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갈리아의 딸들 -2017.12.03

독서/여성주의 2018. 6. 18. 18:32

 

2017년의 마지막달을 7년만의 감기몸살로 정신없이 시작하게 될 줄이야. 사람이 참 한치 앞을 못 내다본다. 어쨋거나 강제로 질병때문에 아무것도 못하고 올-스탑 한 채로 며칠을 집에서 누워지냄.
강철 체력이라 웬만해서는 아프지 않는데.. 너무 힘들었다. 오죽하면 밥을 잘 못먹고(!!) 좋아하는 지인이 상수동에 전시보고 같이 밥먹자고 (내가 제일 좋아하는 류의 데이트 코스) 연락 주셨는데도 거절했다.
밥도 거의 못먹고 옥수수스프나 포카리스웨트, 보리차 끓여마시다가 좀 상태 괜찮다 싶을땐 집 앞 본죽에서 사 온 새우죽 한 번 먹고.

그러는 와중에 부담없이 다시 읽게 된 '이갈리아의 딸들'
이 책은 아마 내가 초등학생 때 읽었던 책인 것 같은데, "페호"라는 남자 성기를 받치는 속옷의 개념이 너무 충격적이라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이전까지 나는 브레지어 착용을 거부하는 페미니스트들의 의도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페호에 관한 글을 보고나서야 그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당시 어린 나에겐 생각의 전환을 하게 만든 엄청난 작품이었던 것 같다.

 1990년대는 페미니즘의 부흥이 한차례 일어났던 시기였지만, 다시금 잠잠해졌고 이제 또 다시 페미니즘에 관련된 서적이나 논쟁들이 많이 이루어 지고 있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2010년대 후반 지금 '메갈'이라고 불려지는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낙인찍기 시도와 밀접하게 관련있는 메갈리아 사이트의 이름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책이다.

메갈리아 사이트의 주된 운동 방법은 '미러링'이었는데, 혐오 행동이나 사상등을 똑같이 반영해서 비추어주는 전략을 말한다.
한국 남성들에게 미러링은 너무 어려운 전략이었다는 정희진님의 말처럼, 미러링은 쉽지 않은 전략이다. 잘 고안되지 않은 미러링은 여러 어려움을 수반한다. 그러나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으면, 잘 고안된 미러링이 얼마나 크고 강한 파급력을 가져다 줄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갈리아는 여성상위사회이다. 단어 하나하나부터 모두가 여성중심으로 다시 재편되어 있는 사회.

어린 시절 충격을 뒤로 하고 서른을 바라보는 지금 다시 읽어도 전혀 유치하거나 이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재밌게 읽게 되었다.
몸이 아파서 아무것도 못하면서도 책을 읽으며 소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다시금, 마음을 꾹꾹 다질 수 있었다.

전화영어를 시작하며 레벨테스트를 하는데, 인터뷰어가 "80년대 생이라는건 어떤의미야?"라고 하길래.. 나도 모르게 너무 훅 들어버린 생각이.. 어릴때부터 남자와 여자가 평등하다고 배워왔지만 사회에 나왔을때 전혀 그렇지 않다는걸 깨닫는 세대라고 대답하며 페미니즘 얘기까지 같이 나왔었는데 ㅎㅎㅎ

이 책을 처음 접하던 십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책이 비슷한 울림을 준다는 것이... 아직 한국 사회가 발전하지 못했다거나 혹은 퇴보하였음을 의미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성인이 되었고. 연대할 수 있는 많은 단체들과 도구들이 있다는, 그리고 진심을 나누고 공감하며 같이 전시도 보고 책도 읽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도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 수 있도록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