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남자- 2017.05.18

독서/심리 2018. 6. 18. 16:48

 

 

책의 제목이 처음에는 비유적이라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코타르증후군이라는 (이전까지 듣도보도 못한) 특이한 병에 대한 묘사였다. 그리고 그 코타르 증후군을 시작으로 저자는 철학이 묻고, 뇌과학이 답하는 '자아에 대한 성찰 여행'을 시작한다.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기본적인 명제는 처음 심리학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굉장히 불편하고 소화해내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지금 그 명제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사실이다.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오랜시간을 걸쳐 진화해 왔다.'라는 명제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그런생각을 해 본다.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런 명제들을 좀 더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까? .... 어떻긴 뭘 어때. 지금보다 빨라 봤자 1~2년 정도 일찍, 편한 마음을 가지고 현재 수준만큼의 심리학을 이해할 수 있었겠지. 이렇게 혼자 답하고 있다ㅋㅋㅋ작년 말에는 이 괴리가 한창 극심해 져서, 이관직 교수님께 용감하게 질문도 드렸다. 심리학을 기본으로 공부를 계속 하다보니, 성경에 입각한 인간관을 가지지못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스럽다고. 교회에 소속된 상담사이지만 보수기독교단에서 대동단결하여 반대하는 여러 입장들에 대해 분개하는 것이 일반 학문에 너무 심취해서 인지 고민스럽다고. 답변은 기억안나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ㅋㅋㅋㅋㅋㅋ그리고 생각 외로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교회의 규범주의적인 문화 및 정죄함에 대해 비판을 함께 해 주셔서 더 편해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갈림길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과연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배움을 더할 수록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고, 나약한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뒤집었을 때 오히려 더 인간의 위대한 발전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게 해 준다. 인류애가 많지는 않으나, 공부할 수록 더 애정을 키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서서.

 

 


 

<책 발췌>

 

p.71

이 검사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질병실인증이 단순히 기억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아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잼버니는 나에게 말했다. "그것은 아주 선별적인 무능입니다. 타인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은데 자기 자신에 관한 정보만 업데이트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p.76

로빈 모리스는 런던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알츠하이머 환자들에게 일어나는 두 가지 큰 변화에 관해 설명했다. 하나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 자기 자신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지 못해 그들의 서사적 자아를 업데이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아를 지지하는 역할을 맡은 뇌 구조가 아마도 알츠하이머병의 공격을 받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는 자신의 이야기 중 가장 회복력이 좋은 부분으로 물러난다. 이러한 회복력에 관한 생각들은 후기 청소년기나 초기 성인기에 형성된다.

... 사실 건강한 사람들도 삶의 사건들을 회상하라고 하면 십대 이전이나 삼십대 이후의 것들보다는 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더 많이 기억한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회고절정reminiscence bump'이라고 부른다.

 

p.78

 여기서 우리는 '회고절정'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후기 청년기와 초기 성인기에 내가 누구인지에 관한 자아믿음과 자아개념을 형성하는 결정적 시기가 있습니다." 로빈 모리스는 나에게 말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서사적 자아의 핵심을 형성한다.

 

p.109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주의사항이 바로 이것이다. 신경과학계는 특히 질병을 연구하면서 뇌와 정신의 관계를 일방통행으로 보는 신경생물학적 환원주의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뇌가 정신활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fMRI나 PET 스캔은 대개 어떤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특정 뇌 영역의 움직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건강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보여준다. 하지만 명백히 신경 손상을 입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스캔은 뇌 활동과 그 사람의 문제에 대한 상관관계만 보여줄 뿐이다.

 

p.153

 블레이크모어와 프리스, 그리고 동료들은 더 나아가 환청과 조종 망상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왼손을 만지든 실험자가 만지든 별다른 차이 없이 똑같이 강렬하고 간지러우며 즐거운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스스로 간지럼을 태울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기발생적 행위와 자신의 행동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p.164

랠프 호프먼도 조현병에 관해 비슷한 얘기를 한다. (호프먼을 포함한) 과학자들은 많은 조현병 환자의 뇌에서 신경 시스템의 오작동이나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변화들을 관찰해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들은 조현병의 원인일까, 아니면 조현병 발병 이전에 이미 '직장이나 학교 등 사회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관계에서 극심한 철회를 여러 번 겪으면서' 생긴 결과로 보아야 할까? 호프먼은 말한다. "어떤 사람이 후기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를 거치면서 정상적인 상호작용에서 여러번 물러난다고 해봅시다. 그것이 몇 년간 계속된다면, 인지 풍부화와 과제 참여가 일어나지 않는 두뇌 시스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나는 이런 관계 철회가 계속 되다 보면 결국 '신경퇴행성 과정'에 이르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p.182

다마지오의 체계에 완전히 동의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신경과학계는 자아가 생기는 데에서 몸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인다. 몸의 역할은 정서와 감정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다마지오의 관점에서자아는 상부뇌간, 섬엽피질, 그리고 체성감각피질에 나타나는 몸 상태인 원초적 감정으로 시작되어 더 복합적인 정서와 감정들을 형성해 간다.

