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지 않습니다- 2017.10.04

독서/여성주의 2018. 6. 18. 18:30

 

며칠 전, 책을 들자마자 근 2년간 발생했던 수많은 여성혐오 범죄들에 대한 목록을 차근차근 나열하고 자세하게 기술해 둔 초반부에 질색하며 화를 내고 있는 나를 보더니 배우자가 "지금쯤이면 우리가 그런 사건들 모아둔 책 읽을 시기는 지나지 않았냐."고 말했다. 그래, 따지고보면 이렇게 황당하고 빡치는 사건들을 보고 화를 낼 시기는 지난건지도 모르겠다. 이미 익숙해지고 무뎌질 것이었다면 담담해지고도 남았을 시간들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앞으로 몇십년이 지나더라도 전혀 담담하거나 화를 덜 내고나 무뎌지거나 익숙하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친 사회현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는 한.
 사실 나 또한 책 제목을 보고 방심했었다. 괜찮지 않다고? 그래, 당연히 괜찮지 않지. 그러면서 책을 들고 괜찮게 읽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아니. 전혀 괜찮지 않다. 매일매일 갱신되는 사건들, 범죄들. 10년 전에 비해 훨씬 후퇴한 여성인권. 엉망인 교실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이 사회. 
 언제쯤이면 이런 사건들을 나열하고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몇 권의 책이 나오거란 생각을 안 할 수 있을까. 삼개월만 지나도, 이 책에 적힌 최근 사건들이 업데이트 되지않고 올해의 대표적인 여성혐오 범죄들로 소개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절망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괜찮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어서. 그리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연대가 있어서. 나는 괜찮아질 수 있다. 지금은 괜찮지 않지만, 좀 더 괜찮아 질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특히 기자분이시기 때문에, 방송과 관련된 여성혐오쪽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셨다. 다양한 사건과 범죄들은 접했었지만 방송 깊숙히 스며들어있는 여성혐오들에 대해 정리하고 인식하기에 매우 좋은 책이었다. 어린 사촌동생이나 친구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페미니즘 입문서로.


 

"괜찮다는 종종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저 난감한 상황을 넘기기 위한 말일 때가 많았다. 원치 않는 호의 앞에서, 무심과 무례 앞에서, 불편과 번거로움 앞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괜찮아요" 대답하곤 했다.
 사람들이 정말 괜찮은 일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내 뒤의 또 다른 여성이 그 괜찮지 않은 말과 행동을 견뎌야 했던 것은 아닐까. 마음이 무거워진다.
여학생, 여직원, 엄마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폭력과 조롱과 비하이 대해 그걸 웃으며 소비하는 대중문화에 대해,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한국 남자들의 세상에 대해 이제 분명히 말하겠다. "괜찮지 않습니다."

p.18
10대 남성들의 성욕이 대해서는 온 사회가 "참느라 힘들지? 자식들, 힘내라!" 며 좋은 티슈라도 챙겨주려는 분위기라면, 10대 여성의 성욕은 어떤가.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기 보다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P.34
가정, 학교, 직장, 사회는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고, 자신을 갈아 넣어 이 모든 것을 완수하는 '알파걸'과 '수퍼우먼'에게만 박수를 보냈다.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도전할 기회를 주고 있으니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 여자는 당연히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낳아야 하고, 상냥한 아내이면서 좋은 엄마이자 알뜰한 주부, 시어른에 대한 도리를 아는 며느리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P.69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소설 "체체파리의 비법"은 이렇게 말한다.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충분히 많은 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생활 방식이라고 부른다."

P.136
체중 관리부터 표정, 몸짓, 발언, 행동, 심지어 범죄 경력까지, 왜 우리는 이토록 남자에게 관대하고 여자애게 엄격한가. 여자 연예인이 무례한 일을 겪었을 때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조롱하고 비난하면서, 남자 연예인의 무례한 언행은 왜 그렇게 조용히 빠르게 잊어주는가.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