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 제목부터 불경스러워서 예전같으면 빌려올 엄두도 내지 못했을텐데 가져와서 재밌게 읽었다.

조심스럽고 겸손하게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솔직하게 삶을 들여다 본다는 점이 좋았다.

모든 정신병리의 시작은 자기기만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 모습보다 과장된 자기 모습, 이상화된 자기 모습을 더 사랑하면서

헤어나올 수 없는 간극에 붙잡혀 있을 때 사람은 정신의 건강함과 진정한 행복으로부터 멀어진다고.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솔직한 선구자들이 모닥불 앞에 둘러앉아 나누는 이야기들은, 얼마나 솔직하고 행복한지.

멋지다.

 

 


 

p.6

​오늘의 질문: 아이를 낳지 않은 것을 후회한 적이 있나요?

친애하는 누군가가 내 페이스북에 이 질문을 남겼고, 나는 모두가 볼 수 있게 대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간단하게 대답하자면, 다행히도 '아니요'다.

 더 길게 대답하자면, 나는 어머니가 되는 문제에 관해서 세상에는 세 부류의 여성들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어머니의 운명을 타고난 여자, 이모의 운명을 타고난 여자, 아이로부터 반경 3미터 내에 있어서는 안 되는 여자. 진정한 본성을 고려했을 때 잘못된 범주에 속한다면 이는 (개인적으로나, 가족에게나, 더 크게 보면 지역사회 전체에) 비극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를 갈망하지만 가지지 못하는 여자들은 우리도 알다시피 굉장한 고통을 겪는다. 하지만 적절하지 않은,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아이들 또한 굉장히 고통받는다. (스스로 충족시킬 수도 없고 즐길 수도 없는 책임감에 갇힌 그 어머니도 고통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이모로 타고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운이 좋은 편이다. 우리는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와 즐겁게 있을 줄 알지만, 내 자식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다. 역사상 모든 여성이 어머니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으니, 그런 생각은 절대적으로 괜찮은 것이다. 자, 보자. 내 앞에 아기가 놓여 있을 때면 안심해도 좋다. 나는 그 아기를 잘 어르고 놀아주며 사랑해줄 것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아이를 사랑해 주면서도 나는 가슴으로 알 수 있다. 이건 내 운명이 아니라는 것을. 결코 운명인 적이 없었다는 것을. 이것이 진심임을 알기에 나는 묘한 환희를 느낀다. 살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만큼이나 내가 무엇이 될 수 없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한 법이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엄마는 아니다.

- 엘리자베스 길버트


도대체 어머니의 운명을 타고나는 이들은 어떤 이들일까? 회음부절개를 비롯하여 출산 굴욕3종세트를 모두 정확히 알고 임신과 출산을 결정하는 여성의 비율이 과연 몇프로나 될까?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여성은 이모의 운명을 타고나는 것 아닌가? 정부와 교회와 각종 권위적인 단체들이 입을 모아 '출산의 신성함과 당위성'을 압박하고 있고 성욕이라는 생물학적 기제도 한 몫 하는 덕분에, 인류가 출산률 저하로 멸종할거란 걱정은 하지 않고 있지만.. 아이를 낳지 않기 때문에 가지는 이 수많은 여성들의 죄책감은 어떻게 해야할까 싶었다. 그런 점에서 숨을 탁 틔워주는 구구절절이다.

p.9

나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는 어떤 선택도 판단하지 않는다. 이 책은 그저 60년대에 성인이 되어 이제 모두 60대가 된 여성들에게 앞으로 나와서 개인적인 경험, 구체적으로는 선택한 것이든 아니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든 아이 없는 삶을 살게 된 원인을 공유해 달라고 내가 부탁한 결과다.


실제로 예전같았으면 제목부터가 불경해서(?) 읽을 생각도 못했을 책인데 이 책은 어떤 선택을 강요하거나 판단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았을때, 여자들이 출산으로 인해 가지게 되는 기회비용이 점점 어마어마해지는 사회에서 아이를 낳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은 꽤 정당해 보인다. 생명의 존엄함과 가치를 비용과 효율로 산출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나, 아이에게는 성장과 삶이 그 부모에게는 수많은 비용과 생명을 갈아넣는 것임을 감안할 때.. 저자들이 자신의 선택에 더 "확신"을 가지고 "추천"하지 못하는 모습이 의아하다고 생각될 정도이다. 아무래도 60년대를 지나온 60대 여성들이라서 그런걸까? 어쨋거나 어르신들의 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조국의 지인들보다도 진보적이고, 그럴듯하고,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깊다.


p.23

 나는 스물한살에 젊은 군인과 결혼했다. 결혼하기 무섭게 부모님과 친구들은 첫 아이를 언제 볼 것인지, 아이는 몇 명 낳을 계획인지 물었다. 그리고 내가 전업주부가 되겠다는 확답을 하길 원했다. 대체로 내가 속한 공동체와 사회에서는 드러나게든 암묵적으로든, 순결, 결혼, 엄마 노릇(성 삼위 일체)이 어떤 여자에게든 허락된, 지상낙원으로 가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믿었다. ...

