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3/2019] 우리는 섬과 같은 존재들이다.

생각 2019. 10. 24. 10:23

어제는 감사한 기회가 있어서 한국에서 열린 기독교 페미니즘 강좌 녹화 영상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공부도 안했다 하하)

그런데 얼굴은 나오지 않았지만, 마지막 부분에 사촌 동생이 질문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질문의 내용인 즉, 교회에서 페미니스트로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낙인이 생겨 버려

무슨 이야기만 해도 그렇게 해석 되고, 지치게 된다는 요지였다.

들으면서 마음이 많이 아팠는데,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심정인지 알 것 같아서.

 

불과 몇달 전에 내가 썼던 글들에도, 그런 말들이 있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건가.]

여기는 기독교이고, 뭘은 기독교 페미니즘을 가리키며, 있는건가는 의미가 있냐는 질문이었는데.

 

요즘 통 사촌동생한테 신경도 못 써서

강좌 디브리핑이나 같이 하자 싶어서 연락했서 안부를 물으니

동생이 거의 비슷한 말을 한다.

삽질 하는 것 같다고.

노답 중에 노답인데, 여기서 괜히 힘 빼고 있는 것 같다고.

 

맞는말이기도 한데,

삽질도 하고 싶은 만큼 하는 것도 의미 있고.

힘 빼는 것도 과정 이고,

또 그게 결과값이 0에 수렴하는 아무것도 아닌 일만은 아니다.

 

동생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교수님께서는

지지 자원들을 찾으라고 하셨는데, 공감가는 말이었고 감사했다.

지치지 않으려면 지지 기반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섬과 같은 존재들이다.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들은

주체적 개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기 힘든 환경에 있어왔고,

그렇기에 여성으로서 연결될 수 없었고

당연히 서로의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왔다.

 

이는 한 개인이 페미니스트로서의 인식을 발달시킨 이 후라도, 

동일하게 적용이 된다. 

우리의 주체성은 매 순간 위협 받고,

여성으로서 여성을 위하고자 하는 이들과 연결 되기란 쉽지가 않고,

그래서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가 많다.

 

나 또한 여성주의자로서, 내 뇌를 씻어주는 사람.

통하고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을 가졌었지만, 오래지 않아 잃었다.

 

그렇지만 절망하지만은 않는 것이,

그들이 지금 비록 나와 연결 될 수 없더라도

어딘가에서 내 흔적을 만나고, 나와 같은 생각, 혹은 다른 생각을 하고,

우리가 했던 대화들을 생각하며

그렇게 가끔은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차 안에서, 혼자 만의 방에서 피식 웃고 있겠지. 그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떨어져 있는 섬과 같은 존재들이지만,

그게 결코 우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이기 때문에

더 이상 절망하지만은 않는 것 같다.

 

다만 그리울 뿐이고,

그래서 동생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된다.

함께 디브리핑 하는 것 정도.

함께 이야기하고, 분석해 통찰을 나누고, 

그리고 그녀의 선택들에 단단한 지지를 보내는 것 정도.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것들 중 하나겠지, 라고 생각한다.

나에게 누군가가 그렇게 해 주었던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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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