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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책을 들자마자 근 2년간 발생했던 수많은 여성혐오 범죄들에 대한 목록을 차근차근 나열하고 자세하게 기술해 둔 초반부에 질색하며 화를 내고 있는 나를 보더니 배우자가 "지금쯤이면 우리가 그런 사건들 모아둔 책 읽을 시기는 지나지 않았냐."고 말했다. 그래, 따지고보면 이렇게 황당하고 빡치는 사건들을 보고 화를 낼 시기는 지난건지도 모르겠다. 이미 익숙해지고 무뎌질 것이었다면 담담해지고도 남았을 시간들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앞으로 몇십년이 지나더라도 전혀 담담하거나 화를 덜 내고나 무뎌지거나 익숙하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미친 사회현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는 한.
사실 나 또한 책 제목을 보고 방심했었다. 괜찮지 않다고? 그래, 당연히 괜찮지 않지. 그러면서 책을 들고 괜찮게 읽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리라 여겼다. 아니. 전혀 괜찮지 않다. 매일매일 갱신되는 사건들, 범죄들. 10년 전에 비해 훨씬 후퇴한 여성인권. 엉망인 교실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이 사회.
언제쯤이면 이런 사건들을 나열하고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몇 권의 책이 나오거란 생각을 안 할 수 있을까. 삼개월만 지나도, 이 책에 적힌 최근 사건들이 업데이트 되지않고 올해의 대표적인 여성혐오 범죄들로 소개될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그렇지만 절망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괜찮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어서. 그리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의 따뜻한 연대가 있어서. 나는 괜찮아질 수 있다. 지금은 괜찮지 않지만, 좀 더 괜찮아 질 것이다.
책에서 저자는 특히 기자분이시기 때문에, 방송과 관련된 여성혐오쪽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셨다. 다양한 사건과 범죄들은 접했었지만 방송 깊숙히 스며들어있는 여성혐오들에 대해 정리하고 인식하기에 매우 좋은 책이었다. 어린 사촌동생이나 친구들에게도 추천하고 싶다. 페미니즘 입문서로.
"괜찮다는 종종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저 난감한 상황을 넘기기 위한 말일 때가 많았다. 원치 않는 호의 앞에서, 무심과 무례 앞에서, 불편과 번거로움 앞에서 어색하게 웃으며 "괜찮아요" 대답하곤 했다.
사람들이 정말 괜찮은 일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내 뒤의 또 다른 여성이 그 괜찮지 않은 말과 행동을 견뎌야 했던 것은 아닐까. 마음이 무거워진다.
여학생, 여직원, 엄마이기 때문에 겪어야 하는 폭력과 조롱과 비하이 대해 그걸 웃으며 소비하는 대중문화에 대해,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한국 남자들의 세상에 대해 이제 분명히 말하겠다. "괜찮지 않습니다."
p.18
10대 남성들의 성욕이 대해서는 온 사회가 "참느라 힘들지? 자식들, 힘내라!" 며 좋은 티슈라도 챙겨주려는 분위기라면, 10대 여성의 성욕은 어떤가. (...)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기 보다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P.34
가정, 학교, 직장, 사회는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역할을 부여했고, 자신을 갈아 넣어 이 모든 것을 완수하는 '알파걸'과 '수퍼우먼'에게만 박수를 보냈다. 남자와 여자에게 똑같이 도전할 기회를 주고 있으니 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지 여자는 당연히 결혼을 해서 아이들을 낳아야 하고, 상냥한 아내이면서 좋은 엄마이자 알뜰한 주부, 시어른에 대한 도리를 아는 며느리이기도 해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P.69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소설 "체체파리의 비법"은 이렇게 말한다. "한 남자가 아내를 죽이면 살인이라고 부르지만, 충분히 많은 수가 같은 행동을 하면 생활 방식이라고 부른다."
P.136
체중 관리부터 표정, 몸짓, 발언, 행동, 심지어 범죄 경력까지, 왜 우리는 이토록 남자에게 관대하고 여자애게 엄격한가. 여자 연예인이 무례한 일을 겪었을 때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조롱하고 비난하면서, 남자 연예인의 무례한 언행은 왜 그렇게 조용히 빠르게 잊어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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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한달 전, 방한 기념회 때 참석해서 사인 받아온 책을 아끼고 아끼고 아껴서 읽다가
어제 시험 끝나고 후루룩 마저 읽은 후 포스팅:) 리베카 솔닛의 글은 분명하고 예리하며 통찰력으로 가득 넘친다.
그녀를 알게 해준 책 '맨스플레인'은 차근차근 다 정리하지 못했었지만
초두효과와 더불어.. 훨씬 더 강력하게 내게 영향을 주었었고,
그 때문에 투고할 논문에도 한 줄을 할애해서 적었었다.