 우리 사이는 절대 안정되지 않았다. 내게는 결혼이 사람들 말처럼 좋지 않았다. 순결, 결혼, 아이라는 삼위 일체 속에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은 나로서는 불량품을 속아서 산 기분, 사탕발림에 넘어간 기분이었다. 아이를 가지자는 말에 계속 '아니요'를 내세우면서 9년이 흘렀고, 남편은 이혼을 청구했다. 나는 우리 둘을 영원히 이어줄 아이가 없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아이가 있으면 결혼생활이 단단해지고 부부사이가 좋아진다는 말도안되는 얘기는 더이상 사람들이 많이 믿지 않는 것 같은데 (이 정도 조차도 내 생각이지만), 어쨋거나 생명 자체를 도구화 하는 것이 너무너무 싫음에도 삶이라는 것이 내 생각처럼만 딱딱 떨어지는것은 아니니까. 이런 모든 사실들을 감안하고서라도 불행한 결혼생활을 지탱해줄 끈으로,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너무나 끔찍하다. 오히려 부부관계가 불행하다면, '아이가 없으니 다행' 일텐데?


p.36

 1960년대 초에 혼전임신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치욕적이었는지를 요즘 젊은 여성들에게 설명할 길은 없다. 피임약을 구하기 쉬워진 60년대 후반이 되어서야 '성의 혁명'이 일어났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 전까지 혼외임신을 해결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결혼이었다. 열여섯 살에 임신한 친구에게도 이것이 해결책이었다. 흔히 그럿듯이, 이런 경우에는 발표하기 몇 개월 전에 이미 결혼을 비밀스럽게 진행한 것처럼 꾸몄다. 하짐나 이렇게 허울 좋게 해놔도 예비엄마는 다른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야 했다. 물론 인기 많은 미식축구선수인 예비아빠가 전학을 가서 연승기록이 깨지는 일은 없었다.


p.38

우리 부모님은 나를 능력에 한계가 없으며 마음 먹은 것은 무엇이든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도록 키우셨다. 나는 어릴 때 주로 여성에 관한 책을 탐독했다. 마리 퀴리, 나이팅게일, 잔다르크, 클레오파트라... 감탄을 자아ㅐ는 이 모든 이야기들은 내게 독립심을 불어넣어 남들이 덜 밟은 길을 따르고 싶게끔 했다. 그리고 그 길에는 아이가 없었다.


p.60

"젠장, 아이 낳는 걸 깜빡했네!"


진정한 힙스터


p.66

아이 낳지 않은 걸 후회하느냐고?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 가끔은 성인 자녀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어쨋든, 내가 아흔다섯 살 어머니를 돌봐드리듯이 나를 돌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아이가 있다고 나를 돌봐줄 사람이 확실히 보장되는 건 아니다. 선천적으로 큰 결함이 있을수도 있고, 마약중독자일 수도 있으며, 외국 전쟁에 나갔다가 죽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내가 늙으나 마나 신경쓰지 않는,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놈일 수도 있으니까.


메디아의 마지막 코러스들의 대사가 생각났다. 코러스들은 신을 원망한다. 신은 여성으로 하여금 아이를 낳고 기르게 하지만, 결국 그 아이를 행복하게, 내 마음대로 기를 수도 없다는 푸념들. 결국 자식을 수단화 하는 것도 못마땅한데, 한걸음 물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잘 키우는 것조차도 너무너무 어려운게 세상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참 머리로 생각하고 논리적으로 결정하여 자녀를 낳고 기른다는게 얼마나 험난한 길인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ㅋㅋ


p.94

나는 신의와 영원함이라는 전통을 원하면서도 내 앞길을 막지 않으려는 남자를 찾아낸 것이다. 프레드는 내 꿈을 존경했고, 우리가 있을 시간을 빼앗아가는 대외활동도 지지해줬다. 그리고 믿고 있는 대의에 강박적으로 헌신하려는 내 모습도 받아들였다.

 

내 소개인줄 ㅋㅋ


p.95

"너랑 프레드가 왜 그렇게 행복한 지 알 것 같아. 너희 부부는 아이가 없잖아."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여러 프로젝트를 하고, 여행을 다니고, 책을 읽은 후 공유하고, 우리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도 요리를 해 주고, 대의를 지지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아이 있는 삶이 아닌 서로와의 관계로 정의된다.


p.165

"많을수록 좋다. 선택도, 시간도, 자유도, 그리고 독립도"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