 

p.309

고요한 확실성, 고조된 각성, 그리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느낌들이 또한 신비주의적 경험들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묘한일이다. 피카르의 환자들은 자신의 발작에 확실하게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내 환자들 중 일부는 신을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인데도 그러한 발작을 경험하고부터 신앙과 믿음을 갖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거기엔 뭔가 영적 요소가 있으니까요. 신비주의적 경험을 한 사람들은 어쩌면 과거에 황홀경 발작을 실제로 겪었는지도 몰라요."

 이것은 그런 경험들에 대한 흥미로운 역설이다. 자신과 주위 환경에 대해 자아인식이 높은 사람이 동시에 자신과 세계의 경계가 녹아버리는 것처럼 느끼면서, 모든 것이 하나가 된 일체감을 갖는다는 것이다.

 

p.324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논쟁에서 신경과학자들과 철학자들(과거와 현재의 사람들 모두)이 하나로 수렴된다는 느낌은 피할 수 없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너무 잘게 구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 크게 불일치하는 경우는 매우 적다. 데카르트의 이원론도 이제는 유행이 지났다. 어느 누구도 자아가 뇌와 몸이 없어진 이후에도 존재하는 독립된 존재론적 현실을 갖는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어느 누구도 자아에 대한 유일한 관리인으로서 하나의 특권을 가진 곳이 뇌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물론 자기감에 다른 영역보다 좀 더 중요하게 영향을 끼치는 뇌 영역들은 있다. 섬엽피질이나 측두정엽, 내측 전전두엽피질 등이다. 하지만 이 중 어느 영역도 단독으로 자아를 맡는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이야기하는 사람 없이도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서사적 자아가 허구라는 주장도 일부 있다. 사실상 신체에 대한 소유감을 포함해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구성자 없이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몸을 단순히 정신을 담는 그릇의 신분으로 격하시켰던 데카르트적 이원론 대신, 우리는 이제 자기감을 몸에 단단히 통합된 신경 프로세스의 결과물로 보게 되었다. 신경은 현재의 우리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와 몸, 마음과 문화까지 한데 결합시킨다. ...

 지적이고 철학적인 논쟁과 별개로, 인간에게는 고통이 있다. 이 책에서 만난 사람들이 경험한 관점에서 보면, 자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불교도들이 주장하듯, 겉으로 견고해 보이는 자아에 대한 망상성 집착이 고통을 일으킨다. 그리고 참된 본성을 깨닫는 것이 고통을 완화시켜줄 수 있다(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구성하는 다양한 자아의 특성들은 실제로 우리가 스스로 분리해낼 수 없는 두뇌의 역할 때문에 일어난다). ... 우리는 자아에 일어난 혼란을 무언가 결소뇐 것으로 생각한다. 대응기제나 병원에서의 치료들, 그리고 심리치료들은 그렇게 이해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혼란들을 자아의 결손에서 비롯된 결과물이 아니라 자아라는 관념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 그럴 경우에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

 

p.327

우리의 진화적 과거에, 최초로 '아는 자로서의 자아'의 표시가 나타났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중대한 생물학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생존을 유리하게 해주었다. 자신의 몸을 자각하기 위해 진화적 조력을 받아 자신의 주의를 그리로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자아과정, 다시 말해 다양한 뇌영역 활동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여전히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더 진화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장기기억과 서사적 자아를 발전시켰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에서 배울 수 있고, 미래를 구상하고 계획할 수 있다. 여기에 과거의 우리 자신과 미래의 자신에 대한 생각들이 보태지면 대상으로서의 자아가 된다.

 문명이 있기 전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았던 동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심리적 시간에 거주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추상적인 생각을 하든, 그러한 생각들이 자신에게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피드백은 여전히 몸에 의해 중재된다. 그것은 큰 기쁨일 수도 있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일 수도 있다. 아니면 황홀감과 우울감 사이에 있는 온갖 다양한 느낌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감정과 정서들은 우리를 행위로 이끈다. 한때 우리가 이런 감정들을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또는 맹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느꼈다면, 이제는 우리의 생각 때문에 느낀다. 생존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이러한 감정은 인간이라는 종에게 사회와 문화, 예술과 기술 등 인간이 된다는 것과 관련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인간을 끊임없이 원하는 종으로 만들어놓기도 했다. ...

장가 대체로 허구적이라는 본성(주관성이라는 쟁점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자신을 조절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단순한 지적 이해도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무아가 매우 중요한 사상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하지만 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주로 명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경험을 포착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을 줄이고 자신을 타인에게 좀 더 개방하게 한다는 점에서 심오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경험입니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