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한달 전, 방한 기념회 때 참석해서 사인 받아온 책을 아끼고 아끼고 아껴서 읽다가

어제 시험 끝나고 후루룩 마저 읽은 후 포스팅:) 리베카 솔닛의 글은 분명하고 예리하며 통찰력으로 가득 넘친다.


그녀를 알게 해준 책 '맨스플레인'은 차근차근 다 정리하지 못했었지만

초두효과와 더불어.. 훨씬 더 강력하게 내게 영향을 주었었고,

그 때문에 투고할 논문에도 한 줄을 할애해서 적었었다.


앞으로도 여러가지 할 일들 많을테고, 그 과정에서 이 책 또한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

본격적으로 인용해 정리해 둘까 싶다.

 



p.18

어떤 엄마들은 내게 말하기를, 자신은 그저 아이가 있다는 것 때문에 무시당해도 싼 아둔한 인간 취급을 당한다고 한다. (...) 많은 엄마들은 설령 일에서 성공하더라도 그렇다면 틀림없이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했을 거라는 말을 듣는다. 여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정답은 없다. 우리가 습득해야 할 기술은 오히려 어떻게 그 질문을 거부할 것인가인지도 모른다.

p.19

내 인생의 목표 중 하나는 진실로 랍비처럼 문답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 닫힌 질문에 열린 질문으로 답할 줄 아는 것,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깍 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p.25

사람들은 아이 없는 사람에게 그 동기를 캐묻고 그가 부모 역할에 수반되는 희생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거꾸로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 밖의 세상에 베풀 사랑이 그만큼 적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

 >>많은 남성들이 우호적이든, 그렇지 않든간에 나의 딩크족 선언을 들으면 마치 '뭘 모르는 인간'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에 신물이 난다. 특히 방금 말한 그런 이들은 모두가 나보다 결혼을 1년 이상 늦게한 자들이라는 것도 우스운 포인트이다. 어쨋거나 그들이 나에게 들이대는 아이를 가지기로 결심한 '귀한 논리와 포부'를 들어보면 딱히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재깍 지적들이 가능한 포인트들이 많다. ex1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최상의 경험인 부모가 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애는 무슨 죄..?? 나의 경험을 위해서 아이를 낳겠다는 건가.. ex2 "와이프가 아이를 낳아줬으니 어쩌면 내가 양육의 반은 부담해 줄 의향도 있어." 아니지. 와이프는 낳는 걸로 그가 할 책임을 다 했으니 니가 100% 양육을 책임지는건 어떨까..? 어쩌면 그들이 나에 대해 반발감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인지도 모르겠다.. 본래 맞는말만 하는 사람들은 미움을 산다.

 나는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인 우위를 통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쨋거나 아이를 가지게 되면 아무리 이타적이었던 사람도, 자기 자신 혼자서는 이타적일 수 있지만 자신의 아이에게 만큼은 최선의 것을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될 터이다.  그리고 오히려 아이에게 이타적이라고 강요를 하는 것 자체도 모순적이고 아동학대적이다. 내가 들었던 최고의 아이를 가지겠다는 결심의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데, 아이와 함께 이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정도였다. 그 밖에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이 논리적으로 뛰어나다고 포장하며 아이를 낳으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대더라도, 차라리 피임 실패였다는 대부분의 이유와 거의 수준이 비슷하다고 느껴졌을 뿐이라고 말하면, 너무 과한걸까..


p.36

지난 세기 동안 인간이 스트레스와 위험에 대처하는 반응은 "맞서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2000년 UCLA의 심리학자들은 그런 연구가 대체로 수컷 쥐와 인간 남성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심리학자들은 그래서 여성을 연구했고, 자주 채택되는 세번째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그것은 여럿이 한데 뭉쳐서 연대와 지지와 조언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3년에 석사과정에 입학했던 나는 여전히 fight or flight를 정설로 배우고 있었다는게 함정.


p.44

피해자를 믿는다는 건 곧 세상의 바탕에 깔린 가정들을 의심한다는 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편안함이 지켜져야 할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 편안함이 남들의 고통과 침묵 위에 세워졌을 때 조차, 아니 그럴 때일수록 더욱 더.

p.46

여성이라는 범주는 길고 너른 대로이다. 계급, 인종, 가난과 부 등 다른 많은 길들이 이 길과 교차한다. 이 대로를 걷는다는 것은 그 다른 길들과 만난다는 뜻이다.

p.52

가부장제가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첫번째 폭력 행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다. 그 대신 가부장제는 모든 남자에게 정신적 자기절단을 행할 것을, 자신의 감정적 부분을 도려낼 것을 요구한다. 만일 자신을 감정적으로 불구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남자가 있다면, 가부장제의 다른 남자들이 그의 자존감을 공격하는 힘의 의식을 틀림없이 거행해 준다. <Bell Hooks>

​(...)

