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16.07.01

독서/종교 2018. 6. 18. 17:04

 

 

1년 반동안 내게 큰 힘이 되어주었던 기독교인 학생 하나가 '미움 받을 용기'를 읽고 재밌었다며 심리학 관련된 책을 추천해 달라길래 몇권과 함께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를 추천했다.

<심리학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의 경우에는 대학원 들어가기 전에 읽었던 오래된 책이고, 당시에 나는 이 책 덕분에(?) '말씀의 검으로, 잘못된 심리학 지식들에 정면승부 할' 훌륭한 "학자가 되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웠었다. 지금도 궁극적인 목표는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 책에는 당시처럼 적극적으로 동의하기에는 어려운 전제들이 꽤나 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은 내가 종종 상담을 통해 만나게 되는 '신실한 기독교인 내담자'들에게서 느끼는 불편감과 매우 비슷하다.


 보통 심리학은 인간의 '선함'과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옹호한다고 한다.(이건 긍정심리학 등 몇에 국한된 부분이지만 그냥 편하게, 직관적으로 그렇다고 치자) 반면에 기독교의 인간관은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이다.

 어린시절부터 엄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일 수록, 인간관에 있어서 중요한 명제는 '인간은 죄인이다'라는 문장일 것이다. 이건 믿음과 구원의 여정에 있어 첫 걸음마와도 같다. 그런데 이 명제에서 좀 더 나아가면, 사람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욕구와 감정들이 '죄악시'되면서, 부정 해야할 것처럼 여겨지곤 한다. 특히 욕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부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모습의 경우 더 억압해야 할 것처럼 보여진다. 이 시점부터, 순종적이고 믿음이 좋다고 여겨지는 학생들은 내적 어려움이 심화된다. 그래서 가면을 쓰게 되거나, 아니면 아예 기독교적 가치관들에 대해 반발을 하게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95% 둘 중 하나다. 왜냐? 부정적인 감정이나 모습은 억눌러서 없앨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전자, 즉 가면을 쓰게되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반발 하는 후자는 내적으로는 꽤나 힘이라도 있는 친구들이다. 


 사실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기 싫어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이치이다. 이것은 기독교인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연약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공격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느껴진다. 모두에게 그렇다. 그런면에서, 오히려 비기독교인들은 '연약함은 숨기는게 자연스럽다'를 비교적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유리한 지점에 있다. 반면 기독교인들은 연약함을 숨기고 싶어하는 욕구 조차도 공격을 받는 불리한 지점에 있다. 그러나 안전함이 뒷받침 되지 않은 상황에서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자살행위와도 같다. 역설적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연약함을 드러냈을 때 그것이 더 강력한 파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 공동체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회개의 힘이 나는 이 부분에서 맞닿아 있다고 생각된다. 나를 죽이는 것. 내가 무익함을 타인에게 알리는 것. 철저한 복종과 완전한 죽음. 이건 구원과도 연관이 되겠다. 


 그런데 많은 교회공동체에서는 (가장 기본 요건인 안전한 환경을 조성해 주지 못한 채로) 연약함을 드러내라고 얘기하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연약함 때문에 "거봐~) 너는 죄인"이라고 얘기한다. 어쩌면 연약함과 그로 인한 회개의 관점을 가진 공동체는 차라리 건강한 것일수도 있다. 아예 '장로님 딸이 왜저래' '목사님 아들인데 왜 저래'가 오히려 더 흔한 반응이다. 그런데 나는...그 연약함 자체 때문에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냥 그 약함, 혹은 악함은 현상 일 뿐이다. 그리고 인간의 너무나도 인간적인 부분이다. 이걸 문장이 아니라 마음으로 이해하게 되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느낌표가 아닌 물음표이자 진행형이다.  


 다른 측면에서, 사실 나는 자신이 죄인됨을 인정하는 것이 교육이나 외부의 요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렇기 때문에 <뜻밖의 회심>에서 로자리아 버터필드의 말에 더 공감이 된다. "그 때까지 내가 들어봤던 간증들은 모두 에고와 자만이 가득한 것들이었다. 그리스도를 선택한 내가 정말 장하지 않나요?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한 내 결정이 정말 대단한 것 같아요. 저는 내 삶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단했어요. 아직 길을 발견하지 못한 저 이방인들 보다 얼마나 훌륭한지 모르겠어요. (중략) 나는 그리스도를 택하지 않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택하실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응답을 해야 한다. 응답을 할 수 밖에 없다. 그게 이야기의 전부이다."

 

 만약에 나 자신의 죄인됨을 교육이나 일방적인 선생님의 요구에 의해서 인정하게 할 수 없다면, 어린 아이들을 위한 근본적인 기독교 교육은 조금 다른 모습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도 또한 마찬가지다. "당신은 죄인입니다"로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것이 과연 옳은 접근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그걸 가르치는 본인 자신도 이미 죄인이잖아... 차라리 저는 죄인입니다,가 나을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물론 나는..현재로선 이상적인 교육이나 접근 대안을 제시할 수가 없다ㅋ 그래서 참 어렵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알게되는 하나님은 그리 단편적인 분은 아니시다. 어떤 사안에 대한 태도를 정하고 싶어서 아주 오래전부터 씨름했던 문제들도 있다. 그런데 주님은.. (별로 안 단호해도 될것 같은)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단호하시면서도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참 지난하게도 단정 하지 않으신다. 답답하다. 그렇지만.. 그래서. 날마다 더 새롭고, 참 감사하고, 이해할 수 없고 응답이 없으셔서 좀 짜증날 때가 많고. 그래도 여전히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선하신 주님이다.

posted by sergeant

애착과 심리치료 - 대학원 스페셜 5

독서/심리 2018. 6. 18. 17:00

대학원 시절 읽었던 책 중에 몇권을 정리해 둔 파일들을 발견했다.

읽었던 모든 책들을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의미 있는 책 몇 권을 정리해 둔 것이라 현재 블로그에도 옮겨 둔다.

 

Bowlby의 중요한 기여는 아이가 양육자에게 애착하는 행동이 생물학적인 진화에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점이었다. Bowlby는 동기 체계로서 애착의 근본적 속성은 양육자와 물리적인 근접성을 유지하려는 유아의 절대적인 필요에 기초한 것으로, 이것은 단지 정서적인 안전을 증진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실상 문자 그대로 유아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했다. 우리 조상들이 적응해야 했던 자연 환경에서는 수많은 포식 동물과 목숨을 위협하는 다른 위험 요소들로 인해, 유아가 보호자와 떨져 몇 시간은 고사하고 몇 분이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극히 낮았다(Main, Hesse, & Kaplan, 2005). 따라서 Bowlby가 말한 애착 행동 체계 (attachment behavioral system)는 생존과 재생산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진화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이처럼 애착 체계는 젖을 먹이고 짝짓기를 하는 것과 같이 인간 유전 프로그램의 한 요소인 것이다 (Bowlby, 1969/1982)


>메모: 본능적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것과 그에 대한 지혜가 유전에 프로그램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아는 것?

 

 

애착 대상은 특정한 한 사람일 수도 있고 여러 명의 애착 대상으로 이루어진 작은 위계에 속한 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인물은 보통 친족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누구든 아이가 가장 밀접하게 관계하는 사람(엄마나 아빠 혹은 다른 양육자)이 애착 위계에서 맨 위에 있을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아이가 가장 선호하는 인물에게 돌아가는 이 자리는 실제로 주로 엄마가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것은 아이가 엄마와 관계하는 정도와는 무관했다. -주석 : Bowlby에 의하면 유아가 엄마와의 근접성을 더 추구한다는 사실은 애착이 주로 가용성과 관련된다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Mary Main, 스웨덴에서 수행된 몇 개의 연구들을 인용하면서 ,심지어 엄마가 밖에서 일을 하고, 아버지가 사실상 주양육자인 경우에도 여전히 엄마가 강력하게 선호되는 사람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Main은 이런 놀라운 발견에 대한 설명으로 유아가 자궁에서 나오기 전부터 엄마가 주된 애착 대상이 될 것임을 어느 정도 보증해 주는 태내 경험(자궁 안에서 엄마의 목소리에 노출되었고 즉각적으로 그것을 선호하는 것과 같은 경험)을 제안한다.

  ..

애착 행동의 목표는 현재의 위험에서 보호받는 것뿐만 아니라, 양육자의 지속적인 가용성(availability)에 대한 확인이기도 하다. 또한 양육자가 물리적으로는 접근 가능하지만 감정적으로 부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여, Bowlby는 애착 대상의 가용성을 그저 접근 가능서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적인 반응성의 문제로도 정의했다.

 

 

그는 마침내 애착에 대한 이런 확장된 이해에 명백하게 내적인 차원을 추가하여, 애착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양육자의 가용성에 대한 아이의 평가이며, 현재 시점에서의 평가는 주로 아이가 과거에 양육자의 가용성에 대해 어떤 경험을 했는가에 달려 있다고 역설했다(Bowlby, 1973).

 

 

신체적 친밀함은 유아의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인데, 이것은 좀 더 연령이 높은 아도오가 성인에게도 감정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요소로 흔히 경험될 수 있음이 분명하다.

-> 나는 스킨쉽을 평가절하 했던 사람임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전 생애에 걸쳐 자신이 가장 애착되어 있는 대상의 신체적, 감정적인 행방, 즉 가용성과 반응성을 점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애착의 정해진 목표로서 근접성에 안전의 느낌이 추가된 이상, 애착은 우리가 성장하면서 탈피하는 유치한 의존성이 아니라 지속적인 인간의 욕구로 간주되어야 한다. Bowlby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1980)

 

다른 사람들에 대한 친밀한 애착은 한 인간의 삶이 그것을 구심점으로 해서 움직이는 것으로, 이는 걷기 이전의 유아나 걸음마를 뗀 유아일 때뿐만 아니라 사춘기와 성년기를 거쳐 노년기까지 지속된다 (p.442).

 

    

 

Bowlby(1969/1982)는 이런 영향이 고통스러운 현실에 대처하기 위한 아동의 노력을 반영하는 일련의 반응에서 규칙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외상성의 분리에 대해 아동이 보인 최초의 반응은 항의(protest)였고, 그 뒤 절망(despair)으로 이어졌으, 마침내 거리두기(detachment)로 나타났다.

 

Ainsworth가 수행한 연구들은 Bowlby가 제안한 생각의 많은 부분을 분명히 확증해 주었지만, 그녀는 또한 애착이라는 개념의 진화에 있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밝혀지는 데 독자적인 기여도 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기여는 선천적이고 생물학적인 애착 체계가 실제로 영향받을 수 있는 (malleable) 것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 개인의 애착 행동의 질적인 차이는 양육자의 행동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Grossman, 1995). 이 발견은 애착 이론이 심리칠에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인 유아와 성인기 애착 양식의 분류로 이어졌다.

.. 그녀는 안정이냐 불안정이냐의 핵심은 유아와 양육자 간에 이루어지는 의사소통 패턴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임을 깨달았다.

 

주목할 만한 예외적인 사례들을 보면서 Ainsworth는 중요한 것은 양육의 양이 아니라 질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녀는 엄마들을 면담한 내용을 토대로 하여 유아가 보내는 신호에 대한 엄마의 민감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또한 유아의 애착 안정과 엄마가 수유에서 누리는 즐거움 간에 정적인 상관이 있음을 발견했다 (Bretherton, 1995; Marvin & Britner, 1999). 이 발견은 건강한 발달이 애착 관계에서 엄마와 자녀 양자가 느끼는 즐거움에 의해 결정된다는 Bowlby의 초기 가설 (Bowlby, 1951)을 지지했다.

  

유아기 애착의 유형화

 

안정 애착

 

 

안정된 유아들은 안전하다고 느낄 때는 탐험을 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관계를 통해 위안을 얻고자 하는 두 가지 충동과 균등하게 접촉하는 것처럼 보인다. Ainsworth는 애착의 안정이나 불안정에 대해 가장 많은 것을 보여 준 것은 분리가 아니라 엄마와 재회 했을 때 유아가 보인 반응이라고 결론 내렸다. 안정된 유아는 분리로 인해 아무리 심하게 고통 받았더라도 엄마와 다시 연결되면 거의 즉시 안심했고 선뜻 놀이를 재개했다.

이와 같은 유연성과 탄력성(resilience)은 유아가 보내는 신호와 의사소통에 반응을 보였던 민감한 엄마와의 상호작용의 산물로 보였다. 일반적으로 안정된 유아의 엄마들은 아기가 울면 재빨리 들어 올려 부드럽고 조심스럽게 안아 주었지만, 유아가 안겨 있고 싶어 하는 동안만 그렇게 했다. 이 엄마들은 유아에게 자신의 속도나 목적을 강요하기 보다는 자신의 리듬이 유아의 리듬과 순조롭게 맞물리게 하는 것처럼 보였다. Winnicott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만하면 좋은(good-enough)’ 방식으로 이 엄마들의 행동은 잘못된 조율보다는 민감성을, 거절보다는 수용을, 통제보다는 협동을, 냉담함보다는 감정적으로 함께해 주는 능력을 보여 주는 경향이 있었다(Ainsworth et al., 1978).

 

회피형 애착

 

낯선 상황 절차에서 유아들이 본질적으로 위협적인 환경에 노출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회피적인 유아들의 무신경한 반응은 특이한 현상으로 보일 수 있다. 엄마가 떠나든 돌아오든 이들은 눈에 띌 정도로 태연한 가운데 끊임없이 탐험하기 때문에, 고통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의 모습은 침착한 것으로 오인받기 쉽다. 실제로 이 유아들이 엄마와 분리된 동안 일어난 심장 박동률의 상승은, 그런 상황에서 눈에 띄게 고통 받았지만 안정된 유아들의 수준과 같았다. 하지만 낯선 상황 절차 이전과 이후에 측정한 이들의 코르티솔(신체의 주요 스트레스 호르몬)은 안정된 유아에 비해 그 증가량이 유의하게 높았다(Spangler & Grossmann, 1993; Sroufe & Waters, 1977b).

Ainsworth는 회피형 아기가 보이는 표면적인 무관심과 애착 행동의 사실상 부재는 Bowlby가 부모로부터 장기간 떨어져 있어야 했던 2,3아기들에게서 관찰했던 거리두기(detachment)와 유사한 방어적인 적응을 나타낸다고 믿게 되었다. 이 회피형 아기들은 부모와의 분리와 상실로 인해 외상을 경험한 좀 더 연령이 높은 아이들처럼, 위로와 돌봄을 청하는 그들의 요구가 소용이 없을 것이라 결론짓고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체념한 것 같았다.

Ainsworth는 회피형으로 분류된 유아들의 엄마는 연결을 원하는 유아의 시도를 적극적으로 거부했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Ainsworth et al., 1978), 이후에 다른 연구자들은 이런 엄마들이 유아가 슬퍼하는 것처럼 보일 때 뒤로 물러나는 것을 관찰했다(Grossmann & Grossmann, 1991). 이것은 뜻밖의 발견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감정 표현을 억제하고, 신체적인 접촉을 회피하며, 접촉 했을 때 무뚝뚝하게 반응하는 것은 모두 회형 유아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양육의 징표인데, 이런 유아들은 엄마한테 안겼을 때도 엄마를 꼭 껴안거나 달라붙기보다 늘상 축 늘어졌다 (Main & Weston, 1982).

 

양가적 애착

 

 

Ainsworth의 연구에서는 두 가지 유형의 양가적인 유아들이 확인되었는데, 이들은 분노하는 유아들과 수동적인 유아들이었다. 두 유형 모두 엄마가 어디에 있는지에 너무 집착해서 자유롭게 탐험할 수 없었고, 또한 엄마가 자리를 뜨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런 고통이 너무 심해 엄마와 분리되는 에피소드를 중단해야 하는 경우가 빈번했을 정도였다. 엄마와 다시 만났을 때 분노하는으로 분류된 유아들은 엄마와 연결하려고 적극적으로 시도하는 것과 거부를 표현하는 것 사이에서 왔다 갔다 했는데, 이때 거부는 엄마가 안으려고 할 때 몸을 뒤로 젖히는 것에서부터 분노 폭발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수동적인으로 분류된 유아들은 엄마에게 자신을 위로해 달라고 그저 미약하게 혹은 심지어 암시하듯이 요청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들은 마치 자신의 무력감과 고통에 너무나 압도 되어 엄마에게 직접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불행히도 양가적인 유아들에게는 엄마와 다시 만나는 것이 그들의 괴로움을 줄여 주지도 못했고, 그들이 엄마의 행방에 집착하는 행동을 멈추게 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이것은 마치 엄마가 곁에 있음에도 이 유아들은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 엄마를 계속 찾고 있는 것 같았다.

Ainsworth가 알게 된 사실은 실제로 양가적인 유아의 엄마는 반응을 하더라도 기껏해야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반응했고, 그리고 이따금 감정적으로 유아와 함께해 준다는 것이었다. 이 엄마들은 회피형 유아의 엄마들처럼 언어적이거나 신체적으로 거부적이지는 않았지만, 유아의 신호에 대한 반응은 그들만큼 둔감했다. 마지막으로 양가적인 유아의 엄마들은 은근히 혹은 그다지 은근하지 않게 유아의 자율성을 좌절시키는 것 같이 보였다. 아마도 이것이 이 유아들의 특징인 탐험 행동에 대한 억제의 원인을 부분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다(Ainsworth et al., 1978)


 

핵심은 의사소통

 

Ainsworth는 안정 애착과 여러 유형의 불안정 애착을 구분하면서 애착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유아와 양육자 간 의사소통의 질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안정 애착이 형성된 관계에서 유아는 분리 후에 위안을 받고 싶다는 욕구와 다시 엄마를 만났을 때 위로 받고 안도감을 느끼는 것, 그리고 그 결과 놀이를 재개할 준비가 됐음을 분명하게 표현했다. 엄마는 유아의 비언어적인 단서들을 정확하게 읽고 그에 맞게 반응했다. 엄마와 유아 간의 이런 일련의 움직임은 일종의 조율된 의사소통을 나타내는데, 이것은 협력적이고 상대방의 의도와 상태에 수반되는 것으로 묘사되어 왔다. , 한 사람이 신호를 보내면 상대편은 행동으로 답하는데 그 행동이 말하는 것은 이른바, 나는 네가 무엇을 느끼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고 네가 필요로 하는 것에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Mary Main, 혼란된 애착

   

 

이후 애착 연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그녀가 고안했던 것은 성인 애착 면접(adult Attachment Interview: AAI)이라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느슨하게 구조화되고 속기 쉬울 정도로 단순한면접도구로서 여구에 참여한 부모들에게 상실과 거절 그리고 분리를 포함하여 그들의 부모와의 관계 내력을 회상하고 성찰해 볼 것을 요청한다.(George, kaplan, & Main, 1984, 1985, 1996; Slade, 2000, p. 1152).

 

.. 사실 낯선 상황 실험은 유아의 성격 특성보다는 관계를 확인하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인의 유형화는 어떤 특정한 관계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Main(1995)은 성인 애착 면접이 실제로 응답자가 현재 갖고 있는 애착과 관련된 마음 상태를 측정한다고 제안했다(p. 437). - 각주. Main과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에서 이 상태(state)’는 특성(trait)이라고 기술해도 정확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장시간에 걸쳐 안정성- 결코 불변의 특성은 아니지만- 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왔다.

 

 

언어는 그것이 드러낼 수 있는 것만큼이나 숨길 수도 있다. - 그리고 내적 표상은 주로 무의식적이어서 언어화할 수 없다- 는 것을 알았기에, Main은 자신의 연구에서 부모들이 사용한 특정한 단어보다는 단어를 사용하는 특정한 방식에 주의를 집중했다. , 말의 내용보다 과정과 형식에 더 집중했다. 성인 애착 면접을 이용한 그녀의 연구가 임상가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가치 있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표상적인 세계를 이해하는 이런 접근- 사람들이 무엇을 전달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전달하는가에 주로 주의를 기울이는 접근-을 취했기 때문이다.

 

 

p.61

원래는 행동적/의사소통적전략으로 구현됭던 규칙들이 또한 결국에 가서는 애착과 관련된 우리 자신의 느낌과 욕망 및 기억에 접근할 수 있는 정도와 본질을 결정하는 표상적/주의(representational/attentional)' 전략을 만들어 낸다고 덧붙였다. 앞서 Ainsworth가 안정 애착을 애착과 탐험 간의 유연한 균형 잡기 같은 것으로 여겼던 것처럼, Main도 그녀의 연구에서 가장 안정된 부모와 아이는 예측 가능하고, ’규칙 같은정규성과 패턴화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관계였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이제는 초점 맞추기와 정서, 사고 및 기억의 유연성이야말로 안정성을 보여주는 표시라고 여겼다(Main, 1995; Main et al., 1985, p.101)

 

유아의 의사소통 패턴을 애착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맞춰진 초기의 표상적 전략으로 간주하면 대인 간 세계와 개인 내적 세계 모두에 대해 많은 것이 명료해 진다. 낯선 상황 실험에서 Ainsworth는 유아의 의사소통 행동의 특성이 유연성(안정 애착을 형성한 유아들의 경우)과 억제나 증폭(불안정 애차을 형성한 유아들의 경우)으로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관찰했다. Main의 연구가 시사하는 바는 이런 다양한 대인 간 의사소통 패턴이 유아가 자기 자신과의 의사소통에서 보이는 이에 상응하는 다양한 패턴에 반영되었다느 점이었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임상적 함의는 환자들이 기존에 그들이 갖고 있던 기대와 현재의 행동을 지지하고 주관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그들의 주의를 무의식적으로 배치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Main의 연구는 안정 애착은 부모의 유연성이 자녀에게 유연성을 가져다 준 결과라고 시사했다. 안정된 부모들은 행동과 정서의 범위가 넓고 자신의 주의를 기울이는 데 거리낄 것이 거의 없기에 유아가 보내는 신호에 민감한 반응성을 보일 준비가 잘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부모의 이런 민감한 반응성은 Ainsworth와 다른 연구자들의 연구를 통해 유아의 안정성을 생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져 왔다.\

 

    -> 안정-> 유연 -> 민감 -> 안정..의 패턴

 


~p.70 메타인지 매우 흥미로운 내용 언급.

 

p.71

마음 이론이라는 용어는 우리 모두가 그 정도는 각기 다르지만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신념과 감정 및 욕망을 포함한 기저의 정신적 상태를 토대로 하여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여기서 주된 생각은 우리가 어린 시절부터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의 생각에 비추어 그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고 또한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도록 어떤 이론을 발달시킨다는 것이다. Fonagy는 어쩌면 Main이 영향 받았던 마음 이론에 대한 문헌과 같은 자료에서 영감을 얻었을 수도 있지만, 그 문헌들에 대한 해석을 통해 Main보다 헐씬 더 광범위하게 개념화했다.

 

 

성찰적 기능은 우리가 자신과 타인을 심리적 깊이를 가진 존재로 보게 해 준다. 이런 기능은 관찰된 행동뿐만 아니라 욕망과 느낌 및 신념과 같은 행동 저변의 마음 상태를 토대로 하여 우리가 우리의 경험에 반응하게 해 주는데, 이런 마음 상태는 행동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고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처럼 성찰적 기능은 통찰하고 공감하는 능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정신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은 힘들었던 어린 시절의 부정적인 영향을 완화하고 또한 불안정 애착이 세대 간에 전이될 가능성을 줄이는 보호요인이었음이 분명했다.

 

부모의 정신화는 아이의 안정 애착 형성을 촉진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안정 애착은 아이의 자재적인 정신화 능력을 활성화시키는 핵심적인 맥락을 제공한다. 환자에게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정신병리는 정신화를 억제하거나 혹은 애초에 정신화를 발달시키지 못한 상태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정신화 발달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안정적인 상황? 그렇지만 역설적으로 만족하면 발전하고자 하는 욕구는 없어지지 않을까?


Fonagy는 경험의 성찰적 양식으로 넘어가는 가교는 정서 조절을 토대로 세워진다고 믿는다.

 

Fonagy에 의하면, 자녀의 불아을 대체로담아내는(containing)' 부모의 유아들이 대개 정신화를 할 잠재력이 충분히 있는 안정 애착을 형성한다. 왜 그런 것일까? 그리고 정서 조저로가 애착의 안정성 및 정신화 간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일까?

 

성공적인 담아내기와 안정 애착

- 부모가 아이에게 전달하는 것은 (1) 그들이 아이의 고통의 원인과 그로 인한 감정적인 충격을 이해하고, (2) 그런 고통에 대처하고 그것을 줄여 줄 수 있으며 (3) 또한 점차 생겨나고 있는 아이의 의도적인 입장을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 의도적인 입장이란 행동, 특히 부모의 행동에 담긴 의도를 추론할 수 있는 아이의 능력을 뜻한다. 이 세 번째 요소, 즉 아기가 자신만의 마음이 있는 분리된 존재이고 또한 잠재적으로 자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부모의 마음도 읽을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음을 부모가 인식하는 것이 아마도 아기가 안정 애착을 형성할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데 가장 중요할 수 있다.’고 믿었다.

 

부모의 정서 표현은 아기 자신 정서의 최초 표상의 기초가 된다.

 

 

감정적으로 조율된 이런 반영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그 이유는 유아가 드러내는 내적 상태에 공명하고 그것에 대해 성찰하며 표현해 줌으로써 부모는 아이가 점차적으로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이 인식하고 공유할 수 있는 정신적인 상태로 발견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런 발견이 정서 조절과 충동 조절의 토대를 만든다.

 

그렇다면 대략적으로 말해 안정 애착이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이되는 것은 이런 과정 - , 중요한 관계적 맥락에서 부모가 높은 수준의 수반성을 보이고 정신화를 함으로써 가능해진 상호작용을 통한 정서 조절-을 통해서다. Fonagy에 의하면 이 과정을 매개하는 것은 정신화이고, 이런 능력은 심지어 문제가 있는 애착의 역사를 가진 부모도 아이들이 안정 애착을 형성하도록 기를 수 있게 해 준다.

 

신체적 감각은 표상을 형성하는 감정의 한 요소이며, 또 표상은 이후에 일어나는 감각과 감정 및 표상의 질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순환이나 겹쳐짐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개별적인 영역들을 확인하는 것은 상당한 임상적 가치가 있다. 그 이유는 이런 구분이 치료적 관계에 참여하는 환자 개개인의 통합의 본질을 밝히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자기의 다양한 차원들이 얼마나 자유롭게 접근될 수 있고 통합될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주로 애착 역사의 세부 내용들이다. 환자들은 어느 정도까지 신체적 감각을 경험하고 감정을 느끼며 자신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들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 영역들을 통합할 수 있을까? 예를 들면, 그들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생각을 불러올 수 있을까? 이 같은 질문들의 답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새로운 애착 관계에서 환자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뭥인지를 명확히 밝히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Fonagy (2002)Schore(2003) 그리고 다른 학자들은 감정 조절이 자기의 발달에 근원적이고, 애착 관게는 우리가 정서를 조절하는- , 감정에 접근하고 그것을 조정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일차적인 맥락이라고 제안한다. 우리의 최초 애착의 특성을 보여주는 관계 패턴은 근본적으로는 정서 조절 패턴이고, 이 패턴은 이후 경험에 대한 우리의 독특한 반응성의 본질- , 자기의 본질-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 이와 유사하게, 치료자가 형성하려고 시도하는 새로운 애착 관계에서도 환자의 감정이 중심적인 것이고, 효과적인 감정 조절- 감정이 느껴지고, 조절되고, 소통되고, 이해되도록 해 주는 과정-은 대체로 환자들이 치유되고 성장하도록 해 주는 과정의 핵심에 있다.

