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2016. 11. 07

독서/기타 2018. 6. 18. 18:05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로 존재하고 있다.

세상의 천재들 대부분이 자신의 삶에 잠재된 죽음의 능력을 극대화 시키기에, 우리는 그들의 빛을 강렬하지만 짧게 목도할 수 밖에 없다. 마치 불꽃처럼. 그렇지만 와타나베처럼 철저하고 끈질기게 죽음과의 대결에서 다른 길을 선택하는 이들 덕에, 우리는 그들의 빛을 조금이나마 더 구경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에게 허락된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좋다는걸 다시금 일깨워준 책. 커피한잔과 책 한권을 이렇게 평생 나누어가며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마 배우자가 나한테 바란다는 그 소소한 행복이 이런것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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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냥한 폭력의 시대 2016. 11.03

독서/기타 2018. 6. 18. 18:04

제목이 매력적이라 집게된 소설,
강남 교보에서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좀 더 천천히 읽었어도 좋았을 법 한 책.

메마른 분위기, 차분한 공허함 그리고 그 속에 녹아져 있는 우리 시대의 속물성.
먼 곳으로의 여행이 아닌 철저한 우리네 삶으로의 여행

 

 

 

posted by sergeant

 

언론과 지식인의 기만적인 실체에 대한 폭로를 차근차근 이야기 해주는 촘스키의 인터뷰 형식 이야기.

9월 말부터 읽어서 꼼꼼이 차근차근 읽었다.

요즘 같은 때에 좀 더 마음에 두고 새겨야 할 것 같은 내용들.

그리고... 대중의 힘, 깊이있는 커뮤니케이션, 연대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 본다.

 

 


<책 발췌>

 

전자책p.38

나는 개인적으로,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훌륭한 지식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거꾸로 이런 이상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대학교수들과 저술가들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p.44

실제로 수천년 전부터 그래왔지만, 지식인의 역할은 민중을 소극적이고 순종적이며 무지한 존재, 결국 프로그램된 존재로 만드는데 있습니다.

 

p.50

사회가 자유로워질수록 무력을 사용하기가 어렵습니다.

p.51

다시 한번 강조해두고 싶습니다. 사회가 민주화 될 때, 달리 말해서 국민을 강제로 통제하고 소외시키기 힘들 때 엘리트 집단은 선전이란 방법을 동원합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도 하지만, 과학적 수법과 선전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타의 수법까지 동원한 공개적이고 의도된 현상이기도 합니다.

 홍보와 광고, 그래픽 아트, 영화, 텔레비전 등을 운영하는 거대 기업의 주된 목표가 무엇이겠습니까? 무엇보다 인간 정신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인위적 욕구'를 만들어내서, 대중이 그 욕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대중은 서로 소외되어갈 뿐입니다. 이런 기업의 경영자들은 아주 실리적으로 접근합니다. '대중의 삶을 표피적인 것, 즉 소비에 몰두하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인공의 벽을 세우고 대중을 그 벽 안에 가둬 격리시키려 합니다.

 신문과 방송, 광고와 예술 등 어떤 수단을 사용하든 간에 선전 자체는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선전 수법이 나날이 교묘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울 뿐입니다. 예전부터 그 역할은 지식인의 몫이었습니다. 학식과 지식을 지닌 사람들의 몫이었습니다.

 

- 성직자들도 빼놓을 수 없겠죠?

- 물론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등장하는 종교재판소 판사가 단적인 예입니다. 성전에서도 똑같은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가 그 시대의 '지식인'이었을 테니까요.

 

- 그렇다면 선생님은 '지식인'을 어떤 사람이라 정의하십니까?