남성성이란 거대한 포기다. 분홍색을 포기하는 건 사소한 일이지만, 성공적으로 남성화한 남자아이들과 남자들은 일상에서 감정, 표현력, 감수성, 그 밖의 온갖 가능성을 포기한다.

p.55

여성혐오와 동성애 혐오는 둘 다 가부장제가 아닌 것에 대한 혐오다.

p.57

감정이 죽여야만 하는 것이라면, 살해의 표적은 여성이 되기 쉽다. 상대적으로 덜 점잖은 남자들은 나약함을 적극적으로 사냥한다. 남자가 된다는 것이 나약함에 대한 혐오를 익히는 것이라면, 자기 내면의 나약함은 물론이고 자신을 대신해서 그 나약함을 품어주는 젠더의 나약함까지 ㅎ며오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자애 같다거나 계집애 같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남자아이나 성인 남자에게 모욕으로 쓰였고, 게이 같다거나 호모 같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ㅏ신이 지배하고 삽입하는게 아닌 방식으로, 오히려 삽입을 당하고 동등해지고 개방된 방식으로 성애화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개방성을 강함이 아니라 약함으로 보는 시각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남성 호모포비아에 대해 생각을 할 때면, 연구결과에 기반한 추론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삽입공포, 강간공포가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자주했었다. 혐오란 본래 두려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근데 솔닛 언니가 이렇게 얘기해주니 또 괜히 반갑고 그렇더라.


p.59

만일 당신이 협동하고 타협하고 존중하고 유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당신과 동등한 존재이자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존재로 여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당신은 사랑하는 일에 자격이 부족하다.

p.64

성폭행이 범죄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강간) 영상은 법 체계에서 유통될 때는 일탈적 범죄의 증거이지만, 범죄자의 동료 집단에서 유통 될 때는 범죄자가 남성성의 규범에 순응한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p.68

Dacid Morris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공개한 인상적인 책  '불길의 시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잠식하는 트라우마의 힘은 이야기를 파괴하는 능력에 일부 담겨있다. 글이든 말이든, 이야기는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엄청난 치유력을 발휘한다. 정상적이고 비트라우마적인 기억은 늘 현재진행형으로 씌어지는 자아의 이야기에 쉽게 포함되고 통합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기억은 길들여진 동물과 같아, 자아가 거뜬히 통제하고 다룰 수 있다. 대조적으로 트라우마적 기억은 들개처럼 멀찍이 떨어진 채, 자아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모리스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강간이 트라우마의 가장 흔하고 심각한 형태인데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연구는 대부분 전쟁 트라우마와 퇴역 군인을 대상으로 수행된다. PTSD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남자들을 연구해서 얻은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고통을 겪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한 침묵도 존재하고, 그 침묵이 여성을 더욱 침묵시킨다는 것이다. 침묵은 침묵 위에 건설되고, 침묵의 도시는 이야기들과 전쟁을 벌인다.


p.82

우리가 공손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종종 자신보다 남들의 안락함을 더 중시하는 태도다. 어떤 상황에서도 남들의 안락함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p.84

개인과 사회는 입을 열어 증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권력과 권력자에게 이바지 한다.

입을 열기를 거부하는 증인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권리, 주체성, 온전한 신체, 인생을 잃는 데 동의하는 셈이다. 침묵은 폭력을 보호한다. 온 사회가 침묵할 수도 있다. (..) 범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위험하거나 불법일 수도 있다. 작가 오르한 파묵은 교과서와 공식 기록에 뻔히 나와 있는 내용이었음에도 범죄에 대해 말했다는 이유로 "터키의 국가성을 모욕했다"며 고발되었고, 해외로 피신해야 했다.


p.91

 여성을 공적이고 전문적인 삶으로부터 밀어내는 방법은 셀 수없이 많다. (...) 우쭐댄다는 표현이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쓰이는 것처럼, 날카롭다거나 나댄다는 표현은 대체로 여자들에게 쓰인다. 정치하는 여자는 너무 여성스러워서도 안 되고 너무 남자 같아서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여성성은 지도력과 연관되는 속성이 아니고 남성성은 여자가 누릴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는 여자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차지하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잘못된 것이 되기 싫다면 불가능한 것이 되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여성이 된다는 것은 늘 잘못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결론밖에 못 내리겠다. 최소한 가부장제하에서는 그렇다.