 

p.102

우리의 초기 관계가 안정된 것이었다면, 그 결과 우리는 개방적이고 융통성 있게 반응하는 - , 생각하고 감지하고 느끼고 행동할 수 있는 - 능력을 가질 가능성이 있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새로운 경험에 비추어 오래된 표상을 수정할 수 있다. 이런 융통성 있는 표상은 우리의 느낌과 함께 우리의 의식적인 선택을 유연하게 형성하는 지침으로 이용될 수 있다. 한편, 우리를 형성하는 초기 관계의 두드러진 특성이 회피나 양가감정 혹은 혼란이라면, 이렇게 수정될 수 있는 표상들과 관련된 반응 유연성(response flexibility)'에 대한 우리의 역량은 제대로 발휘되지 못할 것이다.

 

Bowlby가 언급했듯이 애착 그리고/또는 애착의 혼란 경험은 가장 강렬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때문에 자신과 타인 그리고 관계에 대한 우리의 표상은 단지 강력한 감정적 요소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자각되지 못한 채 표상의 밑받침이 되는 감정에 의해 사실상 지배받는다.

 

내적 표상들은 초기의 애착 관계 안에서 언어 습득 이전 시기에 형성되기 때문에 발달하고 있는 자기의 속성에 강력하고 대개는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지금으로서는 이런 암묵적인 표상을 명시적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이 표상들이 의식적인 성찰의 통합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도록, 치료자는 환자의 언어적 의사소통뿐만 아니라 신체적, 감정적 실연을 통한 의사소통에도 조율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앞에서 논의한 것처럼, 우리의 성찰적인 혹은 정신화하는 자기는 일반적으로 애착 인물을 안전 기지로 경험함으로써 우리가 내면 세계를 포함한 세상을 안전하게 탐험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관계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Diana Fosha(2003)가 제안한 것처럼, 우리가 누군가에게 객체라기보다 사람-, 우리 행동의 의미가 그 저변에 있는 느낌과 의도 및 신념으로부터 밝혀질 수 있는 존재-으로 알려질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는 것은 (우리를) 사랑해 주고 아껴 주며 조율해 주는 침착한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 또한 그 사람의 마음과 가슴속에 (우리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갖는 것‘(p.228)이다. 우리의 마음을 염두에 두고 있는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는 경험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주관적 경험의 의미를 이해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정신적인 주체적 행위자가 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우리의 주관적 경험에 의해 압도되거나 그것으로부터 차단되기보다, 그 경험과 함께할 수 있다.

 

.. 우리가 치료자로서 이 환자들에게 성찰적 자기에 대한 역량을 길러 줄 수 있는 유형의 관계- , 새로운 애착 관계-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인지는 주로 우리의 정신화 능력에 달려 있다.

 

마음챙김은 정신화처럼, 그러나 다른 경로를 통해 우리가 경험에 빠지거나 해리되기보다 경험과 함께할 수 있게 해 준다. 왜냐하면 정신화가 우리가 정신적인 주체적 행위자로 행동할 수 있게 해 줌으로써 내적인 자유를 증진시킨다면, 마음챙김은 우리가 주의 기울이기에서 주체적인 행위자(attentional agents)'로 행동하게 하여 자유를 증진시키기 때문이다.

 

Schoresiegal은 기초 신경과학과 초기 관계들이 뇌에 미치는 영향을 익히 알고 있으면 치료자가 환자들을 좀 더 효과적으로 돕는 데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했고, 이는 나 자신의 임상 경험에서도 입증되었다.

 

뇌간

, 뇌의 다른 영역에 비해 경험과 학습에 의존하는 정도가 가장 적다. 뇌간은 촉주의 꼭대기에 자리하며, 심박동 수, 호흡, 소화와 같은 기초적인 신체기능을 조절하고, 애착 과정에 시동을 거는것을 포함한 반사 행동들을 활성화하는 데 필요한 신경 기제를 제공한다.

 

변연계

Paul MacLean(1990)이 제안한 삼위일체의 뇌(triune brain)' 모델에 따라 뇌간을 파충류의 뇌와 닮았다고 본다면, 변연계는 대략 우리가 다른 포유동물들과 공유하는 원시 포유동물의 뇌에 비유할 수 있다... 변연계는 또한 기억과 학습 및 동기- 애착과 관련된 동기도 포함-에 있어서도 핵심적이다.

 

편도체는 평가의 기관인 만큼 기억의 기관이기도 한데, 무의식적이고 상징화되기 이전의 감정적 기억의 형태로 경험을 저장한다. 언어적으로 접근 불가능한 이런 과거의 흔적들은 자각의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기에 현재 경험에 대한 우리의 평가를 왜곡한다.

 

 

 

 

신피질

p.115 피질에서 가장 발달한 영역이면서 심리치료와 특히 관련성이 있는 영역은 전전두엽피질이다. 이 영역은 두 개의 주요 부위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는 인지적 지능을 위해 전문화된 배외측 부위로서 해마와 언어 지향적인 좌뇌와 연결되어 있다. 두 번째는 감정 지능을 위해 전문화 되고, Siegel(2006)중전전두엽피질이라고 부르는 부위로서 편도체와 감정 지향적인 우뇌와 많이 연결되어 있다.

배외측 영역은 이성적인 마음으로 그리고 의지적인 뇌의 핵심으로 묘사되어 왔다. 이 영역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경험에 대해 생각하고, 의도적으로 자각과 기억 그리고/또는 관념에 주의를 기울이며, 필요할 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우리의 정신적 표상에 의지할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뇌의 두 반구 사이에는 감정과 관련된 작업이 분업화되어 있는 것 같다. 좌뇌는 그 정도가 보통 수준이고 긍정적인 감정의 경험에 의해 활성화되는 것 같고, 우뇌는 아주 강렬한 그리고/또는 부정적인 색채를 띤 감정에 의해 활성화되는 것 같다. 이에 상응하여 좌반구는 우리가 접근하도록 중재하고 우반구는 물러나도록 중재하는 것 같다.

-> 나에 대한 생각. 부정적 색채를 띤 감정에 민감하고 그것에 대해 분석하게 되고, 물러나려고 하는 성향. 어쩌면 예술가들이 부정적인 감정에 활성화 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른다는 것도 생각 하게 된다.

 

여기서 살펴볼 연구 결과 중 첫 번째는 진화와 개인의 발달 모두에서 뇌의 상위구조는 하위구조 위에 만들어 지고 종종 하위 구조에 의해 지배된다는 암시를 주는 발견이다. 이런 패턴의 영향력과 궤를 같이 하듯 신경의 교통량은 하향식보다는 상향식, 즉 편도체에서 대뇌피질로 오는 양이 훨씬 많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아 심리치료에서도 이에 상응하여 치료 작업의 기반을 행동과 사고를 뒷받침해 주는 신체적 감각과 감정에 두는 상향식 접근이 요구된다. 또한 치료적인 관계에서 말로 표현되는 것보다 감지되고 느껴지며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을 통해 표출되는 비언어적이고, 주로 우뇌에 의해 지배되는 차원에도 초점을 두는 접근이 요구된다.

 

 

치료 실제에 주는 함의는 환자, 특히 정신적 외상을 경험한 환자들과 함께 힘든 감정에 대한 생각을 그저 소리 내어 말하는 작업은 어느 정도 유용할 수는 있지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p.125

 

    신체적 경험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을 통해 환자는 단순히 그 경험과 동일시하고 그것에 의해 압도되기보다 그것을 관찰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정신화 및 마음챙김과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는 신경과학적 연구 결과가 있다. 먼저 정신화와 관련하여 여러 연구에서 정신화가 전두엽피질뿐만 아니라 편도체도 활성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주는 함의는 환자들이 실제로 정신화 능력을 발휘하려면 고통스러운 느낌을 실제로 느끼고 있는 동안 그 느낌을 다루어야 한다는 점이다 - 그렇지 않으면 유사 정신화만 일어날 뿐이다. 이 연구들은 더 나아가 명시적인 정신화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고통스러운 경험에 언어가 영향을 주도록 함으로써 그것이 신경계에 주는 충격을 줄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Stern의 정서조율

정서 조율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와 관련된 주제를 다루는데, 그는 아동이 자신의 주관적인 상태가 타당하고 공유될 수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중요한 부분은 아동의 감정적인 경험을 공명해 주지만, 결정적으로는 아동의 표현과는 다른 감각 양식을 통해 공명해 주는 부모의 반응이라고 말한다.

 

posted by sergeant

정신 분석적 진단 - 대학원 스페셜 4

독서/심리 2018. 6. 18. 16:58

대학원 시절 읽었던 책 중에 몇권을 정리해 둔 파일들을 발견했다.

읽었던 모든 책들을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의미 있는 책 몇 권을 정리해 둔 것이라 현재 블로그에도 옮겨 둔다.

 

 

진단에 대한 구체적 내용들 보다는 염두에 두어야 할 태도를 위주로 요약해 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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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자라면 갖추어야 할 기본 태도가 있다. 호기심, 내담자를 존중하고 위하는 마음, 헌신, 성실성 ,실수와 한계를 기꺼이 인정하는 자세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의 중요성을 넘어서서, 내담자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없는 치료자에게 그 이상의 어떤 특별한 기법을 가르치는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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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사용]

또 어떤 주제들은 원래부터 인간을 불편하게 하는 면이 있으며, 우리가 아무리 조심스럽게, 비판단적인 언어를 사용해 그것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그 언어에도 역시 경멸적인 느낌이 드리워지게 된다.

여기에 해당하는 예가 오늘날 반사회적 성격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것은 1835년에 도덕적 광기라는 이름을 얻었고, 나중에는 정신병질’, 그 다음에는 사회병질이 되었다. 매번 기존 언어에 스며든 비난의 요소를 제거하려는 의도에서 새로운 기술적 용어를 만든 것이다. 하지만 정신병질 현상은 사람들에게 크게 충격을 주는 것이어서, 이 개념을 도덕적 영역으로부터 보존하고자 만든 용어들이 결국은 모두 오염이 되고 말았다. 비슷한 운명을 걸었던 또 다른 단어를 들자면, 처음에 성도착이었던 것이 성적 일탈’, ‘동성애’, ‘게이로 변화한 것을 들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게이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도 언젠가는 없어지게 될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2013년도 당시 메모]]]]]]

 

... 어떤 이유에서건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현상은 이렇게 낙인을 제거하려는 노력을 바복해서 촉발하지만, 결과적으로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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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을 모르는 임상가들과 학식이 높은 대중드리 그 개념들을 가로채서는 입심 좋게, 혹은 때로는 사람을 경멸하는 용도로 그 의미를 왜곡하여 널리 퍼뜨려 왔다.

심리학적 개념들이 일상용어에 편입되면서 또 한번의 물타기가 이루어졌다. ‘외상은 재앙에 해당하는 원래 의미를 상실하고 불편한 일이나 상처정도의 의미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우울은 기분이 좀 저조한 거소가 구분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공황장애라는 용어는 불안신경증혹은 불안발작이라는 말에 담겨 있던 매우 유용하였던 옛 의미를 되살리려는 목적에서 새로 창안되었다. 사업상의 점심 식사를 하게 된 사람들의 느낌에서부터 사형 집행관 앞에 선 죄수의 느낌에 이르기까지 불안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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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3

심리지단적 용어의 남용은 쉽게 드러난다. 그러나 남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것을 버리는 정당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모든 종류의 악이 고상한 이상(그것이 사랑이든, 애국심이든, 기독교 정신이든 간에)의 이름으로 행해질 수 있는 것은 원래 그것이 가진 가치 때문이 아니라 그것의 왜곡 때문에 생기는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심리진단적 개념을 조심스럽게, 남용하지 않고 잘 적용할 때 내담자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더 커지지 않겠는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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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하게 훈련을 받고 세심하게 진단을 할 때 얻을 수 있는 다섯 가지 장점이 있다. 진단은 (1) 치료 계획을 수립하는 데 유용하고, (2) 예후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3) 정신건강 서비스 소비자를 보호하는 데 도움이 되고, (4) 치료자의 공감 전달을 가능하게 하며, (5) 쉽게 겁을 먹는 사람들이 치료로부터 도피할 가능성을 줄이는 역할을 한다. 이 외에도 진단 과정에는 치료를 간접적으로 촉진시킬 수 있는 부가적인 이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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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진단 과정이라는 말은, 위기 상황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내담자를 만나면 우선 분석적 배경의 정신과적 훈련에서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정보들을 수집해야 한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 사례는 심리검사나 구조화된 면접을 실시할 수 있다. 나는 관계가 자연스럽게 형성되도록 그냥 놔두면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가 생기고, 모든 관련 자료들이 표면으로 드러나게 된다고 믿지 않는다. 일단 환자가 치료자를 가깝게 느끼면 자신의 과거사나 행동의 어떤 측면을 꺼내놓기가 오히려 더 어려울 수가 있다. 알코올 중독자 익명집단 모임에는 수년간 분석을 받거나 여러 전문가들을 만나면서도 약물남용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없거나, 심지어 질문을 받아 본 일조차 없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다. 진단 회기가 권위주의적이고 위압적으로 거리를 두는 장면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심층 면접이 내담자를 진실로 존중하는 평등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강조하고 싶다. 대개 환자들은 철저한 전문가적 자세에 고마움을 느낀다. 나는 여러 치료자들을 만나 본 경험이 있는 한 여성을 면접한 적이 있었는데, 그녀는 이렇게 말하였다. “아무도 이렇게 나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어요!”

 

posted by sergeant

긍정적 중독 - 대학원 스페셜 3

독서/심리 2018. 6. 18. 16:56

대학원 시절 읽었던 책 중에 몇권을 정리해 둔 파일들을 발견했다.

읽었던 모든 책들을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의미 있는 책 몇 권을 정리해 둔 것이라 현재 블로그에도 옮겨 둔다.

 

 

 

긍정적 중독은 꽤 특이한 책이었고, 윌리암 글라써도 유명한 저자로, 긍정적 중독을 촉진시키는 것에 이 책의 많은 지면을 할애하지만 오히려 나는 그의 우울증에 대한 비유들이나 중독자들에 대한 깊은 통찰들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긍정적 중독 자체는 내게 큰 매력이 되지는 못했었지만 참고할 만한 내용을 아래에 옮겨둔다.

 


<책 발췌>


p.17

고통, 통증, 비탄의 분명한 목적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으니 그것을 고치고, 바꾸고, 개선하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당신에게 알려 주는 데에 있다. 그럴 힘이 없으면 그 고통들에 매여 있게 될 뿐이다. 이것은 힘을 가진 사람들은 고통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그들도 고통을 받는다. 그들도 삶의 고통에 면역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을 느낄 때 어떤 식으로든 행동하고 최소한 무엇을 하려 노력한다. 힘이 많을수록 그 노력의 결과는 성공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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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에게 포기란, 가능한 선택사항이 아니라고 나는 확신한다. 아직 갖지 못한 것, 즉 충분한 사랑과 가치있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게 유일한 행복의 길일 때 어느 누가 포기하는 걸 생각조차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더 많은 이들이 일부만을 포기한다. 그들이 행복을 원치 않아서가 아니다 - 그들도 다른 이들만큼 그 모든 것을 원한다. 인생의 그 비참한 순간에 그들 마음속에 조차 행복이 없으니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포기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하고 앞으로도 결코 가질 수 없으리라는 믿음 때문에 생긴 끊임없는 비참함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희망을 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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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책에서 포기란, 자살에 대해 얘기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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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을 계속하는 것이 단지 미래의 실패만 만드는 일이고, 결국 당신의 한계로 고통 받게 된다는 것에 공감을 하게 되어 이렇게 결론지을지도 모르겠다. “, 노력을 해야만 해? 더 이상 아무것도 안 하겠어!” 수많은 이들이 포기하는 이유는 비참한 삶을 받아들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계속해서 시도하는 노력들이 항상 실패할 때 상처를 받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삶이 비참할 것이라고 이미 인정해 버렸고 마음속은 좀 덜 비참하고 싶다는 생각 뿐인 것이다.

딸 수 없다는 이유로, 포도가 익지 않아서 시다고 여우가 말했다고 해서 그 포도를 시게 만들 수는 없다. 이 행위는 다만 뛰어오르는 노력을 중단케 할 뿐인 것이다. 그러나 만약, 더 민첩한 동료 여우가 달콤한 포도송이를 가져다 주어 그것이 잘 익었음을 그에게 증명한다면, 여우는 그 친구를 골칫덩이라고 부르며 피할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포기하는 사람들은 성공한 자들을 기피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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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어도 의지가 약해지고 부족함에 안주하고, 또 내가 두통을 선택했듯이 어떤 증상을 선택할 경우는 많을 것이다. 비참한 생활의 대부분은 당신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 나은 선택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불행이 단순히 당신에게 일어난 것뿐이라서 스스로는 그 불행을 전혀 제어할 수가 없다고 믿으면 당신의 인생에서 현재 얻고 있는 것보다 더 이상의 것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나가면서 우리들이 불행한 선택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우리에게 세상은 비참하게 비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옳은 선택을 못해내는 무능함에 대한 책임이 세상에 있다고 한다면 그 주장 속에는 많은 진실이 담겨 있기도 하다.


>>이분 굉장히 쎈 상담가구나, 다시 읽으며 놀라워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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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2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치 않는 요소들이 이 세상에는 수없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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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또 교육자로서의 나의 의무는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약한 이들을 강하게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시민으로서 나는 세상을 더 멋지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 이는 여러분들이나 나에게나 모두의 의무이다. 그러나 이 책의 논제는 강하든 약하든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도와 더욱 강하게 될 수 있으며 힘을 향해 가는 새롭고도 중요한 길이 바로 긍정적 중독일 거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 중 힘을 가진 자가 더 많이 있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중 나약한 이가 더 많다면 그렇게 될 기회는 적을 것이다.

삶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포기라는 첫 번째 선택은 더 이상 그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 고통이 돌아오고, 그러면 장래에 그 고통을 줄이기 위한 시도로써 일반적으로 두 번째 선택 중 하나를 고른다. , 우울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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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의 원인이 무엇이든, 그의 잘못이건 아니건, 그가 느끼는 것은 그에게 실재하는 것이고, 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다. 그는 지금 뜨거운 스토브에 앉아 있으면서도 내려설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나는, 여기 당신 방에 오기 위해 수없이 생각해야 했어요 - 우울증 환자로서는 정말 힘든 일이다 - 그리고 나는 당신이 나를 이 불행에서 건져 줄 수 있길 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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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 삼아 얘기한다. “내가 해줄 말은 힘 좀 내란 말 뿐이요.” 내가 그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면 그들은 언제나 웃어 버린다.

그러나 왜 그것이 우습게 들리는 걸까? 내 충고가 잘못된 것인가? 사람들은 자신이 흥분되고, 우울하고, 비참한 기분이라고 말한다. 그가 도움을 원해서 나는 힘내라구. 상처받는 짓은 그만하구.”라고 말했을 뿐인데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간단한 조언을 대단찮게 생각해서 웃는 것이다. 우리는 우울해지면 선의의 농담을 들으면서 힘을 낸다. 찻잔으로 타이타닉호를 구해 내는 것 같은 도움,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작은 충고 말이다.

내담자들은 그럴 때 심각해져서 이야기한다. “힘내라니, 무슨 뜻이요? 내가 우울증에 걸렸다는 말 못 들었소? 내가 힘낼 수 있다면 그랬을거요. 문제는 그럴 수 없다는 거고, 그래서 여기 온거잖소?”

그의 말은 사실이다. 그러나 왜 그는 힘내지 않는 것인가? , 그는 그토록 자신의 불행에 집착하는 것일까? 그는 집착하고 있다. 나는 그가 비참하다고 생각할수록 더욱 우울증에 시달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도 그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우울증이 최악이라고 믿는다.

비록 그가 자신의 선택적인 믿음을 알아채진 못해도 자기가 만일 우울을 떼내 버린다면 지니고 있을 때보다 상처를 더 받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우울을 포기하지 않을거라고 나는 주장하는 바이다. 그가 선택한 우울증은 다른 모든 두 번째 선택들과 마찬가지로 포기라는 첫 번째 선택 만큼 고통스럽진 않다. 모든 심각한 상태의 우울증 환자들은 (그리고 내가 간략히 다룰 다른 이들도 역시) 첫 번째 선택 이후 바로 네 가지 증후의 종류 중 하나를 선택한다.

그들은 사랑이나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는데서 오는 심각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포기를 선택한다. 불행하게도 여러분이 포기할 때 고통은 잠시 동안 줄어들지만 다시 돌아오게 된다. 여러분은 고통 없는 행복을 영원히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내담자의 경우, 두 번째 선택을 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자기의 선택임을 전혀 모른 채로 우울을 선택한 것이다. 우울증은 가장 일반적인 선택,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증상일 것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고통을 줄이는 것일까?

설명을 위해, 내담자가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글라써 선생님, 보세요. 나는 의욕을 잃었어요. 갑자기 아내가 다른 사람과 함께 떠나버렸어요.” 그는 그가 겪었던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가 왜 의욕을 잃었는지 확실히 하기 위해 설명하려 노력한다. 나는 그럼 나가서 다른 여자나 찾아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럴 수는 없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이미 충분한 충고를 들었다.

그는 어쩌면 나의 의도를 알고 선생님, 다른 사람을 찾아 보라는 말은 하지 마세요. 지금 나에게 누가 관심을 가질 수 있겠어요.” 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의 부적절함, 포기와 무능함, 그리고 얘기가 진행됨에 따라 우울증 핵심부에 있는 문제들까지 비난한다. 그는 스스로 우울해지기로 선택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한다. 그는 우울증세가 자신의 문제를 합리화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를 부적절하다고 보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부적절함을 이제는 대면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고통스러운 만큼 든 것이다. 그가 선택한 우울증은 자신의 부적절함과 자포자기를 대면하는 것보다 덜 고통스럽다. 포기함으로써 그는 책임도 회피한다. 그러나 우울증을 선택함으로써 그는 지금 자신의 역량 부족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고, 다른 이에게 책임을 미룰 수 있게될 것이다.

그 여우같이 그는 포도가 덜 익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어쨋거나 더 이상 뛸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완벽한 핑계거리를 가진 것이다. 누가 우울증에 걸렸는데 뛸 것인가? 더구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보고 자신의 불행에 대해 책임지시오라고 말할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그는 도움을 청할 수 있는 보다 좋은 상황에 있는 것이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도움을 받아들이면 자기 자신을 도와야만 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에 타인의 도움을 거부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불평을 더 하게 되고 상처를 덜 받게 된다. 이제는 그의 우울증이 자신의 미숙함에 대한 보호장치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가 느끼는 고통스런 감정에 점점 익숙하게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서 더 이상 사랑이나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다고 믿게 되고, 그 우울증이 그것들을 대신하게 되어 우울증에 집착한다. 이것이 그가 가진 최고의 것일지는 모르지만 좋은 대체물은 못된다. 다시 말해, 그는 첫째 그의 본분을 포기한 행동을 합리화하고 보다 자신을 용서할 수 있게 하며, 둘째,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없는 것을 누군가의 도움으로 이룰 수 있게 하기 위해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입장을 만들기 때문에 스스로 점점 더 깊이 빠진다는 것이다.

그는 포기했을 때 자신이 포기자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장 도움을 요청할 때, 나의 명백한 고통에 주의를 기울여 주세요.”라고 할 때 그는 고통받는다. 이는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다른 이들이 얼마나 자신에게 관심을 두는지 알아보기 위해 제발, 날 혼자 둬.”라고 하며, 사람들의 관심을 시험해 보기 위한 흔한 방법을 쓴다. 협조적이든 아니든 어쨋거나 그는 내 사무실에서 움을 받거나 최소한 관심이라도 끌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진지하게 도울 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가 힘을 가졌다면 결코 우울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문가들조차 내담자가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도움이 되느니보다, 직접 돕고 싶은 유혹에 빠질 때도 있다. 친구나 가족들도 종종 그럴 것이고, 나 자신도 그런 실수의 경험을 인정한다.

나는 문제를 부드럽고 정확하게 짚어낸 후 그가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분관계를 맺고 그와 함께 그렇게 할 수 있는 계획을 만든다. 그러면 그는 지금 유일한 친구를 얻게 되므로 더 이상 우울증이 필요치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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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울증으로 정신과 의사를 만나는 사람들만큼 심한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이런 사례를 염두에 두고 네 가지 증상 분류를 해 놓은 아래의 차트를 살펴보자. 약한 사람들은 흔히 아래의 증상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두 번째로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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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가지 주 증상의 범위

일반적인 증상의 예

1. 행위로 표출하기

울화, 태만 범죄, 반사회적-정신병적 행위

2. 감정과 관계되는 것

우울, 두려움, 공포증, 긴장, 걱정, 슬픔, 낙심, 심술, 의존, 오만, 비열, 분노, 히스테리, 의심

3. 미치게 되는 것

정신이상, 편집증, 환각, 망상, 전환행동

4. 심인성 신체화

두통, 목의 통증, 등의 통증, 공동장애, 편두통, 고혈압, 심장병, 천식, 각종 앨러지, 십이지장 궤양, 회장염, 대장염, 만성설사, 비뇨기장애, 관절염

[나약한 자들이 하는 두 번째 선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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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종종 좌절하거나 거부당할 때 우리가 증상을 선택하지 않으려면 초인적인 힘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강해질수록 우리는 그 선택의 고통으로부터 더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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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들이 완전히 통제불능 상태의 자녀에 절망하여 나를 찾아오면, 내가 해주는 충고는 보통 소년원에 보내라는 것이다. (겁나 쎄고 겁나 웃긴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 책은, 내담자들 보다는 상담자들이 읽고 참고할 정도가 딱 좋은 것 같은데.... 모르지, 또 대가의 당당함에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ㅎㅎ) 그 밖에는 어떤 방법도 없을 것이다. 만일 보호관찰이나 그 외의 법적 방법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아마도 좋은 보호관찰관이나 임상의사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도움을 받을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런 행위가 제지되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비로서 안정할 수 있고, 또 그의 행동에 대한 선택이 얼마나 부정적이고 그를 사랑과 가치있는 것으로부터 격리시키게 했는지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멋대로 행동하는 이들이 줄어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어린 시절 이후로 그만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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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를 폭발하는 것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우리는 선생님이나 엄격한 부모로부터 일찌감치 배웠다. 우리의 충고자들이 우리 행동을 막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들이 우리에게 사랑과 가치있는 것을 찾을 수 잇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는 못한다. 흔히 감정적으로 다른 증상을 선택할 수 있다. 마치 내 사무실에 찾아왔던 우울증 환자처럼 말이다.