- 마음가짐으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문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자기 나름대로 이해하고 통찰해보려는 마음가짐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정규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훌륭한 지식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거꾸로 이런 이상에 전혀 부응하지 못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대학교수들과 저술가들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저명한 지식인'이 곧 진정한 지식인이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저명한 지식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들만의 고유한 권력 체계 내에서 '책임 있는 지식인'이란 직함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게다가 서구 사회에서 그들은 스스로 '책임 있는 지식인'이라 자처합니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반면에 사람들은 그들을 '테크노크라트 지식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사회에 분란의 씨앗을 뿌리는 '무책임한 지식인', 즉 '반체제적 지시인'과 구분하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적국에 대해 말할 때는 가치 기준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테크노크라트 지식인들은 '인민 위원'이나 '기관원'이라 매도하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비난합니다. 반면에 반체제적 지식인들, 결국 적국의 지배자들에게 멸시당하고 핍박당하는 불평분자들에게는 월계관을 씌워줍니다.

 이런 차별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습니다. 성경을 예로 들어볼까요? 히브리어에 상당히 모호한 뜻을 지닌 '나비'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서구인들은 이 단어를 '선지자'라 번역했습니다. 실제로는 '지식인'에 가까운 뜻입니다. 하여간 선지자라 불린 사람들은 정치 문제에 관여하면서 도덕적 판결을 내렸습니다. 성경 시대에 그들은 증오의 대상이었고 멸시와 경멸을 받았습니다. 요컨대 그들이 투옥당하거나 사막으로 내쫓긴 것은 반체제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수 세기가 지난 후에야 그들은 공로를 인정받고 선지자라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한편 그 시대에 존경받고 칭송받는 사람들은 권력자에게 빌붙은 추종자이거나 아첨꾼이었습니다. 그들 중 훗날 대중으로부터 진정한 예언자로 추앙받은 사람응ㄴ 한명도 없습니다. 20세기는 어떨가요? 소비에트 치하에서 투옥된 지식인들, 미국의 영향권에 있는 땅에서 암살 당한 지식인들이 진정한 예언자가 아닐까요?

 

p.93

통찰력 있는 지식인이라면 대중을 그저 구경꾼으로 만드는 이런 흐름을 꿰뚫어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은 입을 다문 채 대중을 종속시키려는 이런 음모에 가담합니다. 그들의 밥줄이기 때문입니다.

 

p.166

-요컨대 선생님이 염려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경제체제는 무척이나 불안정합니다. 누구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습니다. 특히 환경 재앙으로 경제체제가 붕괴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진정한 시장경제라면 모두에게 재앙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시장경제에서는 모두가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혈안이 되어 다른 곳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기업계는 시장을 자율에 맡겨놓은 적이 한번도 없었던 것입니다. 시장에서는 누구나 소유한 몫만큼의 권리를 행사하려 합니다. 가령 당신에게 25달러가 있다면, 그 25달러만큼 시장에서 당신의 위치를 갖습니다. 하지만 현재의 시장에 없는 사람, 즉 미래 세대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내리는 결정의 결과를 짊어져야 할 사람이 바로 그들입니다.

 

p.261

 대중은 각자의 삶을 영위하는데 전념할 것이고, 순간적으로 유행하는 소비재와 같은 피상적인 것에 열중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단계의 정책 결정에서 '참여자'가 아니라 '구경꾼'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노동 현장과 그 이상에 관련된 정책 결정에서도 말입니다.

 

p.303

- 다시 같은 질문을 드려야겠습니다. 국민이 혁명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당신이 앞장서서 기존 질서를 뒤바꾸려 한다면 그 대가를 호되게 치러야 할 것입니다.

 혁명까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령 노동조합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당신이 노동조합을 만들었다고 칩시다. 당신 동료들은 그 혜택을 누릴 수 있겠지만, 당신은 절대 그 열매를 즐길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에 시달려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요컨대 행동하는 데는 그 대가를 기꺼이 치르겠다는 각오가 우선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특권을 누리는 지식인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반체제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는 지식인이 있다고 합시다. 적어도 법치국가인 우리 사회에서 목숨까지야 잃지 않겠지만 적잖은 고통을 각오해야 할 것입니다. 중상모략과 비난이 빗발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이겨낼 수 없다면 그가 택할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바로 반체제운동을 포기하는 길입니다. 여론에 민감한 사람은 옴짝달싹 못할 수도 있습니다.