p.113

침묵과 수치심은 전염된다. 그러나 용기와 발언도 전염된다.


p.125

세계보건기구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전세계 여성 살인 피해자의 38퍼센트가 친밀한 파트너에게 살해된다.

p.130

여성에 대한 폭력을 논하는 공공의 대화가 변하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갑자기, 그런 폭력이 얼마나 흔하고 어떤 변명들이 거기에 뒤따르는지를 말함으로써 폭력을 해결하는 일보다 자기자신을 변명하는 일에 더 골몰하는 남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억울해하는 남자들이 반복해서 읊는 표현인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진 않아"가 - 예를 들어 모든 "남자가 다 강간범은 아니야"처럼 쓰인다- 여자들은 다 겪는다로- 예를 들어 "여자들은 다 어떤 식으로든 강간에 대처해야 해"처럼 쓰인다- 변형되었다.

 많은 남자들은 이때-소셜미디어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여자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서 여자들이 오래 견뎌온 현실을 일생 처음 깨달았다.

p.139

수치심은 성폭행 피해를 당한 여자들을- 또는 남자들을- 침묵시키는 중대한 요소다. 수치심은 사람을 침묵시키고, 고립시키고, 범죄가 지속되게끔 만든다. 언론은 전통적으로 강간 피해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피해자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이 전통은 피해자가 당한 일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암시하고 피해자를 사람들 눈에 안 보이게, 고립되게, 침묵하게 만드는 부수 효과가 있다.

p.161

요컨대, 강간 신고로는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기 어렵다. 그리고 강간 고발의 약 2퍼센트가 무고이겠지만, 전체 고발의 2퍼센ㄴ트가 좀 넘는 비율만이 유죄로 결론난다.( 3퍼센트까지 높게 잡는 계산도 있다.) 달리 말해, 세상에는 처벌받지 않은 강간범이 끔찍하게 ㅁ낳이 돌아다닌다. 그리고 대부분의 강간범은 고발이나 고소를 당했을 때 자신이 강간을 저질렀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세상에는 강간범인 동시에 거짓말쟁이인 사람들이 잔뜩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에 넘치는 거짓말은 어쩌면 강간당하지 않은 여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라 강간을 저지른 남자들의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얼마전 '꽃뱀'에 관련한 얘기가 나오는 프로에다가, 댓글 다는 남성들을 본 적이 있다. 주변 지인이 꽃뱀 때문에 누명을 쓰고 자살했으니 꽃뱀이 매우 흔하고, 많고, (어쩌면 성폭행 가해자 보다도) 나쁘다는 논지의 이야기였다. 실화인지 주작인지 그따위 것은 잘 모르겠고, 어쨋거나 하나 분명한 것은.. 그 댓글을 쓰고 있는 인간의 지인들은 운이 좋다는 생각 뿐이었다. 큰 수고 들이지 않고 투명한 한국남자 한명을 걸러낼 수 있을테니까.

p.163

무고한 사람이 유죄를 선고받는 것은 이렇듯 사법 체계의 부패와 직권 남용의 결과인 편이지, 한 사람의 고발자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예외는 있다. 나는 그런 예외는 드물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p.165

우리가 강관문화라는 용어로 표현하려는 뜻이 무엇인지 따져보자. 그것은 혐오다. 스포츠 팀이나 남학생 사교 모임이 저지르는 강간은 타인의 권리, 존엄, 육체를 침해하는 것이 멋진 일이라는 생각에 입각한다. 그런 집단 행동은 남성성을 포악한 포식자다운 것으로 보는 생각을 깔고 있다. 그런 생각에 찬동하지 않는 남자도 많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p.167

열두살에서 서른살 사이에 나는 날 괴롭히는 남자들로부터 그저 살아남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낯모르는 사람이나 가볍게 아는 사람이 내 젠더 때문에 내게 모욕과 피해를 가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런 불운을 피하려면 내가 한시도 빠짐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것. 정말이지, 그건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 이유 중 하나였다.


p.178

모든 폭력에는 권리의식 혹은 권위주의가 있다. 우리는 살인자가 타인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말한다. 앗는다는 건 가로챈다는 뜻이다. 훔치는 것, 자신이 소유자인 양 특권을 행세하는 것, 타인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자기 것이라서 그래도 된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의 것이 아니다.