앞으로도 여러가지 할 일들 많을테고, 그 과정에서 이 책 또한 피가 되고 살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어
본격적으로 인용해 정리해 둘까 싶다.
p.18
어떤 엄마들은 내게 말하기를, 자신은 그저 아이가 있다는 것 때문에 무시당해도 싼 아둔한 인간 취급을 당한다고 한다. (...) 많은 엄마들은 설령 일에서 성공하더라도 그렇다면 틀림없이 누군가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했을 거라는 말을 듣는다. 여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정답은 없다. 우리가 습득해야 할 기술은 오히려 어떻게 그 질문을 거부할 것인가인지도 모른다.
p.19
내 인생의 목표 중 하나는 진실로 랍비처럼 문답할 줄 아는 자가 되는 것, 닫힌 질문에 열린 질문으로 답할 줄 아는 것, 내 내면에 대한 권한을 스스로 가짐으로써 다가오는 침입자에 맞서서 훌륭한 문지기가 되는 것, 최소한 "왜 그런 걸 묻죠?"라고 재깍 되물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p.25
사람들은 아이 없는 사람에게 그 동기를 캐묻고 그가 부모 역할에 수반되는 희생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거꾸로 자식을 끔찍이 사랑하는 사람은 그 밖의 세상에 베풀 사랑이 그만큼 적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종종 간과한다.
>>많은 남성들이 우호적이든, 그렇지 않든간에 나의 딩크족 선언을 들으면 마치 '뭘 모르는 인간'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에 신물이 난다. 특히 방금 말한 그런 이들은 모두가 나보다 결혼을 1년 이상 늦게한 자들이라는 것도 우스운 포인트이다. 어쨋거나 그들이 나에게 들이대는 아이를 가지기로 결심한 '귀한 논리와 포부'를 들어보면 딱히 오래 생각하지 않아도 재깍 지적들이 가능한 포인트들이 많다. ex1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최상의 경험인 부모가 되는 경험을 해보고 싶다?" 애는 무슨 죄..?? 나의 경험을 위해서 아이를 낳겠다는 건가.. ex2 "와이프가 아이를 낳아줬으니 어쩌면 내가 양육의 반은 부담해 줄 의향도 있어." 아니지. 와이프는 낳는 걸로 그가 할 책임을 다 했으니 니가 100% 양육을 책임지는건 어떨까..? 어쩌면 그들이 나에 대해 반발감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순리인지도 모르겠다.. 본래 맞는말만 하는 사람들은 미움을 산다.
나는 아이를 가진다는 것이 이성적으로나 논리적인 우위를 통해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쨋거나 아이를 가지게 되면 아무리 이타적이었던 사람도, 자기 자신 혼자서는 이타적일 수 있지만 자신의 아이에게 만큼은 최선의 것을 다 해주고 싶은 마음을 가지게 될 터이다. 그리고 오히려 아이에게 이타적이라고 강요를 하는 것 자체도 모순적이고 아동학대적이다. 내가 들었던 최고의 아이를 가지겠다는 결심의 이유는 <우리가 이렇게 서로 사랑하는데, 아이와 함께 이 사랑을 나누고 싶어서> 정도였다. 그 밖에 사람들이 아무리 자신이 논리적으로 뛰어나다고 포장하며 아이를 낳으라는 그럴싸한 이유를 대더라도, 차라리 피임 실패였다는 대부분의 이유와 거의 수준이 비슷하다고 느껴졌을 뿐이라고 말하면, 너무 과한걸까..
p.36
지난 세기 동안 인간이 스트레스와 위험에 대처하는 반응은 "맞서거나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게 정설이었다. 그런데 2000년 UCLA의 심리학자들은 그런 연구가 대체로 수컷 쥐와 인간 남성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심리학자들은 그래서 여성을 연구했고, 자주 채택되는 세번째 선택지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는데, 그것은 여럿이 한데 뭉쳐서 연대와 지지와 조언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러나 2013년에 석사과정에 입학했던 나는 여전히 fight or flight를 정설로 배우고 있었다는게 함정.
p.44
피해자를 믿는다는 건 곧 세상의 바탕에 깔린 가정들을 의심한다는 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편한 일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편안함이 지켜져야 할 권리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 편안함이 남들의 고통과 침묵 위에 세워졌을 때 조차, 아니 그럴 때일수록 더욱 더.
p.46
여성이라는 범주는 길고 너른 대로이다. 계급, 인종, 가난과 부 등 다른 많은 길들이 이 길과 교차한다. 이 대로를 걷는다는 것은 그 다른 길들과 만난다는 뜻이다.
p.52
가부장제가 남자들에게 요구하는 첫번째 폭력 행위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다. 그 대신 가부장제는 모든 남자에게 정신적 자기절단을 행할 것을, 자신의 감정적 부분을 도려낼 것을 요구한다. 만일 자신을 감정적으로 불구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한 남자가 있다면, 가부장제의 다른 남자들이 그의 자존감을 공격하는 힘의 의식을 틀림없이 거행해 준다. <Bell Hooks>
(...)