 행동하고 싶다면 주변의 소리에 귀를 닫아야 합니다. 주변의 소리를 무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이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나는 어떻냐고요? 괜찮습니다. 특권층이니까요. 하지만 아무런 특권도 누리지 못하는 노동자는 그 대가를 호되게 치러야 합니다.

 이런 곤경에 처하지 않을 유일한 길은 조직화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노동조합으로 조직화된다면 혼자서 감당하기 힘든 희생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조합과 같은 조직을 파괴하려는 음모가 다각도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어쩌면 선전이 아니라 이런 파괴 공작이야 말로 국민이 혁명 세력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막는 것일 수 있습니다.

 

 

p.341

 워터 게이트는 언론과 지식인의 원칙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입니다. 권력층은 비난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들의 원칙입니다. 그렇습니다. 가난한 흑인은 암살해도 상관없지만 권력을 움켜쥔 사람을 비난해서는 안됩니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꼭 머릿속에 새겨두라고 충고하고 싶습니다. 이 충고보다 현실적인 충고는 달리 없을 것입니다.

 합법적인 정당이더라도 힘없는 군소정당이라면 당신도 국가경찰을 보내 박살낼 수 있습니다.

p.359

비판정신이 실종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의 속도 경쟁 때문이 아닙니다. 깊이가 없는 커뮤니케이션 탓입니다. 방금 말했듯이 신문을 한 달 뒤에 보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습니다. 오늘이나 한 달 뒤나 똑같은 식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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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16.10.22

독서/기타 2018. 6. 18. 18:01

 

알랭 드 보통에 따르면, 예술은 '삶의 비평'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비극이라는 장르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문제로 점철된 삶을 수용하며 동시에, 타인의 부정함 앞에서도 겸손하여 질 수 있는 내레이션을 제공한다. 이번 신작 역시 기존의 주장처럼, 그는 우리의 삶의 문제를 따뜻하게 쓰다듬고, 인물들의 과오에도 칼을 들이대기 보다는 차분하고 공감적으로 그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편을 택한다.

무엇보다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내가 그의 구절 구절을 '주옥같다'며 좋아하는 것처럼. 그 또한 내가 아끼는 '심리치료'에 대해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을 유지해준다. 만약 세계적인 작가나 대중철학자가 되지 않았다면 분명 심리치료의 대가가 되었을 것 같다며, 혼자서 남의 인생을 가지고 소설을 쓰고.. 나에게 항상 Good-Enough한 작가 알랭 드 보통의 신작. 추천합니다..

 


 

전자책p.163
잘 들어주는 사람은 의사 전달을 잘 하는 사람 못지않게 드물거나 중요하다. 잘 들어주는 사람 역시 특별한 자신감이 그 비결이다. 어떤 확고한 가정에 심각한 도전이 될 수 있는 정보로 인해 경로를 이탈하거나 그 무게에 무너져 내리지 않을 수 있는 수용력 말이다. 잘 들어 주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라면 마음 속에 얼마간 담아둘 혼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이미 경험을 통해 모든 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전자책p.246
사랑을 듬뿍 받은 아이란 쉽지 않은 선례다. 본질상 부모의 사랑은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 쏟은 노력을 감추는 작용을 한다. 부모의 사라은 받는 사람에게 베푸는 사람의 복잡한 사정과 슬픔을 감추고, 부모가 사랑의 이름으로 다른 이익, 친구, 관심사를 얼마나 많이 희생했는지를 드러내지 않는다. 부모의 사랑은 무한한 너그러움으로 이 작은 존재를 한동안 우주의 중심에 놓는다. 부모의 사랑이 그토록 강한 것은 아이가 괴롭고 두려운 심정으로 어른 세계의 진짜 척도와 불편한 고독을 이해해야 할 그 날을 위해서다.