언급했듯이, 우울증은 우리가 멋대로 행동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사랑이나 가치있는 것이 부족한 순간에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가 강하면 그런 일은 줄어들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걸린 친구나 친척에게 평생 동안 매여 있게 되는 것은 놀랄 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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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증이 선택된다는 사실은 심리학의 역사를 통틀어도 많은 정신의학자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아주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시각이고, 종종 임상 장면에서 간과되기 쉬운 부분이지만, 크게 의미 있다. 요즘은 많이들 받아들이는 시각이다.) 이 분야의 많은 전문가들은 이것이 환자의 의식 밖에서 온 것, 마치 에 걸린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정신적인 수두 같은 병의 일종처럼..

그러나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우울증은 행위표출일 뿐이며 외부로부터 온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울을 수두처럼 파악하진 않는다. 그것은 더 이상의 고통은 원치 않아 우울해지기로 선택한 우리의 나약함에서 기인된 것이다. 고통을 줄이려는 노력이 두 번째 선택의 목적이다.첫번째 선택이- 포기하는 것- 성공했다면 그만두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이든, 특히 무심한 학생들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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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증상들 - 정신병 환자가 되는 것.

그가 (정신병자) 만약 사랑이나 가치있는 것을 찾을 수 있다면 그는 즉시 그 미치기로 한 선택을 포기할 것이다- 정말이지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 좋은 병원이나 진료소에서 퇴원하고 있는 것이 사실 아닌가. 적절한 치료를 받아 그들은 그런 미친 짓을 그만둘 수 잇게 될 만큼 강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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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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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Glasser is the genius for metap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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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당신이 축구스타가 되어 3쿼터에서 발목을 삐게 되는 경우와 같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지만 코치는 당신을 절실히 원한다. 마지막 결승전인 것이다. 그때 당신과 코치는 우승을 원해 장래의 건강 따위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팀 의사가 발목에 마취제를 뿌려 고통은 사라지고 결국 우승을 맛보게 된다. 당신은 영광스럽게 되지만, 이 과정에서 발목은 부서져 버려 평생동안 절름발이 신세가 된다.

영광스런 시간이 지나가면 영원한 고통만이 남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중독자들도 자신의 인생을 갈갈이 찢어버리는 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고통 밖에 없을 때 영광을 준 중독은 그의 다른 어떤 의욕도 능가해 버려 평생동안 약이나 습관에 몰두하게 되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중독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나 보다)

결국에는 그는 기꺼이 자신의 재산, 이성, 가족, 친구, 심지어 배우자까지 포기하려 할 것이다. 그의 삶의 어떤 것도 마약이나 다른 중독물에 대항할 수 없다. 그는 오직 한 가지 가치로써 살아간다. 그의 중독을 가일층하는 이외의 모든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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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그만두면 모두 고통을 받게 된다. 여러분은 자신이 가졌던 것을 그리워하며 고통받는다.

그것은 그동안 약물이 주었던 습관성 쾌락과 맞먹는 고통이다. 끊는 것은 고통스런 증상과 금단증상의 고통 모두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며 그 모든 고통을 상쇄할 만큼 많은 양의 사랑과 가치가 중독자에게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전에 이미 사랑과 가치를 얻을 수 없어서 중독자가 된 마당에 지금 그 일이 가능하겠는가? , 중독자로부터 단순히 중독제를 빼앗는다고 해서 그의 습관을 약화시키거나 끊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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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자가 약하다는 것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어느 중독자도 열심히 일하거나 끈질긴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일단 중독의 쾌락에 빠지면 그는 극히 강하다. 어쩌면 가장 자부심 강한 시민들도 매일같이 습관을 밀고 나간다는 점에선 헤로인 중독자와 비슷하다. 그들은 자기 일에 대한 윤리에 철저해서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선 잡다한 모든 것에 대항해 싸운다. 하지만 모든 힘은 중독에 한정되어 있다. 사랑과 가치를 발견하는 일에는 전혀 힘이 없는 듯 하다. 분명 중독습관에서 오는 즐거움은 사랑이나 가치있는 것을 기억하거나 상상하는데서 오는 즐거움보다 강하다.

중독자가 중독에 쏟는 모든 노력을 사랑과 가치있는 것을 찾는 데에 쏟는다면 분명 성공할 것이나 특히 그것을 그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그런 종류의 힘은 없다. 그가 가진 것은, 내가 묘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어귀인데, 단기적인 힘이다. 그는 중독약물을 찾기 위해선 어떤 단기적인 힘이라도 소유한다. 그렇지만 사랑과 가치를 찾는 일은 장기간에 걸친 불확실한 탐색이며 그럴 힘을 그는 갖지도, 원치도 않는다. 짧은 길이 있는데 왜 긴 길을 택하겠는가? 억지로 손을 잡아 끌지 않는 한 절대 할 리 없다. 여기서 억지로 잡아 끄는 자는 아무래도 상담자가 되겠지만, 그리 큰 힘을 가질 여건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최종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의 발견을 위해 우리는 타인이 필요한 반면 중독자는 오직 자기 자신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자신에만 의존해서 중독을 계속 추구할 수 있다는 걸 알며, 단 한가지 목적에만 헌신한다는 것을 훤히 볼 수 있다. 당신을 약하게 하는 대신 당신을 강하게 하는 중독이 있다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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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이 엄청나게 자기 단련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루에 16시간씩 피아노를 쳤던 위대한 피아니스트와 수년 동안 하루에 20마일씩 달렸던 육상선수가 있으며, 그들이 했던 행동이 그들의 목표에 곧장 적용이 되었다고 확신한다. 만약 슈바가 자기에게 공이 던져지도록 하는 장치를 해 놓았더라면 나는 그가 매일 두 시간씩 배팅 연습을 하는 것을 내 마음속에 더욱 선명히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우연하게도 그가 수년간 지하실에서 홀로 배팅 연습을 하게 된 것, 즉 무언가를 신들린 듯이(종교처럼) 했다는 사실에 나는 골몰하게 되었다. 나는 나에게 어떻게 그가 그것을 할 수 있었지? 그는 그것을 어떻게 계속할 수 있었지?’ 하고 말했다. 그때 내 마음에서 일었던 것은, 그가 그것을 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길은 우리가 보통 의지력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가 초월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가 했던 모든 것이 의지력에 의한 것이었다면, 나는 그가 그토록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고는 믿지 않는다. 거기에는 무엇인가 다른 것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비록 어떻게 그렇게 되었느냐에 대한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지만, 일어났던 일은 그가 야구 방망이를 스윙하는 데에 중독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는 거다. 야구 방망이를 스윙하는 데에 꿰었다는 생각은 어리석어 보였고, 가족들과 이 생각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 우리는 모두 웃었으나, 나는 여전히 그것을 내 머리에서 없앨 수가 없었다.

이 생각에 대해 거의 최근 18개월간 집중적으로 생각해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어리석게 느껴지지 않으며, 나는 그것이 정확하게 일어났었다고 믿는다. 그는 한동안, 아마 3-4개월 간은 순수한 의지력으로 야구 방망이를 스윙했을 것이다. 그 때에 천천히, 그리고 무의식중에 이 연습에 중독이 되었다. 만약 그가 야구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는다면, 그는 일종의 통증이나 불안함, 가라앉음, 일종의 죄의식을 느꼈을 것이고, 그것은 그가 그것을 하도록 끌어당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중독의 전통적인 신호가 거기에 있다. 그가 멈추었을 때 그는 고통스럽고, 그 고통은 단지 중독 활동에 의해서만 제거된다. 그가 만약 그것을 하지 않는다면 불편하였다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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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중독은 당신의 정신적 힘을 증가시켜 주고, 반대로 부정적 중독은 그 중독 부분을 제외한 당신 삶의 다른 모든 부분의 힘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긍정적 중독자는 중독을 즐기나 그것이 그의 인생을 지배하지는 않는다. 긍정적 중독으로부터 그는 정신적 힘을 얻어 사용함으로써 본인이 하고자 하는 것을 더욱 성공적으로 성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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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것을 배제하고 중독상태에서 살 때만 완전히 만족하게 되는 부정적 중독과는 달리긍정적 중독은 더 많은 사랑과 가치, 기쁨, 의미 등 일반적으로 삶에 대한 더 많은 열정을 얻기 위해서 그의 특별한 힘을 이용한다. 긍정적 중독은 누구라도 혼자서 그의 힘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히 가치가 있다. 여타 방법으로 힘을 얻으려 하면 더 많은 사랑이나 인정을 받기 위해 타인에게 의존하지만, 당신이 아무리 외롭거나 보잘것없다손 치더라도, 당신이 긍정적으로 중독될 수만 있다면 당신은 힘을 얻을 수 있다.

약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랑과 우정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을 돕는 주요한 방법에서 차단되어 있다. 그들은 허약함과 악순환에 갇혀 있다. 만약 우리가 긍정적 중독을 통하여 이 순환구조를 깨는 것을 배운다면 (나는 수백만의 사람들이 이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하는데), 그때에 그는 약하거나 강하거나 간에,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친구나 인정 없이도 더 강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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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처음에는 그것이(명상) 내게는 긍정적 중독과는 별개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긍정적 중독은 하루종일 길게 해야 하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으로 모든 시간을 거기에 투자하게 되는 헤로인이나 음주, 도박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적당한 시간 동안, 흔히 하루 한 시간 정도 하는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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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내가 다양한 형태의 긍정적 중독을 공부할수록, 그것을 하는 시간은 하루에 한 시간 정도인 것 같았다. 따라서, 만약 긍정적으로 중독 되려고 하는 사람은 하루에 40분을 기꺼이 투자하지 않으면 그가 중독되고자 시도하는 것이 무엇이 되었건 간에 성공할 기회를 놓치게 된다. 물론, 몇몇 사람들은 그들의 긍정적 중독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만, 40분에서 한 시간씩 한번 또는 두 번, 보통 두 번 이상은 아니더라도 한 두 번 미만으로는 긍정적 중독을 거의 발전시킬 수 없다.

긍정적 중독자들은 자신들의 실제적인 중독상태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들에게 좋은 것이다. 반면에, 부정적 중독은 비록 그것이 그들을 해칠지라도, 그것을 하는 것을 좋아한다. 부정적 중독은 즐겁지만 해롭고, 긍정적 중독은 변변찮게 느껴지지만 유익하다는 것은 너무나 깔끔하게 이를 요약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이 생각을 인정하는 것이 싫었다. 알콜중독에서 승려가 된 청년은 만약 당신이 그것을 싫어한다면, 왜 그것을 계속하느냐?”라고 내가 물었을 때, 산뜻한 결론을 제공했다.

나는 꿰어져버렸어요. 만약 내가 노래 부르지 않는다면, 더 고통스러울 거예요.” 그는 그가 술을 끊으려고 할 때 종종 느꼈던 불편함과 같은 종류의 금단고통을 기술하였다. 그것이 너무나 합리적인 것처럼 보여 나는 그것을 믿기를 원했고, 더 이상 그에게 질문을 하지 않았다. 슈바가 야구방망이 스윙하는 것을 즐겼을까 하고 내가 의심하듯이 그도 찬송가를 부르는 실제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질문을 계속했다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을거다. , 그의 뇌에 무언가 기쁨이 일어나 그가 선택한 중독과정의 지루함을 역전환 시켰다는 것이다.

중독자의 마음 안에서 뭔가가 극도로 기분 좋게 느껴지고 이 특별한 기쁨은 경험할수록 본인들에게 극히 중요하게 되어 다른 방법으로는 얻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비록 행위 그 자체는 힘들고 지루할지 몰라도 정신에 주는 기쁨의 효과 때문에 자주 할수록 전 과정이 즐거워져서 중독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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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들은 내 생각을 증명해 주는 것 같았는데, 그는 웃으며 몇 마디를 더 추가했고 나는 내가 믿는 바 모든 긍정적 중독의 진정한 본성 - 긍정적 중독의 심적 상태에 대한 기본적인 성찰에 도달했다. 즉 자신이 달리는 데에 문제가 한가지 있으며, 그것은 위험한 것이라고 그가 말했을 때다. 그가 말할 때 방에 있던 모두가 그를 보았고 우리는 다 웃었다. 내가 토론토에서 아침에 혼자 한 시간 동안 뛰는데 무엇이 제일 위험합니까?”라고 묻자, 그는 그가 달릴 때 거의 매일 빠르게 일종의 무아지경의 정신상태에 들어간다는 것을 설명하여 갔다.

나는 단지 내 마음이 가도록 허락을 하고, 정말로 달리기에 빠져들면, 나는 완전히 내 주변을 자각하지 않게 돼요. 나는 거리를 가로질러 달릴 것이고, 빨간 신호등에서도 달리고 여러 번 거의 차에 칠뻔했어요.”

내가 신체적으로 중독된 많은 사람들, 달리기나 그 외의 것을 하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그들 거의 모두가 기술하는 것이 이러한 마음의 상태, 즉 중독 실스에 동반하는 무아지경의 직관적인 정신상태였다. 나는 이제 이것이 긍정적 중독의 심적 상태이고, 신체단련자들은 간접적으로 도달하고, 명상가들은 직접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긍정적 중독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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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것. 그들은 모두 자기 스스로 연습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긍정적 중독상태에 이르려면 어떤 개인적인 결단이 필요한 것으로 보이며, 무엇이든 당신 스스로 중독되겠다고 결심하지 않고 어떤 공적인 프로그램에 참가하면 중독상태에 도달하기가 한층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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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긍정적 중독에 한 가지 첨가해야 할 요소가 있는데, 긍정적 중독상태가 어떠한 것이든 당신 나름대로 하겠다고 결정해야 중독상태에 도달하기가 쉽다는 거다. 그것은 집단활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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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활동이건 간에 여섯 달 미만 안에 도달하는 경우는 드물다. 몇몇의 달리기 경주자나 사색가들은 긍정적 중독에 도달하는 데 2년이 걸린다고 한다. 여기에서 사색이나 달리기 같은 긍정적 중독활동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이 긍정적 중독에 도다하는 것은 아님을 명백히 해야겠다. 사람들은 신념을 갖고 오랫동안 계속 그 활동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1년 동안 대부분 혼자서 달린다면, 그리고 적어도 하루 한 시간씩 6에서 8마일 또는 그 이상을 달린다면, 당신은 아마도 달리기에 긍정적으로 중독될 것이다. 일단 중독이 된다면, 당신은 달리기를 할 수 있는 한 계속할 것이다. 80대의 달리기 경주자들이 드물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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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내 생각을 요약하자면, 긍정적 중독이란 사람들이 하기로 선택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그것이 자신들에게 가치 있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하루에 한 시간 정도 일정기간 동안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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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적 테니스

그는 교사 또는 코트나 TV에서 훌륭한 선수들을 지켜 보라고 충고하였다. 이때 그는 모방하려는 특별한 생각 없이 전문가가 하는 것을 조용히, 평화스럽게 마음 속에 깊이 새기면서 관찰하여야 한다. 그는 설명하고, 격려하며, 비판하지 않으면서 학생들을 지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그는, 학생이 스스로를 비판하지 않도록 가르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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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당신이 이러한 경쟁상대를 만나게 된다면 그를 제 정신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그에게 단지 그가 그렇게 잘 경기를 하는 이유를 한 번 물어보라고 갤웨이는 농담조로 말하고 있다. 그는 대답을 위해 생각을 하자마자 그 상태를 잃을 것이다. 그것은 도달하기 매우 어렵고 또한 깨어지기 매우 쉬운 사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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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긍정적 중독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자신에 대한 무비판적일 수 있는 능력과 동시에 자신을 향상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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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경쟁을 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긍정적 중독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신과도 경쟁을 해서는 안 된다. 이는 우리가 향상되고자 노력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자신을 비판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강한 사람들의 특징은, 그들이 아무리 힘든 역경에 처하더라도 언제나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포기한 후 고통을 감소시키고자 부정적 증상을 선택하고 삶 속에서 다소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부정적으로 중독되어 버리는 약한 사람들과는 달리, 강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결코 로프의 맨 끝으로 몰아붙이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한 가지의 사고 패턴이나 행동 패턴으로 결코 자신들을 구속하지 않는다. 그들도 분명히 잠시 동안 혹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때때로 난국에도 봉착하고 좌절도 하지만, 그때조차도 그들은 약한 사람들이 생각해 낼 수 없는 대안들을 선택하는 연습을 한다.여기서 말하는 대안의 선택이란, 시간이 지날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리며 고통과 좌절을 견디어 내겠다는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언젠가는 이 어려움을 타개해 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완전히 낯선 새로운 상황에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 혼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그의 힘은 어쩌면 거의 천부적으로 부여받은 듯이 보일 수도 있다. 나는 이 힘이 두뇌의 힘에 대한 그들의 깊은 내적인 믿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려운 문제나 선례가 없는 문제를 풀기 위해, 이 복잡한 사고기관에 의지하는 것을 터득했다. 경험의 도움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경험에 의존하지 않으며, 많은 경우 경험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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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사람들은 강한 기쁜 느낌이라든지 자신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 느낌이란, 어려울 때 그들의 두뇌가 실망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으로써 경험에 의해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느낌이며, 이것으로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이 구분된다.

이 느낌은 아주 확실해서 우리가 그 느낌을 갖고 있을 때는 우리가 그 느낌을 갖고 있음을 알고 있다. 또한, 이 느낌을 갖고 있지 않을 때 역시 우리는 그 느낌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으며, 남들이 그 느낌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거의 언제나 감지해 낼 수 있다. 강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 만일 그가 우리 편이라면, 그의 힘은 전염된다. 그의 힘은 우리에게 믿음을 준다. 강한 사람과 한편이 되어 카드놀이를 하거나 테니스를 칠 때 당신의 실력이 얼마나 빨리 향상되는지 보라. 강한 팀과 대적해서 게임을 하면 종종 그 반대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때로는 강한 사람과 대결할 때 그의 힘이 나에게 전염되어 나로 하여금 위기에 대처하여 수완을 발휘하도록 자극시키기도 한다.

강한 사람의 또 다르 특징은 카리스마인데, 그렇다고 해서 카리스마적인 모든 사람들이 다 강인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가진 카리스마가 장기간 우리를 압도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힘으로부터 나오는 것일 것이다. 링컨이나 처칠, 그리고 일리노이 루즈벨트 같은 사람들은 생존시 뿐 아니라 사후에도 후세에 불멸의 영향을 끼쳤는데, 그들은 힘과 카리스마를 모두 지녔던 사람들이다.

... 자기 비난이나 낮은 자신감은 두뇌를 우리로부터 차단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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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선생님들이 아인슈타인에 대해 불평을 하자, 그의 부모는 아들을 비판하지 않고 격려하는 분위기의 비전통적인 학교로 전학시킬 만큼 지혜로웠다. 이곳에서 그는 수용되고 지지되며 비구조화된 지적 분위기 속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학교를 지배하고 있는 상징적인 언어의 한계 내에 갇혀 학생들에게 주의집중만을 강요하는 교사들의 독재로부터 그가 도망칠 수 없었다면, 아인슈타인은 자기 자신을 몹시 비난하는 사람이 되어버려서, 그의 정신에 내재해 있는 천재성을 결코 발휘해 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교육체제에 의해서 이런 식으로 망쳐진 사람들이 꽤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겠지만 한 명의 아인슈타인을 잃는다는 것은, 규범에 잘 따르지 않고 멍하게 있곤 하는 학생을 질식시켜 버리는 그런 학교가 지불하기에는 너무나 큰 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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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

이 느낌은 수동적이며, 전적으로 우리 두뇌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때나 거의 정신적인 노력을 기울이지 않을 때 느껴지는 그런 느낌인 듯 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즐거움을 만들 수는 없다. 만일 우리가 이 즐거움을 만들 수 있다면 그 느낌은 아마도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느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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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의 긍정적 중동상태에 이르는 확실한 방법은, 우선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잘 알고 있어야 하고, 긍정적 중독상태에 이르도록 마음이 움직일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당신의 마음은 무엇니가에 개입하고 싶어한다. ... 노련한 프로는 압력을 가하지 않고 그거시 저절로 일어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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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유능한 두뇌란 마치 줄에 묶인 잘 훈련된 개와 같아서, 당신이 데려가는 대로 충성스럽게 당신의 뒤를 흥분한 채 쫓아다닌다. 긍정적 중독상태에 있는 두뇌는 주인의 신뢰를 받고 있는 잘 훈련된 개가 잠시 주인의 끈에서 풀려난 상태와 유사하다. 이런 상태의 두뇌는 당신과 당신의 유능함을 지니고 황홀한 자유로움으로 당신을 새로운 경험의 절정 상태로 몰아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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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며 캐나다 총독인 존 부샨(John Buchan)은 맑고 청량한 어느 봄날 말마니 우그(Malmani Oog)라고 불리우는 아프리카의 칼라하리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중 그에게 일어났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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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거기에서 나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을 경험했었다. 배가 몹시 고팠음에도 나는 아침식사하는 것을 잊었다. 향기로운 주변 경치와 소리가 뒤섞여 너무나도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이것은 인간의 표현, 심지어는 인간의 사고를 초월하였다. 그것은 마치 영원한 평화의 섬광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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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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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샨과 동시대 인물인 하폴드 (F.C.Happold)191321일 캠브릿지의 자기 방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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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자신이 아닌 누군가에게 압도적으로 매혹되어 있었으나 그 어느 때보다 더욱 내가 내 자신임을 느꼈다. 나는 이전에는 결코 알지도 못했고 경험해 보지도 못했던 강렬한 행복감과 믿을 수 없을 만큼 놀라운 기쁨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평화로움과 안정감과 확실서에 대한 깊은 느낌은 정말 강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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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자저들은 이렇게 보고하면서도, 이 경험들이 정상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이와 똑같은 경험을 하지는 않아도, 앞서 설명한 것과 유사한 신비로운 긍정적 중독상태의 체험을 보고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에 두 저자들은 크게 놀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을 연구하기 위해 여론조사를 하기로 결저앻. 연구를 시작했을 때 그들은 이런 경험이 종교적인 체험이라고 믿고서, 이와 같은 종교적인 토대를 그들의 연구에 사용하였다(나는 이것이 응답을 다소 왜곡시키는 듯이 보였다).

p.103

그들은 1,500명의 사람들에게 당신은 당신을 당신 밖으로 끌어올리는 듯한 강렬한 영적인 힘과 가까이 있다는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다. 1,500명 중 약 5분의 2600명 정도의 사람들이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300명은 여러 번 경험했다고 했고 75명은 자주 경험한다고 했다. 나는 이들 75명 중의 일부가 긍정적 중독자라고 생각한다. 저자들은 공정을 기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그들은 질문을 종교적인 토대 위에서 하기는 하였으나 이 체험이 반드시 종교적인 것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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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우리는 자신들이 강력한 영적인 힘에 의해 끌어올려지는 듯한 강렬한 체험을 했다고 보고하는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우리는 사실 더 이상 말할 수가 없다. 그 중 몇몇 체험이 )많은 체험들이, 대부분의 체험들이) 단어의 고전적인 의미 그대로 신비한’(종교적으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응답자들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런 강렬한 경험을 보고했다는 것은 놀라운 현상이라고 본다. 이 경험의 성질이 무엇이건 간에, 보고된 경험들이 전통적인 신비주의 (traditional musticism)의 정의에 어느 정도 부합되는지 그 자체를 조사해 볼 가치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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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모든 경험들이 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아니라고 점잖게 부인했으나, 사실상 그들의 논문에서 전체적으로 종교적인 신념을 고수했다. 만일 이 경험을 종교적이라든지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고 간주하지 않았다면 이 논문은 긍정적 중독상태에 대한 독자적인 연구로서 좋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p.104

이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응답을 보냈던 사람들은 대부분 우리 사회의 특권층이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했고 대부분이 대학 졸업자들이었다. 그리고 대부분이 아동기를 행복하게 보냈다고 회상했고, 그들의 부모들끼리도 금슬이 좋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부모들과도 좋은 관계였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경험들 때문에 그들은 자기 비난을 하지 않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긍정적 중독상태로까지 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수용하기 어렵게 만드는 죄의식 중심의 종교와는 대조적으로, 그들의 부모는 충만된 기쁨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는 종교적인 접근방식을 지녔었다고 보고하였다. 이 저자들은 그들의 정신력에 관해 매우 의미 심장한 결과를 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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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보기에 황홀경에 잘 빠지는 사람들이 사회적, 심리적으로 결핍했거나 장애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노먼 브래드번(Norman Bradburn) 교수가 개발한 간이심리척도를 적용시켜 본 결과 (The Brief Psychological Well-being Scale) 황홀경의 체험 빈도와 심리적 건강(Psychological well-being)과의 상관계수는 40으로서 브래드번 교수가 여태까지 연구한 것 중에서 가장 높은 것이었다. 우리는 여러 변인들을 고려하여 이 상관관계의 강도를 줄여보려 애써 보았으나 그 결과는 상관관계가 .40에서 .39로 줄었을 뿐, 실질적인 변화는 거의 없었다.

비록 사람들이 매우 제한된 긍정적 중독의 상태만을 경험했다 해도 그들의 심리적 건강상태에 대한 점수는 매우 높았으며, 나의 용어로 라하자면 그들에게는 심리적인 힘이 있었다는 것이 여기서 증명은 되지 못했어도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두 저자들이 이 결과를 정신건강 분야에서 활동하는 동료 전문가들에게 보고하였을 때, 그들은 이 사람들이 종교적인 체험을 한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논박을 했다고 한다. 사회과학자들은 나처럼 긍정적 중독상태의 체험에서 종교적이 측면을 믿지 낳았다.

그러나 그들이 나와 다른 점은, 그들은 긍정적 중독상태의 전체적인 개념조차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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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중독이 되었건 안 되었건 내가 주장하는 바는, 당신이 긍정적 중독상태를 경험하기 위해 충분한 시간 도안 두뇌를 혼자 남겨둘 수 있을 정도로 자기 자신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긍정적 중독을 통해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는 전 과정의 열쇠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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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불평하는 것은 약자의 특징이며, 이는 곧 자기 비난으로 연결되기 때문에 약한 사람일수록 긍정적 중독상태를 경험할 가능성은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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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담기법으로서 비판을 사용할 경우에도 그가 쉽사리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하면 안된다. 그의 용모에 대해서는 비판할 수 있으나 학교나 직장에서의 실패는 비판할 수 없다. 예컨대, 용모에 대해서 비판할 때조차도 더 나아 보일 수 있게 도와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없다면 비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의 핵심은 증상이란 실패라는 능동적인 고통을 덜 고통스럽고 수동적인 대뇌 내부의 고통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라는 것이다. 사실상, 대체된 증상도 여전히 고통스럽기는 한다.

