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과 트라우마 - 2019.7

독서/종교 2019. 6. 26. 14:22

 어떤 마음들은 입 밖으로 표현되었을 때 변질 되어 버린다. 게다가 어떤 감각들은 깔끔하게 인식 되지도, 명확하게 표현할 수도 없는 채로 까끌거리기도 한다. 이름을 찾지 못한 이 감각들은 부유하다 불쑥 튀어나와 주인의 뒷통수를 치기도 한다.

 기존의 세계에 통합 되지 못한 경험, 즉 트라우마로 부터 온 고통은 더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 시간이 변형되어 과거의 사건이 현재의 위협처럼 재현되는 플래시백, 언어로 정립되지 못해 타인에게 이해 받을 수 없는 기억들과 마비/과각성을 경험하는 몸, 이 모든 것은 고통이 개인에게 영향을 미쳐 일어나는 대표적 증상이다.
 정리되지 않는 것들은 나를 참을 수 없게 한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트라우마를 공부한 후로 그 세계는 여전히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 책의 저자처럼, '나는 세상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를 절실하게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깨어지기 쉬운 내면을 보게 되었고, 우리의 발자국으로 지구가 얼마나 상처를 입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내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설명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히 묵상하던 시절, 목사님께 물어보았다. 십자가를 알수록 동반되는 고통의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목사님은 십자가에서 멈추지 말고 부활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하셨고, 당시 그 말에 많은 위안을 얻었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어떻게 부활까지 나아가는지를 몰라 고통의 문제에 멈춰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오래전 얻지 못했던 다리를 얻게 되었다. 즉, 십자가(성금요일)와 부활 주일 사이에는 성토요일이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내려왔고, 그 사랑이 가는 길에는 고통과 승리, 죽음과 삶이 온통 뒤섞여 있다. 성 토요일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중요한 대목이다. 성토요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인식할 수 없는 곳 즉 죽음과 부활사이, 지옥 깊숙한 곳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죽음의 경험, 즉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태풍 이 후의 삶'이 우리에게 남은 것처럼,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은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 부활 신앙으로 대표되는 '승리주의' 신학이 우리에게 제시했던 고통에 대한 빈약한 대답은 사회적 약자와 피해자들을 위로하기는 커녕 비난하고 억압하는 기제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극심한 고통 속에 남아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는 성령님에 대해, 증언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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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0

우리가 특정한 세계에 발을 들여 놓을 때, 그 세계가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 경우가 있다. (...) 트라우마는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변화시켰다. 10년 전에 비해 나는 세상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사람들을 볼 때마다 깨어지기 쉬운 내면을 보게 되었고, 우리의 발자국으로 지구가 얼마나 상처입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이런 사실에 책임을 느낀다. 나는 우리가 설명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믿게 되었다.

 

p.24
"사람들은 우리에게 이제 그만 폭풍을 극복하라고 계속해서 이야기합니다. 물론 폭풍은 지나갔지요. 하지만 '폭풍 이후'는 늘 여기에 있습니다." (..) 리 집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들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연민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드러내면서, 대중들은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고 이야기했다. 대중들은 카트리나로 인한 트라우마를 불편해했고,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에게 트라우마를 극복해야 한다고 다그쳤다.

 

p.26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가 희미해진 세상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문제들을 진지하게 다루려는 사람은 삶을 파고드는 죽음에 대한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트라우마의 복잡한 모습들을 모조리 목격하고 증언해야 할 과제를 갖는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이나, 트라우마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이들 모두 복잡한 상황 속에서 힘겹게 치유의 길을 만들어 간다.

 

p.28
이처럼 이해 능력을 넘어서는 트라우마를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은 삶과 죽음의 관계 속에서다. 트라우마는 죽음과의 만남으로 묘사된다.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세계와 그 속에서의 익숙한 삶의 모습을 산산이 부서뜨린 끔찍한 사건을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에서부터 단절이 발생한다. 한 사건은 모든 것이 철저히 끝장난 것으로 생각되어 그 이후의 삶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어려운 일이다. 

 

p.34
트라우마 생존자가 경험하는 삶은 새로운 것도, 더 나은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이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한 삶으로 선포되는 한, 트라우마의 고통이 존재하는 현실은 묻혀 버린다. 우리는 이런 방식의 부활 선포가 죽음의 여파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에 침묵하고 그 경험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p.35
트라우마의 이중구조는 이 책에서 내가 '중간(the middle)이라고 비유하여 부르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장소를 드러낸다. 이 중간은 삶도 죽음도 아닌, 생존이라는 당혹스러운 영역에 대해 말한다. 그동안 신학은 죽음과 삶의 사건에 집중한 나머지 이 중간이라는 영역을 다루지 못했다. 중간은 위태로운 위치에 자리하고 있어서 가려지거나 무시되기 쉽다. 시간과 몸과 언어가 중간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에, 중간을 증언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p.36
이 책의 역할은 이 중간에 대한 담론을 드러내는 데있다. 이 작업은 고통경험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구원의 성급함에 반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교 전통의 중심에 자리한 죽음과 부활이라는 내러티브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이중간에서 바라보면, 우리는 고통을 다른 방식으로 대할 수 밖에 없다. 

 

p.41
트라우마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간의 선함을 굳게 믿는그리스도교의 신앙백이 불가능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p.47
복구가 진행 중이지만, 이제 삶은 새로운 삶도 승리한 삶도 아니다. 삶은 오히려 더불확실하고 모호하며 캄캄하다. 이러한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신학적 인식과 표현이필요하다. 나는 아무런 삶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마음속에 삶을 품고나아갔던 사람들의 몸부림을 존경한다. 나는 그들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이 책을 썼다. 