 

posted by sergeant

 

'미국에서는 6.2분마다 한번씩 경찰에 신고되는 강간이 벌어지고, 여성 다섯명 중 한명은 살면서 강간을 당한'다는 내용은 물론, '하도 많은 남자들이 현 배우자나 옛 배우자를 살해하기 때문에 이런 종류의 살인이 매년 1000건을 훌쩍 넘'고, '그 희생자 수가 매 3년마다 9.11 사건의 사망자수를 넘'지만 '이런 종류의 테러에 대해서는 누구도 전쟁을 선포하지 않는다'는 글의 내용을 곱씹으며
과연 대한민국은 천조국보다 더 살기좋고 안전한 나라이기 때문에 제대로 정비된 통계조차도 찾아볼 수 없는걸까 의문이 든다.

토론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표정, 말투, 사상까지도 대단히 우월하다고 느껴지는 한 대통령 후보가, 객관적으로 봤을때 대적이라고 도저히 믿기 어려운 다른 후보로부터 가르침을 당하는 현상. 이 현상은 젠더문제와 합하여 질 때 더 분명히 이해되고,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로 다시금 명명된다. 그 맨스플레인을 만들어내는데 굉장한 역할을 한 작가 ...rebecca solnit의 책. 페미니즘의 좋은 입문서.

미국도 이 모든 진통을 다 겪어왔다. 판박이처럼 닮아있는 이 모든 현상들이 신기하고 놀라워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리고 그나마 큰 위로가 된다. 이 모든 것들이 분명항 시대의 흐름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우리도 잘 해낼 수 있을거란 기대에.

 


 

 

 "6년 전에 내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라는 제목의 글을 쓰려고 앉았을때, 나 스스로 놀란 점이 있었다. 웬 남자가 나를 가르치려 든 우스꽝스러운 사례로 글을 시작했건만 결국에는 강간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로 글을 맺게 된 점이다." P.197 "폭력은 무엇보다도 일단 권위주의적이라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폭력은 내게 상대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한다. 살인은 그런 권위주의의 극단적 형태다. 살인자는 당신이 죽을지 살지 결정할 권리는 자신에게 있다고 살인을 통해서 단언하는 셈이다. 이것은 타인을 통제하는 궁극의 수단이다."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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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 16.07.21

독서/기타 2018. 6. 18. 17:58

 

오랜만에 읽은 한강의 소설책. 아무리 상을 받았다고 하지만 딱히 채식주의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라 크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서점에서 무심코 3장정도 읽었다가 당장 사야겠다고 결심했다. 다 읽고 난 후, 내 자신이 비문학(즉 심리학)에 몰두하면서, 문학의 힘을 너무 간과해 왔음을 다시금 느꼈다. 인간의 폭력성에 대한 아름답고 세밀하고 파괴적인 고찰... 그리고 문학도, 심리학도 결국 사람에 대한 것이라는 놀라운 희열.. 

 


<책발췌>

 

 

 "이런 여러 탐색담은 대상을 찾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정상성을 벗어난 인물들을 찾아나선 '정상적'인 인물들은 스스로 감추었거나 잊었던 트라우마와 조우한다. 마치, 애초에 그들이 그토록 닿으려 했던 목적지가 그 깊은 상처였던 것 처럼" - 프롤로그



전자책p.404(아마에필로그)

햇빛과 바람과 물과 흙 등 외적인 조건에 자신을 맡긴 채 수동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식물이 사실은 주변의 생태계를 포괄하는 역동적인 체계라는 점을 기억하자. 식물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 그것은 때로 냉정한 광물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끔찍할 정도로 생생한 욕망에 달아오른 동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가 자신과 영혜를 식물의 형상으로 구성한 결과가 지독한 동물적 욕망으로 낙착된 것은 어쩌면 예고된 결말이었는지 모른다. (...) 그렇다. 우리는 동물이다. 우리는 스스로가 호모사피엔스라고 불리는 하나의 종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꾸만 잊는다. (...) 사실 가족이라는 제도는 다양한 모순을 내장하고 있다. 서로 다른 씨족 혹은 부족에 속했던 자들이 모종의 계약과 교환을 거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되면 서로 아무런 문화적, 정서적 친밀감이 없다고 하더라도 친밀감을 연기해야 하는 순간이 온다.