프로이드도 한때 코카인에 굉장한 흥미를 가졌으며, 코카인에 의해 유발되는 중독의 심적 상태가 정신과적 만병통치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부정적 중독자는 사랑과 가치를 오랫동안 얻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을 쉽사리 빨리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된다. 그는 또한 사랑과 가치를 다시 얻게 해 주거나 적어도 그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새로운 행복한 힘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이 처음에는 강력한 수동적인 즐거움을 똑같이 복사해 낼 수 있지만, 능동적인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는 아주 많은 사랑과 가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곧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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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0

물론, 누구에게나 대체물이 원래의 습관만큼은 만족스럽지 않다. 어떤 점에서 보면 긍정적 중독이 부정적 중독과 유사하기도 하지만, 긍정적 중독의 금단상태 고통은 부정적 중독에서처럼 그다지 심각하지는 않다. 만일 긍정적인 중독자가 평소에 하던 습관을 중단해야만 한다면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모든 중독의 특징이 그렇듯이) 아마도 그는 그 습관을 항상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약해지지 않고 강해지기 때문에 부정적 중독자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심하게 고통받지는 않는다. 만약에 당신이 긍정적 중독자이고 어떤 이유로 해왔던 습관을 중단해야만 한다면, 고통받을 준비를 하라. 그리고 전보다 더 강해질 준비도 하라. 그러면 결국 고통은 멈추게 되고 여분의 힘도 절대로 잃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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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4

이제는 다른 가능한 긍정적 중독에 대해서 살펴보자. 긍정적 중독은 한 개인이 다음 여섯 가지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한에서 하기로 선택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 (1) 당신이 하기로 선택하고, 매일 1시간 정도 그것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경쟁적이지 않은 것. (2) 당신이 그것을 쉽게 할 수 있고, 잘하기 위해서 많은 정신적인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3) 당신은 그것을 혼자 할 수 있거나 혹은 다른 사람과 함께 하지만, 그것을 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 (4) 당신이 그것에는 당신을 위한 가치(신체적, 정신적, 혹은 영적)가 있다고 믿는 것 (5)당신은 그것을 계속한다면 향상되리라고 믿지만, 그것은 오나전히 주관적인 것이다 - 당신이 그 향상 여부를 측정하는 유이한 사람이다. (6) 그 활동은 당신이 자신을 비판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성질을 가져야만 한다. 당신이 이 활동을 하는 동안 자신을 수용할 수 없다면 이 활동에 중독되지 않을 것이다. 그 활동을 혼자서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왜 그렇게 중요한가에 대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동안 당신은 경쟁이나 비판 또는 그 둘 다에 휘말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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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위의 여섯 가지 기준을 따른다고 할 지라도 중독되는데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절대 없다. 중독되기 위해서 당신은 일주일에 몇 번씩, 매번 1시간에 몇 분씩 규칙적으로 긍정적 중독 상태에 이르러야만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원하던 즐거움을 경험하게 된다. 당신이 3-4일 동안 긍정적 중독의 활동을 하지 않는다면, 신체적,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겪을 것이다.

 

posted by sergeant

대학원 시절 읽었던 책 중에 몇권을 정리해 둔 파일들을 발견했다.

읽었던 모든 책들을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의미 있는 책 몇 권을 정리해 둔 것이라 현재 블로그에도 옮겨 둔다.

 

 

 


<책발췌>

 

p.22_정동, 정서 및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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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affect)’, ‘정서(emotion)’ 기분(feeling)'의 개념에 대한 학문적 역사를 살펴보면 명확하게 구분된 정의를 찾기가 매우 어렵다(Hillman, 1960; Jaspers, 1963; James, 1890, 1950; Freud, 1915, 1963). 이자드(Izard, 1979)는 정서를 정동적 과정과 지적 과정의 조합으로 본 반면, 기분은 의미와 근거에 의해 강렬해지고 풍부해지며 회고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는 정서적 상태를 반영한다고 보았다. 이런 명료한 학문적 구분이 있지만 여기서는 정동, 정서 및 기분을 다음과 같이 구분하는 것이 유용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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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 : 정동을 자극에 대한 무의식적이고 생리적인 반응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진화과정을 통해 적응적인 행동 반응 체계로 발전해 온 자동적이고 생리적이며 동기적이고 신경학적인 과정들이 포함된다. 정동에는 반영적 평가가 포함되지 않는다. 정동은 단지 일어날 뿐이다. 반면, 정서와 기분은 이런 무의식적인 정동과정이 의식화된 산물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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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 기분에는 정동에 대한 생리적 감각을 자각하는 것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몸이 어질어질한것이나 긴장되는 느낌같이 몸이 느끼는 경험들이 포함된다. 이보다 더 복잡한 몸에서 느껴지는 느낌에는 우리가 복합적인 기분 혹은 감정이라고 부르는 것들, 즉 어떤 일이 올바르게 되지 않았거나 배려 받지 못했을 때 느끼는 모욕감이나 가라앉는느낌처럼 의미가 느껴지는 감정들이 포함된다. 그리고 이런 기분 상태는 정동을 자기 자신과 연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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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 : 의식적으로 경험된 인간의 정서는 기분 상태 및 행위 경향성이 이를 이를 촉발한 상황 및 자기와 결합될 때 생겨나는 경험이다. 따라서 정서는 여러 가지 수준이 처리과정이 통합된 것이다(Greenberg & Safran, 1987). 여기에는 각기 고유한 행위 경향성이나 얼굴 표정을 수반하는 두려움, 분노, 슬픔과 같이 구체적인 정서 경험도 있으며 보다 복잡한 이야기나 각본을 수반하는 질투나 자부심 같은 복합적인 정서도 있다. 정서는 경험에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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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와 이성의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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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의 치료적 효과를 다룬 과거 대부분의 이론가들은 전통적으로 정서의 비합리성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 책 전반에 걸쳐 우리는 정서의 조직화(organizing) 역할을 강조하고, 정서가 결정과정이나 문제해결 능력을 어떻게 인도하고 강화하는지를 일관성 있게 보여 주고자 한다. 정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중요한지를 알려 준다. 정서는 인식해야 할 목표를 설정해 주며, 이런 과정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인지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를 바로 볼 수 있다. 이 책에서는 치료 장면에서 정서를 왜,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 중요성과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기 위해 정서를 이성과 어떻게 통합할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정서는 여러 가지 수준의 정보처리를 통합하는 복합적인 구성과정에서 생겨난다(Barnard & Teasdale, 1991; Greenberg et al., 1993; Greenberg & Pascual-Leone, 1995; Teasdale & Barnard, 1993; Watson & Greenberg, 1995). 우리 내부에서는 정동적, 인지적, 동기적 그리고 감각운동적인 정보들이 항상 복합적으로 통합되고 있다. 러한 것들은 모두 경험과 행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다. 이런 정보처리 과정들이 통합되어 최종적인 기분을 낳는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암묵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의식 속에 떠올라 자각되고 종합될 때만이 정서와 이성의 온전한 통합이 가능하다. 신체가 느끼는 감각에 주의를 기울이고 이를 자각하여 상징화할 때 비로소 정서가 의식 속에 출현하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의식적으로 상징화된 요소(material)가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고 문제를 해결하거나 올바른 결정을 하도록 인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의식은 인간의 경험을 통제하는 위계의 정점에 반드시 있는 것도 아니며 외로운 단독자도 아니다. 그보다는 정서 도식, 즉 경험을 처리하는 암묵적인 정서적, 동기적, 인지적 수준이 근본적인 역할을 한다. 정서 도식은 의식적인 이성이나 자동화된 행동보다 높은, 가장 높은 수준의 처리과정을 형성한다. 이러한 과정들이 바로 의식적 사고와 행위를 인도하며, 우리가 결정하고 선택하는데 중요한 복합적이고 정서적인 감각(대개 신체가 느끼는 감각)을 제공하는 것이다. ...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암묵적인 정서적, 동기적, 인지적 과정이다(Greenberg et al., 1993).

 

posted by sergeant

새로운 무의식 - 대학원 스페셜 1

독서/심리 2018. 6. 18. 16:51

대학원 시절 읽었던 책 중에 몇권을 정리해 둔 파일들을 발견했다.

읽었던 모든 책들을 정리하지는 못했지만, 나에게 큰 의미가 있었던 책 몇 권을 정리해 둔 것이라 현재 블로그에도 옮겨 둔다.

 


<책발췌>

 

누구나 살면서 개인적, 금전적, 사업적 결정을 내리며, 자신은 중요한 요인들을 모두 적절히 가늠하고 그에 따라서 행동한다고 믿는다. 자신이 어떻게 결정에 도달했는지를 잘 안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의식적 영향력만을 지각하고, 우리가 아는 정보는 부분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자신과 자신이 동기와 사회를 바라보는 시각은 흡사 대부분의 조각들이 사라진 퍼즐과 같다. 우리는 추측으로 그 빈칸을 메우지만, 사실 우리를 둘러싼 진실은 우리가 의식적, 합리적 마음의 단순한 계산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미묘하다.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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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식한다. 경험을 기억한다. 판단한다. 행동한다. 그리고 이런 행위를 할 때, 지각하지 못하는 요인들의 영향을 받는다. 앞으로 나는 무의식의 여러 측면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런 사례를 더 많이 소개할 것이다. 지금부터는 뇌가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두 평행한 층위를 통해서 정보를 처리한다는 것을 살펴보자. 당신은 무의식의 힘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무의식은 정말로 활동적이고, 목적적이고, 독립적이다. 비록 숨어 있지만, 그 효과는 전혀 그렇지 않다. 무의식은 의식이 세상을 경험하고 반응하는 방식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다.

마음의 숨은 영역을 둘러보는 첫 단계로, 우리가 어떻게 감각신호를 받아들이는지부터 살펴보자. 우리가 물리적 세상에 관한 정보를 흡수하는 경로에는 의식적인 것과 무의식적인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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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단순한 물리적 기관이 아니라 그 소유자가 양육된 전통에 따라서 조건화된 인식 수단이다.- 루스 베네딕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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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 또다른 독일 생리학자 빌헬름 분트는 작센 왕국 교육부에 세계 최초의 심리학 연구소를 세울 자금을 요청했다. 청원은 거절당했지만, 분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1875년부터 이미 비공식적으로 사용해왔던 작은 교실 하나를 연구소로 삼기로 했다. 같은 해, 하버드 대학교의 의학박사 출신으로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비교해부학 및 생리학을 가르치던 윌리엄 제임스는 생리학과 심리학의 관계라는 새로운 과목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또 로런스 홀 지하의 방 두 개에 비공식 심리학 연구소를 차렸는데, 그곳은 1891년에 하버드 심리학 연구소라는 공식 지위를 얻었다. 베를린의 한 신문은 두 사람의 선구적 노력을 기리는 의미에서 분트를 구세계의 심리학 교황으로, 제임스를 신세계의 심리학 교황으로 명명했다. 심리학이 과학적 발판을 딛게 된 것은 이 두 사람의 실험과 베버에게서(분동의 무게차를 느끼는 실험을 통해 정신적 과정의 수학적, 과학적 법칙을 밝혀낼 수 있음을 보여준 사람) 영감을 받은 다른 연구자들의 실험 덕분이었다. 신생 분야는 새로운 심리학이라고 불렸고, 한동안 과학계에서 제일 잘나가는 분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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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확실한 점은, 이 이중체계에서 무의식이 더 근본적인 층위라는 것이다. 무의식은 진화의 역사에서 일찌감치 발달했다. 생물이 외부세계를 느끼고 안전하게 반응함으로써 기능과 생존의 기초적인 요구들을 잘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무의식은 모든 척추동물의 뇌에 표준으로 갖추어진 하부구조이지만, 의식은 선택사항에 가깝다. 인간이 아닌 대부분의 다른 동물들은 의식적, 기호적 사고력이 거의 없거나 전혀 없어도 충분히 살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산다. 반면에 무의식이 없다면 어떤 동물도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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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N이 보여준 현상- 눈이 온전한 사람은 의식적인 시각적 감각이 없어도 어떻게든 눈에 접수된 자극에 반응하는 현상- 맹시(blindsight)”라고 불린다. 이 중대한 발견은 처음 발표되었을 때 불신과 조롱의 빙수음을 일으켰고”, 최근에서야 사실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의식적 시각계는 기능을 잃었으나 눈과 무의식 체계는 온전한 상황이라고 보면, 맹시는 완벽하게 말이 된다. 맹시라는 이 희한한 중후군은 뇌의 두 층위가 독립적으로 작동한다는 것을 유독 극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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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의 아이들에게 언제나처럼 지나친 포옹과 키스를 퍼부을 때, 나는 이 순간이 아이들의 기억에 남지 않을 것임을 잘 안다. 아이들은 잊을 것이다. 정당한 이유에서. 나도 아이들이 셰레솁스키처럼 잊지 못하는 인생을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포옹과 키스는 종적없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적으로 뭉뚱그려져서나마 다정한 감정과 정서적 유대가 되어 남는다. 부모님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의식이 알고 있는 구체적인 일화들로 만들어진 작디작은 그릇에서 철철 흘러넘친다. 나는 나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이기를 바란다. 순간은 영원히 잊힐지도 모르고, 뿌옇거나 왜곡된 렌즈를 통해서 비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순간의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남고, 무의식에 스며든다. 그것들은 무의식에 존재하면서, 우리가 소중한 사람을 떠올릴 때 풍성한 감정이 퐁퐁 샘솟도록 한다. 우리가 한두 번 만나본 사람들을 떠올릴 때, 한때 살았거나 방문했던 이국적인 장소들과 평버한 장소들을 떠올릴 때, 자아를 형성했던 사건들을 떠올릴 때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완벽하지는 않을지라도, 뇌는 우리가 겪은 인생 경험에 대해서 그럭저럭 일관된 경험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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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과정에서 완벽함은 포기되어도 괜찮지만, 충분함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여기에서 겸손과 감사의 교훈을 배운다. 우리는 겸손해야 한다. 제아무리 굳게 믿는 기억이라도 충분히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기억을 보유할 수 있다는 점을, 또한 모든 기억을 보유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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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고통과 물리적 통증의 연관성은 우리의 정서와 몸의 생리적 과정들 사이에 관련이 있음을 시사한다. p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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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과학자들은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요구가 인간의 뛰어난 지능을 진화시킨 동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뛰어난 지적 능력 덕택에 이 세상이 굽은 시차원 시공간 다양체임을 깨달은 것은, 그야 물론 멋진 일이다. 그러나 초기 인류의 생존이 GPS기기로 가까운 초밥집을 잘 찾아가는 것에 좌우되지 않았던 이상, 그런 지식을 발달시키는 능력은 종의 생존에 중요하지 않았다. 따라서 뇌의 진화를 이끈 동인일 수 없었다. 반면에 사회적 협동에 필요한 사회적 지능은 인간의 생존에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다른 영장류도 사회적 지능을 보여주긴 하지만, 그 수준은 인간의 발치에도 미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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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개나 고양이 혹은 원숭이와 비교할 때, 아이큐가 인간과 그들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하다. 그러나 지능이 정말로 사회적인 목적에서 진화했다면, 인간과 다른 동물을 구분하는 주된 특징은 사회적 아이큐인 셈이다. 특히 인간에게는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려는 욕구와 능력이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마음의 이론이라고 불리는 이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인간은 타인의 과거 행동을 이해하고 현재나 미래에 그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는 기량이 뛰어나다. 물론 마음의 이론에는 의식적, 이성적으로 따지는 요소도 있다. 그러나 타인의 생각과 느낌을 이론화하는과정은 대체로 의식 아래의 활동으로서, 민첩하고 자동적인 무의식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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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수컷의 생식적 성공은 다른 수컷들과 경쟁하여 가급적 많은 암컷들과 짝짓기 하는 데에 달려 있다. 따라서 수컷들은 좀처럼 강한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지 않는다. 수컷들의 연합은 친화적 행동보다는 공격적 행동이 강조되는 위계적 관계일 때가 많다. - 모자 유대와 포유류의 사회관계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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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수립에서 흔히 보는 장면을 묘사한 것처럼 들리지만, 이 논문은 사실 비인간 포유류들의 행동을 논하고 있다. 어쩌면 인간 남성과 수소, 수고양이, 숫양의 차이는 다른 포유류들에게는 술집이 없다는 점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온 세상이 술집이라는 점일지도 모른다. 논문에서 여성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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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컷의 생식 전략은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자손 생산에 투자하는 것이고... 그 성공은 보살핌의 질과 젖을 뗄 때까지 새끼를 살려두는 능력에 달려 있다. 따라서 암컷들은 새끼들과 강한 사회적 유대를 맺고, 암컷들끼리도 강한 친화적 관계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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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친숙한 이야기이다. 물론 포유류의 행동에 대해서 일반적으로지나친 해석을 하는 것은 경계할 일이지만, 위의 사실을 알면 어째서 파자마 파티를 열거나 독서 클럽을 조직하는 것이 대체로 여성들인지, 그리고 어째서 내가 공격적이지 않고 친화적으로 행동하겠노라고 굳게 맹세해도 그들이 나를 어느 모임에도 끼워주지 않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 다만 인간의 사회적 행동이 다른 동물들보다 훨씬 더 복잡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행동의 진화적 뿌리는 다른 동물들에게서도 똑같이 발겨되고, 따라서 동물들을 연구함으로써 인간에 대해서 조금쯤 알 수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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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포유류 중에서도 일부일처를 지키는 종들은 뇌의 그 영역에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 수용기가 많다. 반면에 난교성 밭쥐는 그 수용기가 적다. 과학자들이 초원 밭쥐의 뇌를 조작하여 수용기를 늘렸더니, 혼자 다니던 초원 밭쥐가 갑자기 사촌 프레리 밭쥐처럼 외향적이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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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신경과학자들은 흔히 뇌를 세 영역으로 나누는데, 기능, 생리, 진화적 발달을 기준으로 삼아서 거칠게 나누는 것이다. 그중 가장 원시적인 영역은 파충류 뇌(reptilian brain)"이다. 파충류 뇌는 먹기, 숨 쉬기, 심장박동과 같은 기초적인 생존 기능을 담당하고, 싸움 혹은 도주(flight-or-fight)본능을 끌어내는 두려움이나 공격성과 같은 원시적 감정들도 담당한다. 모든 척추동물-조류,파충류,양서류,어류,포유류-에게는 파충류 뇌가 있다.

두 번째 영역인 변연계(limbic system)는 좀 더 세련된 구조로, 무의식적인 사회적 인식의 근원이다. 이 복잡한 체계에 대한 정의는 연구자마다 조금씩 다르다. 원래는 해부학적으로 규정되었지만 이 후에는 기능적으로, 즉 사회적 감정 형성에 필수적인 뇌 체계를 가리키는 말로 정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변연계는 동그란 고리형 구조로 정의될 때가 많은데, m 중 일부는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복내측 전전두엽피질, 배측전방 대상피질, 편도, 해마, 시상하부, 바닥핵 구성 요소들, 그리고 가끔 안와전두엽피질까지 포함된다. 변연계는 반사적인 파충류적 감정을 강화하고, 사회적 행동의 타냉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변연계의 여러 구조를 이따금 오래된 포유류 뇌라고도 통칭하는데, 모든 포유류가 가지고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세 번째 영역인 신피질(neocortex), 새로운 포유류 뇌는 그렇지 않다. 원시적인 포유류에게는 보통 신피질이 없다.

신피질은 변연계의 대부분을 위에서 덮고 있다. 2장에서 설명했듯이, 신피질은 여러 엽으로 나뉘고 인간은 그 크기가 매우 크다. 우리가 뇌라고 하면 보통 떠올리는 것이 바로 이 신피질의 회색질이다. 2장에서 나는 후두엽을 언급하면서 머리 뒤쪽의 그곳에 주 시각처리 중추가 들어 있다고 말했고, 이번 장에서는 이름 그대로 머리 앞쪽에 있는 전두엽을 언급했다. p.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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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하버드의 세 연구자가 아시아계 미국인 여학생 수십 명에게 까다로운 수학시험을 실시했다. 시작하기 전에 피험자들은 자신에 대한 설문지를 작성해야 했다. 아시아계 미국인 여성은 서로 대립하는 규범을 가진 두 내집단에 소속되어 있다. 아시아계라는 집단은 수학을 잘 하는 것으로 간주되지만, 여성이라는 집단은 수학을 못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피험자들 중 한 무리는 자신과 부모와 조부모가 어떤 언어를 쓰는지, 가족이 미국에서 몇 대째 살고 있는지 묻는 설문지를 받았다. 이것은 아시아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떠올리도록 설계된 질문들이었다. 다른 피험자들은 남녀공동 기숙사 정책에 대한 설문에 답했다. 이것은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떠올리도록 설계된 질문지였다. 세 번째 대조군은 전화와 케이블 TV 서비스에 대한 질문에 답했다. 피험자들은 수학시험이 끝난 뒤에 출구조사도 받았다. 피험자들이 출구조사 설문지에서 스스로 보고한 바에 따르면, 최초의 설문이 그들의 능력이나 시험에 대한 의식적 평가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무의식은 분명히 영향을 받았다. 자신을 아시아계 미국인으로 생각하도록 조작된 여성들은 통제군에 비해서 수학시험 성적이 더 좋았고, 통제군은 자신이 여성 내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떠올린 여성들에 비해서 성적이 더 좋았다. 내집단 정체성은 타인에 대한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요, 스스로에 대한 느낌, 행동방식, 가끔은 성과에조차 영향을 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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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 더 우월하다고- 느끼기 위해 기꺼이 투자한다. 우월감의 근거가 제아무리 박약하더라도, 심지어 그럼으로써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결과가 되더라도 말이다.

더 없이 사소한 근거로도 집단 차별이 구축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생각보다 작은 노력으로 그 근거를 없앨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로버스 케이브 실험으로 돌아가보자. 셰리프는 단순한 접촉만으로는 독수리들과 방울뱀들의 상호 부정적 태도를 누그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다른 전략을 쓰면 가능했다. 셰리프는 두 집단이 힘을 합쳐서 극복해야만 하는 난관들을 마련했다. ...

이처럼 공통의 목표를 부여하고 집단 간의 협동을 요구하는 여러 시나리오를 주자, 갈등은 급격히 줄었다. 셰리프는 집단 간 상호작용의 패턴이 놀랍게 변했다.”고 썼다. 인종, 민족, 계급, 성별, 종교처럼 전통적인 내집단에서도 구성원들이 협동을 유익하게 여길수록 서로에 대한 차별이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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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험자에게 자신의 감정을 말해보라고 묻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어떤 깊은 감정들은 아무리 심오한 내성법으로도 그 비밀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감정에 대한 심리학의 전통적 가정들 중에는 유효하지 않은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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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유명한 신경과학자가 내게 말했다. “나는 심리 치료를 몇 년이나 받았습니다. 내가 왜 이런저런 방식으로 행동하는지 알고 싶어서요. 나는 내 감정과 동기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을 치료사에게 말했고, 마침내 합리적인 듯한 이야기를 얻었고, 만족스러웠습니다. 나에게는 스스로 믿을 수 있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게 진실일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진정한 진리는 내 시상, 시상하부, 편도, 이런 구조들에 있겠지요. 그러나 내가 내성법으로 아무리 나를 들여다보아도 그것들에 의식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알려면, 그럼으로써 자신이 다양한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려면, 먼저 자신이 내리는 결정과 행동의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자신의 감정과 그 기원을 알아야 한다. 대체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할까?

단순한 것부터 시작하자. 통증이라는 감정은 어떨까? 통증이라는 감각적, 정서적 감정은 특징적인 신경 신호에서 생겨나며, 삶에서 확실하고 명백한 역할을 수행한다. 통증은 우리에게 벌겋게 달아오른 프라이팬을 내려놓으라고 말하고, 망치로 엄지를 찧은 것을 벌하며, 6가지 상표의 싱글몰트 스카치를 조금씩 맛볼 때는 더블로 만들지 말라고 일깨운다. 당신은 간밤에 당신을 와인 바로 데려간 재무분석가에 대한 감정을 친구가 옆에서 끌어내기 전에는 미처 몰랐을 수도 있지만, 지끈거리는 두통은 남의 도움 없이도 당신이 스스로 접촉할 수 있는 감정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문제가 언제나 이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유명한 플라세보 효과가 그 증거이다.

플라세보 효과라고 하면, 설탕으로 만들어져 아무런 효능이 없는 가짜 알약이 떠오르고, 사람들이 그 약효를 믿는 한 가짜 알약도 타이레놀 못지 않게 가벼운 두통을 잘 덜어준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러나 플라세보 효과는 그 이상으로 훨씬 강력하다. 예를 들어보자. 협심증은 심장벽 근육에 혈액 공급이 충분하지 않아서 발생하는 만성 질병으로, 대개 극심한 통증을 일으킨다. ... 1950년대에 의사들은 통증이 심한 환자들에게 치료법으로 가슴 안에서 일부 동맥을 묶어버리는 수술을 적용했다. 그러면 근처의 근육에서 새로운 통로가 생겨나서 순환이 개선된다고 했다. 많은 환자가 수술을 받고 성공적으로 치료된 듯 보였다. 그러나 의사들이 놓친 점이 있었다. 나중에 병리학자들이 그런 환자들의 사체를 검사했더니, 새로 생겼으리라고 예상되었던 혈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수술은 환자들의 증상 완화에는 성공했지만 원인 치료에는 실패했던 셈이다. ... 자신이 적절한 외과적 치리를 받았다고 믿은 두 집단 모두가 수술 전에 비해서 통증이 크게 줄었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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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46

감정에 대한 오늘날의 지배적 견해는 프로이트가 아니라- 그는 우리가 억압기제 때문에 무의식의 내용을 자각하지 못한다고 믿었다- 윌리엄 제임스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앞에서도 여러 맥락에서 언급했던 이름이다. 제임스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1842년에 뉴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대단한 부자로, 막대한 재산 중 일부를 써서 가족과 두루 여행을 다녔다. 제임스는 열여덟 살 때까지 유럽과 미국, 즉 뉴욕,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 런던, 파리, 프랑스 북부의 불로뉴쉬르메르, 제네바, 본 등 최소한 15군데의 학교를 전전했다. 그의 관심사도 이 주제에서 저 주제로 휙휙 바뀌었다. 그는 미술, 화학, 군사학, 해부학, 의학에 잠깐씩 손을 대면서 15년을 보냈다. 한번은 하버드의 유명 생물학자 루이 아가시의 초청으로 브라질 아마존 강 유역으로 원정을 떠났는데, 그곳에서 제임스는 내내 뱃멀미를 했고 천연두까지 걸렸다. 결국 그가 끝까지 마친 공부는 의학뿐이었다. 그는 1869년에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하버드에서 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평생 한버도 개업을 하거나 의학을 가르치지는 않았다.

제임스가 심리학에 끌린 것은 1867년 독일의 어느 광천수 지역을 방문한 때였다. 아마존 여행에서 얻은 건강 문제 때문에 요양차 간 곳 이었다. 16년 뒤에 뮌스터베르크가 그랬듯이, 제임스는 빌헬름 분트의 강의를 듣고서 이 주제에, 특히 심리학을 과학으로 정립하는 과제에 매료되었다. 그는 독일의 심리학, 철학 문헌을 읽기 시작했으나 일단 하버드로 돌아와서 의학 학위를 마무리해야 했다. 그러나 하버드를 졸업한 뒤에 그는 심한 우울증에 걸렸다. 당시 그의 일기에는 비참함과 자기 혐오가 가득하다. 고통이 얼마나 심했던지, 제 발로 매사추세츠 주 서머빌의 정신병원에 들어갈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회복된 것은 그곳에서 받은 치료가 아니라 프랑스 철학자 샤를 르누비에가 쓴 자유의지에 대한 에세이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그 글을 읽고서 자신도 자유의지로 우울증에서 벗어나겠다고 다짐했던 것이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에도 18개월동안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남은 평생 만성 우울증에 시달렸다.