남성성이란 거대한 포기다. 분홍색을 포기하는 건 사소한 일이지만, 성공적으로 남성화한 남자아이들과 남자들은 일상에서 감정, 표현력, 감수성, 그 밖의 온갖 가능성을 포기한다.
p.55
여성혐오와 동성애 혐오는 둘 다 가부장제가 아닌 것에 대한 혐오다.
p.57
감정이 죽여야만 하는 것이라면, 살해의 표적은 여성이 되기 쉽다. 상대적으로 덜 점잖은 남자들은 나약함을 적극적으로 사냥한다. 남자가 된다는 것이 나약함에 대한 혐오를 익히는 것이라면, 자기 내면의 나약함은 물론이고 자신을 대신해서 그 나약함을 품어주는 젠더의 나약함까지 ㅎ며오하게 되기 때문이다. 여자애 같다거나 계집애 같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남자아이나 성인 남자에게 모욕으로 쓰였고, 게이 같다거나 호모 같다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ㅏ신이 지배하고 삽입하는게 아닌 방식으로, 오히려 삽입을 당하고 동등해지고 개방된 방식으로 성애화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었다. 개방성을 강함이 아니라 약함으로 보는 시각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남성 호모포비아에 대해 생각을 할 때면, 연구결과에 기반한 추론은 아니지만, 전반적인 삽입공포, 강간공포가 있는 것 아닌가 라는 생각을 자주했었다. 혐오란 본래 두려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근데 솔닛 언니가 이렇게 얘기해주니 또 괜히 반갑고 그렇더라.
p.59
만일 당신이 협동하고 타협하고 존중하고 유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사랑하는 사람을 당신과 동등한 존재이자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가진 존재로 여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면, 당신은 사랑하는 일에 자격이 부족하다.
p.64
성폭행이 범죄자가 아니라 피해자에게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진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 (강간) 영상은 법 체계에서 유통될 때는 일탈적 범죄의 증거이지만, 범죄자의 동료 집단에서 유통 될 때는 범죄자가 남성성의 규범에 순응한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p.68
Dacid Morris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공개한 인상적인 책 '불길의 시간'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잠식하는 트라우마의 힘은 이야기를 파괴하는 능력에 일부 담겨있다. 글이든 말이든, 이야기는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엄청난 치유력을 발휘한다. 정상적이고 비트라우마적인 기억은 늘 현재진행형으로 씌어지는 자아의 이야기에 쉽게 포함되고 통합된다. 어떤 의미에서 그런 기억은 길들여진 동물과 같아, 자아가 거뜬히 통제하고 다룰 수 있다. 대조적으로 트라우마적 기억은 들개처럼 멀찍이 떨어진 채, 자아가 예측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모리스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다. "강간이 트라우마의 가장 흔하고 심각한 형태인데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연구는 대부분 전쟁 트라우마와 퇴역 군인을 대상으로 수행된다. PTSD에 대한 지식은 대부분 남자들을 연구해서 얻은 것이다." 달리 말하자면 고통을 겪은 사람이 누구인가에 관한 침묵도 존재하고, 그 침묵이 여성을 더욱 침묵시킨다는 것이다. 침묵은 침묵 위에 건설되고, 침묵의 도시는 이야기들과 전쟁을 벌인다.
p.82
우리가 공손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종종 자신보다 남들의 안락함을 더 중시하는 태도다. 어떤 상황에서도 남들의 안락함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면 잘못이라는 것이다.
p.84
개인과 사회는 입을 열어 증언하기를 거부함으로써 권력과 권력자에게 이바지 한다.
입을 열기를 거부하는 증인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권리, 주체성, 온전한 신체, 인생을 잃는 데 동의하는 셈이다. 침묵은 폭력을 보호한다. 온 사회가 침묵할 수도 있다. (..) 범죄에 대해 말하는 것이 위험하거나 불법일 수도 있다. 작가 오르한 파묵은 교과서와 공식 기록에 뻔히 나와 있는 내용이었음에도 범죄에 대해 말했다는 이유로 "터키의 국가성을 모욕했다"며 고발되었고, 해외로 피신해야 했다.
p.91
여성을 공적이고 전문적인 삶으로부터 밀어내는 방법은 셀 수없이 많다. (...) 우쭐댄다는 표현이 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에게 쓰이는 것처럼, 날카롭다거나 나댄다는 표현은 대체로 여자들에게 쓰인다. 정치하는 여자는 너무 여성스러워서도 안 되고 너무 남자 같아서도 안 되는데, 왜냐하면 여성성은 지도력과 연관되는 속성이 아니고 남성성은 여자가 누릴 특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는 여자들에게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차지하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잘못된 것이 되기 싫다면 불가능한 것이 되라고 요구하는 셈이다. 여성이 된다는 것은 늘 잘못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런 결론밖에 못 내리겠다. 최소한 가부장제하에서는 그렇다.
p.113
침묵과 수치심은 전염된다. 그러나 용기와 발언도 전염된다.