 

전자책p.415

 자신을 포함한 인간의 야수성을 감지하기 시작하면서 그녀는 처벌의 한 형태로 '자기파괴'를 선택한다. 사람들은 농담처럼 '남의 살'이 맛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는 '남의 살'을 베어먹고 물어뜨는ㄴ 식육의 행위가 지닌 파괴력에 전율한다. 그녀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다른 생명체를 먹는 것에 대한 모종의 죄의식에 시달리고 있는 듯하다.  그녀는 자신의 세포 하나하나를 이루고 있을 '남의 살'을 몸피에서 덜어낸다. 과잉소비의 쾌락을 위해서 수많은 생명체를 공장 구조에서 '생산'하는 것을 윤리적으로 비판하는 행위가 오히려 비정상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시대에 말이다. 팽창의 시대에 축소를 택한 그녀에게 남은 일은 시대착오의 의미 그대로, 살아 있는 화석이 되는 것뿐이다. (...) 이런 여러 탐색담은 대상을 찾는 것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정상성을 벗어난 인물들을 찾아나선 '정상적'인 인물들은 스스로 감추었거나 잊었던 트라우마와 조우한다. 마치, 애초에 그들이 그토록 닿으려 했던 목적지가 그 깊은 상처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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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희가 말하는 법 - 16.08.16

독서/기타 2018. 6. 18. 17:56

 

 살아있는 인물을 극찬할 것 같은 분위기의 책은 묘한 경계감이 든다. 사실 묘한 경계감이 든다고 할 것도 없이 나는 아예 손이 잘 안간다.

 그렇지만 이 책은 '말하는 법'을 다루고 있어서인지... 참 읽기가 쉽고, 내용이 좋다! 손석희 아나운서는 많은 국민들이 좋아하는 책이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애정이 더 각별해 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말하는 법을 넘어서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토론', '논의', 그리고 객관적인 '태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우리 시대 위대한 인물의 야망은 모든 이들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지만, 세상에 눈물과 고통이 있는 한 우리의 과업은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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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발하라 - 16.08.23

독서/기타 2018. 6. 18. 17:55

최근 읽은 10권의 책목록 중 유일하게 종이책으로 읽은 '도발하라'는 우리 사회를 액정사회라 분류하며 그 단순함과 피상적임, 그리고 (단군이래 가장 훌륭한 자원을 가진 젊은이들에게, 실력면에서 전혀 그들을 따르지 못하는 이들이 "닥치고 내가 하라는대로 따르라"는 주문을 아무렇지 않게 일삼는 우리사회의) 반지성적임을 비판한다.
저자가 비판하는 "감각적이고 피상적여 쉽게 현혹되지만 반지성적"인 내용들과 겨루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이 글은 쉽고 재밌다. 4장부터 약간 과하게 느껴지는 낙관주의와, 추상적인 이야기로 흘러가는 후반부의 아쉬움을 감안하더라도, 그 낙관주의에 내포된 메시지인 '질문하고 의심하고 사고하고 도발하라'는 조언과 격려는 충분히 마음에 새겨볼만하다.


 

 

P.74
인문학은 감성을 건드리는 상상력과 문장력을 키우는데 매우 중요한 학문이지만, 과도한 인문학 강조는 사람들의 논리적인 이해를 약화시키고 오히려 특정 지도층의 소프트파워만을 강화시키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지 않고 그저 들썩이게 만드는 부작용의 위험이 있다.

P.97
반지성주의 사회를 극복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는 교육이 쥐고있다.