p.188

"사람들이 여자들 말을 왜 그렇게 못 믿는지 모르겠어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남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려면 여자가 두명은 있어야 한다죠. 그런데 여기서는 스물다섯명이나 필요하잖아요." <-인기 코미디언의 강간사실을 밝히기 위해 25명의 여자가 증언을 했어야 했던 것을 비꼬면서 한 말


p.206

가부장제는- 남성이 지배하는 구조와 부계에 집착하는 사회를 둘 다 뜻하는데, 이런 체제는 여성의 성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가능하다- 많은 시대와 장소에서 의존적이고 비생산적인 여성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냈다.


p.211

차별Discrimination이라는 단어에는 서로 모순된 두가지 뜻이 있다. 인식을 말할 때는 이 단어가 무언가를 똑똑히 구별하는 것, 세부를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 사회정치적 맥락에서는 무언가를 똑똑히 구별하기를 거부하는 것, 범주를 넘어 특수와 개체를 보는 데 실패하는 것을 뜻한다. (...)

집단이란 물 샐 틈 없는 범주이므로 그 속의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사고방식, 신념, 나아가 책임을 공유한다는 생각은 차별의 핵심적 요인이다. 이런 생각은 집단 처벌로 이어진다. 이 여자가 나를 배신했으면 저 여자를 비난해도 된다는 생각, 집 없는 사람들 중 일부가 범죄를 저질렀으면 모든 집 없는 사람을 처벌하거나 쫓아내도 되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요즘 그 생각은 어린아이, 장애인, 노약자들을 향해 급속도로 퍼져있으며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마치 그러한 생각이 합리적이고 경제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결과물인 양 포장된다.


p.215

 여자는 누구든 걸어다니는 여성 대표처럼 취급되기 쉬운데 비해- 우리 여자들은 정말로 모두 감정적이고, 앙큼하고, 수학을 싫어하나?- 남자들은 비교적 그런 판단에서 자유롭다. 백인을 일반화하는 말은 많이 들리지 않고, 루프나 찰스 맨슨은 제 인종이나 젠더의 수치로 여겨지지 않는다.

(...)

차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개인의 장점으로만 평가받는 개인이 되도록 허락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종의 자유 때문에 중요한 데이터가 틈새로 빠져 누락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요즘의 총기 난사 사건들에 대해서 불과 최근까지만 해도 거의 이야기되지 않았던 한 사실은 그런 사건을 거의 전부 남자가 저지른다는 것, 그런 남자들 중 대부분은 백인이라는 것이다. 대신 그런 사건들은 불가사의하고 끔찍하게 놀라운 사건으로, 혹은 정신질환이나 그밖에 각각의 사건을 눈송이처럼 저마다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다른 구체성들로 설명된다.

예외는 있다. 이슬람 국가 출신의 사람이 저질렀을 때다. 그 때는 사람들이 총격을 테러로 부르고, 정치적 움직임과 겨랕ㄱ한 정치적 발언으로 간주한다.

p.219

이것은 피부색이 우리의 지위, 경험, 기회, 경찰의 총에 맞을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서 우리가 색맹인 척 하고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우리는 범주를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기술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p.222

남자들 중 그 일부 부분집합은 심지어 #notallmen(모든 남자가 그렇진 않다)이라는 해시태그도 만들었다. 마치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이 땅에 창궐한 재앙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그들의 안락과 평판이어야 한다는 것처럼.

p.234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내 독서 금지 영역에 포함된다. 모름지기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라면 동성애혐오자, 반유대주의자, 여성혐오자가 되어선 안 되고, 총으로 큰 동물을 죽이는 짓을 ㄴ마성성의 동의어로 여겨서도 안 되는 법이다. 총-남성 성기-죽음 어쩌고저쩌고 하는 짓은 꼴사나울뿐더러 서글프다. 게다가 간결하고 억제된 스타일의 문체는 헤밍웨이의 손에서는 딱딱하고 가식적이고 감상적인 문체가 된다. 남성적 감상주의는 최악의 감상주의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면에서 자신에 대한 망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솔하게 감정적이었던 찰스 디킨스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헤밍웨이가 F.스콧 피츠제럴드의 성기 크기에 대해서 했던 쓰레기 같은 소리는 딱할 뿐 아니라 그의 내면을 너무 투명하게 보여준다. 피츠제럴드가 헤밍웨이보다 훨씬 성공한 작가였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지금도 피츠제럴드가 헤밍웨이보다 훨씬 낫다. 레고 블럭 같은 헤밍웨이의 문장에 비해 피츠제럴드의 문장은 실크처럼 나긋하며, 피츠제럴드는 남성 인물 뿐 아니라 데이지 뷰캐넌이나 니콜 드라이버 같은 여성 인물에게도 자유자재로 감정이입할 줄 안다(밤은 부드러워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근친상간과 아동학대가 미치는 장기적 영향을 탐구한 작품으로도 읽을 수 있다).

