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겨울

생각 2020. 1. 3. 16:39

공공 도서관에 가서 마음껏 한국 작가들의 책을 빌릴 수 있는 것, 독립 영화를 큰 화면의 영화관에서 감상할 수 있는 것은 방학의 큰 기쁨이다. 지난 해 한국 여성 감독들과 작가들의 활약이 특히 어마무시했다. 그래서 짧은 한달의 겨울 방학 동안 지워야 할 리스트가 아주 길었다. 행복한 부담감이었다.
언제나 그래왔지만 요즘은 더욱이 독립영화의 상영관 확보가 쉽지 않은 일이라, 대학가 근처에 더 자주 오게 된다.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어떤 것들이 친숙하면서도 생경하다. 그리고 오고가는 대학생들의 대화들 속에서 혈기만 넘치던, 부끄러운, 20대의 나와 친구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싸움과 욕심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우리의 어린 시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린 시절에 부모나 형제나 친구와 싸웠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 중에는 시간이 지나 그 때의 기록들을 보면 어리둥절해지는 경우를 만난다. 일기 같은 것에 써 있는 스스로의 생각이 잘 이해가 안 되고, 뭘 그런 사소한 것 때문에 섭섭해하고 분노했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 어린 아이가 인지한 좁은 세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바뀌었다. -강국진>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면, 지금과 나중을 가늠해 보게 된다. 지금의 내 좁은 세계는 얼마나 더 확장 되고 바뀔 수 있을까. 아니, 이미 쪼그라들고 있은지 오래인 것은 아닐까. 확장 되는 것만이 좋은 것일까. 어쨌거나 부끄러운 과거를 마주하는 것만큼 싫은 일도 없는데, 최근에는 그마저도 그러려니 해야지 마음먹게 되었다. 부끄럽다는 것은 그 전보다, 그 때보다 나아졌다는 신호일 것이라고. 그 세계에 멈춰있지 않았다는, 그 때보다 나아졌다는 증거라고 다독이게 된다.
좋은 작품의 힘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의 삶으로 걸어 들어가, 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여성 감독들과 작가들의 작품을 보고 읽으며, 애초에 절대 이해할 수 없던 인물의 삶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삶을 당연히 이해하고 나의 한조각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 주변의 짜증나는 타인들을 미워하고 증오하지만은 않을 수 있는 경험을 한다.
그렇게 이번 겨울, 내 세계도 조금이나마 더 넓어졌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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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