 

 

 

 

 

 

 

posted by sergeant

죽여 마땅한 사람들 - 16.08.12

독서/기타 2018. 6. 18. 17:51

 

'나를 찾아줘'를 재밌게 보신 분들께 강추 ㅋㅋㅋㅋ
교보문고에서 제목 보고 흥미로웠지만, 본래 소설은 별로 좋아하지도 않아서.. 뭐 얼마나 재밌겠어 싶었고
특히 이 책 바로 전에 읽었던 채식주의자의 담백한 문체가 워낙 훌륭해서(;;) 전반부엔 그저 그랬는데
후반부로 갈수록 진짜로 어떤 평론가 말처럼 '페이지가 휙휙 앞다투어 넘어가는' 신기한 경험이.. (배우자가 불러도 못 들음)
타는듯한 여름, 시체가 묻혀있는 초원과 몽크스하우스를 상상하며 시원한 아이스티와 함께 즐길법한 스릴러ㅎㅎ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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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 2018. 4

독서/종교 2018. 6. 18. 17:44

 

 

랜선친구들이 뉴스앤조이에서 텀블벅 참여 하시길래 나도 따라가서, 따끈따끈하게 받은 신간.
내용들이 참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좋아서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자고 추천하고 내가 발제하게 되었다.
 여성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교회를 버리지 않는, 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까?

  이 고민이 일부 래디컬 페미니스트들에게는 참 정신승리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무신론자들의 수많은 역사적 공격에도 부정되지 않는 기독교의 정통처럼, 크리스천 페미니스트들에게도 단단하고 자랑할만한 계보와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 준, 참 감사한 책이다.

  저자 교수님께서 세미나를 하시기에 참석해서 사인도 받아둔 책. 읽는 내내 위안과 격려가, 힘이 되었다.

 


<책 발췌>

 

p.46
우머니스트 선언, 흑인 여성들의 경험은 백인 중산층 엘리트 여성들의 것과 다르며, 특히 흑인 남성은 여성을 지켜주기는커녕 자신들이 받은 억압 경험을 자기의 여자들에게 폭력적으로 발산한 존재였다. 우머니스트들은 말한다. “살아라, 살려라
책이든, 영화든, 드라마든 요즘 흑인 인권운동의 역사와 감성을 보면서.. 같은 소수자로서의 동질성을 페미니즘에서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아시안 여성들의 페미니즘은 또 다를 것 같다. 나는 영어를 공부를 하고 나서, 영어를 잘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고싶다.

p.49
"살아라, 살려라"
자기 하나만 명예 남성처럼 세상에서 공적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우리의 페미니즘과 다르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개인주의 적이다. 여성을 노새로 응시하는 강한 가부장제의 폭력 앞에서도 우리는 살아남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를 여왕으로 응시하는 부드러운 가부장제는 아예 경험도 해 본 적이 없다.

상호 동반자 관계야 말로 사랑의 토대페미니즘 운동의 지도자들은 반드시 사랑과 공감을 보여줄 능력이 있어야 하며, 행동으로 그런 사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하며, 대화를 성숙하게 끌어나갈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대부분이 이성애자인 우리의 현실을 지적하며, 사랑의 감정과 능력을 부정하지 말고 같은 페미니스트들끼리도 연대하자고 촉구한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 선포와도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하나님 나라에는 배제되는 자가 없다. 모두가 형제이고 자매이며 수평적이다. 희생, 나눔 등이 배타적으로 여성에게만 강요될 때 문제인 것 뿐.

p.59
백인 여성들이 남자들의 자리에 올라가는 순간, 페미니스트 운동이 동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여성으로서 노예로서 이중 억압 속에 살았던 경험을 통해, 나 자신도 중요하지만 더 연약한 생명을 끌어안고 가는 살고, 살리는 페미니즘의 주장. > 그러나
오히려 시스템을 유지하는 역효과가 있을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결국 한 패러다임이 페미니즘을 대변할 수 없고, 또한 특정한 패러다임만으로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세상을 한 번에 완전하게 만들 수 없다.
다만 후배들은 선배들이 주장하고 걸어온 길의 장단점을 살피며 미리 점검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유리한 위상학적 위치.

