들에게 넘겨줄 위험이 뒤따라온다. 물론 톨스토이처럼 지식인이 자기의 철학적 소신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은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당과 정치인이 그렇게 하는 것은 혀명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아니다.


p.349

사회를 계획하고자 하는 가장 열광적인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계획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계획을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된다. 성자와 같은 이편단심의 이상주의자와 미치광이 광신자의 거리는 단지 한 발짝에 불과할 때가 많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노예의 길'


p.401

유토피아적 공학(혁명의 길)을 버리고 점진적 공학(개량의 길)을 선택하자는 포퍼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세상 그 누가 폭력혁명을 좋아하겠는가? 만약 점진적 공학의 길이 넓게 열려 있다면 유토피아적 공학을 선택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논리에는 큰 허점이 있다.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량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았다는 점이다.


p.424

우리가 흔히 내세우는 공공의 이익이란 것도 허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수많은 개인의, 때로는 공존하고 때로는 대립하는 이익일 뿐이다. 국익 또는 사회 일반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을 합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에게 귀속될 수 없는 공공의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하이에크에게 자유는 더 높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유는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정치적 이상이다. 훌륭한 행정을 위해 자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민 사회와 개인의 삶에서 각자 최고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대상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p.490

 진보의 범위를 넓게 설정하면서도 그 목표와 방법을 한결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는 '진보를 연찬하다'에서 이남곡 선생이 제시한 견해를 들 수 있다. 이남곡에 따르면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을 지향하는 게 진보주의다.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는 것은 세 가지다. 불합리한 제도, 물질의 결핍, 낡은 생각이다. 진보는 첫째,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예제도, 신분제도, 계급제도, 독재, 자의적인 국가폭력 ㅡㅇ 불합리한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했다.

 실현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국가가 이런 일을 하는데 반대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국가를 만들어 국가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종국적으로 시민 각자가 훌륭해지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훌륭한 국가는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지혜와 윤리적 결단의 산물이다. 국가가 훌륭해지려면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훌륭해야 한다.


p.536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그러나 사회는 여러 면에서 어쩔 수 없이, 도더성이 높은 사람들이 결코 도덕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종국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이 두 도덕적 입장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양자 사이의 모순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조화되는 것도 아니다. -라인홀트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p.598

니버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적 선으로 상정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태도에 대해 조심스럽지만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절대주의는 종교적 정치적 이상을 추구하는 영웅적 행위를 촉진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상황에서는 위험천만한 안내자가 된다. 개인은 절대적인 것을 추구해도 정당하며 위험이 적다. 일이 잘못되어도 그 자신이 손해를 볼 뿐이다. 고귀한 비극이라는 감상이 좌절을 보상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사회가 절대적인 것을 얻고자 달려들면 수백만 명의 생명과 재산이 하루아침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절대주의는 정책의 수단인 국가의 강재력을 잔혹한 독재로 바꾸어 버린다. 개인에게 광신주의는 해롭지 않은 열정적 기행이지만, 이것이 국가의 정책으로 나타나면 인류에 대한 자비심을 파괴한다.


p.622

사회 전체에서 진보는 일반적으로 소수파이다. 그러나 그 이념을 인생의 신념으로 채택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르다. 그곳에서는 그 이념만이 공인받은 지배적 사유습성이 된다. 이것을 바꾸는 것은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드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진보주의자들도 그들 사이에서 공인된 지배적 사유습성을 바꾸려는 시도를 불온하게 본다. 베블런의 말대로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진보진영 안에서도 "혁신은 나쁜 것"이다. 모든 곳에서, 언제나, 인간은 보수적이다.


p.636

그래서 베버는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이러한 윤리적 역설을 인식해야 하며, 그 중압에 눌려서 변지뢴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정치는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인 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범우주적 인간 사라오가 자비를 역설한 위대한 대가들은 폭력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가지고 일한 적이 업삳. 정치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영혼과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정치의 과업은 전혀 다르며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순수한 신념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모든 정치적 행위에 개입되어 있는 악마적인 힘을 의식하지 못한다.


p.661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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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