p.125
세계보건기구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전세계 여성 살인 피해자의 38퍼센트가 친밀한 파트너에게 살해된다.
p.130
여성에 대한 폭력을 논하는 공공의 대화가 변하기 시작했다. 온 세상이 갑자기, 그런 폭력이 얼마나 흔하고 어떤 변명들이 거기에 뒤따르는지를 말함으로써 폭력을 해결하는 일보다 자기자신을 변명하는 일에 더 골몰하는 남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 과정에서, 억울해하는 남자들이 반복해서 읊는 표현인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진 않아"가 - 예를 들어 모든 "남자가 다 강간범은 아니야"처럼 쓰인다- 여자들은 다 겪는다로- 예를 들어 "여자들은 다 어떤 식으로든 강간에 대처해야 해"처럼 쓰인다- 변형되었다.
많은 남자들은 이때-소셜미디어에서든 다른 곳에서든- 여자들의 말을 귀담아 듣고서 여자들이 오래 견뎌온 현실을 일생 처음 깨달았다.
p.139
수치심은 성폭행 피해를 당한 여자들을- 또는 남자들을- 침묵시키는 중대한 요소다. 수치심은 사람을 침묵시키고, 고립시키고, 범죄가 지속되게끔 만든다. 언론은 전통적으로 강간 피해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피해자 이름을 밝히지 않는데, 이 전통은 피해자가 당한 일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암시하고 피해자를 사람들 눈에 안 보이게, 고립되게, 침묵하게 만드는 부수 효과가 있다.
p.161
요컨대, 강간 신고로는 누군가를 감옥에 보내기 어렵다. 그리고 강간 고발의 약 2퍼센트가 무고이겠지만, 전체 고발의 2퍼센ㄴ트가 좀 넘는 비율만이 유죄로 결론난다.( 3퍼센트까지 높게 잡는 계산도 있다.) 달리 말해, 세상에는 처벌받지 않은 강간범이 끔찍하게 ㅁ낳이 돌아다닌다. 그리고 대부분의 강간범은 고발이나 고소를 당했을 때 자신이 강간을 저질렀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곧 세상에는 강간범인 동시에 거짓말쟁이인 사람들이 잔뜩 돌아다닌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상에 넘치는 거짓말은 어쩌면 강간당하지 않은 여자들의 거짓말이 아니라 강간을 저지른 남자들의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얼마전 '꽃뱀'에 관련한 얘기가 나오는 프로에다가, 댓글 다는 남성들을 본 적이 있다. 주변 지인이 꽃뱀 때문에 누명을 쓰고 자살했으니 꽃뱀이 매우 흔하고, 많고, (어쩌면 성폭행 가해자 보다도) 나쁘다는 논지의 이야기였다. 실화인지 주작인지 그따위 것은 잘 모르겠고, 어쨋거나 하나 분명한 것은.. 그 댓글을 쓰고 있는 인간의 지인들은 운이 좋다는 생각 뿐이었다. 큰 수고 들이지 않고 투명한 한국남자 한명을 걸러낼 수 있을테니까.
p.163
무고한 사람이 유죄를 선고받는 것은 이렇듯 사법 체계의 부패와 직권 남용의 결과인 편이지, 한 사람의 고발자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예외는 있다. 나는 그런 예외는 드물다고 말하려는 것이다.
p.165
우리가 강관문화라는 용어로 표현하려는 뜻이 무엇인지 따져보자. 그것은 혐오다. 스포츠 팀이나 남학생 사교 모임이 저지르는 강간은 타인의 권리, 존엄, 육체를 침해하는 것이 멋진 일이라는 생각에 입각한다. 그런 집단 행동은 남성성을 포악한 포식자다운 것으로 보는 생각을 깔고 있다. 그런 생각에 찬동하지 않는 남자도 많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은 모두에게 영향을 미친다.
p.167
열두살에서 서른살 사이에 나는 날 괴롭히는 남자들로부터 그저 살아남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낯모르는 사람이나 가볍게 아는 사람이 내 젠더 때문에 내게 모욕과 피해를 가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는 것, 그런 불운을 피하려면 내가 한시도 빠짐없이 경계해야 한다는 것. 정말이지, 그건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 이유 중 하나였다.
p.178
모든 폭력에는 권리의식 혹은 권위주의가 있다. 우리는 살인자가 타인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말한다. 앗는다는 건 가로챈다는 뜻이다. 훔치는 것, 자신이 소유자인 양 특권을 행세하는 것, 타인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해버리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자기 것이라서 그래도 된다는 듯이.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의 것이 아니다.
p.188
"사람들이 여자들 말을 왜 그렇게 못 믿는지 모르겠어요.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남자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려면 여자가 두명은 있어야 한다죠. 그런데 여기서는 스물다섯명이나 필요하잖아요." <-인기 코미디언의 강간사실을 밝히기 위해 25명의 여자가 증언을 했어야 했던 것을 비꼬면서 한 말
p.206
가부장제는- 남성이 지배하는 구조와 부계에 집착하는 사회를 둘 다 뜻하는데, 이런 체제는 여성의 성을 엄격하게 통제해야 가능하다- 많은 시대와 장소에서 의존적이고 비생산적인 여성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 냈다.
p.211
차별Discrimination이라는 단어에는 서로 모순된 두가지 뜻이 있다. 인식을 말할 때는 이 단어가 무언가를 똑똑히 구별하는 것, 세부를 인식하는 것을 뜻한다. 반면 사회정치적 맥락에서는 무언가를 똑똑히 구별하기를 거부하는 것, 범주를 넘어 특수와 개체를 보는 데 실패하는 것을 뜻한다. (...)