 

p.48
구원을 죽음이나 삶 어느하나와긴밀학하게 연결 시키면, 고통을 미화시키고 찬양하거나혹은 부정하게 될 위험이 있다. 

p.52
수난과 부활에 대한 주류의 논리를 주장하는한, 신학은 깊은 상처를 덮어버리며 고통에 대해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p.53
결국 고통 속에서 과연 하느님이 계신지를 다시 묻기 위해 남아 있는 것에 관한언어는 신학 안에서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 트라우마라는 렌즈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고통의한가운데에서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전통적인 질문은 새롭게표현된다. (...) 트라우마의 여파 속에서, 신학적 해석의 틀은 사람들이 겪는 깊은 고통을 거의 설명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그 해석의 틀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p.55
여느 고통 경험과 다르게 트라우마는 우리가 고통에 대응하는 능력과 경험을 자기삶에 통합하는 능력을 심각하게 손상시킨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사건의 폭력적이고 예측할 수 없는 특성 때문에, 다양한 트라우마 증상들이 나타나고, 경험을 처리하고 해석하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해진다. 집요하게 떠오르는 고통스러운 장면들과 트라우마 사건의 기억은 가장 전형적인 트라우마 증상중 하나다.
과거의 파편들이 현재에 다시 흩뿌려진다.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과거는 거듭 현재를 침범하고, 많은 생존자들의 삶은 다시 트라우마 언저리로 떠밀려 간다. 트라우마를 겪은 이들 모두는 트라우마와 씨름하면서 자기와의관계 및 타인과의 관계 모두가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경험한다. 트라우마 여파 속에서 생존자는자기신체 및 타인의 신체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언어 사용 능력과 의사소통 능력에도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된다.

 

p.56
트라우마의 핵심 문제는 시간의 문제이다. 이를테면, 과거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않고 현재를 침범한다. 현재는 과거를 재현할 뿐 아니라, 온전히 알지도 못했고 제대로 이해하짇지도 못했던 것들을 다시 보여주게 된다.

"세월이 약이다!"라는 익숙한 격언이 있다. 하지만 트라우마는 이 격언과 상반되는 사실을 보여준다. 

 

p.63
우리가 고통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사람과 공동체에 끼친 영향을 다시 살펴보아야 하고, 그 고통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 자신을 다르게 정립해야 한다. 

 

p.84
트라우마는 일반적으로 죽음과의 만남으로 이해된다. 하지만 이 만남은 완전히 통합되거나 파악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만남은 인식할 수 없는 형태로 되살아난난다. 죽음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죽음이 가져온 위기는 죽음이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닌,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어떤 힘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에 있다. 되살아나는 죽음 때문에 트라우마 이전과 같은 삶은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 삶은 죽음과 계속적으로 맞붙어 싸우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삶은 다른형태를 취하게 된다. 따라서 트라우마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보는 죽음과 삶에 대한 이야기는 간단하게 읽어낼 수 없다. 죽음은 완결되지 않고, 삶 속에 계속된다. 

 

p.87
신학자 발타자르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죽음과 삶 사이에 무엇이 끈질기게 계속되는가?"

 

p.102
트라우마 현장에서 움트는 이해할 수 없는 진실은 바로 사랑이 남아있다는 것이다.

 

p.104

이를 통해 트라우마에 대한 통찰들은 또한 예수라는 인물 대신에, 증언이라는 행위에 의해 드러나는 성령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모델들은 예수가 떠나고 난 뒤, 예수의 부재로 인해 형성된 증언의 방식들을 정확히 포착하지 못하며, 성령이 하는 증언과 성령에 대한 증언이라는 대단히 중요한 전환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증언을 성령의 증언과 연관해 성령론적으로 재해석하는 것은 어떤의미가 있을까? 많은 경우에, 우리가 성서 속에서 보는 증언은 지금 제안된 해석들보다 훨씬 덜 직접적이다. 만약 증언이 말로 전달하기 어렵고, 간접적이며, 다른 이들에게 전해지는지도 확실치 않다는 사실을 그리스도교의 증언에 대한 개념이 인정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우리의 관심이 증언의 내용이 아니라 증언하는 행위 자체로 옮겨지고, 목격된것들은 계속해서 생략된다면 어떻게 될까? 트라우마라는 렌즈는 선포되어야 하는 분명한 진실이 아니라, 우리가 담아낼 수 없지만 증언해야만 하는 진실을 주목하게 한다.

 

 

p.108
"그 위험이아주 실제적이기에 우리는, 마치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드라마를 보는 관객들철처럼, 그저 장면이 바뀔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p.115
"성토요일, 내 몸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나는 오로지 극심한 피로만 느꼈다. 영혼의 상태." 그녀는 그 고통을 신체적인 고통보다는 심리적인 고통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존재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에서 비롯된 괴로움이다. 극도의 고독, 버림받음, 포기가 지옥에존재한다. 그녀의 경험은, 지옥에 존재하지도 않고 그녀가 손에 넣을 수도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지옥의 고통은 그녀의 모든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음을 의미한다. 마치 성자가 성부의 사랑으로부터 끊어졌듯이. (...) 지옥은 고통을 떠맡는 곳이 아니라, 버려짐을 견디는 곳이다.

 

p.125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내려왔고, 그 사랑이 가는 길에는 고통과 승리, 죽음과 삶이 온통 뒤섞여 있다. 성 토요일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의 중요한 대목이다. 성토요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인식할 수 없는 곳 즉 죽음과 부활사이, 지옥 깊숙한 곳에서의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