1872년 무렵에 제임스는 하버드에서 심리학 강의를 맡을 정도로 회복했다. 1875년에는 생리학과 심리학의 관계라는 과목을 가르침으롰 하버드를 미국 최초의 실험심리학 교육기관으로 만들었다. 제임스가 자신의 감정 이론을 발표한 것은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후였다. 그는 1884년에 감정이란 무엇인가?(What is an Emotion?)"라는 논문을 썼느넫, 이것은 심리학 학술지가 아니라 마인드(Ming)라는 철학 학술지에 실렸다. 심리학 연구를 다루는 최초의 영문 학술지는 1887년에서야 창간되었기 때문이다.

제임스는 논문에서 놀람, 호기심, 환희, 두려움, 분노, 욕정, 탐욕 등등의 감정을 다루었다. 이런 감정에는 빨라진 호흡이나 맥박, 몸과 얼굴의 움직임과 같은 신체적 변화가 동반된다. 어릿 보면 문제의 감정 때문에 신체적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지만, 제임스는 그런 해석이 정확히 거꾸로라고 주장했다. “내 논지는 그와 반대이다. 신체적 변화는 자극적 사실에 대한 인식에 직접적으로 뒤따르고, 그런 변화에 대한 우리의 느낌이 곧 감정이다. ... 인식에 뒤따르는 신체적 상태가 없다면 인식은 그저 인지적 형태에 머무를 것이다. 창백하고, 색깔 없고, 감정적 온기가 결여된 상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화나서 떨거나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니다. 떨기 때문에 화를 깨닫고, 우리 때문에 슬픔을 느낀다. 제임스는 감정에 생리적 기반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사람들이 감정을 느낄 때 뇌에서 벌어지는 물리적 과정을 뇌 영상 기술로 볼 수 있게 된 오늘날, 제임스의 생각은 사실로 통한다.

오늘날 신()제임스적 시각에서는 감정도 인식이나 기억처럼 주어진 데이터로부터 재구성되는 것으로 본다. 데이터의 많은 부분은 무의식에서 온다. 감각이 포착한 환경적 자극을 처리하여 생리적 반응을 구성하는 것이 무의식이기 때문이다. 뇌는 또 기존에 품고 있었던 신념과 기대, 현재 상황에 대한 정보 등 다른 데이터도 동원한다. 그 모든 정보가 처리됨으로써 비로소 의식적인 정서적 감정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메커니즘은 협심증 연구를 설명해주고, 더 일반적으로 통증에 대한 플라세보 효과를 설명해 준다. 통증이라는 주관적 경험이 생리적 상태와 맥락적 데이터 양쪽으로부터 구성되는 것이라면, 마음이 똑같은 생리적 데이터- 통증을 뜻하는 신경 자극-를 다른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신경세포가 뇌의 통증 중추로 보낸 신호는 같더라도 통증에 대한 경험은 변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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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원리’...

아이러니하게도, 분트와 제임스는 둘 다 그 책에 만족하지 못했다. 분트는 제임스의 혁신이 분트식 실험심리학에서 벗어난 점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분트의 심리학은 매사를 측정하는 심리학이었다. 그러나 감정을 어떻게 정량화하고 측정하겠는가? 1890년에 제임스는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결론짓고, 따라서 심리학은 실험에만 몰두하는 관행을 넘어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트는 연구를 놋쇠 도구 심리학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한편 분트는 제임스의 책이 문학이고, 아름답지만, 심리학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윌리엄 제임스가 스스로에게 가한 비판은 훨씬 더 신랄했다. 그는 이렇게 ᄊᅠᆻ다. “이 책의 꼬락서니를 나보다 더 역겹게 느끼는 사람은 없으리라. 세상에 1,000쪽을 들여서 다룰 만한 주제란 없다. 나에게 10년만 더 있다면, 이 책을 500쪽으로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상태로는 메스껍고, 팽창되고, 붓고, 부풀고, 팽팽해진 덩어리에 불과하며, 오직 두 가지 사실만을 입증할 뿐이다. 첫째, 심리학의 과학 따위는 없다는 것. 둘째, W.J.는 무능하다는 것.” 이 책의 출간 후, 제임스는 심리학을 버리고 철학을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독일에서 뮌스터베르크를 꾀어, 자기 대신 연구소를 맡게 했다. 이 때 제임스는 마흔여덟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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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의 감정 이론은 한동안 심리학을 지배하다가 다른 접근법들에 밀려났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심리학이 인지적 방향으로 선회하면서 그의 생각-요즘은 제임스-랑에 이론이라고 물린다-이 새로이 인기를 끌었다. 뇌에서 다른 종류의 데이터가 처리됨으로써 다른 감정이 생겨난다는 개념은 제임스의 사고 틀에 보기 좋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posted by sergeant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남자- 2017.05.18

독서/심리 2018. 6. 18. 16:48

 

 

책의 제목이 처음에는 비유적이라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코타르증후군이라는 (이전까지 듣도보도 못한) 특이한 병에 대한 묘사였다. 그리고 그 코타르 증후군을 시작으로 저자는 철학이 묻고, 뇌과학이 답하는 '자아에 대한 성찰 여행'을 시작한다.

 

'인간은 동물이다.'라는 기본적인 명제는 처음 심리학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굉장히 불편하고 소화해내기 힘든 사실이었지만, 지금 그 명제는 사람을 이해하는 것에 있어 공기처럼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사실이다. '분명히 생물학적으로, 인간은 오랜시간을 걸쳐 진화해 왔다.'라는 명제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그런생각을 해 본다. 내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런 명제들을 좀 더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 훨씬 더 좋았을까? .... 어떻긴 뭘 어때. 지금보다 빨라 봤자 1~2년 정도 일찍, 편한 마음을 가지고 현재 수준만큼의 심리학을 이해할 수 있었겠지. 이렇게 혼자 답하고 있다ㅋㅋㅋ작년 말에는 이 괴리가 한창 극심해 져서, 이관직 교수님께 용감하게 질문도 드렸다. 심리학을 기본으로 공부를 계속 하다보니, 성경에 입각한 인간관을 가지지못하는 것이 아닌지 고민스럽다고. 교회에 소속된 상담사이지만 보수기독교단에서 대동단결하여 반대하는 여러 입장들에 대해 분개하는 것이 일반 학문에 너무 심취해서 인지 고민스럽다고. 답변은 기억안나지만, 마음은 편해졌다. ㅋㅋㅋㅋㅋㅋ그리고 생각 외로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교회의 규범주의적인 문화 및 정죄함에 대해 비판을 함께 해 주셔서 더 편해질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갈림길에서 어려움을 느낀다.

 

 과연 사람은 어떤 존재일까. 배움을 더할 수록 통제할 수 없는 존재라고, 나약한 존재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역으로 뒤집었을 때 오히려 더 인간의 위대한 발전에 대해 경외심을 가지게 해 준다. 인류애가 많지는 않으나, 공부할 수록 더 애정을 키울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거인의 어깨에 올라 서서.

 

 


 

<책 발췌>

 

p.71

이 검사는 알츠하이머 환자의 질병실인증이 단순히 기억의 문제만이 아니라 자아에 관한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잼버니는 나에게 말했다. "그것은 아주 선별적인 무능입니다. 타인에 관해서는 그렇지 않은데 자기 자신에 관한 정보만 업데이트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p.76

로빈 모리스는 런던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알츠하이머 환자들에게 일어나는 두 가지 큰 변화에 관해 설명했다. 하나는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 자기 자신에 대해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지 못해 그들의 서사적 자아를 업데이트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자아를 지지하는 역할을 맡은 뇌 구조가 아마도 알츠하이머병의 공격을 받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환자는 자신의 이야기 중 가장 회복력이 좋은 부분으로 물러난다. 이러한 회복력에 관한 생각들은 후기 청소년기나 초기 성인기에 형성된다.

... 사실 건강한 사람들도 삶의 사건들을 회상하라고 하면 십대 이전이나 삼십대 이후의 것들보다는 십대에서 삼십대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더 많이 기억한다. 심리학자들은 이것을 '회고절정reminiscence bump'이라고 부른다.

 

p.78

 여기서 우리는 '회고절정'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후기 청년기와 초기 성인기에 내가 누구인지에 관한 자아믿음과 자아개념을 형성하는 결정적 시기가 있습니다." 로빈 모리스는 나에게 말했다. 이 시기에 우리는 서사적 자아의 핵심을 형성한다.

 

p.109

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주의사항이 바로 이것이다. 신경과학계는 특히 질병을 연구하면서 뇌와 정신의 관계를 일방통행으로 보는 신경생물학적 환원주의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뇌가 정신활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fMRI나 PET 스캔은 대개 어떤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특정 뇌 영역의 움직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건강한 사람들과 비교하여 보여준다. 하지만 명백히 신경 손상을 입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런 스캔은 뇌 활동과 그 사람의 문제에 대한 상관관계만 보여줄 뿐이다.

 

p.153

 블레이크모어와 프리스, 그리고 동료들은 더 나아가 환청과 조종 망상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왼손을 만지든 실험자가 만지든 별다른 차이 없이 똑같이 강렬하고 간지러우며 즐거운 느낌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조현병을 앓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스스로 간지럼을 태울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기발생적 행위와 자신의 행동이 아닌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p.164

랠프 호프먼도 조현병에 관해 비슷한 얘기를 한다. (호프먼을 포함한) 과학자들은 많은 조현병 환자의 뇌에서 신경 시스템의 오작동이나 육안으로 식별 가능한 변화들을 관찰해왔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들은 조현병의 원인일까, 아니면 조현병 발병 이전에 이미 '직장이나 학교 등 사회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관계에서 극심한 철회를 여러 번 겪으면서' 생긴 결과로 보아야 할까? 호프먼은 말한다. "어떤 사람이 후기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를 거치면서 정상적인 상호작용에서 여러번 물러난다고 해봅시다. 그것이 몇 년간 계속된다면, 인지 풍부화와 과제 참여가 일어나지 않는 두뇌 시스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나는 이런 관계 철회가 계속 되다 보면 결국 '신경퇴행성 과정'에 이르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p.182

다마지오의 체계에 완전히 동의를 하든 안 하든 상관없이, 신경과학계는 자아가 생기는 데에서 몸이 중심적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전반적으로 받아들인다. 몸의 역할은 정서와 감정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다마지오의 관점에서자아는 상부뇌간, 섬엽피질, 그리고 체성감각피질에 나타나는 몸 상태인 원초적 감정으로 시작되어 더 복합적인 정서와 감정들을 형성해 간다.

 

p.309

고요한 확실성, 고조된 각성, 그리고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느낌들이 또한 신비주의적 경험들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묘한일이다. 피카르의 환자들은 자신의 발작에 확실하게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다. "내 환자들 중 일부는 신을 믿지 않는 불가지론자인데도 그러한 발작을 경험하고부터 신앙과 믿음을 갖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왜냐하면 거기엔 뭔가 영적 요소가 있으니까요. 신비주의적 경험을 한 사람들은 어쩌면 과거에 황홀경 발작을 실제로 겪었는지도 몰라요."

 이것은 그런 경험들에 대한 흥미로운 역설이다. 자신과 주위 환경에 대해 자아인식이 높은 사람이 동시에 자신과 세계의 경계가 녹아버리는 것처럼 느끼면서, 모든 것이 하나가 된 일체감을 갖는다는 것이다.

 

p.324

자아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논쟁에서 신경과학자들과 철학자들(과거와 현재의 사람들 모두)이 하나로 수렴된다는 느낌은 피할 수 없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너무 잘게 구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 크게 불일치하는 경우는 매우 적다. 데카르트의 이원론도 이제는 유행이 지났다. 어느 누구도 자아가 뇌와 몸이 없어진 이후에도 존재하는 독립된 존재론적 현실을 갖는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또한 어느 누구도 자아에 대한 유일한 관리인으로서 하나의 특권을 가진 곳이 뇌에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물론 자기감에 다른 영역보다 좀 더 중요하게 영향을 끼치는 뇌 영역들은 있다. 섬엽피질이나 측두정엽, 내측 전전두엽피질 등이다. 하지만 이 중 어느 영역도 단독으로 자아를 맡는다고는 할 수 없다. 또한 이야기하는 사람 없이도 이야기가 존재한다는 서사적 자아가 허구라는 주장도 일부 있다. 사실상 신체에 대한 소유감을 포함해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구성하는 모든 것은 구성자 없이 구성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몸을 단순히 정신을 담는 그릇의 신분으로 격하시켰던 데카르트적 이원론 대신, 우리는 이제 자기감을 몸에 단단히 통합된 신경 프로세스의 결과물로 보게 되었다. 신경은 현재의 우리 모습을 만들기 위해 뇌와 몸, 마음과 문화까지 한데 결합시킨다. ...

 지적이고 철학적인 논쟁과 별개로, 인간에게는 고통이 있다. 이 책에서 만난 사람들이 경험한 관점에서 보면, 자아의 본질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불교도들이 주장하듯, 겉으로 견고해 보이는 자아에 대한 망상성 집착이 고통을 일으킨다. 그리고 참된 본성을 깨닫는 것이 고통을 완화시켜줄 수 있다(그리고 우리가 앞에서 살펴봤듯, 대상으로서의 자아를 구성하는 다양한 자아의 특성들은 실제로 우리가 스스로 분리해낼 수 없는 두뇌의 역할 때문에 일어난다). ... 우리는 자아에 일어난 혼란을 무언가 결소뇐 것으로 생각한다. 대응기제나 병원에서의 치료들, 그리고 심리치료들은 그렇게 이해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러한 혼란들을 자아의 결손에서 비롯된 결과물이 아니라 자아라는 관념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으로 본다면 어떻게 될까? 그럴 경우에는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된다.

 

p.327

우리의 진화적 과거에, 최초로 '아는 자로서의 자아'의 표시가 나타났던 때가 분명히 있었다. 그것은 중대한 생물학적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조상들에게 생존을 유리하게 해주었다. 자신의 몸을 자각하기 위해 진화적 조력을 받아 자신의 주의를 그리로 돌릴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자아과정, 다시 말해 다양한 뇌영역 활동들의 복잡한 상호작용을 통해 여전히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더 진화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장기기억과 서사적 자아를 발전시켰다. 우리는 우리의 실수에서 배울 수 있고, 미래를 구상하고 계획할 수 있다. 여기에 과거의 우리 자신과 미래의 자신에 대한 생각들이 보태지면 대상으로서의 자아가 된다.

 문명이 있기 전 우리는 '지금 여기'에 살았던 동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심리적 시간에 거주하는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추상적인 생각을 하든, 그러한 생각들이 자신에게 좋은지 나쁜지에 대한 피드백은 여전히 몸에 의해 중재된다. 그것은 큰 기쁨일 수도 있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일 수도 있다. 아니면 황홀감과 우울감 사이에 있는 온갖 다양한 느낌일 수도 있다. 이러한 감정과 정서들은 우리를 행위로 이끈다. 한때 우리가 이런 감정들을 먹을 것을 얻기 위해 또는 맹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느꼈다면, 이제는 우리의 생각 때문에 느낀다. 생존과 직접적 관련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이러한 감정은 인간이라는 종에게 사회와 문화, 예술과 기술 등 인간이 된다는 것과 관련한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인간을 끊임없이 원하는 종으로 만들어놓기도 했다. ...

장가 대체로 허구적이라는 본성(주관성이라는 쟁점이 아직 남아 있긴 하지만)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자신을 조절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단순한 지적 이해도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무아가 매우 중요한 사상이라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지요. 하지만 사상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주로 명상을 통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경험을 포착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기중심성을 줄이고 자신을 타인에게 좀 더 개방하게 한다는 점에서 심오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경험입니다."

 

posted by sergeant

마음 가면 -2017.01.25

독서/심리 2018. 6. 18. 16:43

 

TED에서 유명한 브레네브라운의 저서, 마음가면.

 

1. 수치심이라는 주제는 사람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못했지만, 상담을 4년 이상 공부한 지금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
많은 우울,불안,완벽주의 등의 역기능적 감정들과 연결되어 있는 수치심은 실제로 더 나은 삶을 디자인하고 자신을 깊이 알아보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될 수도 있다.

2. 이 책에서는 취약성과 나약함에 대한 섬세한 시각을 통해 '온 마음 다해 사는 삶'을 주장한다.

  한 분야에서 깊이 있게 성찰한 연구자의 글이라, 여러 통찰이 많이 와닿기는 했으나 (내가 익숙하고, 원했던 방식의) 양적연구들이 풍부하게 실려있지는 않아서 아쉬웠다. 아무래도 질적 연구를 진행하고, 인터뷰를 통해 통찰을 얻는 형태가 익숙하지 않은 탓이 클 것 같다.

3. 실제 상담 현장에서는 좀 더 세밀한 조정이 필요하다.

최근 만나는 우울한 내담자와 '온 마음 다해 사는 삶'에 대해 얘기하며 느낀 점은 브레네 브라운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책에서 다 담을 수 없어서) 주장하는 것처럼 아름답고, 강력하고, 성공적인 마법 같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도전 자체의 아름다움을 계속 강조하기에는, 우리의 실패가 예상보다, 그리고 실제로도 너무 쓰라리고 무섭고 아프다.  다만 그녀도 얘기했듯이... 우리는 혼자가 아니고, 모두가 이것이 너무 무섭고 아프고 힘들다는 걸 계속 붙잡고 함께 나가야겠지 싶다.
함께 씨름할 문제다.

<책 발췌>

 

p.38
 자신이 너무나 평범하고 부족한 존재라서 괴로울 때 명예와 지위와 찬사를 갈구하는 느낌은 강력한 진통제와 비슷하다.


P.108
비판(비판은 수치심을 증폭시킨다)이 아닌 공감은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단순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공감은 수치심의 웅덩이에서 빠져나가도록 해주는 사다리다.
공감은 누군가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감정과의 이어짐이지, 그 사건이나 상황과의 이어짐이 아니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진실(나의 경험은 인간적인 것이라는 진실)을 깨닫자마자 나의 수치심은 씻은 듯 사라졌다.
.. 공감은 신비롭고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공감에는 대본이 없다. 공감을 잘하는 방법은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이야기를 들어주고 상애를 존중하면 된다. 섣부른 비판을 삼가고 상대의 감정에 다가서고,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놀라운 치유력을 가진 메시지를 전달하면 된다.

사람은 비밀의 개수만큼 아프다고 주장하는 12단계 치유 프오그램에는 나름의 과학적 근거가 있다. 눈에 띄는 연구 하나를 살펴보자. 텍사스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제임스 펜베이커james pennebaker와 동료들은 트라우마(강간과 근친상간)를 비밀로 간직했돈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추적했다. 연구팀이 발견한 바에 따르면, 트라우마의 원인이 된 사건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거나 의논하지 않은 행위는 그 사건 자체보다 더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반대로 자신의 이야기와 경험을 털어놓은 트라우마 피해자들은 육체적 건강이 개선되고 병원 치료 횟수가 줄었으며 스트레스호르몬 수치가 의미있기 낮아졌다.

p.117
먼저 세상은 여자들에게 완벽해지라고 요구한다. 단, 완벽해지기 위해 법석을 떨지 않아야 한다. 다른 어떤 일에 쏟는 시간을 줄여서도 안 된다. 가조과 배우자와 직장에 충실하면서 완벽한 사람이 돼야 한다. 당신이 진짜로 훌륭한 사람이라면 쉽게 완벽해질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당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되,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하거나 기분 상하게 하지 말라고도 요구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자들은 성적 매력도 높여야 한다. 단, 아이들을 재우고 강아지를 산책시키고 집안 청소까지 끝낸 후에. 하지만 학부모로서 교사들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성적 매력을 감춰야 한다. 뭘 하든 두 가지 역할을 혼동하지 마라. 학부모-교사 회의에서 섹시한 모습을 보이는 여자들을 두고 사람들이 뭐라고 수군거리는지 알지 않나? 또한 이 모든 요구를 수용하는 동시에 내 본연의 모습대로 행동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수줍어하거나 우유부단한 모습은 좋지 않다. 여자는 자신감이 넘쳐야 섹시하다. 당신이 젊고 육체미가 넘친다면 더욱 그렇다. 또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면 안 된다. 그러면서도 솔직하게 굴어야 한다는 것이 포인트. 마지막으로 여자들은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행동하면 안 된다. 하지만 지나치게 냉정하게 굴어도 곤란하다. 너무 감정적이면 히스테리 부리는 여자로 보인다. 너무 냉정하면 '인정머리 없는 년'이 된다.
 최근에 미국 학자들이 수행한 성역할 규범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여자다움'의 속성은 다음과 같다. 상냥함, 날씬한 몸매를 만들려는 노력, 자신의 능력이나 재능을 애써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태도, 가정에 충실한 것, 아이들을 잘 돌보는 것, 낭만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것, 한 사람에게 충실하면서 성적 친밀감을 유지하는 것, 돈과 시간을 투자해서 외모를 가꾸는 것. 이 규범에 따르면 우리는 되도록 착하게, 조용하게, 평범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예뻐지는 일에 우리의 시간과 능력을 쏟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꿈이나 욕구나 재능은 중요하지 않다. 암 치료법을 발견한 어떤 젊은 여자가 이 목록을 보고 자신의 능력을 숨겨야 겠다고 마음먹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녀가 규범에 순응하기로 마음먹는다면 아무도 그녀의 천재성을 알지 못할 것이다.

 

p.120
 불완전함에 대한 나의 글이 CNN닷컴에 올라갔을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CNN닷컴 편집자는 나의 글을 실으면서 내가 찍은 사진 한장을 곁들였다. 친한 친구가 가슴에 "나는 이만하면 괜찮아."라는 글씨를 새긴 옷을 입고 있는 사진이었다. 아름다운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 서재에 걸어놓고 틈날 때마다 보는 사진이다. 그런데 그 사진을 본 사람들이 줄줄이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저 여자는 자기가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하나본데, 가슴을 보아하니 돈을 더 써야겠네.;
'브레네 브라운 같은 외모를 가졌다면 나라도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겠다.'
 이런 독설이 현대사회의 잔인한 일면이며 누구든 가리지 않고 먹잇감으로 삼는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나를 공격하는 방법과 그들이 찾아낸 공격 지점을 보니 기가 막혔다. 하필이면 나의 외모와 자녀 양육을 표적으로 삼다니! 그들은 여자다움의 규범 목록 맨 앞에 등장하는 두 가지를 가지고 나를 때려눕히려 했다. 그들은 나의 지적 능력이나 주장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런 것으로는 큰 타격을 입히지도 못했을 것이다.

 

>책의 내용이 여자들의 수치심만에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 좋았다.
p.123
여자들이 자연미인이어야 하고 날씬해야 하고 매사에 완벽해야 하고 훌륭한 엄마여야 한다는 요구에 시달린다면, 남자들은 상자 안에서 갑갑갑하게 살아간다. 그 상자는 남자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남자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은 무엇인지 정해준다. 하지만 남자들의 모든 규칙은 단 하나의 명령으로 요약된다.
 "약해지지 마라!"
......
중요한 사실 하나 더. 우리 사회는 남자들에게 동성애 공포증을 유발하는 잔인한 메시지를 보낸다. 우리 사회에서 남자다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자신이 동성애자가 아닌 것으로는 부족하다. 동성애자 집단을 향한 혐오를 겉으로 드러내야 한다. 앞서 소개한 연구에서도 "우리 패거리에 들어오고 싶다면 저 사람들을 싫어해야 해."라는 요구를 수치심의 중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그 패거리가 교회든 갱단이든 바느질 모임이든 남자다운 사람들의 모임이든 간에 별 차이는 없다.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소속의 조건으로 다른 사람 또는 다른 집단을 싫어하라거나 가입하지 말라거나 거리를 두라고 요구하는 것은 통제와 지배의 수단이다. 우리는 다른 집단에 대한 경멸을 가입의 조건으로 내거는 모든 집단의 의도를 의심해 봐야한다. 그것은 소속감을 가장하고 있다. 하지만 진짜 소속감은 누군가에 대한 거부를 토대로 삼지 않는다. < 남성들의 게이혐오증은..개인적으로는 좀 더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정리하고 있으나 소속의 조건에 대한 부분이 꽤나 마음에 들었다.
완벽주의에서 해방되고 싶다면 남들이 뭐라고 생각하는지 신경 쓰지 말고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p.222
종교 역시 사회계약 불이행의 한 예다. 놓아버리기는 대개의 겨우 리더들이 자신들이 설교하는 가치들을 구현하며 살지 않은 결과다. ... 종교지도자들이 미지의 대상과 맞서는 방법과 신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가르치면서도 모범을 보이지 못할 때, 우리의 두려움과 확실성에 대한 욕구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할 때, 영성에서 취약성을 빼버리고 신앙을 순종과 처벌로 대체할 때 신앙의 개념을 스스로 무너진다. 신앙에서 취약성을 빼버리면 정치만 남는다.
<-교회에서의 정치질을 느끼는 경험의 근거를 찾은듯한 느낌이었다.

p.248
"지금 여러분의 마음이 편안하다면 나는 아무것도 가르치고 있지 않은 겁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배우지 않고 있는 겁니다. 여기는 불편한 자리입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그게 정상적인 배움의 과정입니다."
<-프로불편러들을 위한 위로
posted by sergeant

심리학 일주일- 2016.12.01

독서/심리 2018. 6. 18. 16:30

심리학 책은, 심리학 관련 전공자들에게 다소 피상적이라고 느껴지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작가의 의도대로 잘 정리된 연구안내서적과 같습니다. 게다가 연구 안내서적이라 해도 재미와 위로까지 모두 잡은 훌륭한 책입니다.

 책을 읽고 얻은 소득. 당 보충도 방전burnout을 예방하는 것에 중요한 요인중 하나라는 사실을 환기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몸과 정신상태의 긴밀성에 매우 동의하는 편인데도, 이런점을 많이 간과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책에 대한 결론? 위와 같이 삶에 적용할 실제적인 흥미점들을 찾으며 지적 즐거움도 맛볼수 있습니다!^^

 

posted by sergeant

 

함께 연구해 보고 싶은 내용이 가득합니다. 후에 참고하고 싶어 발췌를 많이 해 두었습니다. 혹여나 문제가 생길시에 글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도덕과 정의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일까 자괴감이 들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정의는 그렇게 딱딱한 틀 안에 들어가고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차츰 들게 되었구요.

저의 경직된 생각을 조금 더 부드럽게, 그리고 철학과 심리학을 통해 명쾌하게 만들어 준 계기가 되었던 책입니다.

 

 

 


<책발췌>- 긴글 주의

 

P.10
의심의 대가들은 도덕을 끊임없이 탈신화화했고, 그 후로 선과 악은 뜨뜻미지근한 불가지론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선악 관념을 별로 믿지 않는데도 허구한날 타인들이 아떤 존재인가, 타인들이 어떤 행위를 하는가를 판단하는데 골몰한다. 또 우리의 행동, 의견, 심지어 겉모습까지 매 순간 다른 사람들에게 평가를 받는다. ... 우리가 사는 세상은 선과 악이 마치 산소와 수소처럼 결합해 이루는 좋은 생각의 바다와 같다. 우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그 바다에 잠겨든다.