집단이란 물 샐 틈 없는 범주이므로 그 속의 모든 구성원이 하나의 사고방식, 신념, 나아가 책임을 공유한다는 생각은 차별의 핵심적 요인이다. 이런 생각은 집단 처벌로 이어진다. 이 여자가 나를 배신했으면 저 여자를 비난해도 된다는 생각, 집 없는 사람들 중 일부가 범죄를 저질렀으면 모든 집 없는 사람을 처벌하거나 쫓아내도 되고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요즘 그 생각은 어린아이, 장애인, 노약자들을 향해 급속도로 퍼져있으며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마치 그러한 생각이 합리적이고 경제적이고 논리적인 사고의 결과물인 양 포장된다.
p.215
여자는 누구든 걸어다니는 여성 대표처럼 취급되기 쉬운데 비해- 우리 여자들은 정말로 모두 감정적이고, 앙큼하고, 수학을 싫어하나?- 남자들은 비교적 그런 판단에서 자유롭다. 백인을 일반화하는 말은 많이 들리지 않고, 루프나 찰스 맨슨은 제 인종이나 젠더의 수치로 여겨지지 않는다.
(...)
차별에서 자유롭다는 것은 개인의 장점으로만 평가받는 개인이 되도록 허락받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일종의 자유 때문에 중요한 데이터가 틈새로 빠져 누락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요즘의 총기 난사 사건들에 대해서 불과 최근까지만 해도 거의 이야기되지 않았던 한 사실은 그런 사건을 거의 전부 남자가 저지른다는 것, 그런 남자들 중 대부분은 백인이라는 것이다. 대신 그런 사건들은 불가사의하고 끔찍하게 놀라운 사건으로, 혹은 정신질환이나 그밖에 각각의 사건을 눈송이처럼 저마다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다른 구체성들로 설명된다.
예외는 있다. 이슬람 국가 출신의 사람이 저질렀을 때다. 그 때는 사람들이 총격을 테러로 부르고, 정치적 움직임과 겨랕ㄱ한 정치적 발언으로 간주한다.
p.219
이것은 피부색이 우리의 지위, 경험, 기회, 경찰의 총에 맞을 가능성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서 우리가 색맹인 척 하고 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주장하려는 것은, 우리는 범주를 사용하거나 사용하지 않는 기술을 익힐 수 있다는 것이다.
p.222
남자들 중 그 일부 부분집합은 심지어 #notallmen(모든 남자가 그렇진 않다)이라는 해시태그도 만들었다. 마치 이야기의 중심 주제는 이 땅에 창궐한 재앙이 아니라 그들, 그리고 그들의 안락과 평판이어야 한다는 것처럼.
p.234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내 독서 금지 영역에 포함된다. 모름지기 거트루드 스타인에게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이라면 동성애혐오자, 반유대주의자, 여성혐오자가 되어선 안 되고, 총으로 큰 동물을 죽이는 짓을 ㄴ마성성의 동의어로 여겨서도 안 되는 법이다. 총-남성 성기-죽음 어쩌고저쩌고 하는 짓은 꼴사나울뿐더러 서글프다. 게다가 간결하고 억제된 스타일의 문체는 헤밍웨이의 손에서는 딱딱하고 가식적이고 감상적인 문체가 된다. 남성적 감상주의는 최악의 감상주의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어떤 면에서 자신에 대한 망상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진솔하게 감정적이었던 찰스 디킨스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헤밍웨이가 F.스콧 피츠제럴드의 성기 크기에 대해서 했던 쓰레기 같은 소리는 딱할 뿐 아니라 그의 내면을 너무 투명하게 보여준다. 피츠제럴드가 헤밍웨이보다 훨씬 성공한 작가였던 시절이었으니까 말이다. 지금도 피츠제럴드가 헤밍웨이보다 훨씬 낫다. 레고 블럭 같은 헤밍웨이의 문장에 비해 피츠제럴드의 문장은 실크처럼 나긋하며, 피츠제럴드는 남성 인물 뿐 아니라 데이지 뷰캐넌이나 니콜 드라이버 같은 여성 인물에게도 자유자재로 감정이입할 줄 안다(밤은 부드러워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근친상간과 아동학대가 미치는 장기적 영향을 탐구한 작품으로도 읽을 수 있다).