p.60~
1960년대 2기, 래디컬 페미니즘의 핵심
<정체성> 과연 여자란 무엇인가, 우리는 여자인가, 우리는 여자여야 하나, 여자라면 어떤 방식으로 여자여야 하나
1. 성차를 제거하자 <성차의 소멸>
Shulamith Firestone, 1969년 발족한 레드 스타킹을 통해 가부장제 해체를 위한 강한 성 혁명 전개. 성의 변증법가부장제 안에서의 성행위, 즉 일부일처 재생산 중심의 성관계를 계속하는 한 여성해방은 어림도 없다. 공동체의 지속을 위한 생산은 인공 생식으로 해결.
2. 성차를 발현하라, 여성성으로 새로운 문명
성차라는 것은 우리의 언어와 사회제도 안에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 가부장적 시스템은 남성들이 여성을 왜곡하여 응시한 성차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원래적 성차는 아니다.
여성성은 본질적인 것이다. 본래적 여성성을 우리가 찾아낸다면, 남성 중심 문화의 반생명적 모습을 넘어, 구원적 문명을 이룰 것.
3. 성차란 구성된 것, <젠더 트러블>
Judith Butler 젠더 트러블성차는 사회 문화적 구성물이다. 본질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형성된다. 결국 남성, 여성의 성차가 반복된 수행성에 불과하다면, 본질주의적 특성을 강조하며 여성성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은 불가능해진다.
본의 아니게 퀴어 이론의 창시자로 평가받고 있음. “원래란 없다. 구성적이다.
4. 트랜스 페미니즘, 존재의 경계를 허물어 젠더 없는 세상으로
: 마지막 패러다임, ‘존재의 교란자연, 인간, 기계 사이의 경게를 없애버림


p.78
예수님께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부자관계의 친밀성, 인격적 관계로 설명한 것은 해방과 자유를 준 것이다. 물론 '어머니'라고 부를 수도 있었겠으나 당시는 강한 가부장제의 한 중간이었기에 '어머니'라는 언어가 하나님의 초월성, 절대 권위, 사랑과 힘을 동시에 가진 어른들의 이미지를 다 담을 수 없다는 한계가 있었다.

p.101
질 리포베츠키(Gilles Lipovetsky) 3의 여성 역사적 사회적으로 의미심장한 이 여성상을 우리는 3의 여성이라 부른다. 이는 전통과 가정의 굴레에 갇혀 있었던 굴종의 여성상과 남성과의 무조건적인 대립만을 일삼았던 전투적 여성상을 뛰어넘는 것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의 자리가 미리 정해져 있지도 않고 사회적 자연적 제약을 받지도 않는다. ...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똑같은 운명, 즉 자아를 자유롭게 구성하고 활용할 기회를 갖고 모든 사회적 강령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아를 창조애햐 한다는, 동일한 과제 앞에 서 있다는 것이다.

p.110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이미 지배적인 후기-근대 페미니즘을 바라보며, 저자는 가족 공동체의 중요성을 언급하는데, 여기서 가족은 기독교적 공동체를 의미한다. 생존력을 가질수 없는 사회의 소수자들과 약자들을 어떻게 끌어안고 갈 것인가 생각해야 한다.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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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의 이상적인 여성: 통제 아래 사랑스런 바보 + 신앙적으로 경건한 성녀 + 결혼 제도 안의 창녀
'성녀'들은 성적으로 순수할 뿐 아니라 남성 중심적인 기독교 전통 안에서 가장 숭앙받을 수 있는 존재들. 대표적으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교회의 금욕주의적 신앙 수행의 시스템 안에서 거룩하다고 구별될 수 있는 여성들은 수녀의 형태로 자기들의 여성성을 될 수 있는 대로 '거세'하면서 살아갔다. 이런 범주의 여성들은 전혀 위험하지 않다. 체제에 도전하지 않으니까.
'창녀'의 경우 시스템 안에 있지만, 시스템의 보호는 받지 못하고 있는 존재들. 어떻게 말하면 시스템이 보호하고 있는 성스러운 질서를 위해서 일종의 분출구, 심지어 하수구의 역할을 하는 대상으로 간주. 남성 사제들과 신자들의 신앙이나 도덕성 측면에서는 위험한 존재들인지 몰라도, 가부장 시스템 면에서는 위험한 존재가 아니다.  성녀와 창녀, 이 둘은 서로를 대면하지는 않지만 실은 보이지 않는 짝이다. 성스럽게 지키고 있는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어두운 그림자의 세계. 두 범주에 속한 여성들 모두 남성들이 만들어 놓은 기독교 전통의 시스템을 흔들지 않는다.
'바보'야 당연히 시스템을 흔들 능력도, 마음도 없다.
그러나 '마녀'는 다르다.