P.12
사실 사회적 저항과 도덕적 봉기는 그렇게 단순한 얘기가 아니다. 권위를 아무리 존중하다 해도, 심지어 유해한 권위의 파괴적인 명령을 따르면서도 우리는 사회적 저항과 분노의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 활발한 소수집단만의 운동일지라도 그 운동에 당위와 일관성이 있다면 지속적이고 근본적인 변화를 끌어낼 수도 있다.

P.27
자의식은 타인의 심리와 정서 상태를 이해하기 위한 초석이다. ... 다트머스 대학 인지신경과학 교수인 마이클 가자니가와 토드 해더튼은 최소한의 자아는 곤충류, 조류, 어류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객관화된 자아'는 이보다 좀 더 발전된 의식 수준에서 나타나며, 이는 곧 자신의 정신 상태를 의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경우에는 자아가 개체의 관심 대상이 되기 쉽다.
...
자아의 최종 단계는 상징적 자아(혹은 서사적 자아)다. 이 단계에서는 언어를 통하여 시간 속에서의 나 자신을 표상할 수 있다.

P.30
나치 전범들에 대한 이야기와 확증편향

P.37
처음에는 우리 자신에 대한 생각이 도덕과 어떻게 관련된다는 것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의 시각과 정서를 고려하는 것이 우리가 본능적으로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위치와 무관할 수 있을까? 더 깊게 들어가자면, 우리는 자신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자기 시각 자체가 문제시되면 부정적으로 반응하기 쉽다. 그래서 자기만족과 이미지 관리는 폭력의 보편적 요인이 된다.

P.40
자신을 과대평다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진 부류는 확실히 남들과 차별될까? 그렇다. 하지만 나쁜 방향으로 차별화된다. 한 연구에서 실험참가자들의 논리적 추론능력을 검사했다. 그 결과 성적이 가장 나쁜 부류와 자신의 추론능력을 가장 과대평가하는 부류가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P.43
자의식을 느끼면 행동과 신념의 일관성에 대한 욕구가 증가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겠다. ... 그렇다면 위반 행동도 자의식 증대에 영향을 받을까? 이를 입증한 연구들이 있다. 필기시험에서 응시자들의 자의식을 자극하면 부정행위릉 저지를 확률이 낮아진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자의식을 일깨워주면 사소한 물건을 슬쩍하는 행위가 줄어든다.
 
p.48
실제로 사회집단은 인간 도덕성의 근원이자 목적이요, 그러한 도덕성이 실현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이다. 이러한 생각은 지지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 전에 우선 인간은 긴밀한 감시 아래서만 도덕적일지도 모른다는 단순한 가설을 살펴보자.
 
p.53
이타적인 행동을 요청할 때에도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권할때, 사회적인 인맥을 고려하게 만들 때, 전화보다는 직접 얼굴을 보고 부탁할 때, 특히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부탁할 때 그 요청이 받아들여질 확률이 높다.
 
p.68
동물-악이라는 등식은 매우 오래되었다. 인류학자들은 이 등식이 보편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부도덕성은 인간적이지 않은 형태로 의인화될 수 있었다.
 
p.69
동물을 부도덕한 존재로 범주화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특히 동물과 더불어 살아본 인간들의 의견은 전혀 다르다. ... 제인 구달은 수컷 침팬지들이 그들의 친구나 이웃과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이는 광경도 목격했다. 그녀는 묘한 씁쓸함을 담아 이렇게 말했다. "안타깝지만 그런 모습을 보자 침팬지들이 더욱 인간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p.70
몽테뉴는 인간은 '피상적이고 인위적인' 것을 탐하지만 동물은 확실하게 손에 잡히는 행복만을 추구하므로 도덕적으로 인간보다 낫다고 했다. 동물이 오히려 인간의 귀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p.74
 자민족중심주의는 좀 더 미묘한 양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다른 집단은 인간의 특수한 감정, 이를테면 수치심이나 행복감 같은 이차적 감정을 모르고 그저 두려움이나 쾌락 같은 원초적 감정만 좇는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이 같은 '인간성 말살', '인간 이하 취급'이라고 부르는 현상이 유럽과 북미 여러 나라에서 연구된 바 있다. 이 현상에 따르면 자기가 속한 집단보다 위상이 낮은 집단 사람들은 자기만큼 이차적 감정, 미묘하고 숭고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여긴다. 또한 집단정체성이 강할수록(예를 들어 자국에 느끼는 자부심이 강할수록) 다른 집단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인간 이하 취급은 다른 집단을 가혹하게 다루는 태도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한다. 엠마누엘 카스타노Emanuele Castano와 로저 자이너 솔라Roger Giner-Solla는 최근 연구에서 미국인들에게 인디언 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 인디언들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태도가 오히려 두드러진다고 했다. 이처럼 타인을 동물 취급함으로써 파괴적 행동을 사후에 정당화하기도 하지만 역으로 그러한 의식 구조가 먼저 자리 잡았기에 타인을 침해하는 행동이 나오기도 한다. 그 예를 살펴보자.
 
어떤 인간집단이 '동물화'될 때
...
 
그들과 우리의 경계
영장류 연구가 프란스 드 발Frantx de Waal은 침팬지에게도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우리/그들' 구분이 있으며 그래서 원래 알고 지냈던 개체들끼리도 어떤 부류와 어울리느냐, 어떤 구역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서로 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프란스 드 발은 우리가 적을 사람 취급하지 않듯이 침팬지도 다른 집단에 속한 침팬지를 자기와 같은 침팬지로 여기지 않는다고 보았다. ...
 '우리'와 '그들'의 경계는 도덕규칙이 적용될 수 있는 선, 다시 말해 우리와 같은 집단구성원에게 기대할 수 있거나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행동방식의 기준을 보여주는 듯하다. 역설적이고 놀랍게도, 이 규칙들은 그 집단 내에서는 대개 더욱 강화되지만 적대관계에 있는 집단에서는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것들이다. 그래서 도덕의 경계에 관심이 많았던 프로이트는 "사랑으로 서로 결합하거나 더 맣은 사람을 포용하려면 공격할 만한 외부인이 있어야만 한다."라고 했다. 꼭 물질적 이해관계가 있어야만 삭막한 구분이 싹트는 것은 아니다.
 
p.81-
개인은 동물이라는 범주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이나 집단을 배제하는 가치를 독차지한다. 특히 다른 사람들을 깎아내리는 것을 자신의 자존감을 북돋우는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p.86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이 자살론에서 주장했던 바는 반세기 동안 꾸준히 확증되었다. 타인과의 의미 있는 관계를 누리는 개인들은 평균수명보다 오래 살고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훨씬 더 건강하다. 가까운 사람들에게서 정신적 위안을 얻지 못하는 사람은 교류가 활발한 사람에 비해 심장질환이 생길 확률이 두 배나 더 높다. 또한 알제리의 라마단처럼 집단적 만남과 대인접촉이 잦은 상황에서는 자살률이 반으로 떨어진다. 정신과 의사 보리스 시륄니크Boris Cyrulnik는 강제수용소에서도 공산주의자나 여호와의 증인은 종교나 이념의 소속이 없는 사람보다 공포심을 더 잘 견디고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줄 안다는 놀라운 사실을 지적했다.
 최근 정신건강 관련 연구에서 사회적 결속력이 면역력을 강화하고 수명을 연장시키며 수술 후 회복에도 도움이 된다고 발표했다. 역학 연구에 따르면 흡연은 사망률을 1.6배 높이지만 사회적 고립은 사망률을 2배나 높인다. 뇌혈관계 질환자 665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혼자 사는 환자는 사회적 관계를 활발하게 유지하는 환자에 비해 5년 내 재발률이 2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타인의 조재가 가져다주는 이로운 효과는 고통과도 무관하지 않다. 극단적인 더위나 추위를 참아야 하는 실험연구 상황에서 여성들은 배우자의 손을 자버나 배우자의 사진을 보면 한결 인내심을 발휘했다. 고통을 느낄 때 누군가 있으면 그 사람과 고통을 나눈다는 의식이 생기는 걸까? 신경촬영을 해보면 바늘에 손을 찔리는 장면을 보는 사람은 마치 감각운동의 전염이라도 일어나는 양 손 근육이 위축되었다.
 
p.89
사회집단과의 심리적 유대는 구체적 처벌에 대한 두려움보다 중요하다. 그러한 유대는 법ㅇ르 존중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사회학자 트래비스 허쉬가 발전시킨 범죄 이론은 여러모로 확증된 바가 있다. 그의 저서인 '범죄의 원인'은 단순한 가설에서 출발해 여러가지 주장과 데이터를 제시한다. 그는 개인이 법과 사회의 지시를 준수하는 이유는 '사회통제'가 그런 것들을 위반하지 못하도록 심리적으로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회통제는 순응의 압박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가까운 이들과의 정서적 애착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p.90
일단 손상된 평판은 되돌리기가 어렵다. 타인들은 우리의 도덕적 평판을 ㅇ지시킬 뿐만 아니라 이따금 좀 더 악화시키기도 한다. 한 연구에서 실험참가자들에게 음식 값을 내지 않고 식당에서 나가버린 프랭크라는 인물을 묘사해 보았다. 그런 다음 참가자의 3분의 1에게는 플애크가 정직하지 못한 인물이라고 말했고, 다른 3분의 1에게는 원래는 정직한 사람인데 깜빡 잊고 그런 거라고 했고, 마지막 3분의 1에게는 아무런 부연설명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 후, 참가자들을 다시 불러 놓고 프랭크 이야기를 최대한 생각나는 대로 재구성해보라고 했다. 그 결과, 프랭크가 원래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평판을 접한 참가자들은 그가 지불하지 않은 음식 값을 실제보다 높게 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람들의 평판은 사회적 교류에서 만들어진다. 작은 집단 내에서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이 거론되면, 그 사람에 대한 평판은 두 번째로 나오는 발언으로 결정된다고 한다. 다시 말해 처음에 그 사람에 대한 안 좋은 얘기가 나왔는데 누가 그 얘기에 맞장구를 친다면 집단 전체는 그 사람을 나쁘게 볼 것이다. 반면에 두 번째로 말하는 사람이 그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맨 처음에 얘기를 꺼낸 사람의 부정적인 언급은 상당 부분 힘을 잃어버린다.
 
 p.92
영장류의 신피질 크기는 그들이 형성하는 집단의 규모에 비례한다. 집단구성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적 교류에 직접 관여하는) 신피질이 발달하는 것이다.
 
p.94
인간의 온기를 거부당한 사람은 정말로 체온이 떨어진다. 토론토대학의 두 연구자는 사람이 사회적 배척을 경험한 직후에는 자기가 있는 방 안의 온도를 실제보다 낮게 느끼고 따뜻한 음료나 음식을 선호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사람들은 실내 온도가 17도일 때보다는 23도일때 서로를 더 가깝게 느꼈다!) 하지만 이게 다가 아니다. 사회적 거부를 경험한 직후에 아이큐검사를 받은 사람들은 지능지수가 상당히 떨어지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또 사회적 거부를 경험한 사람일수록 술이나 음식에 탐닉하는 경향이 있고, 남에게 너그럽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속임수를 쓰기 좋아했다.
... 배척이 이따금 긍정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이러한 설명은 완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거부당한 사람은 자기가 배척받는 이유를 생각해본다. 그는 사회에 다시 편입되려고 노력하므로 타인들에게 좀 더 주의 깊고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게 마련이다. 일례로 배척의 경험을 떠올린 사람은 친해지고 싶다는 뜻을 담은 표정, 즉 미소를 좀 더 민감하게 알아차리는 것으로 밝혀졌다.
 
p.98
 애시의 연구는 17개 국가에서 133번이나 재연되었는데 그 결과들을 종합해 보면, 개인의 정체성이 타자와 연결되어 발달하는, 소위 집단주의 문화권에서는 집단에 순응하는 비율이 개인주의 사회에서보다 더 높았다. ... 물론 개인적 요인도 개입한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집단의 영향력을 덜 받지만, 권위적 성격의 소유자는 그런 영향력에 더 많이 휘둘린다.
 
p.102
신체적 기준을 바탕으로 지배관계를 파악하는 태도는 매우 일찍부터 나타난다. 생후 8~13개월의 아기들에게 키 큰 사람과 키 작은 사람이 서로 반대방향을 걸어오다가 중간에서 마주쳐 서로 길을 막아서고 잠시 후 한 사람이 비켜나며 길을 양보하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연구자들은 이 아기들이 시선을 고정한 시간을 측정했다. (이 시기 아이들이 자기가 본 것에 놀랄수록 눈을 떼지 못하고 오래 바라본다는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그 결과 10~13개월의 아기들은 키 큰 사람이 키 작은 사람에게 길을 양보하는 것을 더 놀랍게 여겼다. (생후 8개월 된 아기는 그렇지 않았다.) 이 아이들은 그러한 상황을 보고 평균 20초간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반대로 키 작은 사람이 길을 양보하는 상황을 볼 때에는 12초만 시선을 고정했다.
 도덕규칙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적용된다. 거의 4000년 전의 바빌론 도덕규범집들조차도 귀족들은 특별대우를 받았음을 보여준다. 귀족이 손실을 입으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탈리오 법칙이 적용되지만 하층계급민이 손실을 입으면 벌금형을 요구하는데 그쳤다. 이러한 특별대우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반응에조차 존재한다. ...
 레너드 빅먼Leonard Bickman은 뉴욕 중앙역과 케네디 공항에서 실험을 해 보았다.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 입은 사람이 공중전화 부스에 동전을 두고 나갔다가 잠시 후 다른 사람이 전화를 걸 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조금 전에 여기다가 동전을 놓고 간 것 같아요. 혹시 동전 못 보셨나요?" 이 사람이 동전을 돌려받는 확률은 77퍼센트에 달했지만 허름한 옷차림을 한 사람이 같은 부탁을 했을 때에는 그 확률이 38퍼센트에 그쳤다.
 성금을 모으는 사람도 높은 지위를 나타내는 옷차림을 할 때에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심지어 좋은 옷을 입고 새치기하는 사람은 허름한 옷을 입고 새치기하는 사람에 비해 반발을 덜 산다. ...
 위반자가 집단 내에서 높은 위치에 있다면 집단이 나서서 그의 위반을 은폐하기도 한다. ..
 실험환경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파트너와의 협업 과제를 주고 관찰한 결과, 이들은 상대의 말을 중간에 끊거나 대놓고 수작을 걸며 부적절한 접촉을 시도하는 경향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지 않으며 적대적이거나 모욕감을 느끼게 하는 태도를 취했다. 게다가 타인의 욕구와 태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능력도 권력과는 공존하기 어려운 것으로 밝혀졌다. 힘깨나 쓴다는 사람들에게 이마에 E자를 써보라고 요구하는 절묘한 실험이 있었다. 이들이 이 문자를 보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시각에서 쓰는 빈도는 보통 사람들에 비해 세 배나 높았다. 하지만 권력은 타인에 대한 책임감과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건설적인 행동방식을 낳을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도 있다.
 
p.106
오늘 날의 연구는 죄의식과 수치심을 분명하게 구분한다. 부끄러움은 사람들 앞에서 더욱 가중되지만 죄의식은 직접적인 사회 환겨에 민감한 감정이 아니다. 죄의식은 종종 회복을 추구하는 태도, 즉 피해자에게 보상을 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는 행동과 연계된다. ... 죄의식을 자극받은 사람은 돈을 타인과 나누는 상황에서 타인에게 더 많은 돈을 내어준다는 연구도 있다. 주목할 점은 수치심은 죄의식과 달리 자기중심적인 감정과 타인에 대한 적의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어떤 실험은 참가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고 한쪽은 죄의식과 관련된 일화를, 다른 쪽은 수치와 관련된 일화를 떠올리게 했다. 첫번째 집단응ㄴ 타인의 문제에 더 관심을 보인 반면에 두번째 집단은 자기 문제에 집중하느라 남들은 안중에 없는 듯했다.
 
p.110
당혹감은 수치심이나 죄의식과는 다른 감정이다. 당혹감은 주로 관습적 규칙을 위반할 때 발생한다. 한창 회의가 진행 중인데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남들에게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났다고 상상해 보라... 당혹감은 우리의 사회적 이미지가 어긋날 때 비롯되며 일시적으로 자존감을 떨어뜨린다. ... 당혹감도 여타의 도덕적 감정들이 그렇듯 사회적 편입의 표식이다. 교수들은 질문에 곧바로 대답을 못하고 당황해하는 학생을 덜 공격적으로 본다. 당혹감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은 그 사람이 어떤 사회적 규범을 어겼는지 의식하고 있음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쓴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기가 방금 저지른 일에 당황해 하는 사람들은 대개 그 일을 목격한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사과를 한다. ...
 
p.145
모방은 사회의 윤활제
- 인간의 거울 뉴런은 원숭이의 거울 뉴런보다 그 수가 훨씬 많다. 그래서 타인의 혐오스러워하는 표정을 보면 우리 뇌에서도 불쾌한 냄새를 맡았을 때에 관여하는 바로 그 영역(뇌섬엽)이 활성화 된다.
표정의 자동 모방은 모방된 표정이 가진 감정을 불러오기 쉽다. 19세기 말에 윌리엄 제임스는 그저 어떤 활동을 보고, 생각하고, 상상하기만 해도 그 활동을 실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관념 운동성의 원리'를 주창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에게 숟가락으로 먹을 것을 떠먹이면서 아이가 입을 벌리면 우리도 따라서 입을 벌리곤 한다. 마찬가지로 성난 표정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인위적으로 표정ㅇ르 막아버리면 표정의 피드백 현상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보톡스 주사를 눈썹 부위에 놓아서 분노의 표정에 이용되는 근육을 마비시키면 분노에 관여하는 뇌 영역에서 실제로 그 영향이 나타난다.

p.150
모방은 행동규범의 강력한 습득 기제다. 이러한 습득은 아이들의 기질에 따라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어떤 아이는 자기 주위 사람들을 주도면밀하게 모방하기 좋아하는 반면, 그러한 본보기에 다소 무딘 아이도 있다. 미네소타 대학의 연구자 데이비드 포먼은 엄마들에게 장난감을 정리하거나 물을 한 잔 가져다주는 간단한 일을 기꺼이 해 보이고 나서 아이도 똑같이 그 일을 따라 하게끔 유도하라고 했다. 아이들의 태도를 관찰하니 엄마를 유독 잘 따라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2년 후에 다시 그 아이들을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엄마를 잘 따라 했던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던 아이들에 비해서 탁자 위의 장난감을 만지지 말라든가 어떤 상자를 열지 말라든가 하는 지시를 잘 지켰다. 또 이 아이들은 손을 대자마자 장난감이 망가진다든가 하는 (의도된) 상황에 처했을 때 자책하고 미안해하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주었다.

사회 환경이 폭력의 무대가 되어버리면 폭력적 행동은 전염병처럼 퍼져나간다. 범죄학 자료 중에서 또래집단이 범죄 확산에 미치는 효과만큼 신뢰도가 노은 자료는 없다. ... 성인 범죄의 가장 믿을 만한 통계지표는 범죄행위에 가담하거나, 범죄를 계획한 바 있거나, 반사회적 태도를 보이거나, 소년범죄 전적이 잇는 친구들이 있는가에 달렸다. ... 부정적 행동의 모방만 고려할 수는 없을 것이다. 행동 모방 원칙은 건설적 행동에도 확실히 적용된다. 한 사람의 협력 행동이 전혀 교류가 없었던 다른 사람들에게로 확산되는 양상은 실험을 통해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타성도 가끔은 폭력 못지않게 맹목적이다.

실존하는 모데만이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마땅한 순리, 이를테면 남성의 본분과 여성의 본분 따위를 가르쳐주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도 하나의 모델이 될 수 있다. 연구자들은 초등학생 권장도서 120권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아동문학 장르에 뚜렷이 나타나는 전형이 있음을 밝혀냈다. 아동물의 여성 등장인물은 모성의 역할을 구현하는 경우가 많고(40퍼센트)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적었다. 그녀들은 직업이 있더라도 사회적으로 크게 인정받는 직업이 아니거나 몇가지 전형적인 직업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반면에 남성 등장인물은 주로 집 밖, 특히 공공장소에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남성은 활동적이고 용기가 필요한 역할을 맡고, 여성보다 훨씬 다양하고 높이 평가받는 직업에 종사했다.

p.154
조건화는 수많은 도덕적 기호를 결정한다. 실험을 수단으로 인간의 도덕적 기호를 개발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마땅한가는 의문의 여지가 있으나 어쨋든 개인의 취향에 속하는 기호가 대단히 일찍 조건화된다는 사실은 입증할 수 있다. 소위 '평가적 조건화'에 대한 연구들은 누구라도 베이지색 볼펜보다 파란색 볼펜을 더 좋아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볼펜을 손에 쥐었을 때 기분 좋은 배경음악이 흘러나왔다면 그 볼펜은 유쾌한 기분과 연결된다. 별 의미 없는 편지를 읽더라도 그 순간 얼음장 같은 찬물에 손을 담그고 있다면 그 편지는 불쾌한 기분과 연결된다. 같은 맥락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에 불쾌한 연상 작용을 개입시킴으로써 전혀 모르는 이들이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게 유도할 수도 있다. 반면에 자기 어머니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함부로 대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이러하 평가적 조건화는 뿌리 깊게 각인되지 않은 대상에 한해서만 가능하다. 뱀을 무서워하지 않는 원숭이들에게 뱀 공포증을 전염시키기는 쉽지만 원숭이들에게 꽃에 대한 두려움을 주입시킬 수는 없다. 집단 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백인이 흑인을 무서워하게 하거나 흑인이 백인을 무서워하게 하기는 비교적 쉽다. 하지만 흑인 혹은 백인이 자기와 같은 집단에 속하는 구성원을 무서워하게 만들기는 훨씬 어렵다.

p.156
도덕규범을 학습하는 능력은 개인의 인성과 심리에 뿌리 내린 근본적 특성들에 의해 조정된다. 아이는 뭐든지 빨아들이는 압지도, 무슨 모양으로든 빋을 수 있는 반죽도 아니다. 아이의 도덕적 기질은 매우 일찍 발현되기도 하며, 부모의 사회화적 행동방식이나 그 효력에 대해서도 주체적인 힘을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화는 쌍방향의 역동적인 방식으로 구상되어야 한다.

p.157
 지금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생물학적 반응성 지표들은 보상과 처벌의 수용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실제로 아주 어릴 때 겁이 많고 민감했던 아이일수록 만 5세에 도덕적 의식을 더 강하게 표현한다.


p.163
 개인의 도덕적 발전이 인지능력, 언어능력의 증강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개인이 선호하는 도덕적 추론과 지능지수 및 언어능력, 논리력 사이에는 실제로 상당한 관계가 있다. 타인의 시각과 욕망을 이해할 수 있느냐느 도덕적 발전의 결정적인 전제조건이다. 여기에 타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타인의 의도를 추정하는 능력도 보조를 같이 한다.

p.169
술을 마셨을 때에는 도덕적 추론이 단순해진다. 집단의 리더가 단순한 추론 방식을 채택한다면 그 집단의 구성원들도 그럴 확률이 높다.
p.170
콜버그 모형에서 높은 단계에 잇는 사람들은 유독 정직했다. 이들은 실험실에서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동안 아무도 모르게 부정행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도 꿋꿋이 그 기회를 못본 척 했다. 하지만 이들이 사회적 압력과 순응에도 그렇게 꿋꿋했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예를 들어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상황에서 권위에 대한 복종은 모든 사람에게서 (즉, 도덕적 추론 단계와 무관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도덕적 추론은 행동과 연결되어 있으나 이 연결이 우리의 생각만큼 직접적이지는 않다고 하겠다.

p.171
사회적 관습 및 관례와 도덕규칙 사이의 구분은 어떻게 발달하는 것일까? 사회적 관습은 아이가 성장하는 사회집단 내에서 암묵적 지시들을 통해 알게 되지만 도덕규칙은 경험 그 자체, 특히 자기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결과를 관찰함으로써 논리적으로 도출된다. 피해자를 확인하거나 자기가 직접 피해를 당해보면 도덕과 관련된 규칙들을 형성하는 데 좋은 자극이 된다.

p.173
요컨대 인간은 규범이 여러 유형을 구분할 수 있고 이러한 능력은 아마시 공동체처럼 극단적으로 규정된 문화의 틀 안에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p.176
펜실베이니아 대학 폴 로진 교수 팀의 연구는 접촉 공포와 같은 원초적 현상들이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을 보여주었다. 특히 오염과 혐오에 관한 연구는 정신에 대한 생각과 체액에 대한 생각이 그리 동떨어져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했고, 콜버그와 투리엘의 접근이 간과했던 측면을 제대로 조명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어떤 행동들은 타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지 않고 개인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설명되지 않는데도 비열한 짓으로 간주되고 혐오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 비판은 콜버그와 투리엘 모두에게 유효하다. 왜냐하면 콜버그와 투리엘의 이론은 지문을 거친 추상적 판단의 우위를 전제하지만, 사실 개인이 감정에서 출발하여 판단의 방향을 정하고 그 후에 이 판단을 정당화하는 경우도 매우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따금 어떤 도덕적 문제에 대해 근거를 생각해보기도 전에 스스로도 놀랄 만큼 단호한 판단부터 내뱉는다.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주는 실험이 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지문을 읽게 했다.
 "마르크와 쥘리는 남매 사이다. 남매는 여름에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남매는 바닷가 오두막에 단둘이 있게 됐고 둘이서 섹스를 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모두에게 전혀 새로운 경험이 될 터였다. 쥘리는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었지만 마르크는 만약을 위해 콘돔을 사용했다. 두 사람은 만족스러운 섹스를 했지만 다시는 그러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날 밤 일은 두 사람만의 비밀이 되었고 그들은 더욱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매가 그런 일을 한 것은 나빴을까?"
 실험참가자들은 대부분 마르크와 쥘리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했지만 그러한 판단을 한 근거를 대면서 기묘한 어려움에 부딪혔다. "뭐라고 설명은 못하겠어요. 하지만 그건 잘못된 일인 것 같아요."와 같은 주장만 되풀이 했다. ... 이처럼 부도덕한 행위에 먼저 반감을 느끼고 그 후에 반감을 정당화하는 근거들을 차즌 경우가 있다. 그러한 근거들을 찾고자 하는 욕구는 가끔 '자기정당화'에 해당하는 논증을 낳기도 한다.

p.182
피니어스 게이지 말고도 뇌손상으로 과학적 연구에 빛을 던져준 환자가 최근에 한 명 더 등장했다. 신경과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가 관찰한 엘리엇이라는 환자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엘리엇은 성공적인 삶을 살던 30대 남성이었으나 뇌막종 때문에 전전두피질을 상당 부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수술은 성공했으나 엘리엇의 일상적 행동이 크게 변하면서 불행이 시작되었다. 엘리엇은 시간을 제대로 운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무분별한 부동산 투기에 빠졌으며 두 번 이혼했다. 그러나 일련의 테스트 결과, 엘리엇의 지각능력, 단기기억과 장기기억, 이해력, 언어능력과 계산능력은 여전히 건재한 것으로 밝혀졌다. 아마시오는 엘리엇의 도덕적 능력을 콜버그 모형에 따른 도덕적 추론 단계 측정도구를 사용하여 평가했다. 이 평가에서 엘리엇은 4단계에서 5단계(연령대 평균 수준을 웃도는 수준인) 사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엘리엇의 사례가 시사하는 바는 그 후에 여러 연구들로 확인되었다. 고도의 도덕적 추론 능력을 지닌 사람도 얼마든지 개인적 삶에서 도덕적 문제가 있을 수 있다.