>>얼마 전, 영페미님과의 대화에서 "헤밍웨이"를 좋아하신다기에 무슨 헤밍웨이냐고 그렇게 말려도 씨알도 안먹혔으나 오늘 비로소 신뢰로운 레퍼런스를 찾았다. ㅋㅋㅋㅋㅋㅋ
그런데 이 마초남이 감히 내가 좋아하는 피츠제럴드까지 건드렸었다니.. 감히 내 위대한 개츠비를. 우리 데이지 뷰캐넌을 창조해 낸 작가를.. 너는 영영 빠이다... 노인과 바다는 잘 읽었었고 너의 자화상 사진은 멋있지만, 너는 진짜 이제 안녕이다!!
p.241
이 문제는 백인 이성애자 남성이 유달리 많이 겪는데, 왜냐하면 서구 사회가 오랫동안 거울을 들어 그들을 비춰주었고, 버지니아 울프가 지적했던 것처럼 고분고분한 여자들로 하여금 그런 남자를 실물의 두배 크기로 비추는 거울이 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 역시..........백인헤테로남성.........
p.249
스스로는 예술에 대한 변호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는 예술에 대한 공격에 해당하는 흔한 주장이 하나 있다. 예술이 삶에 충격을 미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예술은 위험하지 않고, 따라서 예술은 질책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예술에 대해서든 반대할 근거가 없고, 따라서 모든 반대는 검열이라는 것이다. (....)
사진, 에세이, 소설, 그밖의 것들은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다. 그것들은 위험하다. 예술은 세상을 만든다.
>>나는 이 대목에서 "좆같은 걸 만들 수 있는 표현의 자유는 있지만, 그 만들어진게 좆같다고 표현할 수 없는 한국의 좆같은 표현의 자유"를 깊이 묵상하였다.
p.252
어떤 또다른 선한 진보 남성이 나타나서 말했다. "당신은 예술의 기본적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는 한 무리의 여자들이 남자들을 마구 거세하고 다니는 소설이 있더라도 개의치 않을 겁니다. 그 작품이 훌륭하기만 하다면 읽고 싶을 겁니다. 그것도 한 번 이상." 세상에는 당연히 그런 문학작품은 없다. 그리고 만약 저 말을 했던 선한 진보 남성이 거세 장면이 잔뜩 나오는 책, 심지어 거세를 찬양하는 책을 또 읽고 또 읽었다면, 그 경험은 틀림없이 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매혹당한 사람들이 급 보고싶어 졌다. 물론 콜린 파렐은 거세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도, 아가씨의 하정우처럼 "자지는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까? 아직 보지 않았으므로 확인할 길이 없네.
p.263
여자는 자기 자궁 속 태아보다 가치가 없다. 그 태아들의 절반쯤은 여자일 테고, 그 여자들은 자라서 다시 그 다음 세대의 잠재적 태아들에 비해 가치 없는 존재로 평가될 텐데도. 여자들은 가치 잇는 것을 담은 용기를 담은 용기를 담은 용기를 담은... 무가치한 용기인 모양이다. 이때 가치있는 것이란 물론 남자다. 남자 태아다. 어쩌면 태아도 성별이 여자로 확인되기 전까지만 가치 있는지도 모른다. 아, 모르겠다. 나는 이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전혀 이해가 안 된다.
>>너무 맞는말 대잔치 나와서 빵 터졌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p.269
CDC의 가이드라인을 보면, 지나친 알코올 섭취에게는 "지나친 알코올 소비Excessiv eAlcohol Consumption"라는 형제가 있고 그 역시 골칫덩어리이다. (...) 이 이야기에서는 EAC씨가 명백히 단독으로 범행을 저지른다. 이 문장에는 주어가 없다. 누구의 공격성인가? 누가 공격한단 말인가? CDC는 어서 추적에 나서서 남자들에 대한 경보를 발령해야 할지도 모른다. 누가 뭐래도 여성에 대한 폭력을 제일 많이 일으키는 건 남자들이니까(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남성에 대한 폭력을 제일 많이 일으키는 것도 남자들이다). 이런 언어를 상상해보자. "남자를 사용하면 임신이나 부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남자 사용에는 주의가 필요합니다. 위험이 없는지 모든 남자를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술 마신 남자 사용을 조심하십시오." 남자들에게 경고 딱지라도 붙여야 할까? 그러나 그 또한 남자들에게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면해주는 일일 테고, 나는 그런 면책을 그토록 자주 해주지 않는 세상이 더 나은 세상일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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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오래전부터 붙들고 있었지만 차마 마지막 장 덮기가 아쉬웠던 책. 적시성이 있던 시기가 지나고 5월 장미가 아름답다.