>>얼마 전, 영페미님과의 대화에서 "헤밍웨이"를 좋아하신다기에 무슨 헤밍웨이냐고 그렇게 말려도 씨알도 안먹혔으나 오늘 비로소 신뢰로운 레퍼런스를 찾았다. 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이 마초남이 감히 내가 좋아하는 피츠제럴드까지 건드렸었다니.. 감히 내 위대한 개츠비를. 우리 데이지 뷰캐넌을 창조해 낸 작가를.. 너는 영영 빠이다... 노인과 바다는 잘 읽었었고 너의 자화상 사진은 멋있지만, 너는 진짜 이제 안녕이다!!

p.241

이 문제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 유달리 많이 겪는데, 왜냐하면 서구 사회가 오랫동안 거울을 들어 그들을 비춰주었고, 버지니아 울프가 지적했던 것처럼 고분고분한 여자들로 하여금 그런 남자를 실물의 두배 크기로 비추는 거울이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 역시..........백인헤테로남성.........

 

​p.249

스스로는 예술에 대한 변호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예술에 대한 공격에 해당하는 흔한 주장이 하나 있다. 예술이 삶에 충격을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예술은 위험하지 않고, 따라서 예술은 질책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예술에 대해서든 반대할 근거가 없고, 따라서 모든 반대는 검열이라는 것이다. (....)

사진, 에세이, 소설, 그밖의 것들은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다. 그것들은 위험하다. 예술은 세상을 만든다. ​

>>나는 이 대목에서 "좆같은 걸 만들 수 있는 표현의 자유는 있지만, 그 만들어진게 좆같다고 표현할 수 없는 한국의 좆같은 표현의 자유"를 깊이 묵상하였다.

 

​p.252

어떤 또다른 선한 진보 남성이 나타나서 말했다. "당신은 예술의 기본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남자들을 마구 거세하고 다니는 소설이 있더라도 개의치 않을 겁니다. 그 작품이 훌륭하기만 하다면 읽고 싶을 겁니다. 그것도 한 번 이상." 세상에는 당연히 그런 문학작품은 없다. 그리고 만약 저 말을 했던 선한 진보 남성이 거세 장면이 잔뜩 나오는 책, 심지어 거세를 찬양하는 책을 또 읽고 또 읽었다면, 그 경험은 틀림없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매혹당한 사람들이 급 보고싶어 졌다. 물론 콜린 파렐은 거세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아가씨의 하정우처럼 "자지는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아직 보지 않았으므로 확인할 길이 없네.


p.263

여자는 자기 자궁 속 태아보다 가치가 없다. 그 태아들의 절반쯤은 여자일 테고, 그 여자들은 자라서 다시 그 다음 세대의 잠재적 태아들에 비해 가치 없는 존재로 평가될 텐데도. 여자들은 가치 잇는 것을 담은 용기를 담은 용기를 담은 용기를 담은... 무가치한 용기인 모양이다. 이때 가치있는 것이란 물론 남자다. 남자 태아다. 어쩌면 태아도 성별이 여자로 확인되기 전까지만 가치 있는지도 모른다. 아, 모르겠다. 나는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전혀 이해가 안 된다.

>>너무 맞는말 대잔치 나와서 빵 터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p.269

CDC의 가이드라인을 보면, 지나친 알코올 섭취에게는 "지나친 알코올 소비Excessiv eAlcohol Consumption"라는 형제가 있고 그 역시 골칫덩어리이다. (...) 이 이야기에서는 EAC씨가 명백히 단독으로 범행을 저지른다.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누구의 공격성인가? 누가 공격한단 말인가? CDC는 어서 추적에 나서서 남자들에 대한 경보를 발령해야 할지도 모른다. 누가 뭐래도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제일 많이 일으키는 건 남자들이니까(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남성에 대한 폭력을 제일 많이 일으키는 것도 남자들이다). 이런 언어를 상상해보자. "남자를 사용하면 임신이나 부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남자 사용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위험이 없는지 모든 남자를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술 마신 남자 사용을 조심하십시오." 남자들에게 경고 딱지라도 붙여야 할까? 그러나 그 또한 남자들에게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면해주는 일일 테고, 나는 그런 면책을 그토록 자주 해주지 않는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일 거라고 생각한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