p.183
폭주하는 전차의 딜레마
 탈선한 전차가 내리막길을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이대로라면 저쪽에서 일하고 있는 다섯명의 일꾼은 전차에 치여 죽고 말 것이다. 당신은 선로 변경 스위치를 눌러서 그 다섯 명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저쪽에서 길을 건너는 행인 한 명이 전차에 치여 죽고 만다.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응답자의 90퍼센트는 스위치를 눌러야 한다고 했다. 이러한 대답은 전형적인 공리주의의 추론 방식에 입각해 있다. 다섯 사람의 목숨이 한 사람의 목숨보다 가치 있으니 그 한 사람이 희생당할 수도 있다느 논ㄴ리다. 이제 이 딜레마를 조금 다른 버전으로 만나보자.
 당신이 다리 위에서 철로를 내려다보는데 바로 옆에 뚱뚱하고 덩치가 좋은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을 다리에서 철로로 밀어버리면 폭주하는 전차를 막을 수 있다. (당신은 체격이 빈약하기 때문에 스스로 뛰어내려봤자 전차를 막을 수 없다.) 이 경우에도 한 사람을 희생시켜 다섯 사람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전차의 딜레마를 이러한 버전으로 제시하면 응답자의 90퍼센트가 아무리 다수의 인명을 구하는 일이라지만 사람을 '수단'으로만 사용할 수 있느냐며 소위 '의무론적' 입장을 취한다. 두 버전 모두 한 사람만 죽으면 다섯 사람이 살 수 있다. 그런데 왜 응답자들은 딜레마가 어떤 식으로 제시되느냐에 따라 이처럼 상이한 태도를 보이는걸까?
 조슈아 그린과 그의 동료들은 신체적 접촉의 역할을 규명하는 연구를 실시했다. ... 연구팀은 '레버'나 '다리'같은 세부사항이 감정이 동원되는 수준의 차이를 만든다고 보았다. 신체적 접촉과 뚱보를 희생시킨다는 의도는 그 행동을 용인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다리에서 누군가를 밀어버린다고 할 때에는 감정의 프로세스를 관장하는 뇌영역이 활성화되지만, 선로변경 스위치를 누른다고 생각할 때에는 그 영역이 활성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감정이 개입할 때에는 "사람의 목숨을 희생시킨다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거대 원칙에 입각한 판단이 나오고, 감정이 개입하지 않을 때에는 "한 명보다는 다섯 명"이라는 공리주의적 판단이 우세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랫도안 철학자들은 도덕적 판단에서 감정이 담당하는 역할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 중에서도 흄과 칸트는 서로 대조적인 입장을 보였다. 흄은 인간의 판단에 감정이 항상 개입해 있으니 그 둘을 완전히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반면에 칸트는 순수이성을 동기로 삼지 않는 판단은 모두 의심스럽게 여겼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다. 심리학에서도 판단해야 하는 딜레마의 내용과 무관하게 감정의 효과를 연구한 작업들이 있었다. 일례로 딜레마를 접하기 전의 개인의 감정 상태를 실험환경에서 조작한 결과, 도덕적 판단이 감정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다리 버전의 딜레마는 공리주의적 판단을 부정적으로 보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린은 다리 버전의 딜레마를 제시하기 전에 실험참가자들에게 긍정적인 기분을 조성함으로써 그러한 부정적 효과를 완화할 수 있었다. 실험참가자들을 두 집단으로 나누어 한쪽에만 유쾌한 영화를 보여주었다. 그 후로 두 집단은 똑같은 딜레마(다리 버전)을 접했지만 유쾌한 영화를 본 집단은 그렇지 않은 집단에 비해 공리주의적 판단을 더 많이 내놓았다. 또 다른 연구에서는 테스토스테론을 주입하고 그 효과를 살펴보았는데, 이때에도 감정적 차원을 덜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공리주의적 판단으로 기우는 양상이 나타났다.

p.186
우리는 별 수 없는 '판단기계'들이다. 인간은 새로운 정보나 대상을 접하는 순간마다 평가를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의식적인 분석이 시작되기도 전에, 무의식적인 정서적 정보들이 저절로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고 접근(좋다) 혹은 회피(싫다)가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그 후 정보들은 좀 더 완만한 추론 과정에 따라 재배치된다. 우리는 이 때에 비로소 논증을 검토하고, 기댈만한 증거를 찾고, 논리적 관계를 수립하는 '추론 단계'에 이른다. 이 단계가 언어적인 설득력을 발휘하기는 하지만 최초의 감정적 평가만큼 결정적이지는 않다고 볼만한 증거가 두 가지 있다.
 첫번째는 정서적 정보가 뇌에 먼저 도달한다는 것이다. 정서적 정보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나머지 과정 전체를 물들이고 이 최초의 평가에 부합하는 논증들을 불러오는데 공헌한다. 이 평가 단계들은 추론처럼 투명하지가 않다. 이 과정은 부분적으로 개인의 의식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교정할 수 없다. ...
 추론이 판단의 키잡이가 아니라는 두번째 증거는 개인이 제시하는 이유들이 대개 진정한 행위의 동기와 무관한 귀납적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한 실험에서 학생들에게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평점을 매기게 했다. 학생들이 영화를 보는 동안 밖에서 기분 나쁜 전기톱 소리가 계속 났다. 나중에 학생들에게 불쾌한 소음이 그들의 평가에 영향을 주었는지 물어보자 대부분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음 없이 영화를 보고 평점을 매긴 학생 집단과 비교한 결과, 두 집단의 평가에는 아무 차이도 없었다.
 반대로 어떤 영향들은 굉장한 차이를 만드는데도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렵다. ... 우리는 시련에 대한 자신의 반응을 잘 판단하지 못하는 편이다.

p.190
혐오의 심리학

 잼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이제 오랫동안 찬장에 처박아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잼 병을 열어보자. 뚜껑을 여는 순간, 우리 얼굴에는 전형적인 표정이 떠오를 것이다. 코를 찡그리고, 콧구멍을 벌름거리고, 윗입술과 턱이 들려올라가고, 눈썹 안쪽이 살짝 처지는 바로 그 표정. 그게 바로 혐오의 표정이다. 음식물은 부패 여부를 떠나 자주 혐오의 원인이 된다. 그러한 혐오는 일종의 위험 신호, 우리가 아무거나 집어먹지 않게 하는 일종의 파수꾼 역할을 한다. 게다가 실제로 쉽게 혐오감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질병에 걸릴 확률이 낮다고 한다. 혐오감을 관장하는 뇌 영역에 손상을 입은 사람들, 소위 클뤼버부시증후군 환자들은 먹어서는 안 될 것, 이를테면 구두약이나 배설물을 입에 가져가곤 한다.
 북미에서 실시된 연구에 따르면 혐오는 특히 9개 영역(음식, 신체분비물, 동물, 특정 성적 행위, 피부 및 신체 표면의 손상, 불결한 위생상태, 불쾌한 사람과의 접촉, 도덕적 과오)에서 일어나기 쉽다. 혐오감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신체적 혐오와 정신적 혐오는 굉장히 비슷하다. 우리는 혐오를 표정이나 신체적 반응으로 나타내는데 이때의 표정이나 신체언어는 썩은 고기 냄새를 맡았을 때나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게 됐을 때의 반응과 매우 유사하다. 사회 혐오에 대한 한 연구는 미국의 네오나치주의 영화를 보고 나서 혐오감을 느낀 사람들이 실제로 그에 해당하는 신체적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최근 신경영상학 연구는 신체적 혐오와 정신적 혐오가 전두엽과 측두엽, 전측뇌섬엽을 활성화시키는 부분이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도 보여주었다. 연구자들은 불의가 뇌에서 혐오반응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실험참가자들에게 게임을 제안했다. 이 게임에서 A(제안자)는 돈을 마음대로 분배할 권한을 갖고 B(반응자)는 그 제안을 수락할 권한만 있다. 대부분의 경우 A는 3분의 2는 자기가 갖고 3분의 1은 B에게 주겠다고 제안했다. B가 제안을 거부하면 A와 B는 둘 다 돈을 못 받는다. B가 제안을 수락하면 A가 분배한 대로 돈을 나눠 가질 수 있다. 이 게임을 하는 동안 B의 뇌영상을 찍어서 분석했는데 B가 A의 제안을 수락하든 수락하지 않든 그의 전측뇌섬엽이 활성화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달리 말해, 부당한 입장에 있다고 느끼는 인간의 뇌는 혐오를 느낄 때와 똑같이 반응한다는 얘기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형평성을 파악하는데 관여하는 뇌 영역을 전자파를 이용하여 일시적으로 교란시켰더니 B가 A의 제안을 거부하는 횟수가 훨씬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p.194
어떤 실험에서 참가자들에게 과거의 수치스러운 행동을 떠올리게 해싸. 그들의 일부는 이 단계를 마치고 물티슈르 손을 닦을 수 ㅇㅆ었지만 나머지는 그런 중간 과정 없이 바로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다음 단계에서 그들은 어느 박사과정생을 위해서 보수 없이 실험에 참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손을 씻고 온 사람들은 이 학생을 돕는 데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으며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도덕적 차원에 덜 연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근 연구는 실험참가자들이 손을 씻고 나서 포르노그래피나 불륜에 대해 좀 더 엄격한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p.195
우리 머릿속에서 더러움과 악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듯이 아름다움과 선도 훌륭한 한 쌍을 이룬다. 이것은 문학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 주제다. ... 아름다운 얼굴이 주는 즐거움은 일상에서도 무의식적인 영향을 미친다. 누군가를 도와줄 때에도 우리의 이타적 행동은 상대의 매력에 휘둘린다. 매력적인 사람이 도움을 얻기 쉬운 이유는 우리가 매력적인 사람에게 고마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 이러한 경향은 심지어 아무 검증을 거치지 않고 타인의 도덕적 자질을 판단하게 한다. 우리는 종종 신체적 매력이 뛰어난 사람은 특별히 정직하고 친절할 것처럼 생각하고, 못난 사람은 일탈자처럼 여긴다. ... '예쁜 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고에도 물론 예외는 있다. 예븐 사람은 경박하고 이기적이며 겸손함이 부족하다는 편견에 희생되기도 한다. 특히 여성이 지휘하는 입장에 설 때에는 미모가 불리하게 작용하기도 한다.

p.201
어느날 저녁, 바다를 향해 말을 타고 가던 한 남자가 길가의 여인숙에 들렀다. 그는 말에서 내려서 여느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문 옆 나무에 말을 매어놓고 여인숙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이가 곤히 잠든 자정에 도둑이 이 여행자의 말을 훔치러 왔다. 남자는 다음 날 아침에야 말을 도둑맞을 줄 알았다. 그는 말이 사라진 데 한탄하며 도대체 누가 말을 훔쳐갈 생각을 했는지 참 안타깝다고 했다.
 여인숙에 묵고 있던 다른 손님들이 남자의 주위로 몰려들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첫번째 손님은 말을 마구간 밖에 매어놓다니 당신이 어리석었다고 했다. 두번째 손님은 말에 족쇄도 채워놓지 않았다니 어리석었다고 말했따. 세번째 손님도 말을 타고 바다에 가려 했다는 것 자체가 아무리 생각해도 어리석다며 남자를 책망했다. 네번째 손님은 원래 게으르고 걸음이 느려터진 사람이나 말을 타고 다니는 거라며 비아냥거렸다.
 남자는 놀라고 기가 막혔다. 결국 그는 이렇게 역정을 내고 말았다. "이보시오, 내가 말을 도둑맞았다고 해서 모두들 내 흠을 들추기 바쁘구려! 하지만 어찌 이럴 수 있소? 내 말을 훔쳐간 그 놈을 책망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구려!" - 칼릴 지브란

- 역사를 훑어보면 '도덕적 위반이 신체에 나타난 결과'가 매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여서이 생리 중에 성관계를 하면 한센병, 뇌수종, 생식기기형을 앓는 아기를 낳는다고 했다.

우리는 괴로움을 싫어하지만 남들이 괴로워하는 것도 싫어한다. 태어난지 얼마 안 된 아기도 다른 아기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울음을 터뜨린다. 그런데 녹음기를 이용해서 아기에게 자기 울음소리를 들려주거나 다른 시끄러운 소리를 들려주면 그렇게까지 동요하지 않는다.

타인의 울음이나 괴로워하는 태도에 대한 반응으로 나타나는 감정이입은 남성보다 여성에게서 더 두드러진다.

p.202
자연계에는 어느 한 생명체가 괴로워할때 그 동족들이 힘을 합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넘쳐난다. 이러한 결속력은 집단의 규모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프란스 드 발은 이 현상을 적자생존의 법칙과 대비시켜 '또 다른 다윈주의'라고 불렸다. (안타깝게도 적자생존은 다윈의 사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프란스 드 발은 그의 저작에 동물들의 결속행위를 보여주는 수 많은 예들을 동원한다. ... 부상자와 약자에 대한 지원은 종종 매우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작용하는 행동규범이다. ... 그러나 이런일이 늘 가능한 것은 아니다. 유엔국제아동기구와 세계식량기구의 통계에 따르면 매일 18000명의 아이가 굶어 죽어가고 있다. 참을 수 없는 이 상황을 견디는 방법의 하나는 얼른 잊어버리는 것, 소위 '맹점scotoma'을 통하여 자신의 관심에서 배제하는 것이다. 맹점 기제에 대한 연구에서 학생들에게 '공정한 세계'에 관한 믿음을 측정하기 위해 고안된 설문지를 배부했다. "학교의 성적 평가는 합당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라든가 "죄 없는 사람이 감옥에 가는 일은 극히 드물다"와 같은 문항들로 이루어진 설문지였다. 그 후 학생들에게 앞으로 각자 정해진 이동경로에 따라 다른 장소로 옮겨달라는 공지사항을 전달했다. 학생들의 이동경로에는 세계의 빈곤과 기아 문제를 호소하는 전시물들이 걸려있었다. 설문이 끝난 후 학생들에게 이동하는 동안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학생들일수록 이 전시물들과 관련된 요소들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부당하게 굶주리는 타인들의 존재는 아마도 그들의 믿음에 위협이 되지 않았을까.
...
우리는 잘 모르는 피해자들이 불행을 자초했다 싶을 때에는 심각한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지나친 흡연 과음, 속도위반 때문에 폐암, 간경변, 불의의 장애를 겪고 있다는 얘기를 들어도 크게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한 불행이 개인의 절제와 의식으로 피할 수 있는 일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 루소가 어느 편지에서 썼듯이 "우리는 대부분의 신체적 질병을 우리 탓으로 여긴다." 다양한 질환의 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병이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환자는 훨씬 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는다.
... 피해자에 대한 판단을 조율하는 요인들은 그 밖에도 많다. ... 하지만 왜 그토록 많은 피해자들이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떨어졌을 뿐인데도 부정적인 판단의 대상이 될까? 그 이유는 설명을 찾고, 가급적이면 원흉을 지목하려는 욕구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오히려 피해자가 예상치 못한 뭇매를 맞는 것이다. 사고를 '당한' 운전자는 사고의 피해가 클수록 비난 받는다. 피해자는 그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증거를 사후에 찾아 들추는 사람들 때문에 또다른 피해를 입는다. 성폭행 피해자의 상황 진술에서는 평소 아무 문제도 되지 않거나 오히려 좋게 받아들여질 법한 요소들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어떤 피해자 집단이 부정적인 평가를 당하면 결국 그 집단 전체가 그런 생각에 동화될 가능성이 높다. 피해자가 된 것도 모자라, 비판을 내면화함으로써 붖어적인 감정들까지 떠안는 것이다. 피해자 집단에서 종종 나타나는 이러한 잠재적 거부는 2차 피해를 야기한다. 강간, 가정폭력, 질병, 자연재해, 대형 사고의 피해자들이 자책에 시달리는 경우는 매우 많다. 피해자가 어떤 식으로 자책하느냐를 보면 그 사람이 시련을 얼마나 잘 극복할 수 있는지 예측 가능하다. 자신이 한 행동을 자책하는 피해자가 자신의 전반적인 인격을 비난하는 피해자보다는 전망이 밝다.

p.212
 연구자들 역시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위험한 성관계를 더 많이 고려하게 된다는 것을 인정했다. 반대로 죽음을 '떠오리는 것'은 규범을 더 잘 지키려는 역설적인 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실험참가자들에게 죽음에 대한 연상을 유도했더니 오히려 규범체계가 활성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실제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면 자선 단체에 더 많은 돈을 기부하고, 집단의 규범을 잘 지키는 사람을 아낌없이 칭찬하며, 규범을 위반한 사람을 더욱 가혹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p.213
아주 어린 아이들은 부엌 찬장에서 몰래 잼을 꺼내려다가 컵 두개를 깨뜨린 아이보다 엄마를 도오주려다가 컵 여섯 개를 깨뜨린 아이가 더 나쁘다고 생각한다.
 최근의 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인간이 도덕적 의도를 구분할 때 측두-두정집합이라고 하는 특정한 뇌 영역이 활성화된다고 한다. 그런데 자성을 이용하여 이 부분의 활성화를 억제하면 의도적이지만 심각한 결과를 불러오지 않는 행위와 의도적이지 않았지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 행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p.215
워털루 대학의 멜빈 러너는 실험참가자들에게 반대편에서는 볼 수 없는 유리창을 통해서 두 사람이 함께 과제를 수행하는 모습을 지켜보라고 했다. (이 두 사람은 배우들이었다.) 수행 과제는 에너그램(단어나 문장을 구성하고 있는 문자의 순서를 바꾸어 다른 단어나 문장을 만든 것)을 푸는 것이었고 두 사람의 공헌도는 서로 비슷했다. 실험참가자가 예산상의 이유로 두 사람 중 제비를 뽑아 당첨된 사람에게만 사례를 지급할 것이라고 말해두었다. 마지막으로 실험참가자들에게 그 사람들의 작업에 대한 평가를 부탁했다. 실험 결과는 제비뽑기 결과가 공헌도에 대한 지각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사례를 받지 못하는 사람이 어느 쪽이든 간에 그 사람은 공헌도가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 피해자를 업신여기는 태도가 실제로 정의를 표현하려는 욕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준 실험이 있었다. 실험참가자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은 보상이 돌아가게 하려는 동기에서 고통을 참는 피해자의 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공정성을 추구하는 관찰자 입장에서는 이러한 상황이 위협이 될 수 있다. 실제로 피해자를 낮게 평가하는 태도는 이러한 상황에서 극대화되었다.
.. 이러한 현상을 '공정한 세상' 효과라고 부른다. 우리는 세상이 공정한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사건에 대한 판단도 '뿌린 대로 거둔다'는 생각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왜곡시키고는 한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실험참가자들이 피해자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참가자들에게 피해자의 입장을 상상해봐고 하면서 감정이입을 유도한 경우가 그러했다. 피해자의 입장에 서보도록 유도하면 피해자를 경시하는 효과는 사라진다. 그렇지만 피해자와의 동일시가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다. 피해자가 관찰자와 동이한 특징을 지닌다면 관찰자가 위기감을 더 크게 느끼기 때문에 그러한 유사성이 없을 때보다 더 심하게 피해자를 업신여길 수 있다. 게다가 피해자가 가까운 사람일수록 감정이입은 두드러진다.

p.218

공정한 세상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들의 성향을 파악하기 위해 개발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실제로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일수록 실험 상황에서 피해자를 업신여기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연구자들은 설문조사를 통하여 공정한 세상을 '믿는 자'들의 프로필에 대해 다양한 정보를 얻었고 그러한 믿음이 연령, 성별, 사회계급과 약간은 관련이 있지만 단순히 어떤 보수이데올로기나 종교적 세계관으로 싸잡아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공정한 세계에 대한 믿음은 에이즈 환자, 극빈층, 강간피해자와 노숙자, 실업자, 장애인, 노인에 대한 경멸과도 관련이 있다. 이러한 설문 측정의 흥미로운 변화 중 하나는 개인적 적용과 일반적 적용을 구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이 '나'에게 ㄱ옺어하고 믿는가와 세상이 '남'들에게 공정하다고 믿느냐는 별개다.
 개인적 적용- 세상이 나에게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이 거둔 긍정적 결과들과 관련이 있다.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이 투철한 사람일수록 삶에 의미가 있다고 여긴다. 이들은 비교적 행복한 삶을 누리며 부정적 감정이 적고 자신의 사회적 인간관계에 만족하는 편이다. 일례로 한 연구에서 이러한 사람들은 위협적인 정볼르 접해도 자존감이 실추되지 않으며, 힘든 상황을 잘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에서 말썽을 피우는 청소년들의 경우에도 세상이 자신에게 공정한 편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은 남들이 자신을 놀리는 상황에서 덜 공격적으로 반응했다.
 일반적 적용- 세상이 남에게 공정하다고 믿는 사람들-은 법을 어긴 자에게 냉혹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보는 태도로 이어진다. ...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그러한 믿음이 이타성을 자극하기도 한다. 대학생들에게 맹인을 위한 책 읽어주기 봉사를 부탁해보았다. 일부 대학생들은 시험이 없는 학기 중에 이러한 부탁을 받았고 또 다른 일부는 시험이 한창 진행 중인 학기 말에 부탁을 받았다. 결과를 종합하니 그러한 믿음이 투철한 학생일수록 힘들고 바쁜 학기말에도 봉사에 나서는 비율이 높았다. 다른 학생들은 여유가 잇는 학기 중에나 봉사를 하겠다고 했다. 왜 그럴까? 공정한 세상을 믿는 학생들은 좋은 일을 하면 결국 자기에게 보답이 돌아온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p.221
감정이입은 그 정의상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파악하는 능력이다. 감정이입이 지나치게 고조되면 자기도 우쭐해지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동정심이 발휘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한 연구에서 5~13세 아동들에게 힘든 상황에 있는 아이의 모습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었다. 동영상 속의 아이가 괴로워할 수록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도 괴로움을 느꼈고 주의를 기울였다. 그러나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서 아이들은 감정에 몰입한 나머지 동영상 속의 아이보다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실험 결과는 쉽게 감정이입을 하지만 감정 조절을 잘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실제로 감정이입을 유도당한 상황에서 타인을 잘 도와주지 않는다는 보고와도 부합한다.
 사회복지사, 의료인, 간병인이나 상담사 등이 그 직업에 오래 종사하다 보면 감정적으로 냉혹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 바로 여기에 감정이입의 패러독스가 있다. 피해자에게 감정을 이입할수록 그를 도와줄 확률은 높다. 일례로 타인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심장박동이 빨라질수록 신속하게 도움을 제공하려 한다. 하지만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관찰자는 괴로운 상황을 회피하고 피해자와 거리를 두고 싶어진다. 그러나 이미 도움을 주기로 약속한 상황이거나 피해자가 개인적으로 가까운 사람이라면, 관찰자의 감정 이입이 고조될수록 피해자를 도와야 겠다는 의욕의 수준도 높아진다.

누가 피해자를 비난하는가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의 핵심에는 타인의 어쩔 수 없는 불행을 설명하려는 욕구가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귀인이론에 입각한 정의의 수사학이 그저 자기정당화의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강간범이 피해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인들은 아메리카인디언들의 인간적인 감정을 부정하려는 경향이 있다. 특히 인디언 학살에 대한 책임의식을 자극하자 이러한 양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이같은 정당화의 욕구는 자기 이미지를 타인이나 자기 자신에게 항상 잘 유지하고 싶어하는 태도를 반영한다. 여러분이 어떤 실험에 참여하러 왔다고 상상해보자. 실험 과제의 성패에 따라 불쾌한 전기충격을 받을수도 있는데 그건 그냥 제비뽑기로 정해진다고 하자. 당신과 동시에 실험실에 도착한 다른 참가자도 있었다. 당신과 그 참가자가 차례로 제비를 뽑았다. 당신은 운 좋게 피드백을 면했지만 다른 참가자는 과제의 성패에 따라 전기충격을 받게 되었다. 물론 그 사람이 먼저 제비를 뽑고 당신이 나중에 제비를 뽑을 수도 있었다. 문제는 제비뽑기의 순서에 따라 다른 참가자에 대한 당신의 평가가 달라진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먼저 제비를 뽑았다면 상대의 불운에 어느정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를 낮게 평가할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은 자신을 정당화하려 노력한다. 스탠리 밀그램은 권위에 대한 복종을 연구하면서 파트너가 기억력 테스트에서 실수를 할 때마다 전기충격을 가했던 참가자들이 실험 후에 파트너를 낮게 평가하는 현상을 확인했다. 밀그램은 그 실험에 대해 이런 설명을 내놓았다. "책임은 실수를 범해서 처벌을 자초한 학생에게 떠넘겨진다. 그 학생은 이런 실험에 자원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당하고, 더 고약하게는 아둔하고 고집이 세다고 비난을 당한다. ..." 이때의 심리 기제는 명백하다. 그 학생은 '딱한 녀석'이지만 자업자득일 뿐이라는 것이다.
... 어떤 실험에 따르면, 자존감이 높을 수록 피해자를 업신여기기 쉽다. 자기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때로는 '고통을 차단하는 막'이 되어 감정이입을 봉쇄해버리기도 한다. 이 탄탄한 막은 일종의 가면이기도 하다. 그 막은 기꺼이 완벽한 미덕의 귀감으로서 연추로딜 것이다. 이제 이 도덕극이 펼쳐지는 극장의 심리학적 분장실들을 찾아가보자.

p.228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은 상당 부분 타인의 판단에서 오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 행동이 어떻게 해석될까에 그토록 연연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나의 평판이 곧 나의 진정한 사회적 표상이기 때문에 절대로 평판에 흠집 나는 일을 해선 안 된다. 도덕적 차원에서는 더욱 그렇다. 개인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가치, 타인에게 부여받는 가치를 결정하는데에는 도덕성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운동을 잘하고 머리가 좋고 손재주가 뛰어난 것도 사회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하지만, 타인이 가장 중시하는 인격적 측면은 주로 도덕성과 관련이 있다. 실험참가자들에게 인간을 묘사할 수 있는 300가지 특징이 무엇인지 꼽아보라고 했다. 참가자들이 가장 많이 꼽은 특징은 '정직'이었고 다음으로 '신로', '다정함', '신의', '책임감' 등이 순서대로 나왔다. 37개 국가에서 실시된 이문화간 연구 결과를 종합한 결과, 파트너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자질은 '상냥함'이었다.
 배신자나 배후조종자로 찍힌다는 것은 확실한 위협이다. 모두가 나를 피하거나 따돌릴 거라는 위협 말이다. 재화를 분배하는 게임에서 속임수를 쓴 사람이 그 다음 판에서 배제되거나 처벌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경제학적 연구들은 수없이 많다.

p.229
청렴한 사람은(그가 꼭 이러한 혜택을 의식하고 청렴하게 사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 청렴함으로 인해 많은 혜택을 얻는다. 사회는 장기적 관계를 공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는 도덕적 믿음들을 장려한다. 공정한 세상에 대한 믿음도 그중 하나다.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는 정직하게 보이는 사람이 사업에서도 더 큰 성공을 거둔다고 했다. 칭찬받을만한 행동은 남들에게 지각되어야 한다. 도덕성이 그 자체만으로 사회적 편입과 협동에 이롭다면 그러한 태도가 인간 상호작용의 무대에서 인정받는지를 왜 신경 쓰겠는가?
 사회적 존재는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그러한 존재로서 지각되는 것도 중요하고, 집단 속에서 형성된 자기 이미지를 끈지기게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존재는 지각되는 것이다. (Esse est percepi, 주관적 관념론 철학자 조지 버클리가 한 말이다.) 우리가 협력하는 이 역할극이 반드시 의도적이고 의식적일 필요는 없다. 물론 심사숙고된 이중성, 계획적인 속임수, 음흉한 위장이 가능한 살마들도 있다. 게다가 연구자들은 이러한 '권모술수에 능한' 인물의 심리를 밝힌 바 있다. 이러한 인물의 특징 중 하나가 바로 타인을 뻔뻔하게 조종하는 능력이다. 부동산 중개, 자동차 세일즈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설문조사에서 권모술수에 능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험경제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거짓말에 능하고,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많이 하며, 파트너를 배신하거나 착취하기 쉽다. 실험실에서의 연구는 이들이 속임수가 들통 났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능력이 보통 사람들에 비해 탁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런 성향은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감지된다. 아동용 설문조사에서 권모술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아이들은 이미 다른 아이들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조종할 줄 알았다. 한 실험에서 아이들에게 이상한 맛이 나는 과자를 다른 친구들이 먹게 해보라고 했다. 설문조사에서 권모술수가 뛰어나다고 평가받은 아이들은 실제로 능청스러운 거짓말로 다른 아ㅣ들이 과자를 먹게 했다.
 위선자의 특징이 정해져 있어서 척 보기만 해도 사기꾼을 가려낼 수 있다면 참 편리할 것이다. 하지만 그 편리한 기능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바람직하지 않게 여기는 심리적 특징들을 무조건 악한 것으로 몰아갈 위험이 있다. 우리는 왕자보다 어린 왕자를 좋아한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우리가 흔히 위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관계상의 병이 아니라 사회적 조건의 결과로 봐야 한다. 이중성은 대개 당사자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며 오히려 그 사람을 지배한다. "가면은 오랫동안 피부에 달라붙는다. 위선은 결국 진심이 되어버린다." 여러 유럽 ㅓㄴ어에서 위선자hypocrite라는 단어는 원래 무대 위의 배우를 가리켰고 라틴어 페르소나persona 역시 무대에서 쓰는 가면을 뜻했다. 우리는 이러한 어원들을 살펴보면서 역할극과 빌려 입는 의상이 도덕적 삶의 중요한 골조가 된다는 점을 깨닫는다. 위선의 문학적 표본 타르튀프는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신의와 겸양의 본을 보이면서 오르공이 자기 가족들을 외면하고 그에게 유산을 물려주게끔 일을 꿈니다. 그러면서도 타르튀프는 스스로 도덕적인 ㅇㄹ망에 불타고 있다고 믿는다.
 "그는 배우의 정신분열을 모른다. 그는 거짓 진심에 불탄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진심 어린 진심이다. 타르튀프는 연기를 하는게 아니다. 분장은 그의 피부가 되었고 가면은 얼굴에 찰싹 달라붙어 더 이상 떨어질 줄 모른다. 타르튀프형 인간은 자신의 미덕을 의심치 않는다."

p.234
 자기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그 잘못을 금기시하는 규범을 가볍게 여기게 되는 현상은 매우 일반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부도덕한 행동의 심각성을 낮추어보는 태도로도 나타난다.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했을 때에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사소한 폭력에서 시작해서 차츰 폭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다가 결국 극단적인 행동까지 저지르게 되는 경우도 많다.