최고의 행정수반 자리에 올라도, 결국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에 너는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에 따라 은퇴를 선언하고 작가생활을 하는 유시민의 삶은, 마음은, 생각은 과연 어떠한 것일까.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인물인 이유도 어쩌면, 그가 선택한 지식인으로서의 길에 대한 나의 찬사일지도 모르겠다. 삶이란 본래 진흙탕이고 전쟁이다. 그러나 예전과 다르게 그 문장이 읽혀지는 이유는, 그 속에서도 어떤 이는 진주를 찾아내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더럽히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그리고 또... 보잘것 없어보이나 고귀한 자신만의 진주를 가지고 묵묵히 불이익을 감수했던 많은 선배들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에, 두려움이 용기로, 좌절감이 자신감으로 변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p.95
기나긴 자본주의 발전과 사회적 분화를 거치면서 상비군과 관료제가 발전하고 국가제도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길게는 8년, 짧게는 3년에 불과했던 전쟁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새로운 국가가 만들어졌다. 우리의 국가는 시민사회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p.115
밀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어떤 경우에도 침해해서는 안 되는 기본권으로 내세웠다. 이들의 주장을 한마디로 줄이면 국가는 선을 행하려 하기보다 악을 저지르지 않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론의 핵심이다.
p.157
그는 네 가지로 그 이유를 정리했다. 첫째,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근본적으로 틀린 전제가 없는 한 침묵을 강요당하는 어떤 의견이 진리일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침묵을 강요당하는 의견이 틀렸다고 해도 일부 진리를 담고 있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일이 흔하다. 통설이나 다수의 의견이 전적으로 옳은 경우는 드물거나 아예 없다. 대립하는 의견들을 서로 부딪치게 해야만 나머지 진리를 찾을 수 있다. 셋째, 통설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해도 제대로 검증을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 근거를 이해하지도 못한 채 하나의 편견으로 간직하게 된다. 넷째, 소수 의견에 침묵을 강요하면 다수 의견 또는 통설이 독단적 구호로 전락해 이성이나 개인적 경험에서 강력하고 진심 어린 확신이 자라나는 것을 가로막게 된다.
p.225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어떻게 정치제도를 조직할 수 있는가? 이것이 정치철학이 다루어야 할 올바른 질문이다. - 카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p.254
이론적으로도 그러려니와 세계 각국의 경험을 보아도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을 맡긴 예가 적지 않다. 대표적인 사례가 히틀러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히틀러는 독일 국민이 보통선거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한 권력자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악하거나 무능한 또는 둘 다인 사람을 지도자로 선출한 사례는 숱하게 많다.
p.260
훌륭하고 지혜로운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없다면 무척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것은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대가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부작용이다. 이러한 강정ㅁ과 약점을 시민들이 제대로 보지 못하면 민주주의 그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인물을 지도자로 뽑아 최대의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라고 오해할 경우, 선거는 '다시 실망하기 위해 매번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하는 비극적 이벤트'로 전락할지 모른다. 뽑아놓은 지도자가 알고 보니 최선의 인물이 아니었다거나, 선하기는 하지만 능력과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실망하게 되고, 그래서 대중이 선거 자체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잃게 되면 민주주의는 그여말로 교묘한 위선으로 잘 무장한 최악의 인물이 달콤하지만 실현할 수 없는 약속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하는 중우정치로 타락할 수 있다
p.280
국가주의를 신봉하는 지식인들중에는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혐오를 부추기는 이가 많다. 그들은 똑똑한 시민이 정치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시민들이 정치에서 멀어지기를 바란다. 진보를 표방하는 지식인도 비슷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정말로 이 문제에 관심이 적은 사람도 있지만 더러는 일부러 무관심을 가장하기도 한다. 누가 대통령이 된들 어차피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p.290
애국심은 특별한 면이 있다. 국가는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물리적 폭력을 독점적으로 보유하고 행사한다. 다른 어떤 사랑의 대상도 국가와 같지 않다. 그래서 애국심도 다른 사랑의 감정과는 다르다. 폭력조직을 사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 폭력에는 정당성과 합법성이 없다. 국가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사적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다. ... 오로지 국가만이 국민에 대해서, 다른 국가에 대해서,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을 행사한다. 고귀한 사랑의 감정일 수 잇는 애국심 뒤에는 결코 사랑하기 어려운 야수가 숨어 있는 것이다. 경쟁 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에 대한 증오심 또는 혐오감이 그것이다. 애국심은 내가 속한 국가를 사랑하는 감정인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를 배척하는 감정이다. 국가는 때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전쟁과 학살이라는 끔찍한 참화속으로 몰아간다. 다른 어떤 사랑의 감정도 이런 엄청난 악을 저지르도록 사람을 부추기지는 않는다.
p.344
사람은 언어로 생각하고 소통한다. 합리적이든 아니든, 민중이 고귀하다고 여기는 어떤 말을 남이 독점하도록 허용하면 권력을 그들에게 넘겨줄 위험이 뒤따라온다. 물론 톨스토이처럼 지식인이 자기의 철학적 소신에 따라 그렇게 하는 것은 존중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정당과 정치인이 그렇게 하는 것은 혀명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아니다.