p.127
(Mary Daly, 1928-2010), ‘교회의 범위와 정의에 따라 기독교 페미니즘의 범위에 포함.
  교회와 제2의 성출간
데일리는 이들(남성중심 체계의 패배자인 남성들)이 비록 희생자이긴 하지만 이들 역시 남녀 구도에서는 여성을 억압하고 경멸하는 자일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밖에서는 '알파 수컷'인 다른 남성들에게 짓눌리다가도 집에 가면 아내와 딸을 억압하는 남자들이 꽤 있잖아요. 흑인 노예들이 백인 주인들에게 채찍 맞고 고통당했지만, 집에 오면 그들은 '가부장'이거든요. 따라서 여자들은 맨 마지막까지 경멸의 대상이고 아예 원천적으로 권력 구조에서 '거세'된 존재들이라는 고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과의 연대를 끊겠다는 선포예요.

p.154
Elizabeth S. Fiorenza: 성경을 역사적 모형으로 보자고 제안
성경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면, 재구성과 재생산도 가능해 진다.
Carter Heyward: 조직신학자 사랑한다는 것은 성령 안에서 우리가 느끼는 존재의 흐름

p.183
내가 믿는 바 오늘날 사랑에 대한 교리는 주로 남성의 경험에 기초하여 형성되었고, 따라서 남성의 기준점에서 인간의 상황을 바라본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교리는 여성의 상황에 대한 적절한 해석을 제공하지 않는다. 여성의 죄는 의존, 자기 정체성의 결여, 자기를 버릴 정도로 타인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여성의 미덕은 자율성과 자기실현이다. Valerie Saiving Goldstein 1921-1992

p.198
예수의 적극적 사랑의 행위가 상호적인 힘으로 해석될 수 있을까? 나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정통주의 기독론적 해석은 예수의 생애와 사역의 전적인 의미가 골고다, 즉 십자가를 향하는 고난에서 발견되어진다고 말한다. 마치 그가 단번에 모두를 위한 신적 인간의 드라마의 결단을 완전케 하기 위해 결말 그 자체인 고통을 추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나는 예수의 사역에 대한 이런 식의 견해가 예수의 사역의 도덕적 급진성(moral radicality)을 빼는 것이라 생각한다. 예수는 희생을 향한 그의 욕망에 철저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상호적인 힘에 철저했다.
십자가상에서의 예수의 죽음, 그의 희생은 도덕적 미덕의 실천으로 추상화될 수 없다. 그의 죽음은 그의 공동체에서 소외된 사람들과 더불어 연대성과 상호 호혜를 표현하는 사랑의 급진적 행위를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그가 지불한 대가였다.
Beverly Harrison, "The power of Anger in the work of Love" in Carol S, Robb, ed. Making the Connection: Essays in Feminist Social Ethics.

p.266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들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에서나 동경 사람쯤 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이 없는 것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의 정조를 유인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종종 방종한 여성이 있다면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 이 어이한 미개명의 부도덕이냐.
나 혜 석!!!!!!!!!!!!!

posted by sergea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