도덕적인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유혹
사회라는 무대의 배우들은 조심성을 잃지 않는다. 비차별주의는 결코 위반해서는 안 될 중요한 도덕적 규범 중 하나다. 어떤 경우에는 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느 염려가 역차별을 낳기도 한다. 그저 남들에게 지탄받으면 안된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렇게까지 될 수 있다. 과거 미국의 한 조사는 특급 호텔에서 드레스코드를 지키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가 살펴보았다. 호텔 식당에 커플이 등장했는데 남자 쪽이 전혀 격식을 차리지 않은 차림이라고 치자. 이 커플이 백인들이라면 흑인 커플일 경우보다 식당 이용을 거부당할 확률이 두 배나 더 높다. 호텔지배인은 격식을 갖추지 않은 손님을 거부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인종 차별주의자로 몰릴까봐 얼마든지 통용될 수 있는 규칙을 흑인 커플들에게는 제대로 적용하지 못한 것이다.
 스팬퍼드 대학의 브누아 모냉과 데일밀러도 최근 비슷한 현상을 연구한 바 있다. 실험 초반에 참가자들은 자신이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어필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직원을 선발하는 과제에서 훌륭한 이력을 제시한 흑인 지원자를 택했다. 그 다음에는 다소 인종 차별적이라는 평판이 있는 경찰 팀의 일원을 선발하는 과제가 주어졌다. 그러자 그들은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기존의 입장이 무색하게도 반드시 백인만 뽑았다. 동일한 모형을 이용한 또 달느 연구에서는 2008년 미국 대선에서 오바마를 뽑았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사람들이 앞서 말한 경찰 팀 일원으로 백인을 선발하는 경향이 오히려 더 높았다.
 사회적 차별이 농후한 의견들을 내놓기 전에 자신은 차별을 분명히 반대한다고 먼저 밝히는 경우도 많다. "저는 인종 차별주의자는 아닙니다."라는 말에서 이미 인종주의를 짐작해도 좋을 지경이다. 이런 수사법이 때때로 통하기도 하지만, 다수에 속하기 싫어하는 살마들에게는 작위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역효과를 낳기도 한다.

p.240
 
원숭이가 높이 올라갈수록
 도덕성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일이 급격히 틀어질 수 있다. 가혹한 역설이지만 스스로 타의 모범이 될 만하다는 생각이 모범적일 수 없는 행동들을 낳는다. 어느 실험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도덕성이 우월하다는 생각을 유도했떠니 타인의 위반 행동에 엄격한 비난을 퍼붓거나 앙심을 품었다. 노스웨스턴 대학의 소니아 새치데바 연구팀은 실험참가자들에게 자신 혹은 타인과 관련하여 과거에 겪은 일을 글로 쓰되 그 안에 '공정한', '관대한', '친절한'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고 했다. 두번째 ㅈ비단의 참가자들에게도 같은 주제로 글을 쓰되 '신의 없는', '탐욕스러운', '못된'(도덕적으로 부정적인 단어들)을 포함하라고 했다. 세번째 ㅈ비단에게는 '책',
'열쇠', '집'(중립적 단어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했다. 그 다음 단계에서 실험 참가자들은 자선 단체에 기부할 기회를 얻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도덕성을 확인한 참가자 집단이 가장 욕심을 부렸다. 첫번째 집단이 나머지 두 집단보다 훨씬 기부를 적게 했던 것이다.
... 실험참가자들에게 약간의 돈을 지급하고 그들이 뭔가 도덕적 행동을 했다고 상상해보라고 했다. 그들은 자신이 도덕적이라는 생각만으로도 훨씬 더 탐욕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같은 맥락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마치고 나올 때보다 고해성사를 하러 갈 때 기꺼이 적선에 응한다.

p.244
개인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뚜렷한 자기인식과 꼼꼼한 대처가 결심을 지키는데 훨씬 유용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는 너무나도 많다. 오디세우스는 세이렌섬 근처를 지나기 전에 부하들에게 자신을 돛대에 단단히 붙들어 매고 자기가 무슨 말을 하든 철저하게 무시하라고 했기 때문에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러한 '선약'은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막고 결심을 실천하게 하는 하나의 수법이다.


p.249
우리는 우리가 성자, 성녀가 아니라고 인정하지만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우리는 착하다고, 나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카라바조, 나르키소스

괴물들은 존재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위협이 되기에는 그들의 수가 너무 적다. 가장 위험한 것은 보통 사람들이다. - 프리모 레비

p.250
악의 평범성이라는 표현은 평범해졌다. 이 표현을 고찰한 책이나 논문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생각 없이 절대악에 결탁하는 군중을 가리키는 '보통 사람들'이라는 표현 역시 마찬가지다. 이 표현은 역사학자이자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나치 친위대 고위 장교였던 아이히만의 경우를 다루면서 제시한 것이다. 아이히만은 딱히 유대인을 증오하지 않았으면서도 조직적인 유대인학살을 주도했다.
 '악의 평범성'은 중요한 관점의 전복을 뜻한다. 이 개념은 피해자뿐만 아니라 가해자에게 주의를 돌리며 그러한 가해자들이 특별히 악한 인간이 아니라 평범한 수백만 인구 중 하나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렌트가 생각한 악의 평범성은 "대규모로 자행되는 범죄 현상으로서 행위 주체의 특정한 악의, 어떤 병, 이데올로기적 신념으로 설명될 수 없다. ... 행위가 아무리 흉측할지라도 그 행위 주체는 괴물 같지도, 악마 같지도 않다." 는 것이다. 이 현상은 사람들이 체제에 맹목적으로 순응한 나머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잘 의식하지도 못한 채 악에 휘말리는 상황을 가리킨다. 단순한 명령의 하수인이 악의 집행자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아렌트느 1961년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아이히만 재판을 다루면서 나치의 고위 간부를 평범한 인간으로 보았다. 아이히만은 증오심이 넘치거나, 가학적인 사람,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꽤 양심적인 사람으로 볼 수 있었다. 비슷한 다른 예들이 있다.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장본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에놀라 게이'의 조종사 폴 티베츠도 아주 평범한 사람이었다. 1968년 3월 16일 베트남 밀라이에서 노인, 여자, 어린이 500명의 학살을 주도했던 윌리엄 콜리도 그랬다. ...

권위에 대한 복종
- 상황적 압박의 파괴력을 가장 잘 보여준 과학적 시도는 아마 예일 대학의 스탠리 밀그램의 실험일 것이다. 밀그램은 빼어난 연구들을 통하여 권위에 대한 복종을 다루었다. 그의 작업 덕분에 사회심리학은 복종에 대한 정치적, 철학적 성찰에 가시적인 성과를 얻었고 학술적 차원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었다. ..밀그램의 실험은 이제 진부할 정도로 유명해져 버렸다.
 스탠리 밀그램은 실험을 위해 20~50세 사이의 평범한 사람들을 선발했다. 참가자들은 기억과 학습에 대한 연구에 협조하는 대가로 몇달러 상당의 사례를 받았다. 그들은 실험실에서 30대 초반의 실험자와 47세의 남성을 만났고 제비뽑기를 해서 누가 교사 역할을 하고 누가 학생 역할을 할지 정했다. 교사는 학생에게 한 쌍의 단어를 기억하게 하고 학생이 오답을 말할 때마다 전기충격을 가해야 했다. 전기충격은 15볼트씩 단계적으로 높아져 최대 450볼트까지 이를 수 있었다. 교사역을 맡은 참가자는 전기충격의 단계에 대해서 미리 설명을 들었다. '가벼운 충격', '중간 단계의 충격', '강한 충격', '매우 강한 충격', '심한 충격', '극심한 충격', '위험', '심각한 위험' 그리고 맨 마지막 단계의 버튼들은 'XXX'라고만 표시되어 있었다.
 실험참가자들은 전기충격기가 어떻게 기능하는지 설명을 들었을 뿐 아니라 직접 45볼트 상당의 전기충격을 경험해보았다. 학생은 의자에 묶인채 오른쪽 손목에 전극을 붙이고 화상을 방지한다는 연고까지 발랐다. 물론 이 학생 역할의 공모자는 아무런 전기충격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교사 역할의 참가자가 전기충격을 가하면 정말로 아픈 것처럼 비명을 지르거나 울부짖는 연기를 했다. 실험자는 교사가 자신을 바라보며 난감한 기색을 보일 때마다 학생이 발을 구르며 몸부림치는 한이 있더라도 미리 정해놓은 대로 실험을 계속해달라는 말만 되풀이하거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실험 결과, 참가자들은 심한 스트레스 상태에서 평균 285볼트까지 전기충격을 가했으며 그중 65퍼센트는 최대 강도에 해당하는 450볼트 버튼을 눌렀다. 실험자가 계속 해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참가자의 80퍼센트가 120볼트 이하의 충격만을 가했다. 이 실험은 심리학 역사상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밀그램의 초기 연구들은 50년 후까지도 수많은 저작들에 영감을 주었는데, 그 이유는 그만큼 이 연구들이 인간 심리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대중에게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 그 밖에 여러 변화를 가미한 실험들이 있었다. 첫번째 실험자가 내린 지시를 두번째 실험자가 나타나 바박했을 때 혹은 다른 참가자들이 실험의 가학성을 문제 삼으며 반항할 때에는 맹목적 복종이 감소했다. 이 모든 결과들은 권위에 대한 복종이 그 상황에 따르는 여러 변수들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p.260
성격이 권위에 대한 복종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기 위해 나는 가짜 게임쇼 <익스트림 존>에 참여한 다양한 직업군의 남녀 참가자들 90퍼센트와 새로운 실험을 해볼 기회를 가졌다...
실험 결과, 참가자가 양심적일수록 피해자에게 가한 전기충격의 강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일례로 가장 양심적이지 않다고 하는 3분의 1이 가한 전기충격은 평균 460볼트였다. 양심적인 사람일수록 권위에 복종하기 쉽다는 이 결과는 아이히만에 대한 한나 아렌트의 기술-진중하고 체계적인 공무원-과도 맞아떨어진다. 상냥한 성품을 지닌 사람들에게서도 비슷한 결과를 볼 수 있다. 소위 친절하고 사근사근하다는 사람들이 (TV프로그램 진행자와 불쾌한 갈등을 겪고 싶지 않아서 그랬는지) 피해자에게 기꺼이 전기충격을 가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관찰은 성격의 특정한 면들이 권위에 쉽게 복종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준다. 친절하고 순리대로 움직일 줄 아는 사람들, 사회에 나무랄 데 없이 편입되어 있는 사람일수록 밀그램 모형과 가까운 상황 안에서 불복종을 꺼려했다. 우리는 이 두가지 특징이 공격성, 항정신성 약물 남용, 위험한 성적 행동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좋은 가장의 자질, 수혈이나 봉사에 적극적인 태도, 높은 학업수준과 야심과 관련이 깊다는 것을 확인했다.
 주목할 만한 결과는 또 있었다. 여성들의 경우, 정치적 소신이 권위에 대한 복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남성들에게서도 이러한 영향은 관찰되었으나 통계적으로 그렇게 의미가 크지는 않았다.) 정치적으로 좌파인 여성이 피해자에게 가하는 전기충격은 평균보다 낮았다. 이 결과는 1972년 캘리포니아 대학의 앨런 엘름스가 확인한 바와 일치한다. 당시에도 우파의 권위주의적 태도를 두드러지게 나타낸 사람들이 권위에 좀 더 잘 복종하는 것으로 나왔다. 서명운동, 불매운동, 집회 참여, 파업, 사무실 및 공장 점거 등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권위에 불복했다.
 따라서 우리의 성격은 권위에 대한 복종에 부정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친다고 하겠다. 우리의 경험들이 미래의 행동을 마련하는 것이다. ... 권위에 복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결정하는 상황적 변수들뿐만 아니라 개인의 과거 경험들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다소 극단적인 신념을 내세우는 집단에 참여한 경험이 유해한 상황을 타개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기도 한다. 그러나 집단에 대한 소속과 집단이 개인에게 부여하는 역할은 또 다른 맹목과 파괴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p.263
우리는 대상을 판단하는 입장의 변화 효과를 '악의 패러독스'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존재들은 곧잘 '낯선 것=나쁜 것'으로 생각한다. 적의와 낯설음이 비슷해질 때에 악의 이미지는 더욱 공고해진다.
...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집단 참여는 개인의 정체성이 약화되고 익명성이 커진다는 효과가 있다. 실험실에서의 여러 연구들이 우리가 집단에 소속감을 느낄 때 고립된 타인에 대한 공격성이 더 커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 실험에서 참가자들을 두 군으로 나누어 한쪽은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고양하고 다른 쪽은 고립되었다는 느낌을 자극했다. 그 후, 실험자는 (일부러) 참가자들을 나무라고 모욕했다. 소속감을 자극받은 사람들은 고립감을 자극받은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으로 실험자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집단이 어떤 개인을 적으로 규정하면 집단 내에서 발생하는 상호 인력과 결속이 개인에 대한 폭력을 통제 불능 상태로 만들기도 한다.

p.266
우리는 권위에 대한 복종을 다룬 연구들을 살펴보면서 곧잘 '나라면 이 실험참가자들처럼 행동하지 않았을텐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도덕성에 뭔가 결여된 점이 있었기 때문에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면섞지 권위에 복종했을 것이라고 짐작하는 것이다. 이처럼 타인의 행동에 고의성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경향은 한결같다. 시카고 대학의 에비 로셋의 연구는 우리가 화나는 일을 설명해야 할 때에 그 일을 우발적 사건으로 여기기보다는 어떤 사람에게 원인을 돌리기 쉽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상황적 원인보다 행위자의 의도를 더 따진다. 왜 그럴까? 한가지 이유를 꼽자면, 개인의 의지보다 행위를 둘러싼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 지적으로 더 수고스럽기 때문이다. ... 따라서 화가 나는 일을 설명할 때에 누군가의 잘못을 먼저 생각하는 것은 사유의 자연스러운 경향이다. 일찍이 괴테도 파우스트에서 악마는 이성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말하지 않았던가.
 

p.268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은 끔찍한 악행과 그 행위 주체의 멀쩡하고 정상적인 모습 사이의 깊은 심연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이 개념은 수많은 오해들을 낳기도 했다. 사이코패스를 척 보고 알 수 없다면, 나치의 얼굴에서 빈정대는 미소를 찾으려 해 봤자 소용없다면, 결국 악이란 예측할 수 없이 불쑥 튀어나와 누구든 덮칠 수 있는 것일까? 하지만 악이 역사적 조건들과 무관하게 아무나 맨 처음 걸리는 놈을 후려친다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아렌트도, 밀그램도 결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간수들을 교화된 인물로 묘사하는 경향은 사실 그들이 보통사람들과 너무나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요즘은 '친절한 간수'인간형이 인기다. 조너선 리텔의 공쿠르상 수상작 착한여신들만 봐도 그렇다. ... 간수를 악의 화신처럼 묘사하는 것도, 반대로 비범한 교양인이자 음악애호가처럼 묘사하는 것도 역사적 자료에서 확인되는 현실과는 ㅗㅇ떨어져 있다. 나치들은 괴물들이 아니었지만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자들"이었다고 프리모 레비는 간단하게 말한다. 가끔은 전직 고문관이나 살인을 저질렀던 사람이 과거의 잘못을 세련되고 우아한 태도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끔찍한 짓거리가 점진적인 준비 단계 없이, 본인의 동의 없이, 자기 만족이나 병적 이데올로기와 무관하게 갑자기 툭 튀어나왔을 거라고 생각해선 안된다.

p.269
타인이 보는 내 모습이 어떨지 떠올려보는 것만으로도, 악에 대한 정의는 달라질 수 있다. 개인이나 집단 사이의 갈등 상황에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이유를 찾기 바쁘지만, 피해자는 상대를 악한 사람으로 몰아가고 자신의 책임을 모면할 근거를 찾기 바쁘다. 실험참가자들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상황의 피해자가 되었던 때와 가해자가 되었던 때를 떠올리게 했다. 그들은 자기가 잘못한 경험을 진술하면서 비록 자신의 과오를 완전히 정당화하지는 않더라도 대개 그 과오를 해명하는 이유나 책임을 덜어줄만한 정황을 언급했다. 반면 피해자 입장에 섰을 때에는 상황에 대한 언급을 줄이고 가해자가 어떤 식으로 도발하고 위해를 가했는가를 자세히 진술했다. 이것이 1장에서 지적한 우리의 한량없는 자기애이다. 우리는 우리가 성자, 성녀는 아닐지언정 비교적 착하다고, 나쁜 것은 우리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잔인한 독재자조차도 조금 힘이 들긴 하지만 얼마든지 자기사면을 할 수 있다.

p.284
자기조절능력이 소진되면-단순히 집중한 탓에 기분이 달라져서 그렇다고 할 수만은 없다- 더 중대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 실험참가자들은 자기조절을 요하는 작업을 마치고 나서 매력적인 이성의 사진을 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또한 부적절한 상황에서 과음을 하게 되기도 한다.
... 이처럼 자기조절능력이 소진되면 이타심을 발휘하기도 어려워진다. 자기조절을 요하는 작업을 수행한 참가자들은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음식이나 돈을 잘 나누어주지 않았으며, 다른 사람을 돕는데 소극적이었고, 기회가 주어지자 기꺼이 속임수를 썼다. 게다가 피곤에 지친 사람들일수록 타집단에 대한 편견이 심하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 자기조절능력은 일반적으로 수면을 취하거나 포도당을 섭취함으로써 회복된다. 최근 암스테르담 대학의 매튜 게일리엇을 중심으로 한 연구진은 이러한 '정신에너지'의 ㅅ애물학적 토대를 밝혔다. 자기조절은 친구와 대화를 나누거나 영화를 보거나 하는 활동들에 비해 포도당을 더 많이 소모한다. 그래서 자기조절이 필요한 과제를 수행한 실험참가자들에게 포도당을 보충해주었더니 자기조절능력이 소진되었을 때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실제로 한 연구에서 자기조절 활동 이후에 타인을 도와주는 행동이 감소하는 현상은 포도당 음료를 마시지 않은 참가자들에게서만 나타났다.
 사회적 고정관념에 대한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를 볼 수 있었다. 자기조절 단계 이후에 고정관념을 드러낼 기회가 주어지자 포도당 음료를 마시지 않은 사람들이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했다. 다른 흥미로운 현상도 관찰되었다. 포도당을 필요로 하는 활동을 자주 할수록 뇌의 포도당 비축분은 늘어났다. 이 때문에 자기조절 연습이 근육운동과 비슷한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리라. 이렇듯 자제력은 쓸수록 발달하는 능력이다.
 
p.299
죽음은 나의 일에서 묘사한 수용소 간수였던 루돌프랑은 끔찍한 구석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의무의 인간'이었다. 이 같은 극단적 순응성, 지나친 경직성에서는 자기통제가 미덕으로 연결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뿐만 아니라 규범에 집착하는 노모패스도 문제라는 얘기다.

p.303
생각해보라. 어떤 상황에서도 타인에 대한 공격을 유발하지 않는 도덕적 이상이 과연 존재할까? 인간은 기본적으로 부화뇌동하는 모방기계다. 우리는 늘 교제에 목말라 있고 타인의 욕구에 민감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우리 자신이 만들어낸 인간사회의 심판관이자 집행인처럼 군다.
... 어린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면서 사회규칙에 대한 추상적 이해와 담론은 변해간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금세 '나한테 유리한 것'으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옿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에게 중요하고 가까운 이들의 생각을 반영하여 구성될 것이며, 이때야 비로소 그들의 생각에 대한 나의 동의가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다. 법과 질서에 대한 존중은 여러가지 개인적 경험, 특히 다양한 집단에 참여한 경험에 의해 더 넓은 시각으로 확장된다. 이때에는 법이 도덕의 최종 지평이 아니며, 창조적인 도덕성을 발휘하여 도덕적 이견을 제시할 수도 있다. ...
 나는 이 책에서 우리가 타인과 강력하게 연결되는 데 감정 체계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강조했다.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그러한 체계에 힘입어 살아간다. 인간의 근본적 사회성은 상호의존성을 낳고, 그래서 우리는 저 사람을 가까이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매 순간 타인을 평가한다. 생후 6개월 된 아기도 적의를 보잉는 사람들보다는 이타적인 사람들을 선호한다.

인문학과 사회과학에서의 연구가 지난 20년간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가르쳐준 것이 있다면 그건 '호모 에코노미쿠스'라는 계산적이고 이기적인 인간상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깨달음이었다. 내가 이 책에서 주장하고자 한 바는 인간의 선행과 악행, 그 모든 행동의 첫번째 동기를 인간의 사회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호모 모랄리스'의 진정한 동기이다. 게다가 그러한 행동이 인간에게 심리적 충족감을 준다는 점에서 도덕의식은 인간 진화의 산물이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p.308
나는 도덕적 사유와 행동을 이해하는데 가장 유용하다고 여겨지는 개념들을 이 책으로 정리하고 싶었다. 그 중 가장 지배적인 개념들에는 사회적 통제에 대한 민감성, 소속에 대한 욕구, 관찰에 의한 모방 기능과 학습능력, 정의와 공감이라는 차원에서의 반성적 능력 등이 포함된다. 나는 또한 도덕적 평가가 우리의 명증한 의식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으며,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에 휘둘리기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 상황이 생각지도 못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도덕적 사유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도 어느정도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마무리하면서 이 말을 덧붙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인간의 지각과 행동에 관여하는 기제들을 선악의 표상과 관련된 것으로 제시하는 것이 인간의 적극적 태도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제시는 "도덕적인 것/부도덕한 것"에 대한 사회적 이해,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잠재적 능력을 확인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또 어떤 면에서는 인간 행동과 사유를 바로잡는 데에도 기여한다. 일례로 위급한 상황에서 목격자가 너무 많으면 방관자가 되기 쉽다는 연구 결과를 접한 사람들에게서는 책임 확산 현상이 한결 적게 나타났다. 반대로 실험참가자들에게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원인에 의해 결정되기 쉽다는 과학적 연구 결과를 전달했더니, 그들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기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 우리는 우리가 동질감을 느끼는 집단의 도덕적 척도에 따라 타인을 판단하고 평가함으로써 그 집단에 더욱 단단히 결속된다. 도덕적 성향은 사람들을 서로 가깝게 해주고 사회적 협력을 끌어내는 최고의 도구이자 대립의 요인이기도 하다. 우리가 도덕적 성향을 조건화하거나 고양하는 것을 규명하고자 노력할 때에 이 성향은 아마 더욱 예리하게 다듬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 도덕성이 전혀 상반되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있다는 것을 알 때, 즉 '선'과 '악'이 가끔은 관점의 차이에서 나온 부실한 근거의 '선포'에 지나지 않으며 이기적인 의도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도덕성에 만족하고 자부심을 품기보다는 명철하고 객관적인 자세로 그것을 바라볼 때 우리의 도덕성은 더욱 완전해질 것이다.
 니체는 말했다. "자신의 부도덕한 짓에 얼굴을 붉히는 것부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간다면 결국은 자신의 도덕성에도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좀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지침을 제시하거나 인간의 선의 혹은 악의 그 자체에 대한 의견을 주장하기보다는 선악에 대한 표상과 연관된 우리의 판단이 행동방식에 미치는 사회심리적 영향들을 분석하고자 했다. 독자들의 타자를 향한 나름의 탐색에 이 책이 새로운 단초를 던져줄 수 있기를 바란다. 타자야말로 인간 도덕성의 근원이자 목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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