p.349
사회를 계획하고자 하는 가장 열광적인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계획할 수 있게 된다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계획을 조금도 인내하지 못하는 가장 위험한 사람이 된다. 성자와 같은 이편단심의 이상주의자와 미치광이 광신자의 거리는 단지 한 발짝에 불과할 때가 많다. -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노예의 길'
p.401
유토피아적 공학(혁명의 길)을 버리고 점진적 공학(개량의 길)을 선택하자는 포퍼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세상 그 누가 폭력혁명을 좋아하겠는가? 만약 점진적 공학의 길이 넓게 열려 있다면 유토피아적 공학을 선택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논리에는 큰 허점이 있다. 사회혁명과 점진적 개량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았다는 점이다.
p.424
우리가 흔히 내세우는 공공의 이익이란 것도 허상에 불과하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수많은 개인의, 때로는 공존하고 때로는 대립하는 이익일 뿐이다. 국익 또는 사회 일반의 이익은 개인의 이익을 합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에게 귀속될 수 없는 공공의 이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하이에크에게 자유는 더 높은 정치적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자유는 그 자체로 가장 높은 정치적 이상이다. 훌륭한 행정을 위해 자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시민 사회와 개인의 삶에서 각자 최고로 가치 있다고 여기는 대상들을 추구할 수 있도록 보장하기 위해 자유가 필요하다.
p.490
진보의 범위를 넓게 설정하면서도 그 목표와 방법을 한결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는 '진보를 연찬하다'에서 이남곡 선생이 제시한 견해를 들 수 있다. 이남곡에 따르면 진보는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 나가는 과정이다. 이를 위해서는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에서 인간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것을 지향하는 게 진보주의다. 인간의 자유를 얽어매는 것은 세 가지다. 불합리한 제도, 물질의 결핍, 낡은 생각이다. 진보는 첫째,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노예제도, 신분제도, 계급제도, 독재, 자의적인 국가폭력 ㅡㅇ 불합리한 제도는 인간을 억압하고 자유를 박탈했다.
실현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국가가 이런 일을 하는데 반대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최선의 국가를 만들어 국가의 텔로스를 실현하는 길을 어디에서 찾았을까? 종국적으로 시민 각자가 훌륭해지라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훌륭한 국가는 우연한 행운이 아니라 지혜와 윤리적 결단의 산물이다. 국가가 훌륭해지려면 국정에 참여하는 시민들이 훌륭해야 한다.
p.536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그러나 사회는 여러 면에서 어쩔 수 없이, 도더성이 높은 사람들이 결코 도덕적으로 승인하지 않을 방법을 사용해서라도, 종국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이 두 도덕적 입장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양자 사이의 모순도 절대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조화되는 것도 아니다. -라인홀트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p.598
니버는 어떤 가치 하나를 절대적 선으로 상정하여 다른 모든 것을 희생하는 태도에 대해 조심스럽지만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절대주의는 종교적 정치적 이상을 추구하는 영웅적 행위를 촉진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상황에서는 위험천만한 안내자가 된다. 개인은 절대적인 것을 추구해도 정당하며 위험이 적다. 일이 잘못되어도 그 자신이 손해를 볼 뿐이다. 고귀한 비극이라는 감상이 좌절을 보상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개인이 아닌 사회가 절대적인 것을 얻고자 달려들면 수백만 명의 생명과 재산이 하루아침에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게 된다. 절대주의는 정책의 수단인 국가의 강재력을 잔혹한 독재로 바꾸어 버린다. 개인에게 광신주의는 해롭지 않은 열정적 기행이지만, 이것이 국가의 정책으로 나타나면 인류에 대한 자비심을 파괴한다.
p.622
사회 전체에서 진보는 일반적으로 소수파이다. 그러나 그 이념을 인생의 신념으로 채택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다르다. 그곳에서는 그 이념만이 공인받은 지배적 사유습성이 된다. 이것을 바꾸는 것은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소모하게 만드는 귀찮고 번거로운 일이다. 진보주의자들도 그들 사이에서 공인된 지배적 사유습성을 바꾸려는 시도를 불온하게 본다. 베블런의 말대로 언제 어디서나, 심지어 진보진영 안에서도 "혁신은 나쁜 것"이다. 모든 곳에서, 언제나, 인간은 보수적이다.
p.636
그래서 베버는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정치를 직업으로 삼은 사람은 이러한 윤리적 역설을 인식해야 하며, 그 중압에 눌려서 변지뢴다면 그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사실도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정치는 모든 폭력성에 잠복해 있는 악마적인 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범우주적 인간 사라오가 자비를 역설한 위대한 대가들은 폭력이라는 정치적 수단을 가지고 일한 적이 업삳. 정치라는 방법으로 자신의 영혼과 타인의 영혼을 구제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정치의 과업은 전혀 다르며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순수한 신념윤리를 따르는 사람은 모든 정치적 행위에 개입되어 있는 악마적인 힘을 의식하지 못한다.
p.661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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